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 홍대용을 애도하는 박지원
홍대용을 애도함
유세차(維歲次), 1997년 10월 29일에 제주(祭主) 박지원(朴趾源)은 벗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무덤에 무릎을 꿇고 삼가 명복을 빈다. 혼이여! 부디 천안군 수신면 장신리의 무덤으로 내려와 나의 애절한 조문을 귀담아 듣게나.
그대의 부음 소식을 접한 나는 한 걸음으로 달려 와 통곡을 했으나, 하늘이 갈라 논 세상의 이별을 어찌 돌이킬 수가 있는가? 그저 슬픈 마음에 술잔을 놓지 않았더니, 술이 곤드레만드레되어 2 백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깨어났네.
아-아! 슬프다.
그대는 민첩, 겸손하고 식견이 원대하여 사물의 이해가 정밀하였다.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는 그대의 학설은 지극히 오묘하였다.
일찍이 청주에서 태어난 그대는 목사를 지낸 부친 아래서 훌륭한 학문을 닦았다. 부친이 나주목사를 역임하실 때였다. 그곳과 가까운 동복에 천문학자인 나경진(羅景鎭)이 살고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던가? 그대는 나경진의 집으로 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자명시계인 후종(候鍾)을 보면서 그 원리를 깨우쳤고, 스스로 만들어 보면서 천문학에 눈을 떴다. 청주 본가에 사설 천문대인 용천각(龍天閣)을 짓고 기구를 만들며 더욱 천문학에 심취하였다. 그 때 그대는 ‘지구가 스스로 돈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얼마나 위대한 발견이었나!
그대가 나를 찾아와 설명했을 때, 우리는 밤 새는 줄도 모르고 그대의 학설에 감탄을 하며 토론을 벌렸다. 그러나 조정의 대신들은 여전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 하며 그대의 학설을 일개 괴담으로 일축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들이었던가! 속이 탄 그대는 청나라로 가 그곳의 과학자 엄성, 반정균과 토론을 벌렸다.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조선에 훌륭한 과학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인연으로 엄성이 죽자 반정균이 그대에게 부고를 냈고, 또 그대가 죽었을 때 내가 반정균에게 부고를 내어 우리는 국제적인 우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대는 과학기재만 만지느냐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을 했다. 선각자가 겪어야 하는 외로움과 절망을 그대만큼 온몸으로 격은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 비록 그대가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은 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대가 정령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임하경론(林下經論)’을 저술해 신분제도의 철폐와 언론의 평등등 진보적인 제안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장한 일인가!
벼슬이 변변치 못했던 그대는 극도로 가난한 가운데도 과학기술의 보급에만 힘을 썼다. 당시 내 집의 사랑채에 모여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화하자는 북학파의 모임은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그대의 활약은 눈이 부셨다.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그리고 그대와 나. 우리 모두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들이 아니던가? 또 기하학의 원리를 기술한 ‘주해수용’이란 책은 알마니 오묘한 이치로 깨우쳤던가!
오호 애재라.
그대가 학문을 가르치던 영조가 등극하자 우리는 기뻐하였다. 그런데 곧 홍국영이 정권을 유린하자 그대는 침을 뱉으며 청주로 떠났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억지로 벼슬을 했다는 그대의 말도 믿는다. 그러나 어찌하여 청주로 내려간 뒤 1년도 못되어 중풍으로 쓰러지셨나. 춘추 53세가 그리도 늙은 나이던가? 아아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아찔하다. 이 땅에 과학문명을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산 그대가 아닌가?
벗이여!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는 말게. 그대가 사랑했던 조국이 그대가 뿌린 과학문명의 씨앗을 가꾸어 이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대국으로 변신했다. 자동차․조선․반도체 그리고 가전제품의 수출에서 일약 세계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겨누고 있다. 그대의 땀과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또 그대를 사모하는 후학들이 비온 뒤에 죽순이 솟듯이 세계천문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구천을 떠도는 외로운 혼이여! 이제 걱정과 안타까움을 접게나. 그리고 극락왕생하게.
향(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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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