시사, 상식

평화를 위한 텔치크의 조언

道雨 2023. 6. 7. 09:41

평화를 위한 텔치크의 조언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기적적인 정치적 사건은 무엇인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독일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동독과 서독이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통일을 이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45년을 지탱해온 동서 진영 간 냉전체제가, 40년을 지속해온 스탈린주의 독재체제가 동독 시민들의 ‘평화혁명’으로 무너진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포츠담대학의 저명한 역사학 교수 마르틴 자브로는 자신이 펴낸 책 <1989년과 폭력의 역할>에서, 1989년 동독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놀라운 비폭력성’에 주목한다.

“왜 군사적으로 고도로 무장되어 있고, 성공적인 봉기 진압의 경험을 가진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군사적 폭력의 최종적 투입을 주저했는가?”

그는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가 폭력적 저항 없이 권력을 내려놓은 것을 ‘1989년의 기적’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바로 이러한 ‘비폭력의 기적’을 주제로 지난해 ‘독일 통일과 폭력 문제’라는 논문을 썼다. 여기서 이 기적을 낳은 여러 요인을 나름대로 분석하긴 했지만, 끝까지 남은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왜 고르바초프는 소련 제국 붕괴의 신호탄이 터진 1989년 가을에 동독에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동독을 지배하던 사회주의통일당이 급격한 몰락의 조짐을 보인 10월9일 라이프치히 시위에서도, 또한 한달 뒤인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던 결정적인 순간에도 고르바초프는 폭력적 개입을 삼갔다.

 

학기 말의 번잡함 속에서도, 지난주에 베를린에서 열린 ‘한-독 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의문을 풀고 싶어서였다. 1989년 세계사적 격변의 내밀한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역사적 증인과 만날 수 있는 (아마도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베를린 총리관저에서 호르스트 텔치크를 만났다.

 

텔치크는 누구인가. ‘독일 통일의 아버지’ 빌리 브란트에게 에곤 바르가 있었다면, ‘독일 통일의 완성자’ 헬무트 콜에게는 호르스트 텔치크가 있다는 말이 널리 풍미했을 정도로, 통일 과정에서 서독 총리였던 콜이 가장 신뢰했던 최측근 참모가 바로 텔치크였다. 그는 콜의 지근거리에서 당시의 숨 막히는 세계사적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한 인물이다.

 

나는 텔치크와 꽤 상세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 궁금증의 핵심, 즉 왜 고르바초프가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 사용을 포기했는지를 묻자, 그의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무엇보다도 고르바초프는 콜과 깊은 인간적 신뢰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신뢰가 그의 모든 정치적 결정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콜은 고르바초프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부시 대통령 또한 콜과 고르바초프의 우호적 관계를 용인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미·소 양쪽의 신뢰가 있었기에 독일의 평화적 통일이 가능했다.

 

두번째 요인은 고르바초프가 소련 경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서독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경제의 개혁을 위해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수용하려는 생각마저 갖고 있었다.

 

이처럼 콜 총리와의 돈독한 신뢰가 고르바초프가 폭력 사용을 자제한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 텔치크의 설명이었다.

 

자문회의 중에도 텔치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주변 국가들과의 양자관계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자관계이다. 남북 및 주변 국가들과의 다자간 안보협력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이 체제는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체제가 되어야 한다.’

 

텔치크의 조언은 지금 위기에 처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매우 시의적절하다. 우리는 높아진 국제적 위상에 걸맞게 ‘균형 외교’와 ‘작동 가능한 다자간 협력체제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신냉전체제를 강화하는 시대착오적 대결의식으로는 한반도의 평화도 남북통일도 기대할 수 없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지난 30여년 동안 한반도는 지구상 유일의 냉전지대였다.

우리의 시대적 과제는 이 마지막 남은 냉전체제를 허물고 평화체제를 세우는 것이지,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낡은 신냉전체제’의 첨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