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신라왕릉의 오랜 미스터리, 황복사터 동쪽 ‘석재’ 많은 고분터. 알고보니 미완성 왕릉터

道雨 2017. 2. 9. 10:34




경주 신라왕릉의 오랜 미스터리 하나가 풀렸다 




황복사터 동쪽 ‘석재’ 많은 고분터, 알고보니 미완성 왕릉터
8세기 효성왕 무덤 쓰려다 중단된 이후부터 석재는 재활용
면석·갑석·석조부재 다수 출토…왕릉 축조과정도 처음 밝혀져


구황동 왕릉 추정터 유적 발굴현장 전경.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중간에 수레바퀴 자국이 난 도로터가 보이고 아래편에 건물, 담장터와 석물들 모습이 보인다.
구황동 왕릉 추정터 유적 발굴현장 전경.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중간에 수레바퀴 자국이 난 도로터가 보이고 아래편에 건물, 담장터와 석물들 모습이 보인다.




경주 신라 왕릉에 얽힌 오래된 미스테리 하나가 마침내 풀렸다.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터 동쪽 보문들에 널브러진 무덤 석재들과 함께 전해져온 7~8세기께의 고분터 추정 유적이 베일을 벗었다.
그동안 황복사의 목탑터인지 왕릉인지, 왕릉이라면 누구의 것인지를 놓고 수십여년간 학계의 설왕설래가 이어져온 이 유적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거대 왕릉으로 쓰려고 만들다가 중단되어 미완성인채 버려진 가릉(假陵)으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이 무덤은 통일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초, 5년만 재위하고 병으로 숨진 뒤 화장된 효성왕(재위 735~742)이 원래 주인일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해 더욱 주목된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구황동 황복사터 동쪽 고분추정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효성왕의 무덤으로 조성하려다 중단한 것으로 추정되는 왕릉의 석재들과, 이후 무덤자리에 조성된 2기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담장, 배수로, 도로 등의 유적을 확인했으며, 막새, 기와, 전돌, 등잔 등 유물 300여점을 수습했다고 9일 밝혔다.

연구원 쪽은 논란이 제기되어온 무덤 석재들을 발굴해 분석한 결과, 이 석재에 십이지신상 등을 새기기 위해 다듬은 특유의 조형 방식이 성덕왕과 경덕왕 재위 사이의 8세기초로 보여, 효성왕의 무덤용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 석재가 남아 널려있던 자리는 원래 왕릉터가 아니라, 이 석재를 재활용해 지은 후대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이며, 유적 북동쪽이 왕릉 자리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연구원에 따르면, 기존에 논두렁 등에 일부 남아있던 석재와 발굴로 새로 드러난 석재를 조사한 결과,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 이후부터 왕릉에 쓰인 석재와 동일한 형식이고, 크기나 제작 방식도 기존 왕릉과 거의 같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원래 무덤을 쓰려했던 이는 효성왕이 유력하다고 조사단은 보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효성왕은 그의 유언대로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해 동해에 뿌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5년간의 짧은 재위기간을 고려해 보면, 병석에 있을 때 묻힐 능침을 준비하다, 유언으로 화장을 택하자, 짓던 무덤과 석물을 방치하게 됐고, 후대 자연스럽게 황복사터 금당터의 면석과 능지탑의 탱석, 현재 발굴터의 건물터에 재활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일부 석재들 가운데 십이지신상 탱석은 원석에서 십이지신상을 떼어내 황복사터의 기단과 낭산 서쪽편 능지탑 탱석에 쓰였고, 면석, 지대석, 갑석 등은 무덤자리 부근의 후대 건물터에 재활용된 흔적이 뚜렷이드러난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조사단 쪽은 “발굴 현장에서는 미완성된 장대석 석재 등이 다수 확인돼, 완성된 왕릉이 조영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또 전체적인 층위와 해발고도를 감안하면 완성된 왕릉이 북천의 홍수로 파괴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번 조사를 통해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7세기 이후 신라 왕릉의 축조과정도 새롭게 드러난 것도 획기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무덤을 싸는 면석은 암수 얼개의 요철구조로 서로 밀착시켜 흙에 의해 밀려내려가지 않도록 하는 얼개를 한 것으로 드러났고, 각종 화강암 석물들을 산지에서 먼저 일차로 다듬은 뒤 무덤 자리로 가져와 2차 가공하고, 떼어낸 파편들은 다시 무덤자리 진입로의 도로를 다지는 부재로 쓰는 등 치밀한 공정이 진행됐다는 물증들이 확인됐다.
또 고분 추정터에서 새로이 드러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는, 신라 경주 6부중 하나인 습피부로 추정되는 ‘習部(습부)’ 명문이 적힌 기와가 수십여점이나 나와, 당시 습피부를 관할하는 등의 특수한 용도로 쓰인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81925.html?_fr=mt2#csidx8561dba8064ccd0829800644f5eadf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