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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道雨 2018. 1. 3. 17:21



*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87'

 1987년을 배경으로 민주화운동(6월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연말연시기간에 두 번 봤다.

12월 29일(금)에는 해운대에서 노무현재단 사람들과 단체관람, 12월 31일(일) 밤에는 정읍에서 집사람과 처제 및 처조카들과 함께 6명이 함께 관람했다.

(이날 오후에는 집사람, 장모님과 함께 '신과 함께-죄와 벌'도 관람하였음)

영화 촬영 장소 중의 한 곳인 해운정사가 현재 내가 사는 동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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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이유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강기석 | 2018-01-04 12:48:19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내가 왜 뜬금없이 새해 벽두에 김중배 선생 모시고 막걸리 먹으러 가는 꿈을 꾸었는지, 한밤중에 깨어 느닷없이 깨달았다. 내가 비록 가끔 모셔서 좋은 말씀도 듣고 술도 한 잔 모시기도 하지만, 1년은커녕 평생 한 번도 꿈에서 뵐 일이 없던 선생님을 하필이면 1월 1일 새벽에 뵀는지.


▲김중배 언론광장 대표(전 MBC사장, 전 한겨레신문 사장)



그건 그 전날 영화 「1987」을 봤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1987년 1월 17일 쓰신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내 평생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칼럼이다.


당시 10년 차 3류 기자였던 내게 “나로서는 평생 도저히 넘지 못할 ‘글의 경지’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글이었다. 그런 경외심이 내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영화 「1987」을 통해 튀어 나온 것이리라.


다시 잠들기 어려운 이 밤, 선생님의 칼럼을 찾아 다시 읽어 본다. 영상으로도 완전히 재현하지 못한 박종철 죽음의 비탄스러움과 울분이 솟아오른다.

아직 영화를 못 본 이들, 이 칼럼을 먼저 읽고 관람할 것을 권유하고 싶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흑흑 …”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을 찾는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기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민주를 들먹이는 입술들마저 염치없어 보인다. 민주는 무엇을 위한 민주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하늘과 땅을 가꾸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민주를 들먹이기 이전에 인권을 말하자. 그 유린을 없애고, 그 죽음을 없애는 인권의 소생을 먼저 외쳐야 한다.

나는 ‘인권이 곧 나라’임을 서슴없이 말해온다. 인권이 희석되면, 나라의 바탕인 민(民)의 연대도 희석된다. 연대의 끈이 끊긴 나라는 ‘사막의 나라’일 뿐이다. 그 어길 수 없는 실감은 호곡하는 전화의 울림 속에서도 거듭 확인된다.

한스 켈젠은 「민주정치의 진위를 가르는 것」이라는 저서에서 대표성과 다수결의 원리를 말하고, 종교와 경제의 민주적 흐름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책엔 빠져 있는 인권을, 민주정치의 진위를 판별하는 으뜸가는 징표로 삼고 싶어 한다.

인권이 목적이라면 민주는 그 수단이다. 따라서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권력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 어느 땅에서나 민주를 노래할 수 없다. 인권이 유린되는 민주란 ‘레테르의 사기’이며 역설일 뿐이다.

이른바 ‘성고문’ 파동의 한 가운데 섰던 권양을, 그 변호인단은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건 비록 무너졌으나마 처녀의 마지막 ‘성역’을 지키고자 하는 뜻이다.

그러나 박종철, 그의 죽음과 이름은 거듭 되새겨지고 거듭 불려져야 한다. 건강과 밝음이 충만했다는 그 젊음이 무슨 변고로 주검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 진상을 한 점의 의문도 없이 밝혀야 한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인(死因)’을 파헤쳐 되풀이 될 수 없는 그 ‘사인’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박종철, 그의 죽음을 살리는 길이다.

경찰은 책상을 '탕'하고 한 번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고도 말한다. 그럴 수가 있는가. 연행의 시간과 자리도 하숙집 주인의 진술과는 어긋난다. 사망 전후의 병원 이송 여부와 사망의 경과도 이미 애당초의 발표와는 일치되지 않는다.

설령 한 번의 ‘탕’ 소리에 ‘억’하고 쓰러졌다손치더라도 경찰의 해명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앓는 피의자는 경찰의 보호를 요구한다. 그건 국민의 신체와 재산을 지킨다는 국립경찰의 으뜸가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것도 경찰관서의 구내에서 앓는 피의자를 방치한다는 건 경찰의 제 모습이 아니며 부작위의 범죄에 다름 아니다.

