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세종의 '한글혁명', SNS에도 있다

道雨 2011. 12. 14. 18:16

 

 

 

    세종의 '한글혁명', SNS에도 있다

 

- 드라마에서 사실 확인보다 의미 읽을 수 있어야

 

역사드라마에는 늘 시비가 따라다닌다. 후손들이 명예훼손이라며 항의하고 소송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신숙주의 후손들이 KBS에서 방영된 <공주의 남자>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고 한다. 고령 신씨 후손 108명이 방송사와 작가를 상대로 3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작자나 나 같은 관전자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프레시안>에서 김헌식씨의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비평 글(세종이 '부처의 일생'을 한글로 펴낸 진짜 이유는…)을 읽었다. 세종이 한글로 처음 만든 것이 <석보상절>이 아니라 노래로 만든 <용비어천가>였다는 것, 그 목적이 백성들로 하여금 이씨왕조를 찬양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지적은 하나의 사실(fact)이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진실이다. 세종이 "정말 백성을 사랑했다면 백성과 지역 세력에게 자유를 주었어야 했다"라는 부분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과거의 사실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것보다 역사의 맥락과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물며 역사'드라마'에서 사실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역사드라마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에 집착하면 의미를 지나치게 된다. 작가나 제작자가 한글의 첫 작품이 <석보상절>이 아닌 <용비어천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고는 믿기 어렵다.

 

세종이 사대부들의 집요한 반대를 뿌리치고 한글을 만든 목적이 단순히 "조선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을 조선 통치 논리로 세뇌시키려 했다"라는 부분도 믿기 어렵다. <뿌리깊은 나무>는 역사적 사실을 따지는 비평보다는 오늘에 반추하여 그 의미를 음미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와 한글, 그리고 SNS

 

이 드라마에서 압권은 '밀본' 정기준이 조정에 침투한 조직원들에게 "글자는 권력이다"라고 일갈한 부분, 그리고 정체를 드러내고 세종과 장시간 토론한 장면이었다고 본다. 어느 시대에서나 문자는 계급지배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 "글자는 권력"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세종과의 토론에서는 당시 사대부들의 정서를 적절하게 반영했다. 더불어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게 되면 결국 왕을 그들이 직접 뽑겠다고 나올 것이고, 그 왕이 잘못하면 백성들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이냐고 세종에게 다그친 부분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맹점을 정확히 짚었다. 

 

세종 이후 조선에서 한글은 오늘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SNS(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에 비견할 만하다. 문자는 미디어다. 의미를 공유함으로써 소통을 매개해주는 미디어다. 말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지만 문자는 공을 들여 배워야 한다. 그래서 고대국가의 성립 이후 문자는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세종이 피지배계급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겠다고 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들의 반발과 드라마에서 정기준의 우려는 자연스럽다.

 

당시 백성들에게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보급한다는 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공유할 수 있는 문자 미디어를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 파격적이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왕권과 신권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역사로 시작한다. 여기서 한글의 제정은 문자(한자)를 독점하고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사대부들에게 계급지배가 흔들릴 수 있는 요인임에 분명하다. 세종이 노린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이 드라마의 포인트일 것이다.

 

그러면 SNS는 무엇인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SNS는 수평적(민주적)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길을 열었다. 그 전에 매스 미디어는 수직적(전제적) 일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이었다. 그 매스 미디어는 지배계급(자본)이 전유한 상태에서 계급지배의 절대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초국적)자본은 새로운 상품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하는 숙명을 거역하지 못해 퍼스널 컴퓨터를 시장에 내놓은 이후 군사용으로 사용하던 인터넷을 전 세계에 보급했고, 급기야 스마트 미디어까지 개발해냈다.

 

스마트 미디어, 즉 SNS는 대중에게 미디어를 손에 쥐어줌으로써 매스 미디어의 독점을 통한 계급지배에 균열을 내고 있다. 대중매체(mass media)에서 공중매체(public media)로의 전환이다. 김대중 정부의 양대 업적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햇볕정책과 초고속통신망 사업을 꼽는다. 초고속통신망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과거 매스 미디어 시대에는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던 대안매체를 우뚝 세워놓은 반석이었다. 여기에 초국적자본의 탐욕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SNS 시대를 열고야 말았다. <나는 꼼수다>는 대안매체의 전성시대를 예고한다.

 

변증법에 익숙하지 않은 많은 언론학자들이 이 변화를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걱정한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를 종편으로 극복하자고 '힘내라 종편'을 외친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위기가 아니다. 저널리즘의 중심이 신문을 비롯한 전통적 매스 미디어에서 인터넷 미디어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SNS와 더불어 시민 저널리즘과 집단지성의 참여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리고 있으니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SNS가 오늘의 정기준, 사대부, '밀본'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 김동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