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백성이 힘겨워 쓰러지면 이미 늦은 것이다 (안정복)

道雨 2010. 6. 4. 14:06

 

 

 

              백성이 힘겨워 쓰러지면 이미 늦은 것이다 
성호 이익의 제자, 목천현 수령 안정복… 좋은 사례 수집하고 공부해 부역의 고단함 덜어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나무 심는 사람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문 해에는 항상 나뭇잎이 마르기 전에 뿌리에 물을 주어서 나무가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나무는 원래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나뭇잎이 마르는 일이 있다. 하지만 잎이 마른 것을 본 뒤에 물을 주면 때가 늦어 나무를 구하지 못하게 되므로 미리 뿌리를 충분히 적셔주는 것이었다.

 

 

“정치하는 데도 배움이 필요하다”

» 안정복의 스승 성호 이익의 초상(왼쪽)과 안정복이 지은 〈동사강목〉. 안정복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쳤다.

 

백성도 나무와 같다. 때맞춰 돌보지 않고 열매만을 거두다 보면 힘이 다해 잎이 마르고 나무가 쇠하게 된다. 말없는 백성이 힘겨워 쓰러지면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백성에게 절실한 것은 과도한 세금과 부역의 고단함이기에 나무뿌리에 물을 주듯 세금을 경감해주는 것이 정치의 큰 요체인 것이다.

 

그러나 세금도 여러 종류가 있고 종류별로 주된 세원이 있기 마련이다.

이익은 “전토(田土)가 있은 후에 조세(租稅)가 있는 것인데, 조세를 감하면 전토를 가진 자만이 혜택을 입게 된다”고 하여 조세 감면이 백성을 위한 정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익이 보기에 백성 중 전토를 가진 자는 1할이나 2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는 넓은 혜택을 베풀어줘도 아래에서는 굶주리는 고통을 모면할 길이 없으니,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전토가 있으면 부자이다. 저 부자들이야 조세를 감해주지 않더라도 아무 해로움이 없다. 전토를 위해 산에 불을 질러 개간하고 물을 막아 농토를 키워 개인의 이익에만 급급한 자들이 오히려 조세의 반감(半減)을 은근히 매일 바라고 있다.

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 소원을 들어주는 데 힘써, 단지 국고에 손실만을 초래하고 있으니, 장차 어이할 것인가?”

세월이 지나 현재를 살면서도 조선 후기 학자의 한탄이 새롭기만 하다.

 

안정복은 이익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익은 안정복의 성실한 학문 태도와 겸손함을 높이 평가했다.

안정복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가능하겠는가”라고 자문하며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둘이 아님을 강조했다. 안정복의 선정(善政)은 충청도 목천현을 맡으면서 빛을 발했다.

 

안정복이 목천에 부임한 뒤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보기 위해 수령을 보좌하는 기구인 향청(鄕廳)에 글을 내렸다.

“백성을 사랑하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단지 백성을 수탈해서 자신만 살찌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수령의 엄한 정명을 세운 뒤, 고을의 폐단이 무엇인지 자세히 보고하게 했다.

안정복이 새로 부임한 뒤 여러 통로를 통해 고을 형편을 살펴보니 크게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겨울에 얼음을 잘라 빙고(氷庫)에 보관하는 빙정(氷政)에 백성의 고단함이 큰 것이었다. 또 하나는 관청의 재정이 좋지 못해 수령이 바뀌는 등 고을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었다.


빙정은 얼음을 잘 자를 수 있는 추운 겨울날에 행해졌다. 목천현에서는 예로부터 8개 면을 동과 서로 나눠 4개 면씩 해마다 번갈아가며 빙역(氷役)을 하고 있었다. 한 해에는 서쪽 4개 면이 맡아서 하고 이듬해에는 동쪽 4개 면이 맡아서 하는 식이었다.

