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오랜만에 어머님[여흥 민씨]의 말씀을 듣고보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비록 제가 만 백성의 어미인 왕비(장순왕후, 1445~1461)였지만, 가깝게는 아버지[한명회]의 피와 어머니의 살을 받은 못난 딸일 뿐입니다.
열 여섯의 어린 나이에 세자(나중에 예종)의 비(妃)로 간택되자, 어머니는 얼마나 좋아하셨습니까. 왕도의 법도를 배워야 한다며 어렵기만 한 왕비수업을 목이 쉬고 치마가 헐도록 가르켜주었지요. 저 역시 ‘왕비’가 된다는 묘한 흥분에 밤 잠을 설쳤구요. 이조판서를 지내며 상당군(上黨君)에 오르신 아버님이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릴 때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세자와 성대한 가례를 올린 후 저는 세자궁에 들어갔지요. 법도가 엄한 궁궐이라 몸가짐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어요. 아침 저녁으로 상감마마의 잠자리를 문안하는 일이며, 중국 제왕의 치덕과 행실을 배우는 일이며, 뱃속에 든 원손를 위해 태교를 하는 일이며, 장차 임금이 되실 세자 님을 위해 얼굴을 가꾸는 일이며 등등.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힘이 들 때면 언제나 친정이 먼저 생각났고, 한 걸음에 달려 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왕가의 법도가 엄하여 쉬운 일이 아니 였어요. 그래서 어머니만 생각하며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후손이 귀한 왕가에 제가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아주자, 대궐이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지요. 그러나 사실 저는 몸에 병이 있었어요. 부모님을 생각해 차마 말을 하지는 못했어요. 원손를 낳을 수 있을까도 걱정했는데, 하늘이 도왔던지 무사히 낳았어요. 그런데 왠 일인지 몸이 무거워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고, 어의들이 정성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저는 강보에 싸인 원손을 보며 한 많은 눈을 억지로 감았지요.
어머님 죄송해요. 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얼마나 슬프게 통곡하셨던가요. 저 역시 하늘에서 어머니의 피눈물을 보았어요. 세상의 영화가 모두 허망하다는 것도 깨우쳤어요.
제가 죽자, 장순왕후(章順王后)라는 시호가 내려졌어요. 그리고 제 무덤을 공릉(恭陵)이라 불렀어요. 신하가 저의 죽음을 애통해 지은 애책(哀冊)을 보면,
‘화장도구는 시렁에 얹어 두었고, 거울에는 먼지가 끼었습니다. 반짝이는 이슬 빛이 널리 퍼짐이여, 달빛도 수심에 젖었습니다. 오호라 슬프옵니다.’
라고 했어요. 무슨 소용이 있어요.
보고 싶은 어머님!
제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경기도 파주군 조일면 봉일천리에 있는 제 무덤에 어머니와 아버님이 찾아 오셨지요. 아버님은 릉 저 아래서 되돌아보고 계셨고, 어머니는 잔디를 뜯으며 눈물을 흘리셨지요. 못난 자식이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은 것같아 저 역시 왕비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목놓아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슬픈 일은 어렵게 낳은 인성대군이 곧 죽고, 또 왕(예종)이된 서방님도 등극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춘추 20에 승하한 일입니다.
가슴은 무너져 내리고 혼까지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못된 아비 때문에 제 목숨이 단명했고, 세조 때문에 서방님의 명도 짧았다고 하니, 그저 하늘이 원망스럽고 슬플 뿐입니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님!
오늘도 불효여식은 천안에 계신 부모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그럼 이만 눈물의 펜을 놓습니다.
1997년 11월 20일
파주 공릉에서, 딸 장순왕후 올림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