합법적 절차를 밟지 않는 연행에도 새삼 제동이 걸려야 한다. 임의동행은 그야말로 ‘임의’에 따라야 하며 사전에 알려지고 공개되지 않으면 안된다.

제도적으로 연행된 피의자는 즉각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보장된다면 우리가 응시해야 할 죽음은 태어날 턱이 없다.

거듭 말하고자 한다. 설령 고문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죽음의 방치는 용납될 수 없다. 다시 처녀의 부끄러움을 벗고 법정에 선 권양의 최후진술이 생각난다.

무더운 여름날, 한 여학생이 교도소에 끌려왔다. 그 여학생은 화상을 입어 하반신이 곪아 터졌다고 한다. 그러나 교도소는 검찰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찜질이나 응급조치 없이 방치했음을 고발하는 것이다. 권 양은 말한다.

“나는 너네도 딸이 있고 너네도 사람이냐고 외쳤습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사람의 도리입니다.”

그렇다. 인권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어김없는 사람의 사람다운 도리인 것이다. 그 사람의 도리를 어기는 땅에선 어떤 찬란한 이데올로기도 무색할 뿐이다.

그 역리를 바로 잡으려면 우선 박종철, 그의 죽음이 우리 앞에 눈이 부시도록 조명되어야 한다. ‘사인’은 거침없이 밝혀지고, 그 ‘사인’을 죽이는 길이 열려야 한다.

그 무거운 과제는 경찰이나 검찰만의 책무는 아니다. 그의 죽음은 이제 나라의 일이다. 겨레의 일이다. 한 젊음의 삶은 지구보다도 무겁다. 죽음의 무게도 그보다 가벼울 수는 없다.

국회도 불을 밝혀야 하고 법률전문직 단체도 무심할 수만은 없다. 그의 죽음과 삶은 그 한 젊은이만의 죽음과 삶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죽음과 삶이다.

이제 거짓의 하늘은 사라져야 한다. 거짓의 땅도 파헤쳐야 한다. 거짓의 사람들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라의 중심도 권력 쪽에서 내려 잡혀야 한다. 나라의 중심이 힘을 가진 자 쪽에 두어져서는 안된다. 힘이 없는 민중 쪽에 나라의 중심이 내려 잡혀야 한다.

광주의 5월에 이어지는 ‘5월시’ 동인들은 일찌기 ‘하늘아, 땅아, 많은 사람아’를 외쳤다. 이제 박종철, 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의 호곡이 피어난다.

그 호곡을 잠들게 하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이 피어나게 하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영생으로 살리는 길이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0&table=gs_kang&uid=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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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영화)



1987 (2017)
1987 - When the Day Comes

파일:1987.jpg



감독

장준환

각본

김경찬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장르

역사, 드라마

제작사

우정필름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

촬영 기간

2017년 4월 20일 ~ 2017년 8월 27일

개봉일

2017년 12월 27일

상영 시간

2시간 9분

대한민국 총 관객수

2,691,189명(2018년 1월 2일 기준)

국내등급






1. 개요[편집]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 제작 2017년 역사 드라마 영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세력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군상극 영화. 당시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던 상부 지시를 무시하고 법대로 부검을 강행한 최환 부장검사와,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전직 기자 출신 민주화운동가 이부영이 옆방에 수감된 고문 경찰관들에게서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알아낸 뒤 친한 교도관 한 명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전달하여 폭로에 이르게 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2. 시놉시스[편집]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22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박 처장(김윤석)의 주도 하에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검사(하정우)는 이를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이어가는 경찰. 그러나 현장에 남은 흔적들과 부검 소견은 고문에 의한 사망을 가리키고, 사건을 취재하던 윤 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한다. 이에 박 처장은 조 반장(박희순)등 형사 둘만 구속시키며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한편, 교도소에 수감된 조 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카인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하게 되는데…

한 사람이 죽고,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

3. 등장인물[편집]

  • 박처원 처장(김윤석): 당시 치안감(대공수사처장),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최환 검사[1](하정우):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한병용 교도관(유해진): 교도관 신분으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제보한 인물로 실존인물인 한재동, 전병용 교도관을 합친 캐릭터다.

  • 연희(김태리): 창작인물, 한병용의 조카[2]

  • 조한경 반장(박희순):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윤상삼 기자(이희준): 동아일보 기자,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안전기획부장 장세동(문성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안기부장은 장세동이었다. 극중 '장 부장'이라고만 나오다 영화 후반부에 이름이 딱 한 번 나온다.

