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실상사와 황산대첩비 답사 사진 (2010. 5. 30)

道雨 2010. 6. 7. 18:55

 

 

 

                  실상사와 황산대첩비 답사 사진 (2010. 5. 30)

 

 

벽송사에서 내려와 풍경소리(민박)가 있는 의평마을을 지나 큰길로 나와 남원(실상사)쪽 방향으로 향하면 곧 마천면 면소재지가 나온다.

마천면 소재지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가면 백무동으로 가게 된다. 백무동은 천왕봉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이다.

마천면 소재지에서 직진하여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이며, 신라 말기에 세워진 구산선문의 도량인 실상사가 나온다.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문을 연 사찰이다. 실상사에 딸린 암자인 약수암과 백장암의 문화재를 포함하여 국보 1점과 보물 11점 등, 단일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 증각대사(洪陟 證覺大師)가 창건하였는데, 홍척은 도의(道義)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한 뒤 남원으로 돌아와 이 절을 세우고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한 분이다. 2대조는 수철(秀徹) 화상이다.

 

 

* 실상사 입구에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에 해탈교라는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있는 돌장승이다.

원래 마주보고 있는 돌장승이 하나 더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고 한다.

 

 

* 다리를 건너면 또 두 개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있다. 수염이 길고, 이마에 불상처럼 백호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 이 돌장승들은 사찰 장승인데, 모두 벙거지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 발굴되어 수습된 기와들로 탑을 쌓았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실상사도 불타버린 뒤, 숙종 16년(1690)에 크게 중창되고, 순조 21년(1821)에도 중건되었으나, 고종 20년(1883)에 불타버리고, 이듬해에 다시 중건되었다. 

 

 

 

* 지리산 자락에 있기는 하지만, 실상사는 드물게도 평지사찰이다. 비교적 넓은 평지 공간을 지니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

목조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 불타버린 까닭에 오래된 전각은 없지만, 석조박물관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보물급 석조유물이 많다.

 

 

* 자그마한(?) 보광전 건물을 중심으로 정면에 커다란 석등이 한 개 서 있고, 거의 완전한 상태의 같은 형태인 삼층석탑 두 기가 양쪽으로 균형있게 배치되어 있다.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은 상륜부가 멸실되고 없었는데, 여기 실상사 석탑의 상륜부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석탑과 석등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보물 제37호.

 

 

* 이 석등은 형태가 완전하고 장중한 기품이 나는 우수한 작품으로서 절 창건 당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의 석등과 같은 고복형(간주석의 형태가 북모양)이고, 아래 위(기단부와 지붕돌)로 귀꽃이 큼직하다.

왼쪽의 것은 석등에 불을 밝힐 때 딛고 올라서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면에 계단처럼 새겨져 있다. 이와같은 장치는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불을 붙일 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돌계단까지 갖추고 있는 점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고 한다.

 

 

여기 사진에는 없지만, 보광전 우측편에 약사전이 있는데, 그 안에는 보물 제41호인 철조여래좌상(철로 만든 부처)이 있다. 철로 만든 오래된 불상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 불상은 실상산문 2대조인 수철스님이 4천근이나 되는 철을 들여 만든 2.7m높이의 거대한 불상이다.

실상사 창건 당시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거대한 철불로서,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고 한다. 

 

 

 

 

부도와 부도비들은 절의 한쪽 켠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안내판을 잘 보고 가야 된다.

 

 

* 2대조인 수철스님의 부도로서 '수철화상능가보월탑'이라고 한다. 보물 제33호. 

 

 

* 수철화상의 부도비로서 이수 중앙에 '능가보월탑비'라는전각이 음각되어 있다.

 

 

* 실상사를 창건한 홍척스님의부도로서, '증각대사응료탑'이라고 불리운다. 홍척스님이 입적하신 뒤 얼마되지 않는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여기사진에는 빠졌지만,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는 증각대사 부도비도 있는데, 일반적인 용머리 형상이 아닌 거북의 머리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다.

이수 앞면에 '응료탑비'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응료탑(홍척대사 부도)과 한 짝임을 알 수가 있다. 보물 제 39호이다.

