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명옥헌 원림, ‘인위’를 비워 자연을 채우다

道雨 2015. 8. 26. 11:56

 

 

 

명옥헌 원림, ‘인위’를 비워 자연을 채우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담양의 정자와 원림을 둘로 나누어 소개하면서, 명옥헌을 2편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비록 원형이 부서져버리고 말았지만, 소쇄원에 비길 만한 조선시대 원림터이기 때문”이었다. 답사 중 시간에 쫓기면 송강정, 면앙정을 건너뛰고 명옥헌으로 직행했다.

 

유홍준 교수는 1989년 처음 그곳을 찾아갔다.
‘친구’ 황지우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다시 명옥헌을 찾는다.
그건 오로지 원림의 풍광이 그리워서였다

 

명옥헌은 흙투성이 농부에게도 자리를 내주는 그런 곳이었다.
자연이란 화폭에 두 개의 점을 찍어 그런 풍광을 이뤘다.
손길이 아니라 안목이 섬세했다

 

그러나 명옥헌 원림(苑林)에 대한 소개는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위쪽에 정자와 서재를 겸한 건물을 지은 단조로운 구성”, “연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장엄하게 포치하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야를 끌어들임으로써, 더없이 시원한 공간을 창출한 뛰어난 조원의 원림”이라는 것이 고작이다.

 

반면 원림 옆 황지우 시인의 집필실에 대해선 길고 까탈스런 소견을 밝힌다. 가령 이런 식이다.

“명옥헌에 마련한 자신의 작업실 유리창을 통유리로 끼워 넣고, 주변을 끝까지 점유하려는 모습도 올바른 작태는 아닌 것이다.”

물론 그건 비난이 아니라 질투라는 걸 답사기를 읽어 그의 문법에 익숙한 독자들은 안다.

‘뭔 팔자가 그리도 좋아 그런 곳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원림을 독식한담?’ 눈 밝은 독자들을 명옥헌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유 교수는 1989년 처음 그곳을 찾아갔다. ‘친구’ 황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다시 명옥헌을 찾는다. 그건 오로지 원림의 풍광이 그리워서였다.

소쇄원은 의관 정제한 선비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라면, 명옥헌은 흙투성이 농부에게도 자리를 내주는 그런 곳이었다.

소쇄원엔 그만큼 섬세하게 인공이 가해졌고, 명옥헌은 자연이란 화폭에 두 개의 점을 찍어 그런 풍광을 이뤘다. 손길이 아니라 안목이 섬세했다.

 

시인의 집필실은 없어졌다. 동쪽의 예닐곱 채 민가를 담양군에서 사들여 철거했다. 딱히 떠날 곳이 없는 정순자 할머니 집만 남았다.

 

담양에 정자가 많은 까닭은 경승지도 많고 재력이 넉넉한 사대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반인륜과 패륜이 자행되는 중앙 정치에 등을 진 선비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기묘사화에 질려버린 양산보가 지은 것이 소쇄원이었고, 식영정은 낙향한 장인 임억령을 위해 서하당 김성원이 지었고, 김윤제 역시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환벽정을 지었다.

황 시인도 사실은 1980년대의 처참한 상황에 낙담해 내려왔다는데, 명옥헌은 그처럼 가난해 아무도 찾지 않던 곳이었다. 유 교수도 모를 정도였다.

 

멀리 유라시아 서단에 가난한 화가가 있었다. 한 뼘의 정원도 소유한 적 없었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엔 ‘정원은 나를 꿈꾸게 한다’고 쓰곤 했다. 정치적인 소용돌이와는 무관했지만, 마음에 깊은 병이 있었다. 언젠가는 친구와 다투고는 귀를 잘라 버렸고, 종국엔 자살로 이승의 삶을 마감한 이였다. 그런 그의 기억 속에 떠나지 않던 게 네덜란드 시골 목사였던 아버지의 목사관 뒤뜰이었다.

 

그는 파리에 머물 때도 몽마르트르 언덕 위의 작은 채마밭에서 평안을 얻었고, 프로방스의 아를에선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2층집을 빌려 살았다. 발작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있을 때나, 생레미 요양소에 있을 때에도 담장 안 조그만 정원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곳에서 회랑과 뜰, 오래된 분수대, 민들레꽃과 늙은 나뭇등걸, 돌벤치, 붓꽃, 가지가 잘려나간 소나무, 아이비, 심지어 시든 장미 등을 따듯하게 그렸다. 이런 편지를 동생에게 쓰기도 했다. “삶이 다른 데가 아닌 정원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그다지 슬프지 않을 거야.” “정원에서 그린 내 작품을 보면 내가 이곳에서 그렇게 우울하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 거야.” 마지막 2개월을 보낸 프랑스 북부의 오베르 마을에서의 생활은 화가로서 그에게 가장 풍요로웠다. 무려 채색화 75점과 드로잉 50점을 남겼다. 정원에선 언제나 의기양양했던 빈센트 반 고흐다.

