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화무십일홍(하옥대감 김좌근)

道雨 2008. 10. 30. 15:05

 

 

 

화무십일홍(하옥대감)

조선의 여걸, 나합의 몰락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저는 애첩에게 정신을 빼앗겨 인생을 탕진한 김좌근으로 세상에서는 ‘하옥 대감’이라 불렀습니다. 하(夏) 나라의 걸왕(桀王)은 매희(妹喜)를 얻어 주지육림에 빠지더니 나라를 잃었고, 은(殷)의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를 얻어 광란의 밤을 지새우다 망했고, 절세의 미녀 포사(褒姒)를 웃기려고 ‘양치기 소년’처럼 봉화를 올린 유왕(幽王) 또한 망했는데, 저 역시 나합의 요염한 환심을 사려다가 파락호 대원군의 계략에 빠져 망했습니다.

아이고. 그런데 일이 차츰 묘하게 돌아가더니, ‘궁도령’이라 놀리며 가소롭게 생각했던 대원군이 글쎄 자기 아들 명복이를 기습적으로 임금으로 등극시켰습니다. 겨우 12살 짜리 얘를 말이여요. 미리 조대비와 짜고는 철종이 죽기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일시에 모든 권력이 안동 김씨에게서 대원군에게 몰리더니 저 역시 하루 아침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습니다. 나합은 떨어지는 세도에 앙칼을 부렸지만 모두가 공허한 메아리였어요.

그런데 더욱 소름끼치는 음모가 벌어지며 하루는 나합이 귓속말로 속삭였어요.

“영감, 지금 대원군이 대단헌 음모를 꾸미고 있은께 조심허셔야 쓰겠소.”

제기랄. 대원군은 영악하게도 자기 집에 자객을 불러들여 자기를 해치려 하는 연극을 꾸미더니 그 배후로 나를 주목하며 목을 조여 왔어요. 임금의 친아버지를 살해하려고 한 죄목이니 너무도 기가 막혔어요. 하지만 어떡해요. 대원군은 칼자루를 잡고 우리는 칼날에 섰는데요.

너무나 억울한 우리는 사랑방에 모여 앞날의 대책을 협의하였어요. 그랬더니 포졸들이 포졸들이 들이닥쳐 역적 모의를 했다며 모조리 굴비처럼 묶어 끌고갔어요. 나합이도 함께 끌려가 대원군 앞에 무릎을 끓었어요.

“그대는 전직이 기생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를 등에 엎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는데 무슨 권한으로 그런 짓을 했는가?”

 “오메, 그게 무신 말씸이게라. 저는 안동 김씨의 제사에도 참석치 못하는 가련한 첩입니다요. 그런 저가 으치께 역적모의에 가담할 수 있겠당게라우.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이니 듣기가 민망한게라우.”

역시 나합은 난 여자였습니다. 한 방을 얻어먹은 대원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그대를 합하라고 부르는데 어찌된 일인가?”

“호호, 지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지라. 긍대 나합은 정일품의 벼슬명이 아니고 ‘나주에서 올라온 조개(羅蛤)’라는 뜻으로 지를 욕하는 말로 알고 있느지라.”

“뭐라고. 역시 말로는 당할 수 없는 요망한 계집이구나. 여봐라, 저 조개를 당장 눈 앞에서 사라지도록 해라.”

오 하느님, 대원군은 내 마누라에게 인신공격에다 치사한 성희롱까지 서슴지 않아 저는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저는 이선희가 부른 ‘아 옛날이여’를 목이 터져라 불렀지요.

저는 할 수 없이 충남 아산에 있는 아들 김병기의 별장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했어요.

“영감, 인자 으치께 허께라우.”

“갑시다. 더 이상 주저하다간 대원군의 칼 날에 목이 달아날 지경이요.”아 아, 인생무상.

우리는 아산의 염치면의 대동리라는 마을에 정착했는데 하루 하루를 죽지 못해 살았지요. 결국 저는 죽어 이천에 있는 선영에 묻혔고, 나합은 꿔다 논 보리짝 아니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어 혼자서 살았지요.

옛날에는 나합의 버선 코에 이마를 조아리며 ‘합하 나리, 한 목숨을 다 받쳐 충성을 맹세합니다. 한번만 돌보아 주십시오.’ 라며 벼슬을 받아갔던 자들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들었던 ‘상갓집 개’의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정승 집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나 정작 정승이 죽으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다는 세태 말입니다.

꽃같이 예뻤던 나합의 얼굴도 파릿파릿 늙어만 가고, 설부화용같은 몸매도 몽땅 망가지더니 어느 날 싸늘하게 죽었어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사람이 없고, 냄새가 나니까 거적에 둘둘 말아 신털이 고개에 묻어 버렸어요. 그곳은 짚신의 흙을 털던 곳인데, 마치 ‘이 여자의 종말을 보라’는 듯이 대로변에 묻은 겁니다.

아, 나합의 외로움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무덤에는 억새풀과 나무가 자라고 그녀를 위해 제사를 지내 주는 사람도 없어요.

저번에 고제희라는 한량이 찾아와 술잔을 부어 놓아 오랜만에 취했다고 하더군요. 세상의 부귀영화는 모두 다 가지고 마음만 먹으면 안되는 일이 없었던 그녀였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생의 행복이란 많이 가지고 사는 데 있지 않고 많이 느끼고 사는데 있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허, 닭이 우네요. 요즘은 연말 특별 단속 기간이라 통행금지를 넘기면 쇳물이 절절 끓는 솥에 처박혀 죽도록 고생을 해야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