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화로 (불들의 납골당)

道雨 2008. 6. 16. 11:50

 

 

 

        화로

                                                   - 불들의 납골당




인간이 만든 불의 용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불을 피우고 일으키는 기구이고, 하나는 불을 담고 보전하는 기구이다. 서양의 페치카나 스토브는 모든 도가니와 동질적인 것으로 불을 일으켜 태운다. 그러므로 아궁이와 굴뚝의 원리를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 부채나 부지깽이가 그 대표적인 소도구로서 발화의 목적이나 불꽃을 더 강렬하게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그러나 화로는 페치카와는 달리 후자, 즉 불을 보전하고 담는 용구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페치카가 불의 탄생을 위한 것이라면 화로는 불의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로는 불꽃의 원리에 의해 디자인된 것이 아니라, 불이 다 타고 난 재의 원리를 본질로 한, 역설적인 노(爐)인 것이다. 굴뚝이나 아궁이라는 개념이 없는 화로는 불들의 죽음, 그 불의 뼈를 담아두는 납골의 항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정말 한국의 화로는 그 형태나 그것을 만든 재료가 형형색색으로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면에서만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불꽃을 담는 형태, 불의 무덤과도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난방기구인 화로에서는 불을 헤쳐놓는 부젓가락보다는 그 재를 꼭꼭 묻어두고 다독거리는 인두가 오히려 주인 구실을 한다.


한국의 화로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식기 위해서 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싯귀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화로는 불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뜨거웠던 불덩어리가 싸늘한 재가 되어가는 과정, 화로의 참된 아름다움은 불꽃보다는 그 잿속에 있다. 한국의 화로는 근본적으로 불을 담아도 비어있는 형태, 재의 형태를 모방하게 된다. 그러므로 미당 서정주의 시를 빌어 말하자면 그 화로의 아름다움은 봄의 아지랑이가 아니라 가을의 무서리, 꽃으로 치면 도화가 아니라 국화꽃, 여인으로 치면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그리고 새로 치면 날쌘 제비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매가 아니라 천년을 사는 학의 비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화로는 할아버지 방이나 할머니 곁에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린다. 할아버지의 잠든 모습은 화롯가에서 가장 평화롭다.


젊음 속에만 미가 있다고 생각해온 외국의 관광객들은 한국의 노인들을 보고 놀란다. 의젓하고 당당하고 평화로운 그 신선 같은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산 일생인데도 찌들리고 뒤틀리고 왜소해진 도시 양로원의 노인들 같은 추악함을 찾을 수 없다. 노인의 아름다움, 그것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사그라져 가는 불덩어리들을 주워담는 화로의 문화, 그 재의 잔치에서 얻어진 미학이다.


    

* 윗글은 이어령의 ‘우리문화 박물지’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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