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의 딸, 공혜왕후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파주에 사는 딸[공혜왕후, 1456~1474)이어요.
저는 지금 무진장 슬퍼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가 이토록 불쌍한 신세가 된 것은 아버지의 욕심 때문인 것 같아요. 예종에게 시집 간 언니가 1461년 17살로 죽자, 아버지는 어떻게든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어린 저를 지켜보셨지요. 그때 제 나이 몇 살이었는지 아세요. 겨우 6살이었다고요.
그래도 아버지는 속으로 ‘어서 빨리 자라만 다오. 가문이 흥하냐 망하냐는 너에게 달려있다.’라고 생각했지요. 불쌍한 언니가 왕비에 오르지 못하고 죽자(성종 3년에 왕비로 추존) 저를 왕비로 만들기 위해 벼르고 계셨지요.
그래서 제가 12살이 되자, 11살 난 세조의 손자에게 시집보냈지요. 아무튼 아버님의 재치와 수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아마도 아버님의 진짜 마음은 언니를 대신해 저를 다시 예종의 비로 보내고 싶었을 거여요. 왜 요즘도 언니가 사고나 병으로 죽으면 처제를 데리고 사는 남자가 있잖아요. 맞죠? 예종은 언니가 죽은 뒤 7년 뒤에나 왕으로 등극했으니까 얼마나 기다리기가 지루하셨어요. 저는 아버님의 마음을 다 알아요.
다행히 예종이 제위 1년만에 돌아가셨기에 망정이지, 오래 오래 사셨다면 재치에 능한 아버님은 어떤 일도 벌렸을 거여요. 저는 아버님이 원하는 바대로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러면 뭐해요. 몸이 아파 죽겠는걸요.
왜 요즘은 어린 소녀들이 애기를 낳아 미혼모와 같이 사회문제가 되는데, 저는 왜 임신이 안되는 거여요. 아마도 아버님이 여러 사람에게 못되게 굴어서 내가 그 죄를 받았나봐요. 저는 너무나 임신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났어요. 짜증도 났고요. 속상해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랬더니 병이 생기더군요. 스트레스도 병이 된다는 것을 몰랐어요. 저는 자식도 낳지 못하고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어요.
왕비생활 5년이 온통 스트레스였어요. 모두가 아버님 책임이란 말이어요. 제가 죽자, 성종은 영의정 신숙주를 보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그대 한씨는 한결같이 단아하고 성실하고 아름다우며, 그윽한 넉넉함과 곧고 고요함을 갖춘 명문의 빼어난 규수로다….’
모두 미쳤어요. 그게 모두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렇게 몸가짐이 바르고 아름다웠다면 성종은 왜 나홀로 이곳에 묻어놓고 자기는 다른 여자와 다른 곳에 누워있어요. 다 아버지 때문에 할 수 없이 장가를 갔기 때문이란 말이여요. 즉 마음도 없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언제 봤냐는 식으로 저를 외면한 거여요.
흐으흑!
아버님, 저는 아버님이 원망스러워요. 저를 보통의 대감 댁 자제와 결혼을 시켰다면 죽어 최소한 독수공방만은 면했을 거여요. 차가운 원앙금침만 보면 뼈마디가 시려와요. 아버님은 여자의 마음을 너무나 몰라요. 내가 왜 이런 불쌍한 여자가 되었나요. 예? 지금이라도 다시 시집보내 줘요. 5백년이나 혼자 살자니 이젠 서러워서도 못 살겠어요.
선릉(宣陵)에 계신 성종대왕만 생각하면 질투가 나 무덤의 잔디가 삐죽삐죽 곤두서요.
아이고 내 신세야.
제 묘를 치장한 문, 무신석상이나 큼직한 상석, 그리고 장명등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무리 제 인생을 미사여구로 감싸고 보옥으로 관을 장식한들 제 한과 슬픔은 어떻게 가실 수가 있어요. 너무너무 가엾어 죽겠어요. 흐으흑!
아버님!
천안은 사시기가 어때요. 너무 심심하고 외로워 부모님 곁으로 이사가고 싶어요. 그런데 어떻게 할 수가 있어요. 여름 철에는 참배객도 많더니만 이제 추워지니 아무도 오지 않네요. 에고, 그럼 이만 줄이겠어요. 어머니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1997년 11월 23일
파주 순릉에서, 딸 공혜왕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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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