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순(旬)이란 나무의 가지나 풀의 줄기에서 새로 돋아 나온 연한 싹이다

道雨 2024. 5. 1. 10:54

순(旬)이란 나무의 가지나 풀의 줄기에서 새로 돋아 나온 연한 싹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2024년 4월 29일)

 

 

어제는 천안에 다녀왔다. 어린 시절 친구와 한 달에 한 번식 만나 같이 탁구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함께 한다.

어제는 천안 친구가 옻 순을 대접했다. 이젠 직접 자기 산에서 따온 옻 순을 삶아서, 생으로, 닭에 넣어 실컷 먹도록 초대하는 일이 연례 행사가 되었다. 몸에 옻이 오를까 약을 한알식 먹고 시작했다.

 

난 고집스럽게 제철 음식을 먹으려 한다.

봄은 ‘보다’에서 왔다고 하지만, 영어로는  스프링(spring)이라고 한다. 그래 봄의 새 순을 먹으면,  겨울 내내 눌려 있던 내 심장의 ‘스프링’이 다시 높이 튀어 올라 내 심장도 따뜻한 사랑이 장착된다.

 

순(旬)이란 나무의 가지나 풀의 줄기에서 새로 돋아 나온 연한 싹이다. 그러니까  ‘싹’이다. 순을 따주는 것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걸 방지 하기 위해 필요하다.

요즈음 나의 즐거움은 봄 순을 먹는 일이다. 그러니까 봄철 나물들을 주로 먹는다. 나물은 부드러운 새 순이 나는 시기가 제철인데 지금 같은 봄에는 파릇파릇한 나물을 먹으면 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제일 좋아하는  봄철 순이 두릅이다. 이걸 한문으로 하면 ‘목두채’라 한다. ‘나무의 머리 채소’라는 뜻이다. 그리고 가시가 있는 엄나무 순, 향이 진한 가죽나무 순, 오가피 순 그리고 옻 순을 어른들은 봄의 5대 순이라 말한다.

이 어린 순들을 먹을 때 미안한 마음은 든다. 그러나 순을 따주는 것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걸 방지 하기 위해 필요하다.

두릅이나 오가피 순은 향이 있지만, 옻 순은 식 감이 좋고 고급 지다. 그래 사람들은 옻 순을 ‘봄 나물의 제왕’이라 한다.

 

봄 나물과 함께 한 그릇의 밥은, 우리가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힘이 협력 하여 지어낸 것. 해와 달과 별, 바람, 공기, 숱한 미생물, 땅을 기름지게 하는 지렁이, 그리고 농부의 피땀 어린 수고도 더 보태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해월 최시형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 만사를 다 안다”고 했다.

 

‘동사적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봄마다 봄의 새 순을 먹는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내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동사적 삶이란 경험자들의 이야기에 매달려 살기보다 직접 불확실성을 껴안고 덤비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삶의 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술의 신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디오니소스이고, 로마 신화로 오면, 박코스로 바뀐다. 그 박코스가 영어로 오면 박카스가 된다.

그 뜻이 ‘싹’, 새 순이다. 그 뜻하는 바는 단지 도취에 빠지고, 동물적 본능이나 분출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참된 의미는 창조성에 있다. 창조력이 결여된 도취는 광기가 아니라 객기이고,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으로 흘러갈 뿐이다. 따라서 새 순과 같이, 술은 파괴력과 창조력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야누스적 존재다.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 쓰면 독이 된다.

 

 

디오니소스를 소개하고 있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부분을 읽어본다.
 
“나는 곡식과 과일 그리고 이로 빚은 술의 신이자 곧 곡식과 과일 그리고 술이다. 내가 썩어 술이 되거든 너희가 마셔라. 너희가 썩어 술이 되면 내가 마시리라, 마시고 취하고 싶은 자는 취하라. (...) 너희들의 목적은 술이 아니다. 광기도 아니다. (…….) 나는 누구인가? 바꼬스(싹)이다. 씨앗이 대지에 들었다가 제 몸을 썩히고,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대지에 들어 제 몸을 썩히는 이치를 생각하라. 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한 알의 곡식과 과일이 있는 이치를 생각하라. 그리고 너희가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의 생명으로 곧게 설 방도를 생각하라. 그것이 목적이다. 내가 너희에게 준 술과 술자리는 쾌락이 아니라 한 자루의 칼이다. 너희는 자루를 잡겠느냐, 날을 잡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준 술은 무수한 생명이 뒤섞여 있는 카오스의 웅덩이다. 너희가 빠져 있겠느냐, 헤어 나오겠느냐?”
 

