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스크랩] 형산강과 왕룡사

道雨 2007. 12. 19. 21:55
 

형산강과 왕룡사

 

 

형산강(兄山江), 서라벌의 넓은 들판을 굽이굽이 흐르면서 알토란같은 자양분을 공급해온 경주의 젖줄이다.

찬란했던 신라천년의 문화와 역사를 뒷받침해온 어머니와도 같은 이 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는 형산강이 지금처럼 동해로 흘러들지 못했다고 한다. 경주와 포항의 경계지점에 있는 형제산에 가로막혀 지금의 강동지역 일대에서 큰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비만 오면 이 일대가 물에 잠기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호수에 큰 용이 나타나 동쪽에 막혀 있던 형제산을 꼬리로 내려쳤다. 그러자 산이 갈라지고 물길이 열리면서 호수의 물은 동해로 빠져나가고, 안강평야를 비롯한 인근의 넓은 들은 모두 옥토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때 용꼬리에 잘린 형제산은 그 이후 남쪽은 ‘형산(兄山)’이 되고, 북쪽은 ‘제산(弟山)’이 되었으며, 잘록하게 산이 잘린 곳을 ‘형산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은 김부대왕(신라 제56대 경순왕)이 죽어 신룡(神龍)이 되어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김부대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신당을 지어 제를 올렸다고 한다.

김부대왕에 대한 신앙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강동면 국당리의 형산 정상부에 있는 왕룡사(王龍寺 옛 옥련사)에는 보통 절에서 보기 어려운 용왕전이 마련되어 있고, 현재 이곳에는 김부대왕과 그 신위가 모셔져 있다.

왕룡사 부처


김부대왕 신당과 국화로 국당(菊堂)

국당(菊堂)은 형산강의 전설이 얽힌 ‘형산’과 ‘형산목’이 있는 마을이다.

국도 7호선을 따라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다가 강동대교를 지나 강동면사무소가 있는 유금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형산과 제산 사이로 형산강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쪽(남쪽) 형산을 의지하여 자리한 마을이 국당이다. 형제산을 잘라 물길을 내고 옥토로 만들어준 고마운 김부대왕을 모시던 신당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마을에 국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菊堂)’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을은 조선말 전국 4대 장의 하나로 꼽히던 ‘부조장(푸조장)’이 있었던 곳으로 일반에는 ‘부조’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문무왕 때 쌓은 돌성

↑↑ 성벽

 


형산(兄山) 높이 256m의 부조 동쪽 산.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여 중사(中祠)로 제사를 지냈는데, 문무왕 때 쌓은 석성(石城)이 있다.

이 산은 모양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혹은 ‘연화봉(蓮花峰)’이라고도 한다.

형산성(兄山城) 터 국당리 형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720m 정도이다.

신라문무왕 13년(673) 9월에 말갈, 거란과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 현재 건물자리와 성문자리가 남아 있고, 봉수대와 연못이 남아 있다. ‘북형산성(北兄山城)’이라고도 한다. 봉수대가 있는 정상부에 성곽일부가 남아있다.

형산봉수(兄山烽燧) 형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로 ‘봉우재’, ‘봉오재’, ‘봉화재’라고도 부른다. 동쪽으로는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봉수, 서쪽으로는 영천 소산봉수(所山烽燧)에 연기를 피워 신호로 알리던 곳이다.

왕룡사(王龍寺)는 1910년경에 중건된 형산 정상부에 있는 절이다. 김부대왕을 모신 용왕전이 있다. 이 용왕전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의 목상 2기가 중앙단에 주불처럼 모셔져 있다. 용왕전은 15년 전에 중건했으며, 대웅전은 재작년에 크게 새로 지어 아직 단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부대왕 사당(金傅大王祠堂) 터 국당리 산2번지, 형산 연화봉(蓮花峰) 동쪽 돌병풍 아래 큰 반석 앞에 김부대왕을 모시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의 왕룡사(王龍寺) 안으로 옮겼다.

 

 



목조 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

왕룡사(王龍寺)에 있는 목조 문·무인상으로 약 200년 전에 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목상은 김부대왕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이기 때문에 김부대왕은 경순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마의태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형제산을 잘라 물길을 낸 용은 마의태자가 기도를 통해 화한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이 2기의 목상은 경순왕과 마의태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이 두 목상은 동쪽에는 문인상, 서쪽은 무인상을 배치했다. 둘 다 왼손만 드러나게 조각했고, 오른손은 옷속에 감추어진 형식을 취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상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푸른 옷에 얼굴은 살색으로 칠해져 있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손에 무엇을 바쳐든 것 같은 형태이며 역시 푸른 옷에 얼굴색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도지정 민속자료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서산류씨들이 물알(포항)사람들이 이곳에서 공을 들여 고기도 잘 잡히고 영험이 있다고 출입이 잦아지자 보기 싫다고 목상을 뽑아 물에 쳐 넣었는데 이후 류씨들의 소년죽음이 많아 새로 목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 <경주신문/이채근기자>에서 발췌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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