  • 강민창 본부장(우현): 당시 치안본부장,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유정방 경정(유승목): 당시 대공수사처 수사2단 5과장,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신성호 기자(이신성): 중앙일보 기자.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박종철 사망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인물이다.[3]

  • 중앙일보 사회부장(오달수)

  • 동아일보 사회부장(고창석): 윤상삼 기자가 소속했던 동아일보의 사회부장

  • 안유 계장(최광일[4]): 당시 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 박정기 씨(김종수): 박종철의 아버지

  • 박월길 씨(조우진): 박종철의 삼촌

  • 김승훈 마티아 신부(정인기): 실존인물과 이름 동일


3.1. 특별출연[편집]

특별출연이라고는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물고문 시퀀스에서만 나오는 여진구를 제외하면 강동원, 설경구, 김의성 모두 나오는 장면 하나하나가 전부 서사 전개 상 중요한 장면 또는 복선인데다, 나오는 분량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 까메오보다는 준 조연급에 가깝다.


4. 예고편[편집]

티저 예고편. 희대의 망언은 50초에 나온다.


메인 예고편


캐릭터 예고편


5. 줄거리[편집]


5.1. 실제 역사와의 비교[편집]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항목 참고. 영화상 스토리와 실제 사례를 비교해 보면서 보다 입체적으로 이 사건과 민주화투쟁 과정에 대해 파악할 수 있으므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본 항목을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또한 세세한 차이는 하위 문서 1987(영화)/줄거리의 세부단락에 정리되어 있다.


6. 평가[편집]








뜨겁고 아프다, 감사!
박평식(★★★☆)



실화와 픽션의 조각들을 놀라운 세공력으로 맞춰나가다가 1987년과 2017년을 이어내고야 만다.
김도훈(★★★★)



전.두.환. 반드시 처벌해야 할 역사
허남웅(★★★☆)



평론가 이동진은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마치 벽화를 그려내는 듯 하고, 속도감과 긴장감을 동반해 1987년의 격랑을 먹먹하게 담아낸다고 호평했다. 그 외에도 이미 알려진 출연진 이외에 적잖이 등장하는 캐스팅의 화려한 면도 놀랍다고 했다. 하지만 강동원과 하정우의 스타성 때문에 영화 자체의 동력을 약화시키며 김태리 친구 역 배우 같이 부주의한 관성으로 직조된 캐릭터를 단점으로 보면서 별 세 개 반을 주었다.#

7. 흥행[편집]

1987의 순제작비는 115억원, 총제작비는 145억 원으로 손익분기점(한국에서 매출 100%로 가정 시)은 410만 명이다. 링크

7.1.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 누적 관객수

주차

날짜

관람 인원

주간 합계 인원

순위

일일 매출액

주간 합계 매출액

개봉 전


35,562명

35,562명

-위

306,258,500원

306,258,500원

1주차

2017-12-27. 1일차(수)

331,809명

-명

2위

1,974,145,400원

-원

2017-12-28. 2일차(목)

221,308명

2위

1,655,692,700원

2017-12-29. 3일차(금)

306,564명

2위

2,560,164,830원

2017-12-30. 4일차(토)

487,103명

2위

4,075,411,307원

2017-12-31. 5일차(일)

560,054명

2위

4,685,151,700원

2018-01-01. 6일차(월)

531,532명

2위

4,460,845,600원

2018-01-02. 7일차(화)

217,257명

2위

1,643,506,600원

2주차

2018-01-03. 8일차(수)

-명

-명

-위

-원

-원

2018-01-04. 9일차(목)

-명

-위

-원

2018-01-05. 10일차(금)

-명

-위

-원

2018-01-06. 11일차(토)

-명

-위

-원

2018-01-07. 12일차(일)

-명

-위

-원

2018-01-08. 13일차(월)

-명

-위

-원

2018-01-09. 14일차(화)

-명

-위

-원

3주차

2018-01-10. 15일차(수)

-명

-명

-위

-원

-원

2018-01-11. 16일차(목)

-명

-위

-원

2018-01-12. 17일차(금)

-명

-위

-원

2018-01-13. 18일차(토)

-명

-위

-원

2018-01-14. 19일차(일)

-명

-위

-원

2018-01-15. 20일차(월)

-명

-위

-원

2018-01-16. 21일차(화)

-명

-위

-원

4주차

2018-01-17. 22일차(수)

-명

-명

-위

-원

-원

2018-01-18. 23일차(목)

-명

-위

-원

2018-01-19. 24일차(금)

-명

-위

-원

2018-01-20. 25일차(토)

