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몽골군의 고려 침략과 최씨정권의 후계자 다툼

道雨 2008. 10. 22. 18:32

 

 

 

몽골군의 고려 침략과 최씨정권의 후계자 다툼

 

 

 

최이(최우)에게는 만전과 만종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본처 소생이 아니라 서련방이라는 미천한 첩의 자식이었다. 최이는 본처 소생의 아들이 없다는 점이 늘 마음에 걸렸다.

쟁쟁한 문벌귀족들이 포진하고 있는 고려 사회에서, 비첩 소생이라는 신분은 그 자체가 약점이었다. 최이는 그런 연유로 일찌감치 후계자로 두 아들 대신 사위인 김약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약선은 경주 김씨로 신라 왕실의 후예였다. 그의 아버지 김태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명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다섯 임금을 거치는 동안 중용되어 벼슬이 재상에까지 올랐다. 또한 할아버지 김봉모는 한어와 여진어에 능통하여 외교교섭에서 많은 능력을 발휘해 역시 재상이 된 인물이었다.

더구나 몽골군과의 항전과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당대 최고의 명장 김경손은 김약선의 동생이기도 했다.

이런 김약선이 최이의 사위가 된 것은 최이가 부친 최충헌의 권력을 세습한 1219년 무렵이었다.

그런데 최이는 두 아들을 그대로 두면 훗날 사위와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두 아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해 출가시켰다.

출가한 만종과 만전은 순천의 송광사(지금의 수선사)로 들어갔다. 그때 송광사의 주지는 진각국사 혜심이었다. 혜심과 그가 주지로 있던 송광사는 최이 정권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급성장하고 있었으므로, 최이는 두 아들을 안심하고 맡겼던 것이다.

송광사의 혜심 문하로 들어온 만종과 만전은 혜심이 입적하는 1234년, 송광사를 떠났다. 이들은 15년 동안이나 고승의 문하에서 수도를 했으나 형제 모두 불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이 두 형제는 단속사(경남 산청)과 쌍봉사(전남 화순)으로 들어가 그곳에 거주했다. 그리고 각각 두 사찰을 본거지로 삼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특히 몽골군의 3차 침략이 끝난 후 짧은 휴전기 동안 이들이 자행한 횡포는 몽골군을 능가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만전과 만속은 무뢰배 같은 파계승들을 모아서 자신들의 문도로 삼고 인근의 이름난 절들을 차지하여 온갖 행패를 부렸다. 몽골 기병을 본뜬 안장과 의복을 갖추고 말을 타고 횡행하면서 불법을 마구 자행했다. 때로는 관리를 사칭하여 마음대로 역마를 타고 다니면서 관리들을 모독하기도 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거나 여자를 강간하고, 심지어는 고리대금업까지 손을 뻗쳤다.

최고 권력자 최이의 아들인 관계로 지방관들도 이들의 횡포를 막지 못하자, 품성이 나쁜 승도들 중에 이들 형제의 문도임을 사칭하여 불법을 서슴치 않는 자들도 속출했다.

두 형제는 또한 50여만 석의 쌀을 비축하여 경상도 일대의 백성들에게 강제로 꾸어주었다가, 가을에 문도들을 각 지방에 나누어 보내 꾸어준 쌀에 이자를 붙여 가혹하게 착취하니 백성들의 아우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관청에 납부하는 조세를 못 내더라도 그 이자만은 빠뜨릴 수 없었다고 한다.

최이의 두 아들은 이렇게 젊은 날을 반사회적인 행위로 낭비하고 있었다. 본래 그들의 성향에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위 김약선을 후계자로 낙점한 최이의 조치에 그런 식으로 불만을 표출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은인자중하던 김약선은 중대한 일을 겪게 된다. 1235년 6월 고종의 태자비로 자신의 딸이 간택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236년 2월, 이 태자비는 태손(후의 충렬왕)까지 낳았다.

