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빈민에겐 곡식 몇 알보다 먹고살 방도를 (서유구)

道雨 2010. 6. 7. 15:15

 

 

     빈민에겐 곡식 몇 알보다 먹고살 방도를 

근본적 진휼책을 편 서유구… 제방을 쌓아 농업을 일으키고 관료의 수탈을 막고 고구마를 보급하다

 

 

중국 제나라 환공이 곽나라의 옛터를 찾아가 노인들에게 곽나라가 망한 일을 물었다.
“곽나라는 무엇 때문에 망했는가?”
“착한 자를 옳게 여기고 악한 자를 미워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진 임금인데, 어찌하여 멸망하였단 말인가?”
“곽나라의 임금은 착한 자를 옳게 여겼으나 등용하지 못했고, 악한 자를 미워했으나 버리지 못했으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곽나라 임금의 잘못은 인재를 쓰고 버리는 것을 결단하지 못한 데 있던 것이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임금이 인재를 등용했지만 오늘날은 국민이 선거로 인물을 정한다. 인물의 선악을 논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 선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옛 고사가 오늘날에 주는 교훈일 것이다.

 

 

 

농업기술 전문가 양성 주장

»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조선 지식인 중 정약용·이규경과 함께 3대 박학(博學)으로 꼽히는 풍석(楓石) 서유구의 초상. 1838년 그의 나이 75살 때 그린 초상화다. 왼쪽 아래 책은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 이선희 제공

 

임금이나 국민은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책임이라면, 등용된 인재는 나랏일을 처리할 때 마치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길을 헤매는 것과 같이 경계하고 조심스럽게 행해야 한다. 자칫 길을 잘못 들면 전체 여정이 뒤엉켜버리므로 낯선 길에서 항상 주변에 물어보기를 부끄러워해선 안 될 일이다. 서유구가 살아서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받기를, 힘써 옛사람이 가르친 일을 따라 늙을 때까지 중단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경계함과 성실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서유구는 정약용과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꼽힌다. 하지만 인지도가 낮고 다만 그가 쓴 <임원경제지>가 교과서에 나와 있는 탓에, 그저 그 책의 저자로만 익숙할 뿐이다.

서유구와 비슷한 시기에 역시 백과사전류를 편찬한 이덕무도 학문과 독서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덕무는 서유구가 서양의 수차(水車)에 대해 설명한 글을 읽고서야 그동안 뒤얽혀 이해할 수 없던 부분까지 손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분명해졌다고 감탄했다.

 

서유구는 가학(家學)인 농학을 바탕으로 젊은 날부터 할아버지의 저술을 도왔고, 정치 풍파에 쓸려 낙향했을 때는 직접 농사를 지었다.

서유구는 실용이 저술에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여겨 25살에 편찬한 본인의 문집에 시작품을 싣지 않을 정도였다.

서유구는 임금과의 경연 자리에서, 공부란 모름지기 독서를 바탕으로 해야 하고, 독서의 요체는 오직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캐묻고 밝혀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서유구가 전라도 순창군수로 있을 때, 정조 임금이 농서와 농정에 대해 각 수령의 의견을 묻는 교지를 내렸다.

서유구는 근본 해결책을 찾아 고민하고 궁리했다. 백성에게 한두 번 죽을 먹이거나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농업을 일으키면서 기민을 구제할 방도를 마련코자 했다.

서유구가 제안한 방법은 기민을 모아 제방을 쌓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수리시설을 마련하고, 공사 기간과 참여 일수를 계산해 상을 내리고, 새로 조성된 토지에 대해 세금을 탕감해주는 방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진휼과 농업이 함께 힘을 받을 수 있었다. 서유구는 진휼과 농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문제라고 본 것이다.

흉년이 들면 잠시 세금을 탕감해 백성을 구제하는 대신 백성의 노역을 통해 농업을 위한 기반사업을 진행해 경제와 구휼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진정한 진휼책이라고 보았다.

또한 서유구는 농업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농업 전문가를 양성해 전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어려울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준비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벌금을 걷어 백성 위해 사용

 

서유구가 요즘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전라도관찰사에 부임한 것은 음력 4월이었다. 그해 전라도 전체가 재해를 입었는데 해안가의 고을이 특히 심했고 섬마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말이 되면 다음해 초에 시행할 진휼을 준비해야 했다.

서유구는 섬마을 백성이 겨울을 나기 어려워 여러 곳으로 흩어지지 않는지 뭍에서는 사정을 잘 알 수 없으므로 각 읍에 소속된 섬의 피해 상황을 알아보고 자세히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조사된 내역에 따라 다음해 1월에 진휼을 시행했다.