-명

-위

-원

2018-01-21. 26일차(일)

-명

-위

-원

2018-01-22. 27일차(월)

-명

-위

-원

2018-01-23. 28일차(화)

-명

-위

-원

합계

누적관객수 2,691,189명, 누적매출액 21,361,176,637원[7]


같은 주에 개봉하는 작품으로는 1987, 원더(이상 2017년 12월 27일), 고스트 스토리, 극장판 프리파라 모~두의 동경♪ 렛츠 고☆프리파리, 나의 연기 워크샵, 두 개의 사랑, 일주일간 친구, 줄리아, 하이 스트렁, 배틀그라운드 브릿지 전투(이상 2017년 12월 28일)까지 11편이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개봉해야할 작품들이 많았는데, 강철비,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신과함께-죄와 벌, 위대한 쇼맨 등에 밀려서 대거 개봉 연기되었다.

12월 27일 1일차에 328,794명으로 신과 함께-죄와 벌에 약 17만명 정도 뒤지며 2위로 출발했다.

12월 30일, 개봉 4일차에 100만을 돌파했다.[8] 하지만 문화가 있는 날에 개봉하여 방학, 주말 버프를 연달아 받은 대작이지만, 흥행 속도면에서는 부진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관객 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다소 늦게 퍼지고 있다는 평가가 있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개봉 당시 배급사 파워로 신과함께보다도 많은 좌석을 배정받았으나 낮은 좌석점유율 탓에 관객수가 느리게 증가하고 있다. 반면 경쟁작인 신과 함께는 1.5배 가량의 스크린 수와 10%p정도 높은 좌석점유율로 빠른 상승세를 보이는 중이다.

1월 1일 자정 기준, 좌석점유율 67.4%로 1위를 차지하였다. 입소문이 다소 늦게 퍼져 차트 역주행을 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는 중.

7.2. 북미[편집]

2017년 12월 29일 미국 영화 영화 시장에서 제한적 상영으로 개봉하였다. 배급사는 '우정 필름'.

8. 기타[편집]


  • 2015년 당시에 감독이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의 제목은 <보통사람들>이였다. 그러나 똑같이 1987년을 다룬 영화 <보통사람>이 앞서 2017년 3월 개봉하면서 제목을 바꿨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When the Day Comes>다. 엔딩크레딧에서 나오는 그 날이 오면이한열 합창단이 불렀다.



  • 초반 대한뉴스에 나오는 음악은 Badenweiler Marsch로 실제론 우리나라에서 잘 쓰지 않은 매우 독특한 선곡이다. 참고로 이 곡은 히틀러가 굉장히 좋아한 음악인지라, 해당 곡을 유투브에 검색하면 대부분 2차대전 나치시절 영상이 주로 나올 정도.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곡인듯 하다. 대한뉴스의 삽입에 대해 감독은 “다큐처럼 시작해서 진짜 다큐를 보게 되길 바랐다”고 밝혔다.


  • 영화 소품용 차량대여를 해주는 업체가 한정되어 있다보니, 차량 한 대로 여러 장면을 돌려쓰거나 도색만 바꿔서 쓰는 장면 등을 확인 할 수 있다. 심지어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만섭"이 몰았던 '브리사' 택시가 그 모습 그대로 장면에 나오기도 하였다.해당영상 5분 37초경 등장. 윤기자가 탄 은색 포니2는 전면부는 포니2 픽업의 그릴과 헤드라이트를 장착하고 있는 부분 복원차량. 차량을 대여한 업체 2곳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포니2는 "인아트웍" 업체의 차량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시내버스와 장례차량으로 쓰인 버스의 경우 금호렌터카의 차량을 도색만 바꿔 사용하였다. 소품 사정상, 87년에 생산되지 않았던 차량도 어쩔수 없이 나오는데, 그 예로 기아의 뉴 베스타(90년 생산), 기아 뉴 콩코드(91년 생산), 현대 1세대 후기형 그랜저(89년 생산)[9]등이 있다.



  • 김윤석하정우추격자, 황해에 이어 3번째로 대립 관계로 나온다. 먼저 시나리오를 받은 김윤석이 하정우에게 전화로 출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김윤석은 “다른 사람들은 연기 대결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연기 앙상블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하정우의 또 다른 주연작 신과함께가 1주 먼저 개봉함으로써, 하정우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둘이 경쟁하는 묘한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외에 오달수도 신과 함께에 동시 출연하였고 김의성, 조우진은 또 다른 경쟁작인 강철비에 동시 출연하였다.


