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음악 관련

도올의 여순민중항쟁 강연과 애닲은 사연의 노래 부용산

道雨 2019. 1. 9. 19:05



도올의 여순민중항쟁 강연과 애닲은 사연의

노래 부용산






부용산



                                                                                       - 박기동 작시, 안성현 작곡



                           부용산 오리길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도올 김용옥 선생이 '여순민중항쟁 강연 2부'에서 소개하고 부른 '부용산' 노래가 화제가 되고

있다.

부용산 노래의 음률도 애닲기 그지없지만, 그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슬프고, 안타깝고,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서려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작사자(박기동)의 여동생, 작곡자(안성현)의 제자, 또한 친구의 장례식에서 그 노래를 부르던

목포 항도여중 학생들, 빨치산이 불러 금지곡 된 점 등, 그 모든 것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  

부용산 오리길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이 작사하고 안성현이 작곡하였으며, 반세기 동안 금기의 노래가 되었던 ‘부용산(芙蓉山)’

의 가사이다.

 



***


박기동, 누이를 위한 제망매가 부용산지어



박기동은 1917년 여수 앞바다의 돌산도에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벌교보통학교와 일본

관서대학을 졸업했다. 벌교남초교, 광주서석초교, 벌교상고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에 좌익계열의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입하여 4개월 동안 구금됐다.


박기동은 1947년 가을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여동생 박영애를 부용산 자락에

묻고 돌아와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었다.

누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근해서 음악교사인 안성현을 만났다.
 


작곡가 안성현은 월북하고, 빨치산이 불러 금지곡


 
안성현은 1920년 나주 남평 드들강변에서 태어나서, 남평초교와 일본 도호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전남여고,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 등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며 작곡가로 활동했다.


안성현은 해방 직전에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국민동요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했다.

1948년 발표된 안성현 작곡집의 처음에 엄마야 누나야가 실려 있고, 마지막에 부용산

실려 있다.

안성현이 목포 항도여중 재직 중인 1948년 가을, 경성사범에서 전학을 온 여제자 김정희가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했다.

상여 나가는 소리로 동료교사인 박기동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 부용산을 발표했다.


노래 부용산은 정적인 가락과 슬픈 사연 때문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호남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

하지만 작곡가 안성현이 한국전쟁 당시 월북하고,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에 들어간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이 되었다.

안성현은 문학평론가이자 숙부인 안막과 무용가이자 숙모인 최승희 부부와 함께 한국전쟁 당시

월북하여 200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서 최고의 예술인들에게 수여하는 국가명예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2009년 4월, 안성현의 고향인 전남 나주 남평의 드들강변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진 지 70년 만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세워졌다.
 
 
****


박기동은 부용산이 족쇄가 되어, 기관으로부터 수시로 가택수색, 연행, 구금 등을 당했다.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일본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번역했다.

1993년 평생소원인 시집 한 권 내는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일흔일곱의 나이에 혈혈단신 호주

시드니로 이민을 떠났다.

1997년 구전으로 전해오던 노래 부용산을 안치환이 취입했고, 1998년 호주에서 51년 만에

부용산2절이 만들어졌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


목포와 벌교에서 부용산 음악회가 열렸다.

목포여고 교정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박기동은 산문집 부용산을 발간했다. 벌교 부용산에

기념비와 기념누각을 세웠다.

박기동은 2004몸은 건강하게, 마음은 깨끗하게, 생활은 검소하게라고 벽에 써 붙인 글처럼

고고하게 살다가,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용산은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나즈막한 산이다.

부용산노래는 반세기 동안 금지곡이 되었다가 다시 불리고 있다.

가수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 유민, 윤선애 등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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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여동생을 그리다 노래가 된 '부용산'


박기동 시인의 애환담은 현대판 '제망매가'...작자미상의 구전가요서

대중가요로 불려




  

부용산 오리길 입구. 부용산은 산세가 대체로 완만해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다.

/송금종 기자 sheriff121@naver.com






















보성군 벌교읍에 있는 부용산은 해발 192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다.

이곳은 경사가 완만해 산책이나 트래킹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항시 붐빈다.

