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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만남. 상 제 례

道雨 2008. 7. 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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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만남, 상 제 례

 

 

 

 

 

 


상제례는 한번 토착화되면 나름대로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가지면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특징을 갖는다. 고려 말 들어온 주자가례에 의거한 유교식 상제례는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정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관혼상제는 풍속을 교화시켜 질서를 세우고, 동시에 효(孝) 사상을 세우는 수단으로 삼아 국가에서도 이의 시행을 적극 권장하였다.

 


사흘 내 입관은 살인행위?

공자는 3일 이전의 입관(入棺)은 살인행위와 같다고 했다.

옛날에는 장례 기간이 길었다. 임금은 5개월 장, 4품 이상의 대부는 3개월 장, 선비는 1개월 장, 일반 백성들도 지금 3일장보다 길었다. 때문에 입관은 3일, 만 2일이 지나야 했다.

그 까닭은 첫째, 소생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혹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니 적어도 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장례를 치르자면 상복이나 관과 같은 여러 물품들이 필요한데, 이런 물품들을 준비하려면 적어도 3일 정도는 필요하다. 셋째, 미리 시신을 관 속에 넣어버리면 멀리 있는 친척이나 자식들이 돌아가신 부모의 얼굴이라도 볼 수 없기 때문에 돌아오는 시간을 감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 상례에서는 입관하기 전까지는 시신을 묶지 않고, 얼굴을 싸지도 않았다. 혹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의를 입히고 염을 할 때 끈으로 단단하게 묶을지언정 매듭은 짓지 않는 것 역시 혹시라도 시신이 깨어나면 저절로 풀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3일 후 입관은 생명존중 사상의 발로인 셈이다.



왜 하필이면 삼년상인가

유교식 상례 즉, 전통 상례의 핵심은 3년 상, 만 2년이다. 공자는,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라야 비로소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기 때문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도리”라고 했다.
한마디로 삼년상이란 자식이 태어나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젖먹이 3년 동안 부모의 품안에서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육신을 땅에 묻고 혼령이 깃든 신주를 모셔와 탈상 때까지 만 2년간을 갓 태어난 아기를 품안에서 보살피듯 모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49제 혹은 100일 탈상을 하고, 심지어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날 3일 탈상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아예 탈상이 무엇이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비좁은 아파트에서 방 한 칸을 내어 상청빈소을 마련하여 매일 조석으로 찬을 올릴 수는 없지만, 삼년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안다면 결코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주와 지팡이

상주가 지팡이를 짚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중에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2천여 년 전에 쓰여진 <예기>에 의하면, “효자가 부모를 잃으니 몸과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수가 없고, 근심과 괴로움으로 삼년상을 나니 몸은 병들고 메마르기 때문에 지팡이로 병든 몸을 부축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스스로 죄인으로 여겨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와 허리에는 죄인처럼 동아줄을 매고 지팡이를 짚고 3년을 난다.
상주가 짚는 지팡이만 봐도 부상(父喪)인지 모상(母喪)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부상에 죽장을 짚는 것은, 아버지는 아들에 있어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대가 둥근 것도 또한 하늘을 본뜬 것이다. 안팎에 마디가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안팎의 슬픔이 있음을 본뜬 것이다. 또 대나무가 사시사철을 통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또한 겨울과 봄, 여름을 지나도 변하지 않음을 본뜬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서 오동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오동나무의 ‘동(桐)’자가 같을 동(同) 자와 음이 같은 것을 취해 슬퍼함을 아버지와 같게 하라는 뜻이다.



제사,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되나

한마디로 제사를 몇 대까지 지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일반적으로 4대 봉사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6품 이상은 3대 봉사를, 7품 이하는 2대까지 봉사하고, 서민들은 부모제사만 지내토록 하였다. 이 같은 신분에 따른 차등봉사는 조선 말기에 양반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일반 서민들까지도 모두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오히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의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오늘날에는 장남이 집안을 대표해서 차례며 제사를 혼자 책임진다. 하지만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큰아들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았다. 큰아들, 작은 아들 또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모든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제사를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를 했다. 심지어는 ‘외손봉사’도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윤회봉사와 외손봉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점차 사라졌고, 오늘날처럼 모든 제사를 장자가 주관하게 되었다. 이는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가 확고해지고, 재산의 균등상속에서 차등상속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이러한 윤회봉사도 장남 단독봉사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속법도 아들과 딸을 구별하는 ‘차등상속’에서 지금은 아들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는 ‘균등상속’으로 바뀌었으니, 차례만이라도 형제간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떨까.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생각과 제물에 대한 정성이 각별해질 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도 더욱 깊어지는 덤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제사에는 대추, 밤, 곶감을 올리나

대추, 밤, 감 세 과일은 아무리 간소한 제사라 할지라도 제사상 맨 앞줄에 반드시 올린다. 대추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다닥다닥 열린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와는 달리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 떨어진다. 사람도 태어났으면 대추처럼 반드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서 가야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대추나무처럼 많이 낳고 가야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손 번창하라고 제사상의 첫머리에 대추를 놓는 것이다.
그럼 밤은 왜 올리는가. 대부분의 식물은 싹이 돋아나면 싹을 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땅속에서 새싹을 틔운 최초의 씨 밤은 그 나무가 크게 자라도 땅속에서 썩지 않고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남는다. 이런 밤의 묘한 생리 때문에, 밤은 자손과 조상을 연결하는 영원한 상징으로 여겼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위패나 신주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 이유도 그 같은 밤의 상징성 때문이다.
감은 어떤가. 감씨를 심으면 반드시 감나무가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고욤나무가 나온다. 감씨를 심기만 해서는 고염이 열리지, 감은 열리지 않는다. 감나무를 만들려면 3~4년쯤 된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 붙여야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여만 감이 열리듯이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 배워야 된다는 것이다. 생재기를 째서 접붙일 때 아픔이 따르듯이 사람도 교육이란 아픔을 겪어야만 한 인격체로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제사상에 감을 놓는 것이다.


▶글·사진_ 정종수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 윗 글은 '문화재사랑(44호)' 정종수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