서유구가 섬 주민을 구휼하는 데 시각을 다투어 실시한 것은 섬사람들은 어업을 전업으로 하므로 어업이 시작되면 생계를 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기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한편, 서유구는 육지와 떨어져 아전들의 횡포가 더욱 심했던 폐단을 막아야 했다. 서유구는 진휼을 담당한 감색(監色)과 관속들은 섬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백성에게 절실한 곡식만을 섬에 보내 그곳 관리들이 기민에게 스스로 나눠주도록 했다.

 

현대 복지에서도 구제할 대상을 선정하는 게 바른 복지정책의 시작일 것이다. 서유구 역시 배고픈 백성을 진휼하는 데 잘되고 못되고는 진휼민을 선정하는 데 고르고 고르지 못한 것에 달렸다고 했다.

조선시대 진휼 대상은 조금이라도 의지해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제법 생계 바탕이 있는 양반이 진휼 때가 되면 수령을 찾아와 곡식을 요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진휼을 시행해야 하는 담당 아전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곡식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도 전체 백성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서유구는 기민 장부를 엄격하게 작성해 폐단을 최소화하는 것에서 진휼의 바른 정치를 시작하고자 했다.

 

진휼은 곡식을 마련하기 위해 배고픈 백성에게 또 다른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는 정책이었다.

서유구는 목민관을 맡는 곳마다 소를 도살하는 일을 엄금해 우금(牛禁)을 어길 때마다 벌금을 거둬들였다. 우금 벌금이 진휼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농업을 장려하는 것 중 개간이 중요했는데, 개간에는 소가 반드시 필요했다. 우금을 통해 농업을 권장하면서 해당 벌금을 다시 백성에게 환원하는 정책을 폈다.

또 다른 진휼 자금은 흉년 상황을 조사해 보고하는 담당 관원이 거짓으로 보고했을 때 거둬들이는 벌금이었다.

벌금을 정하고 벌금으로 백성을 구휼했던 서유구의 정책은 농사를 권장하는 원칙과 관원을 단속해 올바른 세정을 펼 수 있는 규제책이었고 진휼을 위한 재원 마련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서유구는 진휼을 위한 방책이 백성에게 다시 빚이 되는 폐해를 막고자 했다. 봄에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거둬들이는 환곡미를 백성이 빌리고 갚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무에 백성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없애려 했다.

 

 

거문고 들으며 평온하게 눈 감다

 

한편 서유구는 배고픈 백성에게 새로운 식량을 제공할 방법을 마련했는데, 고구마를 재배토록 하는 것이었다.

구황식물로 유명한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일반적으로 확산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작물 중 가장 뒤처진 셈이었다.

고구마는 기근을 구제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또 황충을 막고 가뭄을 줄일 수 있었다.

고구마는 조선 후기 기록에 따르면 순조 때를 전후해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온 뒤 바닷가 몇몇 고을에서만 전해졌다. 산간 백성은 여전히 고구마가 무슨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서유구는 전라도관찰사로 있으면서 급히 고구마 종자를 찾아오도록 명령했다. 구해온 고구마 종자를 도내 모든 고을에 배포했다.

하지만 종자만 나눠준다고 해서 고구마가 절로 크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농사 전문가가 필요함을 강조한 서유구였기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여러 농서를 정리해 고구마를 심고 가꾸는 방법이 담긴 <종저보>를 간행했다.

서유구는 그를 찾는 손님에게 고구마 맛을 보이곤 했는데 먹어본 사람은 떡 같은 것이 매우 맛있다고 했다.

 

서유구는 중앙관료로 있을 때도 농학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곡식 종자를 소개하고 재배하기를 제안했다. 서유구의 제안은 사실에 바탕해 종자별 파종 시기와 재배 방식이 자세했다.

 

서유구가 82살에 생을 마감하던 날은 식자층에게 회자될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살림 형편과 관직 생활의 편차가 크고, 처자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에게 80여 년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고 현실에 발 디디고 살던 서유구는 평생을 마무리하는 임종의 순간에, 시중 드는 자에게 곁에서 거문고를 타게 했다.

자신이 수십 년간 공력을 들여 집필한 <임원경제지>를 전해줄 후손도 없는 상황에서, 많진 않지만 남은 가산을 죽기 전에 모두 주위에 나눠주고 거문고를 들으면서 평온하게 잠들었고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선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