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21세기 한국에 ‘공산주의’ 유령이 떠돈다

道雨 2023. 8. 29. 09:14

21세기 한국에 ‘공산주의’ 유령이 떠돈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을 항일 독립운동의 영웅이라 배우며 자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 시절이었다.

보수 본산이랄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던 홍범도 장군이, 그로부터 반세기 지난 지금 새로운 보수 집권세력에 의해 부정당하는 현실은 낯설기 짝이 없다.

역사란 항상 앞으로 나가지는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퇴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놀라운 일이다.

 

국방부는 육사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이전하기로 한 이유를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논란이 있는 분을 생도 교육의 상징적 장소에 기념하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홍 장군 흉상을 없애기 위해서, 옆에 함께 세운 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이회영 선생의 흉상마저 철거할 계획이라고 한다.

 

더 가관인 건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발언이다. 이 장관은 홍범도 장군 흉상과 관련해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육사에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군 간부’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니….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내건 국가나 정당을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육사는 여전히 ‘공산주의와 맞서 싸울 인재’를 양성한다니, 이런 시대착오가 어디 있을까 싶다.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1848년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무려 180년을 뛰어넘어 한국에서 부활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두렵게 하리라고는, 마르크스를 비롯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윤 대통령은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일삼아왔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이런 상황 전개는 이미 예견됐던 것처럼 느껴진다. 진보가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2023년에 사회주의도 아닌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대통령 육성으로 듣는 건 뜻밖의 경험이다. 1970년대 유신 시절엔 ‘무찌르자 공산당’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친숙했지만, 소련 붕괴와 한국-동구권 수교를 거치면서는 거의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한때 위세를 떨쳤던 유럽과 일본의 공산당도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정부는 1920~30년대 항일 투쟁을 위해 소련 볼셰비키에 잠시 가담했던 경력을 친일 행위보다 훨씬 위험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일본제국주의가 볼셰비키 혁명세력(적군)에 맞선 백군을 지원하며 시베리아 진출을 꾀했던 건 역사적 사실이다. 그 시절 만주와 연해주에서 일제와 싸우는 독립군이 볼셰비키와 손을 잡는 건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 아니었을까.

일제에 부역한 건 이해해도 조국 독립을 위해 볼셰비키와 손잡은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윤석열 정부는 생각하는 것일까.

 

진보·보수를 떠나서 역대 어느 정권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계열이라도 북한 정권에 직접 협력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라면 공로를 인정하는 게 맞는다는 나름의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런 오랜 노력을 윤 정부는 뿌리째 흔들고 있다.

한국 사회를 철 지난 이념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다.

풍차를 거인이라 착각하고 돌진하는 돈키호테 정부를 지금 대한민국에서 보고 있는 셈이다.

 

윤 대통령은 ‘시대착오적 투쟁과 사기적 이념에 휩쓸린 진보’를 맹비난했지만, 정말 무모하게 시대를 거스르는 건 대통령 자신이다.

 

1961년 5월 쿠데타에 성공한 군부 세력이 혁명공약 1조에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구절을 넣은 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남로당 가입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때는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으로 그럴 수 있다 쳐도, 6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반공산주의’를 다시 전면에 꺼내 드는 현 정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대체 뭔지 궁금하다.

 

지난주 국무조정실 1차장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일본의 방류 방식이 과학적 선례나 안전성 측면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가 빈축을 샀다. 일본정부 대변인을 연상케 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게 이 정부의 목표는 아니리라 믿는다.

 

 

 

박찬수 기자 :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