  • 김윤석은 실제 당사자인 박종철과는 혜광고등학교 동문으로 김윤석이 2년 후배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나도 1987년 당시 데모현장에 있던 학생 중 하나였는데,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란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고 하였다. 김윤석은 1987 출연이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게다가 역시 같은 혜광고등학교 동문으로 3년 후배인 오달수는 “자랑스러운 선배님의 후배로서, 이 영화에 참여하는 게 도리이자 뜻 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감독님께 잠깐이라도 출연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1987년 당시의 실제 장례식 영상에서 군사정권에 의해 희생된 열사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인물은 문익환 목사이며, 그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극중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여러 민주화 운동가들을 간첩으로 몰아갈 음모를 꾸미는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맡았다.[12] 문익환 목사의 영상은 일종의 수미상관으로, 도입 부분 땡전뉴스와 맞물려 실제 영상이 주는 힘을 얹었다고 감독이 밝혔다. 문익환 목사가 외친 “열사여”에 맞닿아 그날이 오면이 울려퍼진다. 감독은 그 외침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 광주민주화항쟁 참여자이자 구미유학생간첩조작단 사건 피해자로 14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바 있는 강용주 의사[13]는 이 영화를 보이콧했는데, 영화에서 원칙주의자로 상관인 박처원에게도 항의하고 이부영에게 사건을 알릴 기회도 주는 의인으로 그려진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가 실제로는 90년대 장기 비전향 수감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고문가해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전에도 재야 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사범을 감시하던 인물인데 이러한 묘사는 없이 선한 역할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나, 영화 자체에서는 절대선보다는 입장을 바꾸는 방향으로 묘사되었다.[14]


  • 이희준의 경우 이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아 촛불집회에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김태리 등도 참여했다고 밝히며 1987년과 2017년은 미묘하게 연결된 것 같다며 남다른 소회를 말했다.



  • 장준환 감독의 아내인 배우 문소리가 마지막 장면에 빨간 손수건을 손에 두르고 버스 위에서 선창하는 사람으로 출연했다. 뿐만 아니라 캐스팅 과정에도 직접 다리를 놓아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고, 현장에서 배우들 연기 지도도 도와줬다고 한다. 특히 데모하는 장면에선 본인의 운동권 경험을 살려서 각종 시위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한다.


  • 영화의 화려한 캐스팅에 대해서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영화와 동시대를 살았던 386 연배의 배우들이 당시 자신이 주역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통해서라도 일익을 담당하고 싶어하는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극중 주요 무대로 나오는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 출신 중 유명 인물로는 경향신문 장도리를 그리는 박순찬 화백이 있다.


  • 이한열 역을 맡은 배우 강동원의 외증조부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온 친일파여서 논란이 있었지만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 여사는 인터뷰에서 본인이 성실하게 잘 살아왔고 또 열심히 하겠다고 했고, 강동원의 외증조부가 친일파라고 연좌제로 비난하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같이 민주화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개봉이 불가능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바이두 백과에서 항목이 만들어져 있거나 일부 언론에서 해당영화에 대한 기사를 낸것을 봤을때 아직까지는 검색불가능 수준은 아닌 듯.


  • 김윤석은 연기를 위해 실제 박처원의 사진을 구해 똑같은 스타일링을 시도했다. 일부러 이마를 넓혀 M자 모양을 만들고, 머리카락을 올백 스타일로 넘기고, 마우스피스를 해서 하관 쪽을 두껍게 하는 작업을 거쳤다. 다만 마우스피스를 착용하면 침이 자꾸 고이는 탓에 발음에 제약이 와서 고생했다고.


  • 엔딩크레딧의 도움주신 분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순심 여사, 영화에도 등장한 이부영 전의원 등 6월 항쟁과 관련된 재야인사들 외에 신원호 PD도 올라가 있다. 재야인사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자문했던 점이, 신원호 PD는 영화 중 나오는 교도소신의 촬영을 위해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촬영 장소인 장흥교도소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유 때문이라고.


