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농민전쟁’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내일, 5월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894년의 대대적인 농민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을 비로소 5년 전부터 정부 주관으로 거행해오고 있다.
19세기 들어 조선은 역사적 한계에 다다랐고, 백성들은 가혹한 탐학으로 연명하기조차 어려웠다. 내내 혼란이 이어졌지만, 지배층은 이를 수습하고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급기야 전국적으로 수많은 고을의 농민들은 민란이라 일컬어진 항쟁을 벌이다가, 마침내 1894년에 대대적인 반정부 봉기에 나선 것이다.
이른바 ‘농민전쟁’이며, 중세 봉건사회 해체를 추동하는 역사변혁 운동이었다. 또 이 농민전쟁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일대 사변이었다.
그동안 학계의 연구 성과가 미흡한 상태에서, 이 농민봉기를 두고 사용하는 명칭만 살펴보더라도, 동학란에서부터 갑오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제각각이어서, 만일 그 명칭에 따라 역사를 서술한다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이는 연구 결과에 따른 역사인식의 차이라기보단, 각기 관심사에 얽매인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1989년에 한국역사연구회는 이 농민전쟁의 역사를 5년에 걸쳐 협동작업으로 연구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는 마침 프랑스혁명 200주년이기도 했는데, 이를 기념해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대대적인 학술연구와 국제적인 학술행사를 준비해 진행했다.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던 우리 형편을 생각할 때, 프랑스의 대응은 참으로 부럽고 한편으론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처구니없게도 군사정권의 쿠데타를 치장하고 호도하는 방편으로 오용됐다.
1963년 황토현전적지의 갑오동학혁명 기념탑 건립 제막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봉준 선생이 이 정읍 고을 말목장터 감나무 아래에서 징을 울려 농민을 동원하던 심정이나, 나 자신이 2년 전 5·16에 한강 다리를 넘어설 당시의 심정은 동일”하다고 했다.(최광승, 박정희 정권은 어떻게 동학과 천도교를 활용했는가)
그뿐 아니라 1973년 공주 우금치에 건립된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박정희가 건립 명예회장을 맡아 제자(題字)를 썼으며, 탑명에 “5·16 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돐을 보내게 된 만큼”이라고 새겨, 유신체제 명분 찾기에 이용했다.(손호철, 키워드 한국 현대사 기행)
1894년 농민전쟁 연구는 곧 한국의 근현대 역사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이 연구를 추진한 한국역사연구회는, 1970~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희생을 무릅쓴 민주화운동에서 형성된 역사의식으로 역사 연구에 나선 신진 학자들이 조직한 학회였다.
연부역강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5년에 걸쳐 매년 개최할 학술대회 장소 사용료나 행사 경비 등에는 외부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정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해 한겨레신문 창간 기념으로 3·1운동 70주년 학술행사를 진행하여 대성황을 이룬 것을 기화로 또 한차례 후원을 요청하던 참이었다. 마침 연구계획의 의의를 잘 알고 있던 유홍준이 중간에서 대학 친구인 장두환에게 이를 설명하고 후원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장두환은 직원 몇 명의 작은 사업에서 얻은 이익금을 값지게 지원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장두환이 5년에 걸쳐 지원한 연구비로 50개 분야의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이룩해, 다섯 차례 큰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1894년 농민전쟁 연구’ 5권(역사비평사)으로 엮어 냈다.
그는 안타깝게도 3년 전에 작고했는데, 생전에 남긴 회고록에서 “그토록 중요한 사건이 100년이 되도록 관도 민도 그 누구도 제대로 연구하고 정리하지 못하던 차에, 우리가 그걸 해냈다는 자부심을 지금도 강렬하게 갖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도 ‘1894년 농민전쟁 연구’ 지원은 보람 있고 뿌듯한 일이었다. 참으로 뜻깊은 선각자였다.
농민전쟁 연구를 선도하면서 학술대회 등을 통해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때문인지, 이후 여러 연구·관계기관의 100주년 행사가 추진되었다. 나아가 2004년에는 농민군유족회, 천도교, 관련 지방자치단체들의 노력으로 ‘동학농민명예회복법’(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기념재단을 설립하고 기념사업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기념재단은 그사이 많은 자료를 수집·간행하여 연구자들에게 제공해오고 있다.
갖가지 기념시설들이 유관 지자체들에 의해 조성됐지만, 어떤 것들은 역사적 의미의 계승보다는 일종의 과시적 토건 사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2004년 특별법이 통과된 뒤 국가기념일 선정을 두고서도, 정부 지원을 염두에 둔 탓인지 관계기관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14년이나 지체했다. 뒤늦게 동학 기념재단, 국사편찬위원회 등 유관기관 대표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결정에 따르겠다는 각서까지 첨부해서 기념일 선정을 위임한 뒤, 비로소 황토현 전승일인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수 있었다.
1894년 봉기에 나선 농민군들의 숭고한 뜻이 무엇인지 새삼 다시 되돌아본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동학의 종교적 이상과 포교 조직에 적절히 유도됨으로써, 일거에 의식화된 대중의 전국적 조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해, 봉건 지배체제의 전면적 혁파를 요구했다. 농민군은 전주성을 함락하여 봉건권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집강소를 설치해 스스로 통치의 주체로 나섰다. 집강소를 통해 신분제의 철폐와 토지의 평균분작(平均分作) 등 혁명적인 조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했다.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의 많은 부분이 정책으로 수용되고 법제화에 이르렀지만, 무능한 위정자들의 배신으로 성취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난해 말 임진택의 창작 판소리 ‘녹두장군 전봉준’ 공연을 감동 속에 관람했다. 세 시간에 걸쳐 장엄하게 펼쳐진 무대에서 임 명창은 “그대들이 지른 들불은 결코 꺼질 수 없는/ 우리 민족사의 절정이요 모든 민중들의 희망이니/ 이제 우리 스스로 활~활~ 타오르겠네/ 도도한 역사의 들불 되겠네”라고, 130년 전 농민군의 결의를 형형한 전봉준 장군의 눈빛에 담아 오늘 우리 폐부에 아로새겼다.
임 명창의 판소리가 세계 무대에서 ‘레미제라블’ 공연과 겨루면서 높게 펼쳐질 날을 꿈꾼다.
학술연구와 예술창작이 어우러지는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를 새긴다.
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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