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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에 밝혀진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 사진의 진실

道雨 2016. 5. 6. 11:20

 

 

 

70년 만에 밝혀진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 사진의 진실

베스트셀러 작가 "아버지가 혼동한 것 같다" 종전 태도 바꿔

 

 

 

 

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선에서 일본이 항복하기 6개월 전인 1945년 2월 23일, 이오지마(유황도)에서 일본군을 제압한 미 해병대 병사들 중 6명이, 그 섬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미국 국기)를 꽂았다.

AP통신 사진기자 조오 로젠털이 찍은 이 장면은, 해병대의 용맹성과 조국애를 상징하는 대형 동상으로 제작되어, 미국 수도 워싱턴 외각에 세워져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 6명 중 3명은 이오지마에서 전사했고, 나머지 3명만 전쟁이 끝난 후 살아서 귀국했다. 생존자 3명 중 하나인 잔 브래들리는 영웅대접을 받으며 40년을 더 살다가 1994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는 2000년에 <우리 아버지들의 국기(Flags of Our Fathers)>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곧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아버지의깃발 ]

제임스 브래들리는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얻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사진이 찍힌 지 거의 70년이 지난 2014년, 미국 네브라스카주 수도 오마하에서 발행되는 신문 <오마하 월드 헤랄드>가 특종기사를 보도했다.

미국의 한 무명 역사학자와 아마추어 역사연구가가 공동으로 밝혀낸 사실을 실은 것이다.

 

내용인즉,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사진의 주인공 6명 중 한 명이 잔 브래들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본 두 사람은, 사진 속 6명이 입은 해병대 군복이 모두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잔 브래들리는 해병이 아니라 해군 위생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 브래들리는 성조기 게양에 참여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후랭클린 슬리라는 해병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두 역사광은 미국 해병대에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해병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브래들리의 아들도 "그건 말도 안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진실은 영원히 감춰지는듯 했다. 그런데 미국 최대 박물관의 케이블 방송인 스밋쏘니안 채널(Smithsonian Channel)이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다가 잔 브래들리 문제를 거론하자, 해병대도 이번엔 정식으로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임스 브래들리는 종전의 태도를 바꾸어 "그 유명한 사진이 찍히기 전 우리 아버지가 다른 국기 게양에 참여했는데, 아버지가 그것과 혼동한 것 같다"고 좀 애매하게 말했다. 브래들리 부자가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도 숨겼는지, 아버지 브래들리가 정말로 착각을 한 것인지는 해병대 자체 조사 결과를 보면 곧 알게 될 것이다.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 사진은 퓰리처 보도사진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이 사진을 찍기 전 또다른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국기게양 사진을 찍었다(아래 사진).

기사 관련 사진
유명하지 않은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 사진(1945). 아마추어가 찍은 이 사진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 구글 검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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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현장에 없었던 로젠탈 기자가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해병대원 6명에게 성조기 올리는 장면을 연출하여 멋있게 찍었다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찍은 사진은 생동감이 없고 멋이 없지만,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은 동영상의 정지 화면 같이 역동적이다.

그러나 로젠탈 기자는 자기 사진이 곁코 연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2006년 94세로 사망했다.

이로써 유명한 이오지마 성조기 게양 사진이 연출이냐, 연출이 아니냐 하는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영원히 묻혔다.

그러나 해군 위생병 잔 브래들리가 그 유명한 사진에 들어있느냐, 아니냐 하는 미스터리는 거의 풀린 듯 하다.

 

 

 

 

 

 

[ 조화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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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어느 감독의 두 편의 영화


우리들 세대에게는 서부극의 명배우로 깊이 각인되어 있는 클린트이스트우드 감독이 하나의 전쟁을 배경으로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이 두 편을 연속해서 보게 되었고, 또 전쟁영화인데도 뭔가 남다른 감동을 주기에 여기에 소개해 본다.


지난 토요일 저녁, TV에서 두 편의 영화를 감상했다.

집사람이 일을 보러 나가 몇 시간동안 혼자 집에 있게 되었는데, 모처럼 여유가 있는 주말 시간이어서 비디오를 빌려볼까 하다가, 비디오를 안 본지가 오래되어 비디오가 제대로 작동할 지 염려가 되었다.

집에 있는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찾아 시험 삼아 돌렸는데 화면은 제대로 나온다. 그런데 아차, 비디오가 기계에 물려서 빠져나오지를 않는다.