산 입구부터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오르면 체육공원과 충혼탑이 있다. 탑을 지나 길을 꺾어 오르면,

항일 민족 음악가인 채동선 선생의 묘가 있다.


그 뒤로는 박기동 시인의 시비가 있다. 시비를 지나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면

부용정(芙蓉亭), 좌측으로 나가면 용연사(龍淵寺)가 나온다.


'부용산 오리길'로 유명한 산이지만, 부용산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박 시인이 쓴

동명의 시 '부용산' 때문이다.


'부용산'1947년 목포 항도여자중학교(현 목포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이던 시인이, 어린

나이에 숨진 여동생을 기리며 쓴 추모시다.

여기에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여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부용산'이다.


현대판 '제망매가(祭亡妹歌)'인 부용산은 느리고 슬픈 노래다. 가사에는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오빠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은 처음 쓰일 당시 가사가 1절이 전부였다. 하지만 연극가 김성옥 선생이 호주로 이민을

가 있던 시인을 찾았고, 1999년 마침내 2절 가사가 완성된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지금은 작사가와 작곡가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부용가는 작자미상의

구전가요였다.

작곡가 안성현이 한국전쟁 당시 월북을 하고,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금지곡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부용산은 호남지방에서 입으로만 전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가수 안치환이 부용산을 노래로 부르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후 다른 가수들이 따라 부르면서 지금의 노래로 자리 잡게 됐다.



송금종 기자  sheriff121@naver.com







박기동 시비. 비석에는 시 '부용산'이 적혀있다. /송금종 기자 sheriff121@naver.com




부용정(왼쪽)과 목판에 새겨진 '부용산'. 부용정에 오르면 벌교 읍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송금종 기자 sheriff1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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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비운의 월북 음악가' 안성현 고향 나주 남평 지석강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부용산' 등 작곡…생애 재조명 첫 시도



 



'비운의 월북 음악가' 안성현 고향 나주 남평 지석강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세워졌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봤을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나주 남평 지석강변에

세워졌다.

김소월의 시(詩)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사람은 남평 출신 월북 음악가 안성현(1920∼2006)

선생.

가곡 부용산을 작곡하기도 했지만 6ㆍ25 때 월북한 그는 그동안 '월북 음악가'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오는 30일 나주 남평 지석강 솔밭유원지에서

'엄마냐 누나야' 노래비 제막식을 갖는다고 26일 밝혔다. '엄마야 누나야'노래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승화시킨 안성현 선생의 고향이 남평이기 때문이다.

따스하면서도 서글픈 곡조의 이 노래를 작곡한 안 선생은 1920년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나

남평초등학교를 졸업(21회)하는 등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지석강변에서 보냈다. 1936년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한 뒤 도쿄 동방음악대 성악부를 졸업한 안 선생은 귀국한 뒤 전남여중

(현 전남여고)과 광주사범학교(현 광주교대), 조선대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 재직하던 1948년에는 같은 학교 국어교사였던 박기동씨가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을 기리기 위해 쓴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목포와 보성 등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진 '부용산'은 그해 발발한 여순사건에서 빨치산들에 의해

자주 불려졌고, 월북 인사가 작곡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에 월북했던 안 선생의 소식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6년. 북한의

'문학신문'이 '공훈예술가'칭호를 받은 그가 그해 4월25일 86세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였다.

같은 해 개교 100주년을 맞은 남평초등학교 졸업생 31명은 선배였던 안 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해 '엄마야 누나야 노래연구회'를 만들어 행방을 추적했다.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월북이후 잊혀져 '남평초등 100년사'에 싣지 못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노래연구회'는 남한에 남아있던 안 선생의 부인 성동월(86) 씨의 조카로부터 1948년 출판된

'안성현 작곡집'을 찾아내기도 했다.

'엄마야 누나야'를 시작으로 작곡 순서대로 '앞날의 꿈', '진달래', '내고향', '어부의 노래',

'들국화', '낙엽', '봄바람', '비' '부용산'까지 모두 10곡이 수록됐다.

작곡집은 단기 4281년(1948년) 8월17일 안성현 음악 연구소가 발행했고 목포의 '동광사'라는

곳에서 인쇄됐다.

