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전국 4공자(戰國 四公子)

道雨 2011. 3. 8. 17:06

 

 

 

       전국 4공자(戰國 四公子)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 당시에 중원 열국에서 대권을 잡고 식객을 키우며, 막강한 영향력으로 정세를 좌우했던 4공자를 말함.

이들은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이다.

 

        

                       제, 맹상군[齊·孟嘗君]

이름은 田文이다. 그의 부친은 전영(田?)으로 제나라 위왕(威王)의 아들로 재상을 지냈다.
전영에게는 4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전영의 첩 하나가 5월5일에 아들을 낳았다. 그 날 태어난 아이는 키가 지게문 높이까지 자라면 부모에게 해를 준다하여 전영이 내다 버리라고 하였으나 첩은 몰래 키웠다.

후에 이를 안 전영이 첩을 힐책하자, 어린 문은 「사람의 운명은 하늘로부터 받느냐 아니면 문지방으로부터 받는냐" 묻고는 문지방 문으로부터 받는다면 그 문을 높이면 될게 아니냐며 따질 정도로 영리했다.
후에 전영은 문을 후계자로 삼고 전영이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설 땅의 영주가 되니 이 사람이 맹상군이다.

孟嘗君이 설(薛)땅에 있으면서 가산을 기울여 빈객들을 정성껏 대우하자 천하의 인물들이 다 모여들어 빈객의 수가 수천에 이르고 맹상군의 명성도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秦나라 昭襄王은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맹상군을 진으로 초청했다. 맹상군은 식객을 인솔하고 진나라로 들어가 진왕을 만났다. 진왕은 즉시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위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맹상군은 진왕이 총애하는 첩에게 사람을 보내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첩은 맹상군이 진왕에게 바친 여우 겨드랑이의 힌털로 만든 호백구(狐白?)를 원했다. 호백구는 진품으로 하나밖에 없어 맹상군이 고민하자 식객 중의 하나가 개 흉내를 내어 창고속의 호백구를 훔쳐 돌아왔다.
호백구를 첩에게 바쳐 간신히 풀려나와 함곡관에 도착하였을 때, 진왕은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그를 뒤쫒게 하였다. 첫 닭이 울어야 문을 열게 되어 있어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의 기지로 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빈객들이 너나할것없이 맹상군을 따르게 되었다.

                                                                                                               - 열전 16권 맹상군열전 - 

                      

 

                       조 평원군[趙·平原君]

이름은 조승(趙勝)으로 조나라 여러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레나 재상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에 올랐다. 평원군은 첩중의 하나가 지나가는 절름발이를 보고 비웃었다하여 첩의 목을 베라는 절름발이의 청원을 들어준 후로 그의 휘하에 수천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왕은 초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평원군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평원군은 출발 전 지용을 겸비한 19명을 선발하였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고르지 못하였다.
문하 중에 모수라는 사람이 나섰다. 평원군은 그가 누구인지 몰라 물었더니 3년간이나 식객으로 있었다하여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속의 송곳과 같아 금새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라 하니 모수가 「오늘 저를 주머니속에 넣어주십시오. 만일 일찍 주머니속에 있게 하였더라면 송곳의 자루까지 나왔을 것입니다」라 말하며 끼어 줄것을 간청하여 20명을 채워 진나라로 동행케 했다.

진나라로 간 평원군은 모수의 기지로 진왕과 담판하여 조초동맹을 맺는 성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다. 그래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나왔다.

사마천은 평원군을 「혼탁한 세상에서 얻기드문 훌륭한 공자였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하였다」라 평하고 있다.
다른사람의 그릇된 말에 빠져 장평의 군사 40여 만명을 산채로 매장케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던 장편전투를 두고 한 말이다.

                                                                                                       - 열전 16권 평원군 우경열전 -

 

                           위, 신릉군[魏·信陵君]

이름은 無忌이며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안회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신릉군의 누이가 평원군에게 시집을 가 조나라 평원군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전국시대 사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있는 선비로서 빼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식객은 누구를 막론하고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대해 사방에서 식객들이 몰려와 3천명에 달하였다.