김약선은 자신의 딸이 태자비가 되고 태손까지 낳으면서 정치적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왕실에 딸을 바쳤고, 그 딸이 태손까지 낳았으니 이변이 없는 한 김약선의 사위(태자)나 외손자(태손)가 고종의 뒤를 이어 대대로 왕위를 이을 것이었다. 이 일로 김약선의 정치적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는 최이의 딸이기도 한 그의 아내의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태자비가 태손을 낳기 직전, 김약선의 처가 궁궐을 찾은 적이 있었다. 연등회를 핑계댔으나 만삭이 된 딸을 위로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이 때 고종은 그녀를 태자비의 어머니라 하여 융숭하게 대접했다. 또한 가마의 행차나 복식을 왕비와 똑같이 하고, 국왕의 친위군을 따로 떼어 호종케 했다.

그런데 이렇게 김약선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자 그를 보는 최이의 시선이 따가워졌다. 최이는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가 된 것을 그다지 달가워 하지 않았다. 김약선의 딸이 태자비로 간택되었는데 예물을 간소하게 하라는 지시를 했고, 태자와의 혼인 날 마땅히 고위관료들에게 베풀 연회를 취소시키게 했다.

또한, 태손이 태어난 해인 1236년 7월, 전중내급사(종 6품)로 있던 김약선의 아들 김미를 고종이 수사공(정 1품)으로 삼으려 하자, 최이가 어린 나이를 이유로 굳이 사양하여 물리쳤던 것이다. 수사공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으로 보통 왕실의 종친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벼슬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김미는 종실인 양양공의 딸을 아내로 삼았고, 이제 태자비의 오라비까지 되었으니 받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최이는 김약선에게 너무 권력이 집중된다고 생각해 그런 조치를 내린 것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태자비 납비나 태손 생산을 해낸 김약선을 시기, 질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김약선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는 분위기속에서 최이는 사위를 견제하려 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사위 김약선의 정치적 위상이 한껏 높아지고, 두 아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망나니 짓거리를 일삼고 다닐 무렵, 최이는 후계자 문제를 심각하게 다시 고려하고 있었다. 아들을 제쳐놓고 사위에게 권력을 물려준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았다. 두 아들놈의 포악한 성격도 문제였지만 사위 역시 안심하고 믿기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이쯤 되면 김약선으로서는 최이의 의중을 제 나름대로 헤아려 처신을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주도면밀하고 권력의 동향에 민감한 최이 밑에서 그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은 너무나 좁았다. 보통 이런 경우 후계자들은 권력에 초연한 척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럴 때 애정행각에 빠지곤 했다.

김약선도 그랬는데, 그는 어린 처녀들만을 골라 음탕하게 놀기를 즐겼다. 망월루에 목단방이라는 밀회 장소까지 마련해 놓고 음행과 유흥을 일삼았다.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해 자신이 정치적 권력에 야심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지만,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김약선의 여성 편력이 심해지면서 울분을 참지 못한 그의 아내, 즉 최이의 딸이 친정 아버지에게 남편의 심한 외도를 호소하며 고자질해버린 것이다. 최이로서는 비구니가 되어버리겠다는 딸의 협박 가까운 호소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그는 밀명을 내려 김약선과 관계를 맺은 여자들을 모두 섬으로 유배 보내고, 목단방을 철거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저속한 속담에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이 있는데, 김약선의 처가 그 꼴이었다. 남편의 바람기에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 자기집 종과 간통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사실을 김약선이 알아채자 불똥이 튀기 전에 최이의 딸은 간통죄를 숨기고 잘못에서 벗어날려고 남편을 아비 최이에게 모함하였다. 김약선은 권력에 초연한 척 하지만 사실은 야심을 숨기고 있는 음흉한 사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 화를 당할지도 모르니 미리 손을 쓰라고까지 말했다.

바람끼야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지만 최이의 권력을 넘보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이는 주저하지 않고 자객을 보내 김약선을 암살하고야 말았다.

최이는 그후 김약선에 대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했는지 장익공으로 추서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의 처인 딸은 자기 집에 오지 못하게 막았다. 미묘하고 사소한 감정의 흐름이 가차없는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는, 우리 일상사에나 역사상의 사건에서 흔하게 벌어진다.

카리스마를 지닌 강력한 통치자일수록 후계자에 대한 지원에 소홀하고 정치적으로 견제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후계자를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통치자는 가장 적합한 후계자를 능력보다는 자신과 가까운 사적인 관계 속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참조: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7권, 고려 무인 이야기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