노래비 건립추진위원회 최정웅 위원장은 "'엄마야 누나야'가 가장 먼저 실려 있고 '부용산'이

가장 마지막에 실린 점을 감안해 추정해볼 때, '엄마야 누나야'는 해방 직전에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선생이 아름다운 지석강변의 풍경과 추억을 떠올리며

작곡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자료들을 토대로 '노래연구회'는 나주시에 "예술가는 예술로 평가받아야 하며

'엄마야 누나야' 노래는 지석강변의 아름다움이 반영돼 있는 곡인만큼 노래비라도 세워야

한다"고 요청했다.

일부에서 "월북 음악가의 노래비를 만들거나 기념사업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예술은 예술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우여곡절 끝에 노래가 만들어 진지 70여년 만에 지석강변에 노래비가 세워지게 된 사연이다.

최 위원장은 "부용산 노래비는 있지만,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는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면서

"앞으로도 안성현 선생을 재조명하는 작업과 함께 지석강의 문화적 가치를 알릴 수 있는

행사도 개최해 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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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항도여중박기동과 안성현




박기동은 안성현처럼 학급담임을 맡지 않았고, 학적부 정리 등 기타 잡무 또한 맡지 않았다.

그 대신 박기동은 부임하자마자 20페이지가 넘는 타블로이드판 지면에다 교사들의 작품,

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해서 싣는 《새싹》이라는 문예지를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해방 이후 남한의 중학교 중에서 발행한 최초의 문예지였다.


안성현, 박기동 이 두 사람은 목포극장을 빌려서 ‘항도여중예술제’를 열었는데 매우 볼만한

잔치였다. 일개 여중학교에서 목포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연극, 무용, 독창, 합창, 시 낭송 등을

무대에 올린 대운동회 같은 축제였다.

이 예술제에서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시 낭송을, 한 사람은 음악 부문을 지도하였다.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한지 8개월쯤 되었을 무렵, 박기동, 안성현 두 사람의 제자인 김정희가

열여섯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는 해방 직전에 경성사범에 입학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김정희는 얼굴도 예뻤지만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도 잘 했고, 문학에도 빼어난

소질을 보였다. (「감화원설계」-전국 학생백일장 장원상 수상작)

이런 학생의 죽음이니 학교 전체가 충격에 빠질 만큼 안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안성현의 대표곡인 「부용산」이 탄생한다.

이 노래가 작곡된 배경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스물네 살에 요절한 박기동 시인의

여동생 박영애이고, 또 한 명은 항도여중의 3학년 재학생이던 김정희(16세), 그리고 또 한 명은

안성현의 여동생 안순자(15세)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는 당시의 불치병이던 폐결핵으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비극적인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시인이나 작곡가의 가슴에서 피어나지 못한 채 죽은 여동생과의 이별이

주제가 되었고, 여기에 김정희라는 애제자의 죽음이 오버랩 되면서, 세 사람의 죽음을 합하여

한세상을 풍미한 명곡이 탄생한 것이다.

박기동의 시 「부용산」은 그가 항도여중 부임 이전인 순천사범에 재직하던 1947년에, 하나 뿐인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작품이었다.


안성현이 박기동의 「부용산」을 어떻게 접했는지에 대해서는 박기동의 진술이 밝히고 있다.

『신동아』 2001년 11월호에 실린 박기동과의 인터뷰에는, 제자 김정희의 죽음을 많이도

슬퍼했던 안성현이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을 발견하고서, 곧바로 가져다가 곡을

붙였다 한다.


김정희의 죽음에서 안성현은 몇 년 전 같은 병으로 죽은 자신의 누이를 떠올리면서 슬픔의 감정이

더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에 비견될 수 있는 「부용산」은, 이들 세 명의 여성 모두를 위한

진혼곡이자, 소멸된 혈육에 대한 애절함과 제행무상의 보편적 심상을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노래한 연가였다.


1948년 8월 17일 안성현은 ‘안성현음악연구소’ 명의로 제1작곡집을 발간하였는데,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박기동의 시 「부용산」, 「진달래」, 조희관의 시 「앞날의 꿈」,

「내 고향」, 「어부의 노래」, 「봄바람」, 「비」, 박화성의 시 「들국화」, 안성현이 직접

지은 시 「낙엽」 등 총 10곡이 담겼다.