  • 2017년 12월 28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박상기 법무부 장관, 문무일 검찰총장, 이철성 경찰청장 4인이 검찰과 경찰의 흑역사를 다룬 이 영화를 동반 관람하였다. 법무부 인권국장의 기획으로 박상기 장관의 제안으로 성사되었다고 한다. 김부겸 장관의 경우 6월 항쟁에서 몸소 뛰며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 했던 만큼 감회가 남다르다고. 김 장관은 자기는 원래 영화 보면 10분 이면 잠들지만 이 영화는 끝까지 다 봤다고 한다.[15] 그리고 일각에서는 1987이 경찰 최고 흑역사를 다룬 만큼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기자들이 실제로 이 질문을 하자 김 장관은 박상기 장관이 그럴 사람도 아니고 영화에서도 검찰들의 부실수사로 수사결과가 3번 이나 바뀌지 않았냐고 답했다.그리고 하정우 제외하고 딱히 이 영화에 나오는 검사들이 막 정의롭게 나오지도 않고,




[1] 1987년 6.29 선언 덕에 전두환은 즉각 퇴진을 하지 않고 임기를 채울 수 있었기에, 법대로 부검을 하자던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환 검사와 당시 정구영 서울중앙지검 검사장은 다음 인사에서 물을 먹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정구영 검사장은 사건 은폐에 일조하고 나중에 검찰총장으로 영전한다.

[2] 누나의 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삼촌을 아버지처럼 따른다고 한다. 주요 등장인물 중에선 유일하게 순수창작인물이다.

[3] 현재는 성균관대 신방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특보를 역임했다.

[4] 배우 최민식의 동생

[5] 실제 배역명이 이렇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인듯.

[6] 장준환 감독의 아내인 배우 문소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빨간 손수건을 손에 두르고 버스 위에서 선창하는 사람으로 참여했다. 뒷모습만 나온다.

[7] ~ 2018/01/02 기준

[8] 변호인, 국제시장과 동일한 흥행 속도.

[9] 각그랜저 초기형과 무슨 차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기형은 리어라이트가 일자형이지만, 89년형부터는 윗부분이 살짝 파여 있다.

[10] 감독이 밝히길, 우현을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이미 좋은 역할들이 캐스팅이 되어있던 터라 어쩔수 없이 이 역할을 제안했는데, 우현이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우현이 영화에 참여하면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고백했다고.

[11] 여담이지만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개소리는 원래 우현이 맡은 치안본부장이 해야하는 대사였으나, 본작에서 치안본부장은 이 사인(?)을 보고 자기도 기가 막혔는지 말문이 턱 막혀 박처원을 쳐다보고, 김윤석이 맡은 박처원이 이 천인공노할 말을 하게 된다.

[12] 사실 문성근은 자타가 공인하는 친노-친문 성향 인물이지만(심지어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과거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당적으로 도전했다 허태열에게 진 부산 북-강서 을 지역구에 도전했다 낙선한 전적도 있다.) 정작 자신의 성향과 정반대의 악역(?)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참여정부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나온다면 보수 성향 언론사 회장 역할을 맡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13] 직업이 의사(Doctor)다

[14] 작중에서도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는 사람'이라고 언급되긴 했다.

[15] 박상기 장관은 당시 연세대학교 법대 강사로 재직 중이였고, 문무일 총장은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생으로, 이철성 청장은 순경으로 재직 중이였던 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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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쎈 컷] '1987', 연희슈퍼부터 성당까지..어떻게 탄생했나


[OSEN=김보라 기자] 영화 ‘1987’(감독 장준환)의 제작진이 전국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1980년대를 생생하게 완성한 비법을 전했다.



#1.민주화 인사 김정남 검거의 중요한 단서? 통영 충무교회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분)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잠재우기 위해 재야에서 활동중인 민주화 인사 김정남(설경구 분)을 검거하는데 혈안이 돼있다. 집요한 수사 끝에 김정남이 은신해있는 교회를 찾아내고, 치열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제작진은 이 장면을 위해 옥상과 첨탑이 있는 교회를 찾으러 전국을 다녔고 통영의 충무교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작진은 극적인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교회 유리창의 스테인글라스를 직접 제작했고, 오묘한 빛깔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 색색깔의 시트지를 붙이고 수 차례에 걸친 테스트를 진행했다. 작은 빛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은 제작진의 노고 덕분에 긴장감 넘치는 추격전을 완성할 수 있었다. 




#2.80년대 느낌 물씬 풍기는 연희슈퍼, 목포 서산동


영화 속 많은 장소들이 철저한 고증에 의해 재현됐지만 한병용(유해진 분)과 연희(김태리 분)가 사는 연희슈퍼는 정서적인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제작진은 평범한 소시민인 두 사람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을 찾으러 전국을 다녔다. 이에 1980년대의 정취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목포의 서산동에 연희슈퍼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서산동은 시와 벽화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로, 삼촌 한병용과 조카 연희의 따뜻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3.비밀 서신을 전달하는 사찰, 부산 해운정사

연희가 한병용의 부탁을 받아, 비밀 서신을 전달하는 중요한 장소인 사찰은 부산 해운대에 있는 해운정사에서 촬영됐다. 제작진은 비밀 서신을 주고 받는 이 사찰이 옛스러운 분위기는 물론, 지리적으로 도심에서 멀지 않고 연결되어있는 곳이기를 원했다.