안정복이 부임한 해에는 동쪽 4개 면 차례였는데, 왕래해야 하는 거리를 계산해보니 40~50리나 되었다. 안정복은 추운 날 오가는 사이에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까 염려해 인근 고을에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 80명을 고용해 술과 음식을 후하게 먹이고 얼음을 뜨도록 시켰다. 과연 하루 해가 지기도 전에 얼음 뜨는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안정복은 빙정을 행하면서 한 가지 의혹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4개 면의 백성 수가 1천 명이 넘는 상황에서 힘든 빙역을 피하려는 사람도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면을 담당하는 면임(面任)이나 해당 아전이 받는 뇌물이 많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안정복은 앞서 시행한 빙정에서 필요한 인원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기에 1개 면이 1년씩 맡도록 새롭게 법식을 세웠다. 이후로 각 면은 8년에 한 번씩만 빙역이 돌아왔기 때문에 백성의 편리함이 컸고 면임이나 아전에게 뇌물을 바쳐야 하는 일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안정복이 실시한 위와 같은 방법은 이미 그보다 앞선 시기에 인천부사가 시행한 것이었다. 안정복은 인천부사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行狀)을 읽고 익혀서 그가 얼음 뜨는 일을 면제해주고 10년에 한 번씩만 돌아오게 한 선정을 알고 있었다. 여러 사례를 수집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해결해야 할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안정복은 적절한 시책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하는 데도 배움이 필요하다”는 명제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닌, 백성을 위한 정책과 방법의 활용이라는 좀더 깊고 영향이 큰 결과를 품는 구절이었던 셈이다.

 

 

재력과 권력을 한곳에 모아두지 말라

 

안정복이 부임한 목천현의 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다른 고을에서는 고마청(雇馬廳)을 두어 전임 수령을 보내고 신임 수령을 모셔오는 데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것에 비해 목천현에는 고마청이 설치된 적이 없었다. 매번 수령이 갈릴 때면 백성이 그 비용을 부담해 메웠음을 알고 안정복은 큰 고민에 빠졌다.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폐단을 구제할 텐데 작은 고을에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는 고을 재정을 꾸릴 자원을 마련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정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새롭게 작성해 보고하도록 하는 호적 관련 업무가 실시된 덕분이었다.

목천현 호적에 대한 수정과 정비 작업에 소요되는 재정을 일부 절약한 뒤 이를 전용함으로써 백성이 불시에 떠맡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안정복은 이때 마련한 재원을 방역전(防役錢)이라 했다. 이 돈이 백성을 힘들게 하는 잡다한 부역을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었다.

 

소망이 컸고 그 혜택이 분명했음에도 안정복은 스스로 “다만 민간에서 편리하게 여길지 모르겠다”는 말로 더욱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이와 같은 정책을 편다는 사실을 백성 한명 한명 모두 알 수 있게 하고 서로 상의해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각자 아뢰게 했다.

혹시 형식적인 고시가 될 것을 조심해 “만일 민심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하지는 않을 테니, 이런 뜻을 각 마을의 백성에게 알려서 한 사람도 이를 모르는 일이 없게 하라”고 재차 당부했다.

 

방역전을 관리할 방역소(防役所)는 관가에 설치되지 않았다. 만일 방역소를 관가에 설치한다면 관리할 재원의 수가 방대해서 거두고 내는 때에 백성을 도리어 번거롭게 하는 폐단이 생길 수 있었다. 또한 중간에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릴 경우, 감독하고 적발하기가 어려울 수 있었다.

재력이든 권력이든 한곳에 모두 모이면 이득을 보는 쪽은 다수보다는 일부 관리층이 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안정복은 방역소를 관가에 설치하지 않고 각 면과 동에 설치했다. 안정복은 이 돈은 그 근본이 민간에서 나온 것이니 민간에 맡겨서 거두고 내게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기만 하면…”

 

안정복이 목천현의 수령직을 다하고 집에서 지내던 중 하루는 친척이 그를 찾아왔다. 안정복이 떠난 뒤 목천현 내에 있는 복귀정(伏龜亭)에 ‘떠난 목민관을 그린다’는 뜻의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친척이 전했다.

목천에 있을 때 안정복은 손님을 맞아 함께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너무 적게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본래 안정복은 적게 먹는 편이었지만, 우스갯소리로 “잘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먹고 마시기만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인가. 그래서 적게 먹는다네”라고 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자신을 기리는 백성의 마음을 고맙게, 그리고 머쓱한 부끄러움으로 담아 안정복은 시를 지었다.

 

삼 년간이나 목천의 밥으로 배를 채우지 못하면서도(三年不飽木州飯)
재주 없이 먹기만 한다고 부끄럽게 여겼었는데(自分無才愧素餐)
우습게도 복귀정에 세워진 한 조각 돌(可笑龜亭一片石)
거기에다 내 이름 남겨 후인들에게 보이다니(陋名留與後人看)

 

<이선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