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누라(논개) | |
논개의 남편, 최경회 지금 논개도 제 곁에 있어요. 왜란이 일어나기 전, 저는 전라도 장수 현감을 지냈는데, 본부인 전씨는 해수병을 않아 누어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논개 모녀가 송사에 휘말려 동헌으로 끌려 온 사건이 있었고, 진상을 파악해 보니 잘못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작은 아버지가 꾸민 계략에 놀아난 겁니다. 갈 곳이 없던 모녀가 불쌍했습니다. 그러자 본부인은 자기의 병 간호와 집안 일을 위해 두 모녀를 동헌에서 살게했습니다. 매사에 빈틈이 없던 논개였고, 어느 새 저의 부실이 되었지요. 당시 논개의 나이 겨우 18살이고 저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잉꼬처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아니, 도둑놈이라고요.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나이 차이를 극복한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김 화백은 "그걸 물을 게 아니라 건강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맞받아쳤습니다. 정규 훈련도 받지 않은 의병으로 왜군을 섬멸하자, 조정에서는 저의 용맹을 인정하여 경상우병사로 삼아 진주성을 지키라는 어명을 내렸어요. 바로 그겁니다. ‘용장 밑에 졸병은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왜군에 밀려 그만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와 김천일이 응원군으로 파견되었고, 왜군들이 몇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어요. “도중에 왜놈을 만났는데 색에 굶주린 놈들이 저를 성폭행하려고 덤벼들었어요. 저는 자살을 결심하고 은장도를 꺼냈는데, 그 찰나 황진 장군이 달려들어 구해 주었어요. 하마터면 당신도 못 보고 먼저 세상을 떠날 뻔했어요.” 그러자 조선군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놈들을 돌과 바위로 시정없이 까 버려 대승을 거두었어요. 그러자 풍신수길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왜군들을 모두 진주성에 집결시킨 후 겹겹으로 성을 포위한 채 우리의 군량과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어요. 우리의 전세가 약해진 틈을 타 왜군이 기습을 해 오자, 최후까지 싸우던 저와 김천일은 북쪽을 향해 두 번이나 절하고는 남강에 투신했어요. 원통하고 분한 일이지만 그런데 분명히 본 것이 있어요. 물로 뛰어드는 순간 제 눈에는 일본이 망하는 모습이 보인 겁니다. 불쌍한 것은 아내지요. 마침내 기회가 왔는데, 6월 29일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7월 7일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촉석루에서 열었어요. 그러자 술 자리를 위해 기생들을 모집했고, 논개도 스스로 기생이라 속이고 술 좌석에 참석한 겁니다. 미모에 빠져 술에 취하자, 논개는 게다니무라를 촉석루 아래에 있는 의암(義岩)으로 유인햇으며, 그 놈을 부둥켜안고 강물로 뛰어 든 겁니다. “그랬어요. 그러고 보니까 옛 시 한 수가 생각나는구먼.” “그래 여보, 우리는 죽어서도 함께야. 그런데 나는 당신의 무덤만 보면 그만 기가 죽어 버려. 왜 내 무덤 보다 두 배나 더 큰 거야.” “어머, 참 당신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후손들이 저의 충절을 생각해 한 일인 걸요. 질투하지 마세요. 무덤이 작고 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험, 그리고 왜 당신의 사당은 진주와 장수 두 곳이나 있는 거야. 내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야. 내 참. 잘 난 마누라 때문에 어디 오금이 저려 살 수가 있나.” “여보, 미안해요. 물론 여자로서 사당을 가진 사람은 춘향이 하고 저 밖에는 없는 줄 알아요. 춘향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까 실존 인물로는 제가 유일한 여자지요.” “알겠어요, 여보.” 쪽! |
* 윗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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