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풍속,관습 등

[스크랩] 동래정씨 시조묘 정문도공 묘소

道雨 2008. 9. 3. 17:45

동래정씨 시조묘 정문도공 묘소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산 73-28번지 화지산의 남측 자락에 동래정씨 시조묘인 정문도공의 묘소가 있다. 화지산(和池山 또는 華池山)은 부산 연제구 거제4동과 부산진구 양정1동 일대에 걸쳐있는 해발 142.4m의 명당 지세의 산으로 옛날에 지금의 연지동 자리인 화지산 아래에 '화지언(和池堰)' 이란 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연지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못에는 연이 많아 '연못골' 또는 '연지언(蓮池堰)'라 불러 연지동이 되었다.




 


이 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는데 고려초기 동래 정씨 정문도와 그의 아들 정목과 후에 정목의 장인이 된 고익공간의 이야기이다.


고익공은 광릉 고씨 시조로 정문도가 동래지역 호장으로 있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이곳 지방관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정문도는 동래지역을 통괄하는 호장이었기에 두 사람은 공무로 만나 업무를 처리하고 대화를 하던 사이였다. 어느날 중앙관 고익공이 지금의 화지산 풍수를 보고 탄복하면서도 "좋기는 하나…"라고 하면서 뒷말을 잇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몇 차례 들은 호장 정문도와 그의 아들 정목은 궁금했지만 그 사유를 끝내 듣지 못했다.


 그 후 중앙관 고익공이 경상도 안찰사를 거쳐 중앙관계로 전출하고 정문도도 유명을 달리하자 아들 정목이 아버지 묘소를 어디에 쓸까 망설이다가 중앙관 고익공의 말이 생각나 화지산에 묘소를 쓰고 뜻한 바 있어 개경으로 상경하고 고익공을 찾아 이 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이에 고익공이 깜짝 놀라면서 정목을 자기 집에서 내쫓았다. 이는 그곳에 산소를 쓰면 역적이 배출된다는 사실을 정목이 알지 못하고 부친 산소를 썼기 때문에 역적이 될 가문의 사람과 한자리를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고익공이 한참 생각하다가 정목을 다시 불러 묘소를 쓰는 과정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히도록 하였다. 이에 정목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친(정문도)을 화지산에 묻을 때 호랑이가 걸터앉아 울었던 그 자리가 명당지리라 생각되어 그곳에 묻고 그 다음날 동생과 같이 묘소에 가 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묘를 파헤쳐 목관이 드러나 있었기에 다시 목관을 묻고 밤에 이곳에 와서 상황을 감시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 3경에 이르자 도깨비 같은 괴물들이 나타나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따위 나무 관을 묻느냐. 적어도 금관(金棺)을 묻어야지'라고 하면서 다시 묘를 파헤치고 사라졌다.


두 형제는 금관을 어떻게 마련할까 하고 울고 있는데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 밤중에 웬 사람이냐'라고 말을 하면서 사연을 물었다. 이에 묘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더니 노인은 '그것은 도깨비의 장난임에 틀림없네.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인다고 하니 보릿짚으로 목관을 잘 싸두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날이 새자 두 형제는 보릿짚으로 목관을 싸서 묻고 밤이 되자 무덤 주위에 숨어 무덤에서 일어나는 정황을 또 살피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깨비들이 나타나서 또 무덤을 파헤치더니 달빛에 비치는 보릿짚으로 싼 목관을 보고 '금관이야. 이제 됐어. 어서 가자'라고 하면서 행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또 묘소를 쓴 그 해 여름 어느 날 뇌성 벼락이 천지를 진동하더니 황령산 괴시암의 바위(연산전화국 위쪽에 있는 바위로 정문도의 거처 뒷산이라 함)를 산산이 부셔버렸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고익공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황령산의 괴시암이 깨어졌으니 이제 그 묘소와 동래 정씨 가문의 화근이 없어졌네"라고 하면서 정목을 거두어 과거시험에 합격시켜 관직에 출사하게 하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다. 이후 부산의 동래정씨가 중앙무대에 진출하게 되고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묘의 감결

낙동정맥의 천성산(千聖山)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지맥은 금정산(金井山)을 일으키고 다시 만덕고개를 지나 금정봉에 이르러 그 웅대한 양팔을 벌리는데, 거기에서 왼쪽 줄기는 화지산과 황령산(荒嶺山)을 지나 용당동 신선대에서 바다와 만나고, 오른쪽 줄기는 불태령(佛態嶺)과 구덕산(九德山)을 지나 다대포 앞바다의 몰운대까지 이어진다.