민주화 인사 김정남이 대공형사들을 피해 은신하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야만 했기 때문에 해운정사가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한국영화 최초로 촬영이 허가된 명동성당을 비롯해 관광지로 유명한 철암 석탄역사거리, 사북탄광문화관광촌 등 여러 명소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1987’은 1980년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 제작진의 노력은 관객들을 1987년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한 체험을 선사했다.


/purplish@osen.co.kr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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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흥행, 이한열 열사-손석희 닮은꼴 화제




영화 <1987>이 흥행하면서 고 이한열 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한열 열사와 손석희의 과거 인연이 다시금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고 이한열 열사의 사진과 손석희 JTBC 사장의 과거 사진이 나란히 올라왔다. 앞서 이한열 기념 사업회가 진행한 스토리 펀딩 ‘잃어버린 시간을 찾습니다’ 캠페인은, ‘6월 항쟁의 인연, 이한열과 손석희’라는 제목의 글에서 두 사람의 인연을 공개한 바 있다.


게재된 글에 의하면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지난 1988년 손석희 앵커를 만났다. MBC 노동조합 투쟁 당시 격려차 MBC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손 앵커는 입사 5년 차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당시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손 앵커에게 “사람들이 자네랑 우리 한이(이한열 열사)가 많이 닮았다고들 하더라”고 말했다. 이에 손 앵커는 “예 어머님. 그렇지 않아도 저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고 답했다.


이어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최근에도 손석희 사장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열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그린 소설 <L의 운동화> 출간 당시,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통해 한 짝만 남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언급했다.

이한열 기념사업회 측은 “내가 한이한테 그렇게 데모하지 말라고 말리긴 했지만, 우리 한이가 살아있었다면 아마 지금도 손석희 저 양반처럼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며, “저렇게 열심히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고 이한열 열사(왼쪽)와 손석희 JTBC사장.
고 이한열 열사(왼쪽)와 손석희 JTBC사장.



한편,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1987년 6월 9일, 전두환 정권에 맞서 ‘6ㆍ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했다가, 머리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다. 이후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았으나 그해 7월 5일 숨졌다.

그가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는 한 장의 사진은 6월 항쟁을 끌어내는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1987>의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연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강주일 기자 joo102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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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 숨어 있는 이야기

[김종철 칼럼] 명예도 이름도 없는 민주 교도관들

     




지난해 12월27일 개봉한 영화 ‘1987’이 1월12일이면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기획되어 은밀하게 제작되고 있던 이 작품은,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창고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7’은 촛불혁명 덕분에 밝은 세상에서 많은 이들, 특히 20~30대의 사랑까지 받는 ‘국민영화’로 솟아오를 수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격동적인 민주·민족·민중운동이 펼쳐진 1980년대는 촛불혁명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과 1987년의 6월항쟁이었다.

영화 ‘1987’은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된 그해 정초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의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두 사건은 지난 30여년 동안 나라 안팎에 그 진상이 널리 알려졌는데, 정작 이 영화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가공(加工) 또는 허구(虛構)가 도처에 널려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의 진상을 재야민주화운동권에 전달한 영등포교도소 교도관 한병용의 이름과 더불어 그가 겪은 고초의 내막을 들 수 있다. 




▲ 영화 ‘1987’ 포스터
▲ 영화 ‘1987’ 포스터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1987년 봄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 민통련 사무처장)이 작성한 비밀편지(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실상)를 그의 친구인 김정남(나중에 김영삼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교도관은 한재동이었다.


한재동은 1970년대에 서대문구치소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는 전직 교도관 전병용에게 ‘비둘기’를 전했고, 전병용이 김정남에게 그 문건을 건넨 것이었다.

박종철 사건 은폐·조작의 전모를 폭로하는 이부영의 두 번째 비밀편지를 한재동이 극비리에 받았던 때, 전병용은 도피 중인 재야인사를 숨겨준 혐의로 체포되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한재동이 김정남에게 그것을 직접 전달했다.