 

정(庭)은 건축물 아래부터 대문에 이르기까지의 공간(뜰), 원(園)은 인위적으로 조영해 관상 가치가 있는 공간을 뜻한다. 정원(庭園)이란 관상용 수목과 연못 등을 조성한 담으로 둘러싸인 뜰을 말한다. 원림(園林)도 있는데, 원(園)은 동산이요 림(林)은 숲이니, 원림은 인위적으로 조성한 동산과 숲이다.

또 원림(苑林)이란 것도 있다. 원(苑)이란 동물까지도 사는 곳이니, 일제가 조선의 정궁을 동식물원과 놀이터로 바꿔버린 창경원이 그런 경우다. 원림(苑林)이란 자연 속에 인공의 정자나 연못을 슬쩍 끼워 넣은 정원(庭苑)이 되는 셈이다. 창덕궁 후원, 소쇄원, 보길도 윤선도 원림 그리고 명옥헌 원림 등이 그런 곳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명옥헌 원림은 특별하다. 다름 아니라, 없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공이라곤 평범한 정자 하나와 크고 작은 연못 2개가 전부다.

정자는 아랫못과 표고차 10m 높이의 기슭에 두어, 목백일홍 숲 위로 지붕선만 간신히 드러난다. 산기슭과 계류의 선을 따라 자연스레 조성한 탓에, 연못 물 밖으로 살짝 드러난 석축을 보고서야 인공임을 알 수 있다. 윗못은 깔끔한 방지원도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목욕탕 욕조의 반 정도여서 연못이라 할 것도 아니다.

 

웬만한 정원에는 꼭 조성하는 삼신산도 없고 무산십이봉 괴석도 없고, 대나무나 매화도 없고, 연못엔 흔한 연꽃 한 송이 없이 수초뿐이다. 정자가 앉은 자리도 북향이고, 흙무덤 같은 동산에 시야가 가려 있다. 계류가 흐르긴 하나 농수로 수준이다.

이름있는 정자엔 많으면 수십 개씩 걸려 있는 기문, 시, 현판이 이곳엔 명옥헌, 삼고라는 현판 두 개와 정홍명의 ‘명옥헌기’뿐이다. 전하는 시라도 있을 텐데, 남간 유동연의 연작시 5편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황 시인이 남몰래 터를 잡았고, 안목도 문화재급인 유 교수가 그런 황 시인을 질투할 정도이니, 명옥헌엔 특별한 게 있어야 한다.

 

요즘 명옥헌 주변은 자미화(목백일홍) 자주색 꽃구름에 잠겨 있다. 자미화는 보통 7월말 8월초에 절정에 이르지만, 그곳 자미화는 워낙 노령이어서 만개 시기가 8월 중순에서 8월 말이다. 그 한철 명옥헌 원림은 별유천지가 된다.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출사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지만, 명옥헌 원림의 주인공은 목백일홍이 아니다.

 

설계자의 구상 속엔 애초 목백일홍 숲이 없었다. 가장 오래된 것이 수령 150년 안팎이고, 20그루 정도가 100살을 넘겼다. 나머지 100여 그루는 20~30년생이다. 담양군이 후일 심은 것들이다. 소나무도 100~150년생이다. 장계 오이정에 의해 원림이 조성된 것은 17세기 중반이었으니, 그때 그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명옥헌기’나 남간의 연작시에도 목백일홍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자와 연못 사이에 지금처럼 나무를 빼곡히 심는 경우도 없다. 정자에서 연못을 관상하기 위해서라도 대여섯 그루는 쳐내야 한다. 애초 목백일홍은 명옥헌 원림에서 주인이 아니라 객이었던 것이다.

 

조성자인 오이경의 아들 오기석과 동세대였던 남간은 연작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부럽구나 그대여, 나 먼저 선경을 독차지했네/ 한 줄기 물줄기라도 함께 하길 허락하시게나.”(새벽편)

남간도 유 교수처럼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주인장의 안목에 대한 존경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빈산에 달빛 가득하니 푸른 산 빛이 보일 듯하고/ 상쾌한 기운은 어리석음 물리치고도 남으니/ 고요히 비운 마음 주인장의 깨달음이어라.”

 

 

무위자연, 인위를 비워 자연 스스로 이루게 하라.

 

문외한이 그 덕성을 옮기는 것은 결례다. 그저 명옥헌 원림은 사람이 조영은 했으되 사람이 없고, 인공을 들이긴 했으되 자연이 되어 버렸다고, 사족만 달 수밖에 없다.

배롱나무 숲 또한 자연이 싹틔워 세월이 기른 것이었다.

 

명옥헌은 다른 정자와 달리 마을 바로 곁에 있다. 20~30가구가 올망졸망 모여 있는 후산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서, 10m 높이의 둔덕에 올라서면 돌연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별세계는 인간세계의 이웃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더욱 자연스럽다. 가까이 있어 친근하고, 낮아서 그윽하고, 자연 그대로여서 평안하다. 인위와 무위의 분별조차 넘어선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