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무령왕릉과 출토 유물 (1)

道雨 2007. 10. 17. 00:13

 

 

                            무령왕릉과 출토 유물

 

* 지난 일요일(2007. 10. 14),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국립공주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을 감상하였고, 막연히 생각하고 들어왔던 것보다 더욱 다양한 유물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물관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기에 제가 인상깊게 본 것들 위주로 공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퍼왔습니다.

 

 

                                                무령왕

 

  무령왕(武寧王)은 백제 개로왕 8년(426), 동성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 시호는 무령(武寧)이라고 하였다.

   무령왕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에는 고구려와의 세력 싸움으로 수도인 한성(漢城, 지금의 서울)이 함락되고(475년), 급히 수도를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게 이르렀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왕권과 지배체계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하였다.

  이런 참담한 시기에 무령왕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백제국의 제 25대 왕으로 40세(501년)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왕은 경제의 기반이 되는 농업생산력을 극대화시키고, 고질적인 문제였던 귀족들의 반란을 잠재우고자, 22담로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하는 등, 극심한 혼란에 빠져있던 정국을 수습하고,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고구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백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의 대외교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백제의 문화를 중흥시킨 결과 22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501 ~ 523), 다시금 백제를 강력한 왕권국가로 재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러한 점들은 사비(泗沘 , 지금의 부여)시기에 꽃을 피우게 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무령왕의 치세에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이와 같이 무령왕은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선정(善政)을 펼쳐 국가안정을 이루었으며, 이후 사비도읍기 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 무령왕릉 내부 배치상태 (모형)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은 전축분(塼築墳)으로, 무덤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인 연도(羨道)를 지나, 왕과 왕비 관이 있는 커다란 방인 묘실(墓室)이 있고, 물이 빠지는 배수구(排水口)로 구성되어 있다.
  묘실의 네 벽 가운데 남북벽은 아래에서 천장부까지 수직으로 올라갔고, 동서벽은 벽면의 상부에 이르러 차츰 안쪽으로 기울어 아치형 천장을 구성하였다. 
 

 

 

 

 

* 무령왕릉에서는 묘지의 내력을 적은 지석(誌石)이 두장(양면에 글씨를 새겨 모두 4면이 됨) 발견됨.

 

 

 

 

 * 무령왕 지석(誌石) (국보 제163호)  :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또한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무령왕릉 출토 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연구에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지석에 새겨진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百濟) 사마왕(斯麻王)께서 나이 62세 되는 癸卯年(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乙巳年(525년) 8월 12일에 대묘에 모시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

 

* 지석의 제3면(매지권) : 무령왕릉의 지석 위에는 오수(五銖)라는 글씨가 새겨진 쇠돈 한 꾸러미(90여 개)가 놓여 있었다.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사기 위해 실제 유통되는 돈을 무덤 안에 넣는 것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였던 풍습이다.

  지석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525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천상천하의 2천석의 여러 관리에게 문의하여 남서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을 삼으니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 왕비의 지석으로 매지권의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丙午년(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빈전을 설치하여)에서 삼년상을 지내고, 己酉년(529년) 2월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기어 정식 장사지내며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한다."

 

 

* 지석 위에 놓여 있던 오수전.  무덤 안에서 나온 이 철제 오수전은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무제 때 만든 것이다.

 

 

 

* 석수(국보 제162호). 이 석수는 상상의 동물로서,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이다. 진묘수란 벽사의 뜻으로 묘실 앞에 세우는 동물상이다. 이 석수는 널길의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돼지처럼 뭉툭한 몸매인데, 머리에는 철제 뿔이 꽂혀 있고, 등에는 융기가 있으며,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 모양 갈기가 부조되었다. 

 

 

* 동제 발(鉢). 동제 발은 같은 시기의 대가야연맹권 내의 대형묘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양 정치체간의 교류관계를알려준다. 

 

 

* 동제 완 

 

 

* 동제 접시 

 

 

* 동탁 은잔.

  무령왕비의 머리 부근에 놓여 있었던 이 탁잔은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표면에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치 단아한 산봉우리와 같이 만든 잔뚜껑에는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에 짐승이 노닐고 있으며, 위로 올라가며 나무가 있고, 연꽃잎이 꼭대기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뚜껑 덮인 잔의 윗부분에는 구름이 물흐르듯 부드러운 무늬가 너울거리고, 그 밑으로 3마리의 용이 유유히 날고 있으며, 이 모두를 연꽃과 고사리 같은 꽃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어, 연화화생한 극락정토의 느낌을 준다.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은잔은, 다시 여러가지 문양이 새겨진 널찍한 잔받침에 올려져, 위아래가 안정된 조화를 이룬다.

  박물관에는 문양을 확대하고 길게 펼쳐놓은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어 자세히 볼 수 있다.

 

 

* 동제 수저.

  요즘의 것에 비해 숟가락의 손잡이 부분이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넓은 편이다. 젓가락에는 고리를 만들어 끈으로 묶을 수 있게 된 것도 보인다.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가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기. 작은 것은 무덤 안을 밝힌 감실 안에 있던 등잔으로, 타다 남은 심지가 남아 있다. 

 

 

* 무령왕과 왕비의 관목.

  목관재로 사용된 나무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 구주(九州) 지방에서만 분포하는 금송(金松)으로 판명되어, 일본에서 가져온 것임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근거가 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며, 이중 국보가 12건에 이른다. 유물에는 지석, 석수,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몇 점의 부장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어 3,000여점에 이르는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백제의 역사와 문화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무덤의 주인공과 연대가 뚜렷하게 새겨진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이 출토되어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바로 왕과 왕비 지석의 기록에서 숨겨져 있었던 백제 역사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풀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기록들이 『삼국사기』의 기록들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어서 이로 인해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무령왕릉은 자료가 부족하여 늘 미완성의 상태였던 백제사의 복원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온 나무조각 하나하나까지 다른 지역에서 나온 유물들과 비교하여 그 역사성을 연구하는데 결정적 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