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또 다른 면모

道雨 2011. 1. 25. 17:53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또 다른 면모

 

 

'선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조선의 임금, 임진왜란, 의주 피난, 당파 싸움, 그리고 여러 신하들(류성룡, 이항복, 이순신 등)이다.

당파 싸움으로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임금, 충성스런 이순신 장군에의 홀대 등, 판단력이 부족하고 소인배적인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많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선조도 임금으로서 매우 훌륭한 덕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선조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임금 중에서도 뛰어났다는 평을 듣는다. 

 

다음의 글은 『인생의 참스승 선비(이용범 지음)』에서 옮겨온 것이다.

 

 

 

***********************************************************************************************************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가릴 정도면 족하다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의 검소한 덕행은 여러 임금 중에서도 뛰어났다.

만년에 병이 났을 때 의원이 들어가 진찰하였는데, 임금은 푸른 무명으로 만든 요를 깔고, 덮고 있는 이불은 자줏빛 명주였다. 입은 옷 역시 굵은 명주였으며, 약을 마시는 그릇도 백자기에 무늬도 없는 것이었다.

 

선조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았으며 수라에 두 가지 고기를 올리지 않았다. 여러 부마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할 때도, 상 위에 차린 것은 물에 말은 밥 한 그릇과 마른 생선 조각, 조린 생강, 김치와 간장 뿐이었다.

 

어느 날 선조는 여러 부마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선조는 상 위를 가리키며 부마들에게 말했다. 

"남은 것을 모두 싸 가지고 가거라."

 

하루는 대간이 선조에게 아뢰었다.

"요즘 관리들이 입는 옷이 점점 사치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손수 속옷을 헤쳐 보이며 말했다.

"과인도 면포를 입는데 신하들의 의복이 나보다 나은 자가 있다는 말이냐?"

그후로 선비들의 사치한 풍습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루는 딸 정숙옹주가 뜰이 좁다고 탓하며 선조에게 아뢰었다.

"이웃집이 너무 가까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리고, 담이 얕아 이웃집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옆집을 사서 집을 넓힐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선조는 딸의 청을 거절하며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면 이웃집에서 들리지 않을 것이요, 처마를 얕게하면 이웃집에서도 방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뜰이 넓어야 하느냐, 사람의 거처는 무릎만 가릴 정도면 족한 것이니라."

그러면서 선조는 정숙옹주에게 굵은 발 두 벌을 하사하며 말했다.

"이 발을 쳐서 가리거라."

 

하루는 승지 강서(姜緖)가 동료들과 더불어 승정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자 술이 떨어지고 말았다. 술에 취한 강서가 동료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술이 떨어졌군. 내가 직접 구해보겠네."

강서는 술에 취한 김에 관복을 걸치고 선조가 있는 편전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강서가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술이 떨어졌으니 전하께 술을 내려주시라고 아뢰거라."

그러고는 다시 되돌아와 동료들에게 말했다.

"금방 술이 도착할 걸세."

선조는 강서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여 술을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기다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은 강서가 숙직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강서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마를 불렀다. 그러자 동료들이 그를 말렸다.

"아니, 공은 오늘 숙직인데 어째서 집으로 가는가?"

하지만 강서는 술에 취하여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내가 버릇없이 전하께 술을 내려달라고 청했으니 아마 나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곧 올라올 것이오. 그렇게 되면 내일 아침에 벼슬을 내놓아야 할 것이니, 아예 집에 들어가 어명을 기다리려고 하네."

강서가 집으로 돌아가자 예상했던 대로 사헌부에서 강서의 죄를 논하는 상소문이 임금에게 올라갔다. 선조는 상소를 읽어보고는 그의 관직을 즉시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이조에서는 다음날 승정원의 업무가시작될 때 이 사실을 알리고 강서를 파직시키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승정원에 사람들이 모이자 선조가 명하였다.

"어제 과인은 강서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니, 그는 이미 벌을 받았다. 그래서 오늘 새로이 승지에 임명하겠다."

관직을 빼앗고 다시 임명하니 선조는 결국 그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은 셈이 되었다.

 

 

 

 

*********************************************************************************************************

 

 

선조는 즉위 초년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읽지 않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없었다.

훈구 세력을 물리치고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이황과 이이 등을 극진히 예우하였다. 특히 향리에 은둔한 선비들을 등용하고, 각종 서적을 간행하여 널리 읽히도록 하였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 억울한 선비들의 죄를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임 등을 죽이고 이기와 윤원형을 삭훈(削勳)하였다. 

하지만 김효원과 심의겸 등을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이 당파싸움을 벌이면서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결국 이러한 정치상황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왜란이 끝난 뒤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거듭되고 당쟁이 더욱 격심해져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특히 임종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오히려 그 유언이 영창대군을 죽이는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