* 엄마야 누나야(시 김소월, 곡 안성현)

* 앞날의 꿈(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진달래(시 박기동, 곡 안성현)

* 내고향(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어부의 노래(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들국화 (작사 박화성, 곡 안성현)

* 낙엽 (시 안성현, 곡 안성현)

* 봄바람(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비(시 조희관, 곡 안성현)

* 부용산(시 박기동, 곡 안성현)


                         -----이상 작곡順----




제1작곡집 끝부분에는 ‘뒷말’이라는 이름으로 작곡가 안성현의 소회가 적혀있다.


어떻게 해서 젊은 학생들의 불타오르는 음악열에 알맞은 곡을 만들어주나 하는 것이, 해방 후

오늘까지의 나의 과제이었습니다. 나는 그 과제를 혼자 가슴에 품고, 남모르는 괴로움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이 조그마한 하잘 것 없는 작곡집은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네들의 뜨거운 요청에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줄 수가 있을까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바이외다.

다행히 이 길에 밝으신 여러 선생님의 따뜻한 가르침을 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1948. 8. 지은이



‘뒷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안성현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한

노래를 만드는 일에 온힘을 쏟았던 강한 열정과 겸손한 마음가짐과 지칠 줄 모르는 교육적

실천력이 읽힌다.


안성현은 항도여중을 1949년 9월 15일 돌연 의원사직을 했다.

이는 의외의 일이며, 지금껏 그때의 사직의 이유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채, 몇 가지 방향의

추정이 모여들었다.

(그의 작곡 ‘부용산’을 빨치산이 불렀다는 이유로 사찰대상이 되면서 사표를 제출했을 것으로

보는 측과,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와 천재무용가 최승희를 만나러 평양에 가기 위해,

그의 음악활동을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는 둥의 추정이 그것이다)


조희관 교장의 총애를 받은 박기동과 안성현은, 한 사람은 시를 썼고 한 사람은 곡을 붙여서

‘부용산’을 만들었는데, 이를 지리산에 숨어든 여순사건의 빨치산들이 부른 것이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국이라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목숨 부지가 어려운 현실이고, 1949년 9월이면

지리산으로 들어간 여순사건의 빨치산들이 「부용산」을 노래하고 있을 때이므로, 박기동과

안성현 두 사람은 억울한 죽음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때에 조희관은 박기동에 앞서서 안성현을 의원사직의 명목으로 미리 피신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안성현의 제1작곡집 발표 이틀 전인 1948년 8월15일에 수립되었다.

여순사건은 여기에서 불과 두 달여 후인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곧바로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가와 일반

시민들을 구별하지 않는 초토화 작전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여순사건의 잔류군인

빨치산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이때부터 「부용산」이

불려 졌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선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간이라도 ‘적대적’이면 목숨 부지가 어려웠고,

안전한 곳은 익명성이 보장된 보다 큰 세상인데, 그래서 오직 “음악활동만을 위해 서울로

갔을 것”이라는 증언 또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김재민은 그 무렵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6·25발발 이후 계속되는 인민군의 진주로 미군이 목포 유류저장 창고를 폭격하는 일이 있었고,

시민들은 피난을 가는 등 불안한 나날을 어찌 보낼까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목포시내에 함포사격이 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공포분위기가 커져 있었다.


우리 내외가 전쟁을 피해 목포에서 20㎞쯤 떨어진 일로의 농가에다 문간 방 하나를 얻어

기거하고 있는데, 그 집에서 안성현과 조념趙念을 함께 만났다.

조념은 안성현이 직장을 그만두고 뚜렷한 이유 없이 (추정컨대 음악활동의 무대를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서울로 옮겨가던 무렵, 목포중 음악교사로 내려온 작곡자 겸 바이얼리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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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이 있는 곳 ]      


아름다운 노래 "부용산"                 



고비 마다 피로 아로 새긴 우리 현대사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너무나 아까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 고 강희남 목사.....

 

이런 때 

우리의 애통한 마음을 달래는

제대로 된 추모곡 한 곡 쯤은 

익히고 있는 게 좋겠기에.....