위나라에 숨어사는 후영(候嬴 : 候生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그는 가난하여 대량성의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신릉군이 선물을 보내어 모시려 했으나 후영은 받질 않았다. 하루는 연회를 열어 빈객이 많이 모이게 한 후 몸소 후생을 찾아가 마차 옆에 앉게 했으나 후생은 사양하지 않고 신릉군은 더욱 예를 갖추었고, 오는 중간에 후생이 마차를 기다리게 하고 푸준간에 있는 친구와 장시간 얘기를 주고 받아도 신릉군은 낯빛이 변하지 않고 공손하게 기다렸다.
후생은 술자리에서 공자에게 「오늘 저도 공자를 위해 일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는 한낱 문지기로서 공자께서 손수 수레를 끌고 와 저를 예를 갖춰 맞이하여 주셨고, 일부러 공자의 수레를 오랫동안 시장 한 가운데 세워두게 하여 공자의 눈치를 살폈더니 공자께서는 더욱 더 공손했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저를 소인이라고 하고 공자를 덕행이 잇으면서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분이라고 했을 것입니다.」라 말했다. 이리하여 후생은 상객이 되었다.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깨치고 다시 군사를 몰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조는 각국에 원군을 청했다. 먼저 신릉군과 사돈국인 위에게 청하여 위왕이 장군 진비를 시켜 군사 10만을 이끌고 조를 지원하라 했으나 진왕이 위협하여 위왕 군사가 관망하고 있을 때 신릉군은 빈객들을 이끌고 후생의 기지로 장군 진비의 첩을 이용해 부절을 훔쳐내어 조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진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했다.

위왕은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 왕명이라 속이고 군사를 지휘한 것을 알고 화를 내 신릉군은 조나라에서 10년을 머물었다. 진나라는 신릉군이 조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위를 공격하여 위왕은 사자를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도록 하였다. 신릉군은 돌아와 위 초 연 한 조의 5국 연합군을 이끌고 함곡관에서 진나라 군대를 무찔러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전쟁편 참조)

제후의 빈객들이 앞다투어 공자에게 병법을 올려 공자가 이를 이름을 붙였는데 오늘날 전하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다.

진나라 왕은 신릉군이 죽인 진비의 옛 빈객을 찾아내 신릉군을 위왕에게 모함토록 하자 위왕도 신릉군 대신에 다른사람을 장군으로 삼았다. 이에 신릉군은 빈객들과 밤낮으로 술로 4년간 보내다가 결국 술중독으로 죽고 말았다.
진나라는 신릉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위를 공격하여 20개 성을 함락시켰다.
사마천은 「신릉군의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결코 헛소문만은 아니었다」라 하여 이상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 열전 17권 위공자 열전 -

 

                      초, 춘신군[楚·春申君]

춘신군은 姓이 黃이고 이름이 헐(歇)이다.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 견문이 많고 변설에 뛰어났다. 국력이 쇠퇴해졌을 때 진나라 소왕을 설득시켜 곤경에 빠진 초나라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춘신군은 진나라에 태자 完과 함께 불모로 가 있었다. 초나라 왕이 병들자 태자와 가까운 진 재상 범수를 설득하고 태자를 변장시켜 태자를 진에서 빠져나가게 한 후 자신은 진왕에게 자수하여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범수의 진언으로 초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초나라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열왕이다. 왕은 황헐을 춘신군을 재상에 임명하고 춘신군에 봉하였다.
진나라가 조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조는 초에게 구원을 청하여 춘신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하게 하였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 되던 해에 진은 장양왕이 왕위에 올라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아 동주(東周)를 차지하고 계속하여 주변국들을 위협했다. 제후들이 합종하여 초나라 왕이 합종의 맹주가 되고 춘신군이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그만 싸움에 패해 달아났다. 그 일로 왕(고열왕)과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초나라 고열왕은 후계가 없어 춘신군이 걱정하자 조나라 이원(李園)이란 자가 누이를 춘신군에게 바쳐 잉태케 한 후에 누이와 일을 꾸며 춘신군이 왕에게 이원 누이를 추천토록 하였다.
몇달 후 그녀가 아들을 낳아 태자가 되고 이원 누이는 왕후가 되어 이원이 정사에 관여하게 되자. 이원은 춘신군과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춘신군을 죽이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신하 주영이란 자가 춘신군에게 이원을 죽일 것을 간언했으나 춘신군은 자신이 이원을 그토록 잘 대접해 주었는데 그럴리가 없다며 받아주질 않앗다.

결국 고열왕이 죽어 춘신군이 궁안으로 들어서자 미려 숨어있던 이원의 병사들이 춘신군의 목을 베고 그 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아이를 가진 뒤 초나라 왕에게 바쳐졌던 이원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라 유왕(幽王)이 되었다.
이 무렵 진나라는 여불위가 쫒겨나고 노애의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삼족이 몰살되는 변이 있었다.

사마천은 춘신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춘신군이 진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인가? 그러나 이원에게 당한 것은 늙어서 사리판단에 어두운 탓이다.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할 때에 결단을 못내리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는 춘신군을 두고 한 말인가?」

 

                                                                                                               

출처-사마천의 사기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