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불평등은 공해 물질이다

道雨 2012. 2. 27. 12:03

 

 

          불평등은 공해 물질이다
 각종 사회·보건 지표 분석해 부자와 빈자가 고루 행복한 평등 사회의 장점 실증한 리처드 윌킨슨의 <평등이 답이다>

 

 

 

미국과 일본, 어느 나라가 더 살기 좋을까.

 

초등학생이나 옥신각신할 만한 질문 같지만, 슬쩍 한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몇 가지 지표를 보자.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7123달러이고, 일본은 3만3828달러다. 미국의 경제 수준이 확실히 높다.

 

사회·보건 지표는 일본이 좋다.

일본인은 미국인보다 평균 4년6개월을 더 오래 산다. 일본 비만 인구는 100명 가운데 2명이지만, 미국의 비만 인구는 31명이다. 인구 10만 명당 살인 건수는 일본이 5.2건, 미국은 64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는 항목에 대해 일본인 100명 가운데 43명이 그렇다라고 답한 반면, 미국인은 35.8명만 그렇다고 답했다.

한 달 중 며칠 동안 정신건강이 안 좋았느냐고 물어보니, 일본인은 9일을 꼽은 반면, 미국인은 26일이라고 답했다.

미국인들은 거의 매일 ‘안녕하지 못하시다’는 말이다. 이런 통계를 훑다 보면, 어느 사회가 더 살 만한지는 대략 선명해진다.

 

 

돈 많다고 사회문제 줄어들진 않아

 

질문은 이어진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더 잘사는 미국인이 왜 더 피곤하고 힘겹게 살고 있을까.

2009년 영국에서 출간된 <평등이 답이다>(원제: Spirit Level)는 소득불평등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소득 격차가 가장 크기로 악명이 높다. 반대로 일본은 소득 격차가 가장 적은 나라다. 소득 5분위 배율, 그러니까 소득 상위 20%의 수입을 하위 20%의 수입으로 나눈 비율을 보면, 미국이 8.55인 데 견줘 일본은 3.40 정도다.

 

저자인 리처드 윌킨슨 영국 노팅엄 의대 교수는 소득 2만달러가 넘는 23개 나라의 각종 사회·보건 지표를 분석했다.

여기서 분석 대상이 된 사회지표는 △사회 구성원 신뢰도 △기대수명 △유아사망률 △비만 △정신질환 △교육 점수 △10대 출산율 △살인율 △수감률 △사회적 이동 등이다.

 

분석 결과가 재미있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사회·보건 지표와 소득 사이에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돈이 많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줄어들진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회·보건 문제와 불평등 수준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따라서 미국보다 ‘가난한’ 일본이 더 살기 좋은 나라였던 이유도 다시 명확해진다. 일본이 미국보다 더 평등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문득 이 책의 내용이 왠지 낯설지 않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한겨레21>이 지난해 2월 표지이야기로 다룬 ‘생명 OTL- 골고루 건강하게 사는 길’(846호)에 소개했던 책이다. 이 책이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됐다.

 

방대한 통계 데이터를 분석해낸 책은 사실 과격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 부유한 국가에서는 더 이상 경제성장이 국민의 후생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저자인 윌킨슨 교수도 인정하듯, 1인당 소득이 2만달러 이하인 국가에서는 소득과 수명이 거의 정확하게 정비례했다.

이를테면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 수준인 짐바브웨는 평균수명이 고작 52살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1만6100달러인 칠레인은 평균 78살이었다.

 

국내에 번역된 책 24쪽을 보면,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명이 소득에 비례해 증가하는 경향이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부유한 나라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앞에서 예로 든 칠레인들은 미국인들에 비해 소득은 절반에 못 미치지만 수명은 길었다. 여기서 경제성장은 삶의 질과 상관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 책 때문에 우파들이 패닉에 빠졌다”


둘째, 책의 분석은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논쟁에도 함의를 던진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는 이른바 ‘747공약’(7%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내세워 당선됐다. 이제는 ‘공약’(空約)으로 판명된 이 공약이 이뤄졌다면 과연 한국에 ‘유토피아’가 도래했을까. 최소한, 국민의 삶의 질이 조금이라도 올라갔을까.

 

이 책에서 제시했듯,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달러를 넘는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의 사회지표는 참담한 수준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누리집을 보면, 2011년 한국의 1인당 GDP가 3만1700달러로 추산됐다. 그렇지만 소득 5분위 배율은 2007년 7.09에서 2010년 7.74로 올라, 오히려 소득 불평등이 심화했다.

 

셋째,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심지어 부자들도 부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이다.

평등한 사회에서 평균수명이 길고 범죄율이 낮은 것은 사실 당연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빈곤층의 인구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어떨까? 미국의 부자들은 일본의 부자들보다 삶의 질이 높지 않을까?

윌킨슨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책에 소개된 여러 통계 가운데 두 가지만 살펴보자.

 

<미국의학협회저널>의 자료를 보면, 미국인과 잉글랜드인이 교육 수준에 따라 당뇨병·고혈압·암·폐질환·심장질환 등을 앓는 비율을 보니, 모든 계층에 걸쳐 미국인들이 잉글랜드인보다 모든 질환에서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과 스웨덴을 비교해보니, 상대적으로 더 평등한 스웨덴의 국민이 모든 직업군에 걸쳐 영국인들보다 사망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윌킨슨 교수는 “불평등이란 사회 전반에 퍼지는 공해 물질처럼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새 책은 2009년 출판되자마자 영국에서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럴 법도 했다.

영국 역시 비교 대상이 된 23개국 가운데 네 번째로 불평등한 나라였다. 건강 및 사회 지표가 좋게 나올 턱이 없었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이끈 우파그룹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Spirit Level의 착각>이라는 책이 아예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반응이 격했다는 것은 결국 이 책의 파괴력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가디언>은 “영국의 우파들이 이 책 때문에 패닉에 빠졌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래도 영국의 우파는 새 책을 열심히 읽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검색해보니, 정세균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해 설에 이 책의 영어 원서를 읽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의 성장론자들이 새 책에 대해 영국 우파들 같은 반응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