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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청동기에 나체의 남자가 등장한 까닭은?

道雨 2007. 10. 13. 18:20

청동기에 나체의 남자가 등장한 까닭은?

옷 벗고 밭갈며 풍요 기원…2000년 뒤 함경도 풍속 남아

 

 

농사 짓는 모습을 새긴 ‘농경문청동기’가 있다.

지금부터 2300여 년 전인 청동기시대 후기 것이다. 뒷면에는 솟대 같은 곳에 새 두 마리가 앉은 것을 묘사했다.

 

1970년대 초반 대전에서 도굴 직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했다. 윗부분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다. 구멍에는 닳은 흔적이 보여, 당시 샤먼과 같은 종교 지도자가 제사 등을 주관할 때 가죽 끈으로 매달아 장식용으로 찼던 것으로 추정된다. 너비는 12.8㎝이지만, 아랫부분이 많이 파손됐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홀딱 벗고 성기를 드러낸 채 머리에 깃털 같은 것을 꽂은 한 남자가 농기구로 이랑과 고랑이 표현된 밭을 가는 모습이다. 나체의 남성이 든 농기구는 그 모양을 볼 때 밭을 가는 데 쓰는 따비(쟁기와 비슷하나 좀 작고 보습이 좁음)가 확실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 2300여년 전 청동기시대 때 유물인‘농경문 청동기’.

      샤먼이 제사를 주관할 때 풍요를 기원하며 찼던 장식품으로 추정된다.

      성기를 드러낸 채 따비로 밭을 가는 남자 모습이 보인다.

         

         

        고대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땅은 여성으로 간주돼 왔다. 이복형제를 일컬을 때 ‘밭이 다르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성기를 드러낸 남자가 밭을 가는 모습은 결국 남녀의 합일(合一)을 통한 풍년 기원이라는 추론을 반박하는 학자는 없다. 그런데 청동기시대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진짜로 나체의 남자가 밭을 갈았을까? 아니면 풍요를 기원하며 당시로는 ‘최고급품’이던 청동기에 새겨 넣은 의례용 장식일 뿐일까?

        조선의 명의 허준을 궁중의사인 내의원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썼던 이조참판 유희춘(1513~1577)이 남긴 ‘미암(眉巖·유희춘의 호)선생집’에는 ‘입춘나경의(立春裸耕議)’라는 글이 있다. 그가 함경도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 목격한 이 지방의 풍속을 적은 글 중 하나로, ‘입춘날 홀딱 벗고 밭을 가는 풍속을 논한다’라는 뜻이다.

        ‘(입춘 나경은) 먼 변방의 비루한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를 해괴하게 여기지만 백성들은 즐거워한다. 매년 입춘 아침에 지방관 앞에 모이게 한 뒤 관문(官門) 길 위에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여 심고 거두는 형태에 따라 한 해를 점치고 곡식의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다. 이때 밭을 가는 자와 씨를 뿌리는 자는 반드시 옷을 벗게 하여 차가운 기운을 몸에 닿게 하니, 이 얼마나 해괴한가? (이 제도가 시행되는 이유에 대해) 관에 물으면 백성의 풍속이라 하고, 백성에게 물으면 관에서 시킨 일이라 말한다.’

        농경문청동기에 나타난 청동기시대 대전 지방의 나경 풍속이 근(近) 2000년 뒤 함경도에서 존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속학자나 고고학자들은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고 한다. 최소한 2000년간 지속됐던 ‘나경’과 관련한 유물이나 기록이 농경문청동기와 유희춘의 글 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언론인이자 한국학자였던 고(故)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일제 강점기 때도 함경도에 나경 풍속이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민속조사보고서나 사진 혹은 필름이 민속학계에 알려진 것은 없다. 더 나아가, 동북아지역에서 나경 풍속이 발견된 예도 아직 없다. 민속학자들은 “청동기시대 한반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풍속이 예와 도를 강조하는 후대 역사의 흐름 때문에 사라진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 <조선일보/신현준기자 2007.7.23>

         

         

        청동기에 그려진 옛 그림, 우리 과거를 말하다

          문자기록이 남아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옛 우리 선조들의 삶을 그려보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고구려와 관련된 많은 기록을 전하고 있어도 역시 역사기록은 정치·군사적인 사건에 한정되기 일쑤여서, 실제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다행히 고구려인들의 무덤에 남겨진 그림을 통해 그네들이 살았던 모습(씨름하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춤을 추는 모습 등)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니 역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문자기록이 있는 고대사회도 이 정도일진대 아무런 기록도 없는 선사시대나 기록이 미미한 원사시대 우리 선조들의 삶은 상상 그 자체이다.
          이런 와중에 초기철기시대의 한 청동기에 우리 조상들의 기원이 닮긴 그림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는 2,3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시 농경사회의 풍경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1969년 대전의 한 고물상은 푸른색 청동녹이 잔뜩 낀 청동제품을 입수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서울의 한 상인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오게 되어 지금은 고고관 청동기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당초 이 방패모양 청동기는 전면에 녹이 붙어서 전체 문양은 보이지 않고, 테두리의 기하학적 문양만이 어렴풋이 관찰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유물을 입수한 박물관 측에서도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표면의 녹을 제거하면서 나타나는 문양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먼저 앞면을 보면, 왼쪽에는 무언가를 항아리에 담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아마 수확한 곡물을 담는 여인의 모습이리라. 오른쪽 위에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는 길며 쌍날로 된 따비로 열심히 밭을 갈고 있다.
          이 남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채로 밭을 가는 것, 즉 나경裸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 일이 남자의 성역할性役割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 아래에는 괭이를 들고 무언가를 파려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뒷면에는 Y자 모양으로 벌어진 나뭇가지 양쪽에 유난히 꼬리와 다리가 긴 새 한 쌍이 서로 마주보고 음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솟대와 그 모양이 일치한다. 새는 인간의 영혼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무늬의 연구를 통해 이 방패모양 청동기가 당시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사용된 의기儀器임이 밝혀졌으며 ‘농경무늬 청동기’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남아 있는 역사기록과 수없이 출토되는 당시 유물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우리 과거를 ‘농경무늬 청동기’ 하나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보잘 것 없으리라 생각하고 큰 기대를 두지 않았던 유물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이는 그 유물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해 준 관련 연구자들의 노력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했던가? 우리가 유물의 가치를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산 역사가 된다.
          *********************박진일(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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