 

이들 부도와 부도비가 있는 곳에서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누구의 부도인지 모르는 부도가 하나 더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미처 찾아보질 못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그냥 실상사 부도라고 하고, 보물 제36호라고 한다.

 

 

 

 

 

실상사 구경을 마치고 다시 남원 쪽으로 조금 더 가면 오른편으로 실상사의 부속 암자인 백장암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내비게이션과 함께 오래 전에 백장암 삼층석탑을 와서 본 기억을 좇아 올라가는데, 목적지에 도착해도 탑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예전에는 암자까지 가지 않고,  암자로 오르는길 중간의 호젓하고 고즈넉한 곳에 얕은 담장에 둘러 싸인 탑과 석등 및 부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 도난을 염려하여 암자 가까이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탑의 바로 뒤에 암자의 건물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 앞에 있는 탑이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이고, 뒤의 석등은 보물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 고즈넉한 곳에 있을 때는 아담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져 멋진 탑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이렇게 큰 건물의 공사현장 앞에 있으니 너무나 왜소하고, 위축된 느낌이 들어, 국보인 이 석탑의 가치마저도 낮게 여겨지는 듯 해서 안타깝다.

 

 

 

 

백장암에서 다시 내려와 가던 길로 계속 가면 인월이 나온다.

우리는 점심 시간이 지나 다들 허기가 진 탓에 인월에 있는 '남원추어탕'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미꾸라지 튀김과 함께 추어탕을 먹는데, 국물이 매우 진하다. 들깨를 넣어서 그런가 했는데, 서빙하는 어린 총각(주인 아들)의 말에 의하면 미꾸라지를 갈아 넣은 량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병옥 동기생이 산 추어탕 점심 먹고나서 마지막 답사지인 황산대첩비를 향해 출발...

 

 

 

황산대첩비는 군인 출신이라는 의미도 더하여 꼭 보았으면 하는 곳이었다. 안내하는 나도 책에서만 읽었고 아직 가보질 못한 곳이다. 근처에 온 덕분에 나도 처음 가보는 곳이다.

 

황산대첩비터는 사적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임에도 내비게이션에는 나와 있질 않았다. 이번에도 느끼는 바이지만, 문화재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의 가장 애로사항 중의 하나가 내비게이션에 없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내비게이션 지도정보에 웬만한 문화재는 위치 정보가 입력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황산대첩과 이성계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가가 몹시 혼란스러웠다. 왜구가 지리산 방면을 집중 공격해 들어오자, 나라에서는 이성계를 내세워 왜구 토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성계는 가는 곳마다 승전하기로 명성이 높았는데, 우왕 6년(1380) 운봉면 화수리의 황산 일대에서도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 싸움을 황산대첩이라 하며,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고려시대에 왜구와 싸워 승리한 2대 대첩으로 기록하고 있다.

황산대첩비는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인데,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옛날 태조가 승전했던 황산이 오래 전에 지명이 바뀌어 잊혀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조정에 건의해,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명에 의해, 임진왜란 이전인 선조 10년(1577)에 건립되었다.

 

 

 

 

* 황산대첩비각이 있는 주변을 정화하고 담장을 둘러 놓았는데, 주차 공간이 없어 불편하다.

 

 

* 파비각(破碑閣) : 일제에 의해 파괴된 황산대첩비 비석을 역사성을 기려 보존하고 있다.

 

** 태평양전쟁(2차세계대전)에서 패망을 눈앞에 둔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발악으로, 반시국적인 고적을 관할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 파괴하여도 좋다는 비밀문서를 내려보냈다. 

1943년 11월 14일 총독부에서 작성한 이 문서에 의하면, "철거할 물건 중 황산대첩비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 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중략)...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 당국에 일임하는 바임"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의 영예로서 400년 가까이 전승비로 남아 있던 황산대첩비는 폭파되었던 것이다.