흔히들 야자형 명당이라고 불리는 이곳 묘소는 화지산의 나지막한 산자락이 혈장을 포근히 감싸고 주산에서 뻗어 내린 청룡 백호가 관쇄를 이루어 비교적 장풍이 잘된 곳이다. 묘 앞에 잠깐 앉아 바람을 느끼니 혈처의 바깥에는 몹시 심한 바람이 부는 날인데도 이곳에서는 전혀 바람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이 아늑함마저 든다. 더욱이 정남으로 바라보는 양지녁에 자리하여 따스한 기운이 정감 있게 느껴진다.




안산을 바라보니 백호자락이 휘어져 내려오다 자그마한 봉우리 하나를 맺어 놓았다.그리 높지 않은 것이 혈장에서 가슴높이라 단아하게 보인다. 멀리 영도의 봉래산이 바라다 보이는데 삼태봉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조산(朝山)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정씨 문중에서 세 명의 훌륭한 인물이 나온다는 설이 생겨났다.



혈장에서 왼쪽으로 올려보니 황령산 자락에 역적이 난다고 하는 바위가 보인다. 전설대로 벼락을 맞아서 그런지 바위가 부서져 흩어진 모습이다. 천파암(天破巖)이라 이름 지어 그 흉한 기운을 없앴다고 하는데 지금 보아하니 그리 흉한 몰골은 아닌것 같다.



 

패철로 파구를 보니 물이 오방(午方)으로 소수(消水)하여 수국(水局)의 태파(胎破)를 이루었다. 내당은 좌선수에 외당도 좌선수라 자연순행을 이룬 길지이다. 상석 위에 올린 패철로 향을 보니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남향을 놓았다. 내룡(來龍)은 자계(子癸)로 입수(入首)하여 쌍산이 불배합된 용이라 흉하다고 보아야겠다. 수국의 태파에 자좌오향은 왕향왕파(旺向旺破)에 해당되어 향법을 무시한 좌향으로 남향만을 고집하여 그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득수를 보니 좌측에서 흘러나온 물이 혈장 앞을 감싸지 못한 채 묘 앞으로 곧게 흘러나간다. 무정한 형국에 입수룡이 득수를 하지 못한 상태이다.


묘의 양쪽에는 수령 800년이 넘었다는 배롱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었는데 묘를 봉분할 당시에 심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나무는 원줄기는 고사하여 수간만 남았는데, 나무의 움트는 힘에 의하여 새로운 움이 여러 갈래로 나와 뿌리에서부터 측간을 이루고 있다. 동쪽의 노거수는 4개의 측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높이 8.3m에 가슴높이 25m에 이르고, 서쪽의 것은 3개의 측간에 높이 8.6m, 가슴둘레가 4.1m, 수관 목이 20m에 이른다. 꽃의 색깔은 동서 모두 분홍꽃을 피우고 있으나, 수령이 오래된 관계로 생장 상태가 양호한 편은 아니다. 배롱나무는 꽃이 100여일 동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 또는 상부에 많은 가지를 쳐서 여름철에 오랫동안 분홍빛 꽃이 가지 끝에 뭉쳐 피기 때문에 백일홍(百日紅)이라 불린다.

  

 



화지사 이야기

정문도공의 묘소 옆에는 제실이 있고 제실의 뒤 쪽에 화지사 또는 정묘사라 불리는 작은 절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어느 해에 법당 안에 정씨문중 사람들이 많이 모여 놀 때 술을 먹고 담배를 피워 당내가 자못 시끄러웠는데 그러던 중 당내에서 놀던 사람 전부가 갑자기 두통이 일어나고 전신이 아프므로 여러 의원을 불러 치료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 때 몇 사람이 "우리가 부처 앞에서 불손하게 놀아 이런 모양이니 정성 드려 불공을 한번 해보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정성드려 불공을 올렸더니 모든 사람의 병이 일시에 나았다고 한다.

(김의환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서 발췌)




 


출처 : 대한풍수지리연구회
글쓴이 : 풍수청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