 

이 노래, <부용산>은

애국시인 박기동 선생의 시에

월북작곡가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힌 것으로

 

해방 이후~6.25전쟁 시기

지리산 빨치산들이 쓰러진 동지를

이름 모를 골짜기에 묻으며 불렀던 노래 입니다. 

 

그 후 40년 동안 금지곡으로 묶였으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애국민중 속에 구전되어 오다가

97년 민중가수 안치환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이번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의 메인 음악으로 등장했습니다.

 

 

 






 


[2절]

그리움 강이 되어

내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꿈은 간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 이동원

 

 

부용산 - 안치환 

  

부용산 - 박흥우(바리톤)

 

부용산 - 국소남

 

부용산 - 한영애

 

 

 

작사자 박기동 선생 약력



▷  1931 년 (14 세)    벌교 보통학교 (현 벌교남초등학교) 6회 졸업.
                                    벌교에서 초등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 대학을 일본에서 학업을 마침.
▷1943 년  (26 세)     일본관서대학 영문학과 졸업후 귀국후 벌교에서 생활.
▷1943 년 10월        벌교남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1943 년 10월 ~1946년 1월 31일까지     3년 9개월동안 벌교남초등학교 재직.

▷1944 년  (27 세)                                         벌교초등학교에 부임. 교가 작사
▷1946 년 2월 1일 (29 세)                            광주 서석초등학교 발령.
▷1946 년 2월 1일 ~ 1946년 11월 14일     광주 서석초등학교 재직.
▷1946 년 11월 15일                                    벌교공립초급 중학교 발령 (현 벌교상업고등학교) . 국어 영어 교사
▷1946 년 2월 1일 ~ 1947년 3월 31일        벌교공립 초급중학교 재직. 교가 작사
▷1947 년 4월 1일 (30세)                             순천 사범학교 재직.

                                                                       - [남조선 교육자 협회] 가입이 문제가 되어 순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받고 , 6개월 정직처분
▷1947 년  9월 6일       누이 박영애가 폐결핵으로 순천도립병원에서 사망.

▷1947 년  9월 8일       누이 박영애를 벌교 부용산(절산)에 장사지냄.  집에 와서 부용산 을 슴

▷1948 년 2월  (31 세)   목포 항도여중 전근 (교장 조희관. 현 목포여자고등학교)

                                           - 천재 문학 소녀 김정희(     )와  음악교사  안성현(1920.- )을 만남 
▷1948 년 10월 10일     김정희 사망 . 안성현교사가  부용산시에 곡을 붙임.

▷1950 년 (33 세)           광주 동중 에서 교편  

▷1950 년 5월               문행자와 결혼

▷1951년 (34 세)           아들 출생 ( 현재  치과의사) 

▷1953 년                        군산 해운말?근무

▷1957년 (40 세)           목포 사범학교에서 국어교사 교편 (마지막)

▷1961 년 (44세)           서울 의 출판사에서 번역일  근무 - 일본소설 '빙점'등  번역

▷1982 년 (65 세)          부인 문행자 작고(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

▷1993 년  (76세)          호주 이민 (단신)

                                       - 생식과 요가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며,  그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정리하고, 시와 수필등을 집필

▷1997 년 (80 세)          안치환이 부용산 노래 취입 (구전 가요)

▷1998 년  (81세)          박기동의 제자  김효자 교수가 부용산 노래 악보 원본을 제보

▷1998 년  5 월 29 일    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

▷1998 년 6 월 26일      벌교에서  부용산 음악 발표회 개최 

▷1999 년 9 월                벌교 부용산에 노래기념비 및 기념누각  건립

▷1998 년                       연극인 김성옥(목포출신)의 요청에 의거 시드니에서  부용산 가사 2절을 완성

▷1999 년 (82 세)          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 (대표 오성환)이 공주 전국향토연극제에서 부용산 연극 공연

▷1999 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 개최

▷2000 년 (83 세)           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이  제4회 벌교 꼬막축제 마지막날 (6일) 부용산 연극 공연

