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참된 송덕비

道雨 2007. 12. 21. 17:10

 

 

 

                      순천 팔마비



                           


                       




0. 순천 팔마비(八馬碑) : 지방유형문화재 제76호(80. 6. 2)

 

  전남 순천시의 승주군청 앞에 팔마비라는 오래된 비석이 있고, 순천시 죽도봉공원에 팔마탑이 서 있으며, 여기에 고려 때의 한 청백리에 얽힌 일화가 전해진다.

  

  고려 충렬왕(1277년) 때, 최석(崔碩)이라는 선비가 승평(지금의 순천)부사로 있다가 임기가 차서 고을을 떠날 때, 그 당시의 고을 풍속에 따라 백성들이 부사에게 좋은 말 여덟 필을 선물로 주었다.

  최부사는 서울(개경)까지 갈 수 있는 말이면 족한 것이지 구태여 좋은 말을 여덟 필씩이나 받을 필요가 없다고 이를 사양했다. 그러나 향리들이 간청하므로 받아가지고 개경에 돌아와 내직인 비서랑이 되었다.

  최부사는 개경에 도착하자 말 여덟 필과 도중에서 태어난 망아지까지 모두 순천으로 보내면서 ‘이 망아지는 내가 순천에서 받아가지고 온 여덟 마리의 말 중에서 오는 동안에 낳았으므로 어미를 따라 돌려보내노라’하고 적어 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부터는 부사들에게 이러한 헌마(獻馬)의 폐습이 없어지게 되었다.

  말을 받은 고을 사람들은 그의 고결한 인품에 감동하였으며, 최석 부사의 청렴 한 뜻을 기리고자, 성 밖 연자교 남쪽에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

   이 비석은 고을 백성이 스스로 세워 준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관 선정비로 전해진다.



0. 순천도호부 중건 팔마비 음기


  내가 예전에 『동국여지승람』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최석팔마비(崔碩八馬碑)의 기록을 보고서 최석(崔碩)을 흠모하게 되었다.

  병진년(광해군 8, 1616년)에 외람되이 이곳에 관리가 되어 와서 맨 먼저 그 옛 자취를 방문해보니, 비석은 정유년(선조 30, 1597년)의 병란으로 훼손되어 있었고, 복구되지 않은지 20년이 되었다. 서글픈 마음에 비석을 복구할 방법을 계획하였다. 이에 고을의 어진 어른들이 창고의 재물을 내주어 생원 정지추(鄭之推) 등 몇몇 사람들이 서로 재물을 모으고 돌을 깎고 다듬어 해를 넘기지 않고 완성을 보게 되었다.

  아! 최석이 죽은 지 지금 400년이 되었는데도 백성들이 그의 덕을 사모함이 그 옛날처럼 하니, 비석은 비록 무너졌지만 입으로 전승되어 옴[口碑]은 그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구차하게 비석을 만들려고 했겠는가?

  그러나 드러내고 알려 사람들에게 그의 덕을 본받도록 면려(勉勵)하는 것은 실로 이 비각(碑閣)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훼손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옛날 부사 최원우(崔元祐)는 그 넘어진 것을 일으키면서도 시를 지어 노래하였으니, 하물며 지금 무너진 것을 중건하는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이후로부터 이곳을 지나치는 모든 이들 중에 염치(廉恥) 있는 선비들에게는 실로 기쁜 마음으로 공경함을 일으켜 더욱 면려됨이 있을 것이고, 조급하고 탐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두려운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착하지 못한 행동을 고치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관리가 된 자들에게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풍속과 기강에 관계됨이 매우 커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옛 사람이 남긴 인애(仁愛)’를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비석이 단지 한 때에 지난 일의 사모(思慕)를 드러내어 후인들에게 위엄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서로의 시간적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이 일이 이루어짐을 기뻐하고 고을 사람들의 뜻을 더욱 가상히 여겨서 대략이나마 그 전말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살펴보니, 최석은 고려 충렬왕조의 사람이다. 그에 관한 일은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실려 있어서 고찰해 볼 수 있다.

  최원우가 시를 읊었다.


“승평(昇平, 전라남도 순천시)을 오고 가노라니 사계절이 차례로 옮겨가는데,

맞이하고 보내면서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았으니 매우 부끄럽네.

후세에 전할 만한 덕이 없다 말하지 마소,

최석의 팔마비를 다시 일으킨다네.”


최원우의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내가 운에 이어 짓는다.


“옛 산천으로부터 몇 번이나 변하였던가.

무너진 터가 매몰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네.

비석을 세워 이름을 거듭 돌에 새기지 않고,

서로 구전(口傳)하기를 좋아하였으니 입이 비석이네.”


  예전에는 비면(碑面)에 ‘최석팔마비’라고 썼지만, 지금은 내 말을 듣고 다만 ‘팔마비’ 석자만 썼다. 그래도 현산(峴山)의 타루비(墮淚碑) 와 요양(遼陽)의 화표주(華表柱)가 그 성명(姓名)을 물을 필요도 없이 그것이 양호(羊祜)와 정영위(丁令威)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  만력(萬曆) 45년 정사년(丁巳年 : 광해군 9, 1617년). 



0. 팔마비 비석의 건립 경과

  전라남도 순천시 영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

  현재 세워진 비석은 당시의 비석이 아니다. 1365년(공민왕 14)에 다시 세워 전해 내려오던 중 조선시대인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불에 타 훼손된 것을 1616년(광해군 8)에 이수광이 승주부사로 부임해와 그 이듬해 최석의 뜻을 기려 복원한 것이다.

  이때 대석은 처음 중건 당시의 것을 그대로 쓰고 그 위에 비석을 다시 세웠다.

  원래 남문통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1930)에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하천 확장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인 옛 승주군청 앞 도로변으로 옮겨진 것이다.

  복련좌대석 위에 놓인 직사각의 비석으로, 조선시대의 일반형 비석과는 다른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다. 크기는 높이 160㎝, 너비 77.5㎝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대석은 가로 140㎝, 세로 85㎝, 높이 40㎝이다.

  앞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팔마비’는 진사 원진해의 글씨이며, 뒷면에 음각되어 있는 팔마비 중건기는 이수광이 짓고 김현성이 썼는데 마멸이 심하다.

  1977년 8월에 비석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 비석은 한국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과 청덕을 기리는 비석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크다. 



***    겉으로 보아 크고 화려한 비석보다는, 입으로 전해지는 비석(口碑)이야말로 참된 불망비, 송덕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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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비석을 중건한 이수광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지봉유설'(일종의 백과사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 타루비(墮淚碑)란 중국 晋나라 때 양양지방 사람들이, 양양태수를 지냈던  양호의 선정을 잊지 못해, 현산에 있는 그의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 화표주(華表柱)는 무덤 앞에 세우는 망주석인데, 옛날 요동의 정영위라는 이가 영허산에 가서 도를 배워 학이 되어 천 년만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았다는 중국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