이리저리 비디오 꺼냄 스위치를 자꾸만 반복해서 누르고, 다시 또 여러 번 조작해도 영 나오지를 않는다. 손으로 꺼내려고 해도 나오지를 않으니, 비디오 빌려보는 것은 포기해야만 하였다.


비디오 빌려보는 것은 포기하고, 방송에서 하는 영화나 봐야겠다고 TV영화채널을 돌렸는데, 마침 한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영화가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였다.


이오지마는 우리말로 유황도(硫黃島)라고 하는데, 태평양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그 전투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이오지마의 최고지휘관(중장)과 말단 병사의 기록(편지)을 회상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두 사람은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기록을 남겼는데, 전쟁 이전의 평화롭던 시절과 전쟁 중의 참혹한 참상, 그리고 내면의 갈등을 전하고 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일본군의 상황을 기록하고, 전투의 과정을 기록해놓은 영화이기에, 국민 정서를 고려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관에서 개봉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름대로 재미있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어서 또 한편의 전쟁영화가 방송된다.

제목은 ‘아버지의 깃발’이었다. 전쟁영화인데 제목이 좀 특이하다 싶어 보고 있으니, 이것도 역시 이오지마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영이 바뀌어 이번에는 미군의 함정에서 수병들이 나누는 대화로 영화가 시작되고 있다. 


허 ! 이럴 수가, 조금 전에 이오지마 전투 영화를 봤는데, 또 이오지마 전투라니...

동일한 전투에 이번에는 미군 측의 입장에서 본 영화라...

흥미가 생긴다. 그리고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제목이 뭔가 사연을 가진 듯하여 이어서 보게 되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미군들에게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 미군 수병들도 굉장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처절한 전투장면에서 미군의 피해가 엄청났다는 것을 보여주며, 최초로 점령한 작은 고지에 성조기 깃발을 꽂는 사진으로 인해,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들, 그들의 전쟁비용 모금활동에 대한 갈등과 번뇌 등을 그리고 있으며, 결국 자랑스럽지 못한 깃발(사진)이기에 죽을 때 까지도 자식에게 말하지 않았던 아버지였던 것이다.


영화가 다 끝나고 화면이 올라가는데 이 영화의 감독도 클린트이스트우드였다.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두 편의 영화를 함께 본 것이 행운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의 영화에 비해서는 박진감이 조금 떨어지고 지루한 감이 없진 않지만,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앞의 영화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었다.


방송에서 전쟁영화 스페셜로 보여준 것이었는데, 내가 운이 좋게도 이것을 모두 본 것이었다.

두 영화가 모두 말단 병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 닥쳐올 두려움에 떨었으며, 전투중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전쟁보다는 소박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되며, 내가 본 것처럼 두 편을 이어서 보면 더욱 감동을 받을 것 같다.

 

 

 


** 이오지마의 깃발


이오지마 전투의 상징이 된 성조기 깃발을 꽂는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 참고로 인터넷에서 이오지마 전투에 대해 뽑아 보았다.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일본어: 硫黄島の戦い, Battle of Iwo Jima,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지마(유황도)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생긴 전투를 말한다.


@ 개요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에, 대일본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단,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합계). 다만, 피해율은 약 40%이다.



@ 배경

 

이오지마는 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이오지마'(硫黄島, 유황도)로 불렸다.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물은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치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했으며, 11월부터는 B-29에 의한 일본 본토까지의 장거리 폭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로 향하는 B-29를 무선으로 보고하는 조기 경계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본토로 침입하는 미군의 침투를 미리 대비하고 있는 상황이 많이 발생해, 큰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벌어졌다.

또한, 마리아나 제도와 일본 본토사이는 상당한 장거리이기 때문에, 호위 전투기가 수반하지 못하고, 일본 상공에서 피격받거나 고장난 B-29가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역으로 일본군 폭격기는 이오지마를 경유해 미군의 마리아나 제도의 기지를 급습하면서, 지상의 B-29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특히 12월에는 11기의 B-29가 폭격당해 손실되었다.


미국 태평양 통합 작전 본부는 일본군 항공기 공격기지의 격멸, 일본군 조기 경보 시스템의 파괴, 이오지마를 피하기 위해 손실되는 작전 능률, 손상 폭격기의 중간 착륙장의 확보, 장거리 호위 전투기 기지의 확보를 위해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