▷2002 년                        벌교 부용산 오리길 노래비 방문 (54년 만에 벌교 부용산 동생 묘 방문)

▷2002 년 4 월 24 일      목포여고 교정에  노래비 세움 

▷2002 년  5월 20 일 (85 세)    목포에서 부용산  (박기동 산문집) 발간 출판기념회 - 잠시 귀국

▷2003 년 (86세)                       영구 귀국 .아들(치과의사) 과 함께  거주 - 뇌경색으로 병원 치료

▷2004 년 5월 9 일 (87 세)       별세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내 부인과 합장

 

 


작곡가 안성현 선생 약력 

 

▷  1920 년 나주 남평에서 출생

▷   함경도 함흥에서 성장

▷   일본 도꾜 동방응악대학교  성악부 졸업

▷   목포항도여중 교편  (음악교사) 

     - 광주 사범대학교

     - 조선대학교

     - 전남여고

♡   성동월과 결혼 (1남 1녀를 둠) - 남한에서 살고 있음

▷   1950 년 최승희 따라 월북 (안성현은 최승희 남편 안막 의 조카임)

▷   작곡집 1집 (11곡 )

▷  작곡집 2집 (23 곡) - 처조카 성경래씨(광주 북구 연제동) 가 발굴

▷  작곡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시)

     - 부용산 (박기동 시)

    - 낙엽 (안성현 시)

    - 앞날의 꿈 (조희관 시)

    - 진달래 (박기동 시)

     - 내고향 (조희관 시)

 ▶ 2006. 4. 25  오후 3시에 노환으로 평양에서 별세 (86세)

 

 

노래 관련한  행사 등 일지

 

▷  1947              작사  (박기동) - 동생 박영애 사망으로 슬픔을 시로 씀
▷  1948              작곡  (안성현)  - 항도여중 김정희의 요절로 제자 잃은 슬픔을 박기동선생의 시에 곡을 붙임

▷  1950              안성현  처 삼촌 안막 , 안막의 부인 최승희 와 월북

▷  1993              박기동 시인 호주 이민

▷  1997              안치환 이 구전가요를  음반으로 취입 - 세상에 알려짐

▷  1998. 3.28.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정설'부용산' 에세이를 씀

▷  1998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김효자 경기대 교수가 악보를 제보

▷  1998. 5. 29     목포에서 부용산음악회 개최

▷  1998. 6. 1.      최성각(소설가)시가  단편소설 '부용산' 발표

▷  1998. 6. 26      벌교에서 부용산음악 발표회 개최

▷  1998               연극인 김성옥(목포출신) 의 요청에 의해 박기동 선생이 시드니에서 3일만에 2절 작시

▷  1999.  9          벌교 부용산에 부용산노래기념비및 기념 누각 건립

▷  1999               보성공연애술촌'연바람' (대표 오성환) 이 공주 전국향도연극제에서 부용산연극 공연

▷  1999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 개최

▷  2000               보성공연예술촌'연바람'이 벌교꼬막축제 마직막날(6일)  부용산 연극 공연

▷  2002               박기동 시인 벌교 노래비 방문 .

▷  2002 . 4. 24.    목포 여고 (구 항도 여중) 교정에 부용산 노래비 세움.

▷  2002.  5. 10.    박기동   산문집'부용산' 출판

▷  2002.  5. 28     연합뉴스, 경향신문에 박기동 시인 인터뷰 기사.

▷  2002.  6.  3.     목포에서 부용산 수필집 출판기념회 개최  - 6. 8 호주로 출국

▷  2003               박기동 시인 시드니에서 영구 귀국 장남과 거주 - 병원에서 퇴경색 치료

▷  2004. 2.12.      나천수 시인 (나주 향토사학자) 부용산 시 발표.

▷  2004. 7. 1.       KBS 라디오에서 최성환(목포 신안 향토사학자) 진행으로 서해안인물열전에서

                            박기동시인을 소개

▷  2004. 5. 9 .      박기동 시인 별세 -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부인옆에 안장

▷  2005.11. 7 .     전남일보 김용재 기자가  타계한 '부용산' 작사 박기동옹 기사 작성

▷  2006. 4.25       안성현 작곡가  평양에서 별세

 


구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