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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사회가 위임한 지위를 특별한 사익에 이용하는 이들
해마다 봄이면 서울 여의도 국회 주변 윤중로에선 한바탕 벚꽃의 향연이 벌어진다. 벚꽃의 아름다운 자태가 야간조명 아래 더욱 환상적으로 돋보여서 늦은 밤까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금이야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됐지만, 윤중로는 1980년대 말만 하더라도 국가주요시설 보안을 이유로 연중 통제하던 곳이었다. 신분증을 패용한 국회 직원이라면 모를까 윤중로를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 시절 국회에 근무하던 나는 맘만 먹으면 그야말로 개미새끼 한 마리 없는 윤중로에서 벚꽃의 향연을 온전히 호젓하게 즐길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규모의 개인 정원을 거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리케이드로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막은 덕이었다.
나중에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윤중로가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을 때 결국 나의 이런 호사는 끝났다. 특혜를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쉽고 떨떠름했다. 특권적 혜택이 얼마나 달콤한지는 누려본 자만이 안다.
민주화가 진전되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가 확장되면 모두가 행복해할까? 유감스럽게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어느 누구에게는 민주화로 인해 그동안 누렸던 특혜가 시민의 품으로 달아나버려 특권적 일상을 더는 구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시민통제의 반대급부로 특혜를 누려오던 이들은 “그 망할 놈의 민주화 때문에” 자신의 권리가 ‘박탈’되거나, 심지어 ‘위협’받고, ‘침해’당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특권이 다른 누군가의 권리행사를 유예시키고, 기회를 박탈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위계 중심의 사회, 절대복종의 권위주의 체제일수록 일반인들의 권리는 다반사로 유예되고 통제되는 반면, 특수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은 당연시 보장된다. 그러니 특권층이 민주화에 저항하고 결사반대하는 것은 나름 당연한 것이다.
변호사로부터 법인카드와 벤츠 승용차를 건네받아 제 것처럼 써서 사달이 벌어진 어느 검사는 지금 아주 억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바닥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일인데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쨌건 준 변호사나 받은 검사나 공히 그 비용이 결국 고달픈 의뢰인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는 무감할 것이다.
시민의 권리보호라는 공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가 위임한 직무상의 권한 또는 지위를 도리어 자신들만의 특별한 사익을 위해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도 유감스럽게도 정작 국민의 인권보호 측면은 뒷전으로 밀리고, 기관 간 권한 다툼으로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국민 처지에서는 자치경찰제를 도입해 경찰력을 분권화하는 것을 전제로 경찰 수사권 독립이 이뤄지지 않는 한, 수사권 조정은 고작해야 밥그릇 싸움, 잘해야 ‘또 하나의 검찰’을 만드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권한 조정이 아니라, 무소불위의 독점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이나 경찰, 교도관 등 법집행 공직자들은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자신들의 직무상의 권한이 축소될 수밖에 없고, 또 그것이 시대변화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찰은 ‘그놈의 인권’ 때문에 공무집행이 안 된다고 볼멘소릴 하고, 학교 현장에선 학생인권조례 한번 읽어 보지도 않은 채 “그 망할 놈의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다 무너진다”고 장탄식하는 한, 시민권은 하찮아진다.
직권은 어디까지나 시민권을 보장하라고 주권자가 위임한 직무상의 권한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래서 설혹 직권과 기본권이 충돌한다면 당연히 기본권이 우선한다는 원칙을 그들은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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