 

술은 한 자루의 칼이다. 카오스(혼돈)의 웅덩이다. 술을 단순히 취하려는 목적으로만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술을 통해 다시 부활하라고 말한다. 술과 함께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로 들어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우리는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고 갈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할 것도 없고, 그저 겸손하게 자연의 도도한 흐름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나의 죽음을 딛고 또 다른 씨앗이 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埋葬)된 것이 아니라, 파종(播種)된 것이다.

매장과 파종은 다르다. 파종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다.

그래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4월이 떠나고 나면 / 목필균
 
꽃들아, 4월의 아름다운 꽃들아.
지거라, 한 잎 남김없이 다 지거라
가슴에 만발했던 시름들
너와 함께 다 떠나버리게
 
지다 보면
다시 피어날 날이 가까이 오고
피다 보면 질 날이 더 가까워지는 것
새순 돋아 무성해질 푸르름
네가 간다 한들 설음 뿐이겠느냐
 
4월이 그렇게 떠나고 나면
눈부신 오월이 아카시아 향기로
다가오고
 
바람에 스러진 네 모습
이른 아침, 맑은 이슬로 피어날 것을

 

 

 

속절없이 “잔인한” 4월이 다 간다.

영국 시인 엘리엇은 자신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다. 이렇게 시작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왜 “잔인한”가?

4월이 잔인한 것은, 마치 겨울잠을 자듯 자기 존재를 자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을 뒤흔들어 깨우는 봄 때문이라는 것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雪)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약동과 변화를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 매일매일 자신을 변신시키지만, 인간은 주저하고 안주하고 편함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낙엽들을 헤치고 삐쳐 나오는 풀잎들은 현재에 안주하는 법이 없다. 항상 자신이 변화해야 할 모습으로 변한다. 만일 내일도 이런 모습을 간직한다면, 그 풀잎들은 죽은 것이다. 자신이 되어야만 하고 될 수 있는 모습으로 매 순간 변한다. 이런 식으로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은 그 개체만의 고유한 성격이 있어, 인간을 제외한 동물과 식물은, 그 고유한 특징을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맞추어 조화롭게 변신한다. 그 속도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정도이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모든 인간이 세상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 신분은 공동체인 도시에서 자기 나름의 고유임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각자 그 고유 임무에 따라 각자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를 그리스어로 ‘아레테’라 한다. 우리는 흔히 이걸 덕(德)으로 번역하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단어이다.

아레테는 그리스 어에서 ‘선, 탁월함, 남성 다움, 힘, 용기, 성격, 명성, 영광, 위엄’이란 의미 뿐만 아니라, ‘기적, 경의, 경배의 대상’이란 의미도 있다. 이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들의 공통점은 ‘고유(固有)’이다. 우리 모두는 고유(固有)하기 때에,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 중 하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떠한 일을 하든, 진심으로 헌신하고 노력한다면,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고유하고 귀중한, 즉 고귀(高貴)한 일이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문법은 변화(變化)이다. 눈 깜박할 사이의 나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재의 나에 만족하고 탐닉하고 안주하는 사람은 시시하다. 미래에 자신이 건축해야 할 자신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고 즐겁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위해 변화무쌍하게 변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엉뚱함, 신남, 거침 없음에 매료된다. 변화하는 인간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살해하고 앞으로 될 자신을 시도하고 연습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현인들은 이 과정을 해탈, 각성, 회개, 희생, 오상아(吾喪我, 내가 나를 장례시킨다), 그로시스 등 각 문화 전통에서 개념들을 만들어 냈다.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불만을 깨닫고 그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위가 희생이다.
 
4월을 이젠 버리고, 변화의 5월을 맞이한다. 이것 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데, 이젠 선택과 집중을 할 때이다. 바꾸고 변화를 하여야 할 때이다.

 

 

 

[ 박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