 

1957년 파손된 귀부를 짜맞추고 비교적 온전한 이수는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이미 파손된 비석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에 검은 대리석으로 원형과 똑같은 비를 다시 만들어 세우고, 폭파된 비석들도 한데 모아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 일제 패망 직전 당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고적 파괴 목록

  고양 행주전승비,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공주 명남방멸종덕비, 공주 명위관임제비, 공주 망일사은비,

  아산 이순신신도비, 운봉 황산대첩비, 여수 타루비,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해남 이순신 명량대첩비,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연안 연성대첩비, 경흥 전보파호비, 회령 현충사비, 진주 촉석성충단비

 

 

 

 

* 군인 출신으로 고려 말의 황산대첩을 상상해보며 기념 사진 한 컷. 좌측이 필자, 우측은 동기인 하병옥. 

** 학생이나 군인들의 전적지 순례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을 포함시켜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것도 좋겠죠...이성계 장군의 기운도 받고... 

 

 

* 군인가족들도 반 군인이니 만큼, 역시 파비각 앞에서 한 컷. 왼쪽부터 박철웅 가족, 우리 집사람, 하병옥 가족... 

 

 

* 비석을 폭파시키는 것도 모자라, 비석 조각의 글씨까지도 읽지 못하도록 긁어놓은 일제의 만행을 목격할 수 있다.

** 이 비석이 온전하였다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을텐데, 완전히 파괴된 까닭에 이 터만 사적(제104호)으로 지정된 듯 싶다.

 

 

* 1957년에 새로 만들어 세운 황산대첩비와 비각.

귀부와 이수는 예전의 것을 수리하여 그대로 사용하였고, 비석은 새로 제작된 것이다. 

 

 

 

 

황산대첩비와 가까운 곳(왼쪽으로 50m 쯤 떨어져 있어 같은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에 어휘각(御諱閣)이 있다.

황산대첩 후 1년이 지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성계가 황산대첩의 승전을 기리고자 자신의 이름과 함께 황산전투에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이 바위에 새겨넣었는데, 일제는 이것도 정으로 쪼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 중앙의 두 기둥 사이로 보이는 바위가 이성계 본인과 휘하 장수들 12명(8원수, 4종사)의 이름을 새겨놓았던 곳인데, 일제에 의해 마멸되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이 어휘각은 태평양전쟁이 종료되기 수 개월 전인 1945년 1월 17일 새벽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황산대첩비가 있는 마을은 비전(碑殿)마을(내 생각에 아마 옛날에는 碑閣이 아닌 碑殿이라고 높여져 불리웠는 듯이 생각된다)이라고 하는데, 판소리 중 동편제의 본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홍록과 그의 아우인 명창 송광록이 이 마을 태생이며, 판소리의 여류 명창 박초월이 태어나고 소리를 가다듬은 곳이다.

 

판소리는 원래 열두 마당(마당은 작품 한 편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신재효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여섯 마당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부르는 명창의 출신지역, 창법, 조의 구성에 따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흔히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남원, 순창, 구례에 전승된 소리를 동편제, 서쪽 지역인 광주, 나주, 담양, 보성 등지에 내려온 소리를 서편제라 구분하였다는데, 지금은 소리의 특성에 따라 남성적인 소리를 동편제, 여성적인 소리를 서편제라고 구분한다고 한다.

 

 

 * 비전마을은 동편제의 본향인데, 가왕(歌王)으로 칭송되는 송홍록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우리가 갔을 때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국문학과 학생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답사를 왔다.

 

 

 

 

 

 

이로써 답사를 마치고 비전마을을 출발하여 부산의 집으로 돌아왔다.

차가 몹시 막힐 것이라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리산 IC로 들어가 88고속도로로 가서 고령분기점을 지나 다시 구마고속도로 들어가서 내려오니, 조금 돌아오기는 해도 막히는 곳을 피해서 그런지, 중간에 영산휴게소에서 한참을 쉬다 왔는데도 막히는 곳이 없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였다.

 

이로써 지리산자락으로 귀향한 친구의 집(풍경소리 민박)을 방문한 여행은 멋진 답사로써 마무리하게 되었다.

 

 

 

혹 지리산 칠선계곡 입구 풍경소리(민박)를 방문할 분들을 위해 참고삼아 이번 답사의 여정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풍경소리(민박) - 벽송사 - 서암정사 - 실상사 - 백장암 - 황산대첩비 - 송홍록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