김정남은 그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 문서로 만들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신부)에게 맡겼고, 5월18일 밤 8시30분 서울 명동성당에서 ‘5·18광주항쟁 희생자 추모 미사’가 끝난 뒤 홍제동성당 주임신부 김승훈이 그 문서를 낭독함으로써 전두환 정권을 뿌리째 뒤흔드는 6월항쟁에 불길을 댕긴 것이었다.



영화 ‘1987’의 한병용은 한재동의 한과 전병용의 병용을 차용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한병용이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에게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하는 장면도 시나리오작가와 연출자가 만들어낸 허구임이 분명하다. 내가 1975년 봄 이래 서너 번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친밀한 사이가 된 전병용과 한재동은 그렇게 무참한 고난을 겪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런 장면을 연출한 사실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기에 전국 여러 곳의 구치소와 교도소에는, 민주화운동과 독재타도투쟁을 하다 잡혀온 양심수들이나 정치범들을 은밀하게 도와줌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들의 ‘동지’가 된 민주교도관들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병용과 한재동이다.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난 기자, PD, 아나운서 등 113명이 결성한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15명 이상이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옥살이를 했다. 1970년대에 서울구치소에서 그들을 은밀하게 도와주면서 바깥 정보를 전달해준 교도관은 전병용과 한재동을 비롯한 여러 명이었다.  


이제는 밝혀도 될 그 이름은 최양호, 나장균, 김재술, 김형옥, 최영옥, 김성렬, 김영배, 나종남이다. 전병용과 한재동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3월 초, ‘민주교도관’이라는 낙인이 찍혀 각기 순천과 김천의 교도소로 전출되었다가 결국 강제 사직 당했다. 한재동은 한 달 동안 수감생활까지 한 뒤 1981년 1월 행정소송에서 승소해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1984년 6월 영등포교도소로 전출해 오랜 지기인 이부영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날마다 퇴근 이전인 저녁 5시쯤 그가 갇힌 감방 앞에 가서 한 시간쯤 대화를 나누던 끝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한 진상을 온 세상에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 영화 ‘1987’ 포스터
▲ 영화 ‘1987’ 포스터


나는 개인적으로 전병용·한재동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80년 5월17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지명수배를 당해 도피생활을 하던 나를, 그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거나 다음 은신처를 물색해 주었던 것이다.


그 쿠데타가 터지기 한 달쯤 전에 나는 한재동으로부터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여동생이 결혼할 계획인데 주례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실직 상태였고, 여동생은 영등포 어느 공장의 노동자였다. 신랑감은 작은 구두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나는 만 36세였으므로 주례를 서기에는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였다. 내가 한사코 고사하자 그는 어느 날 주례로 내 이름을 박은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뜨겁던 5월5일 오전 11시, 나는 아내와 함께 세 살 박이 아들의 손을 잡고 용산구 남영동 큰길가에 있는 허름한 건물의 예식장으로 갔다. 식단 앞으로 어색하게 다가가자 안내를 맡은 여성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당황해서 “제가 주례인데요”라고 우물거리자 그는 “새파랗게 젊은 분이 주례를 보세요?” 하면서 내 손에 흰 장갑을 끼워주었다.



나는 그날 진지하게 ‘주례사’를 했는데, 나중에 한재동에게 들어보니 큰 실수를 한 대목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신부의 오빠와 맺은 인연 때문에 주례를 맡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서대문구치소에서 민주화운동 투사들을 돕다가 파면 당했지만 꿋꿋하게 살고 있다고 소개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례객 대다수는 한재동의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올라온 순박한 친척과 농민들로, 그 지방의 명문인 순천고등학교를 나온 그가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잘 살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봄’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5월18일부터 도피자 신세가 되어버린 나는 당장 숨어 지내야 하는 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때 한재동은 서대문구 현저동 산동네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한 평을 겨우 넘는 방이라서 둘이 누우면 칼잠을 자야 했다. 그래도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앞에 이름을 소개한 민주교도관들 역시 동아투위는 물론이고, 청년·학생운동권의 수배자들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보살펴주었다.  

전병용은 지금 성남시 분당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한재동은 수원시의 한 대학에서 비정규직으로 조경(造景) 일을 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웬만한 민주화운동가들 대다수는 적절한 보상을 받았는데, 민주교도관들은 ‘명예도 이름도 없이’ 지내 왔다. 그래도 70대 안팎의 그들은 충실하게 생업에 종사하면서 겸손하게 살고 있다. 요즘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회포를 푼다고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그렇다 치고,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재인 정부는 이제라도 민주교도관들에게 ‘숨은 노고’를 치하하는 상패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cckim999@naver.com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40758#csidxd409f0b37929c33b1b76ccbd62b54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