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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

道雨 2024. 6. 27. 11:42

리차드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에 대한 이야기다.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태어났고, 와이오밍 대학교 ROTC 출신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해 1차대전에 참가했다.

2차대전 당시 소령으로 아이슬란드에 있다가, 영국,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6.25 전쟁 당시 준장이였으며, 제2군수사령관으로 1953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미지출처:조선일보

1953년 11월 27일. 부산 중구 영주동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였지만,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판자촌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고, 언덕을 내려와 부산역까지 화마가 내려왔다. 일명 부산역전 대화재로 인해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6천여 세대 무려 3만여 명의 피란민이 집을 잃었다.

 

이미지출처; 국제신문

판자집은 커녕 변변한 잠자리도 없이 노숙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역 건물과 인근 시장 점포 등이 윤일한 잠자리였는데, 화마로 그것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입을 옷은 고사하고 먹을 것도 구할 수 없었다.

이 때 리차드 위트컴 유엔군(미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1894~1982)이, 군법을 어기고 미군 창고를 열어, 잠을 잘 천막과 먹을 것을 나눠줬다.

매일 2만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 등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지원했다. 장군은 화재 다음 날부터 곧바로 공병부대를 투입해 화재 지역을 정리하게 했고, 장병들로 하여금 4만 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미지출처:국제신문

 

이뿐 아니라, 위트컴 장군은 그해 12월 9일 첫 텐트촌을,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장군은 1953년 12월 5일 자 ‘성조지 태평양판(Pacific Stars & Stripes)’에서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 진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고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이에 미국 본토에서 군법을 어긴것에 대해 청문회를 열었고, 그는 청문회에 출석해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1954년 준장으로 전역했다.

전후 환자가 넘쳐나자, AFAK(미군대한원조) 기금을 지원받아, 160병상을 갖춘 3층짜리 건물을 지어 준 것이 메리놀병원이다. 건축비가 모자라자, 휘하 장병에게 ‘한국사랑기금’이란 이름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하자고 호소했다.

부산의 유엔평화기념관엔 “가장행렬을 해서라도 기금을 모으겠다”며, 군복 대신 갓과 도포 차림으로 거리를 누비던 사진이 전시돼 있다. 메리놀병원뿐만 아니라 성분도병원, 복음병원을 세우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미지출처: 내 인생의 일기장 블로그

 

그 후로도 부산에 머물면서 재단을 세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 송환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 세워달라."고 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 달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 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 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씨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글 자료: 국제신문

박선영 국제대학교 교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