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동은 안성현처럼 학급담임을 맡지 않았고, 학적부 정리 등 기타 잡무 또한 맡지 않았다.
그 대신 박기동은 부임하자마자 20페이지가 넘는 타블로이드판 지면에다 교사들의 작품,
학생들의 작품을 선정해서 싣는 《새싹》이라는 문예지를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해방 이후 남한의 중학교 중에서 발행한 최초의 문예지였다.
안성현, 박기동 이 두 사람은 목포극장을 빌려서 ‘항도여중예술제’를 열었는데 매우 볼만한
잔치였다. 일개 여중학교에서 목포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연극, 무용, 독창, 합창, 시 낭송 등을
무대에 올린 대운동회 같은 축제였다.
이 예술제에서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시 낭송을, 한 사람은 음악 부문을 지도하였다.
박기동이 항도여중에 부임한지 8개월쯤 되었을 무렵, 박기동, 안성현 두 사람의 제자인 김정희가
열여섯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희는 해방 직전에 경성사범에 입학했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전학
온 학생이었다.
김정희는 얼굴도 예뻤지만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도 잘 했고, 문학에도 빼어난
소질을 보였다. (「감화원설계」-전국 학생백일장 장원상 수상작)
이런 학생의 죽음이니 학교 전체가 충격에 빠질 만큼 안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안성현의 대표곡인 「부용산」이 탄생한다.
이 노래가 작곡된 배경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스물네 살에 요절한 박기동 시인의
여동생 박영애이고, 또 한 명은 항도여중의 3학년 재학생이던 김정희(16세), 그리고 또 한 명은
안성현의 여동생 안순자(15세)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는 당시의 불치병이던 폐결핵으로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비극적인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시인이나 작곡가의 가슴에서 피어나지 못한 채 죽은 여동생과의 이별이
주제가 되었고, 여기에 김정희라는 애제자의 죽음이 오버랩 되면서, 세 사람의 죽음을 합하여
한세상을 풍미한 명곡이 탄생한 것이다.
박기동의 시 「부용산」은 그가 항도여중 부임 이전인 순천사범에 재직하던 1947년에, 하나 뿐인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은 작품이었다.
안성현이 박기동의 「부용산」을 어떻게 접했는지에 대해서는 박기동의 진술이 밝히고 있다.
『신동아』 2001년 11월호에 실린 박기동과의 인터뷰에는, 제자 김정희의 죽음을 많이도
슬퍼했던 안성현이 박기동의 습작노트에서 「부용산」을 발견하고서, 곧바로 가져다가 곡을
붙였다 한다.
김정희의 죽음에서 안성현은 몇 년 전 같은 병으로 죽은 자신의 누이를 떠올리면서 슬픔의 감정이
더더욱 증폭되었을 것이다.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에 비견될 수 있는 「부용산」은, 이들 세 명의 여성 모두를 위한
진혼곡이자, 소멸된 혈육에 대한 애절함과 제행무상의 보편적 심상을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노래한 연가였다.
1948년 8월 17일 안성현은 ‘안성현음악연구소’ 명의로 제1작곡집을 발간하였는데,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박기동의 시 「부용산」, 「진달래」, 조희관의 시 「앞날의 꿈」,
「내 고향」, 「어부의 노래」, 「봄바람」, 「비」, 박화성의 시 「들국화」, 안성현이 직접
지은 시 「낙엽」 등 총 10곡이 담겼다.
* 엄마야 누나야(시 김소월, 곡 안성현)
* 앞날의 꿈(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진달래(시 박기동, 곡 안성현)
* 내고향(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어부의 노래(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들국화 (작사 박화성, 곡 안성현)
* 낙엽 (시 안성현, 곡 안성현)
* 봄바람(작사 조희관, 곡 안성현)
* 비(시 조희관, 곡 안성현)
* 부용산(시 박기동, 곡 안성현)
-----이상 작곡順----
제1작곡집 끝부분에는 ‘뒷말’이라는 이름으로 작곡가 안성현의 소회가 적혀있다.
어떻게 해서 젊은 학생들의 불타오르는 음악열에 알맞은 곡을 만들어주나 하는 것이, 해방 후
오늘까지의 나의 과제이었습니다. 나는 그 과제를 혼자 가슴에 품고, 남모르는 괴로움을
겪어왔습니다.
이제 이 조그마한 하잘 것 없는 작곡집은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네들의 뜨거운 요청에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줄 수가 있을까를 은근히
두려워하는 바이외다.
다행히 이 길에 밝으신 여러 선생님의 따뜻한 가르침을 주신다면 매우 고맙겠습니다,
1948. 8. 지은이
‘뒷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안성현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학생들을 위한
노래를 만드는 일에 온힘을 쏟았던 강한 열정과 겸손한 마음가짐과 지칠 줄 모르는 교육적
실천력이 읽힌다.
안성현은 항도여중을 1949년 9월 15일 돌연 의원사직을 했다.
이는 의외의 일이며, 지금껏 그때의 사직의 이유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채, 몇 가지 방향의
추정이 모여들었다.
(그의 작곡 ‘부용산’을 빨치산이 불렀다는 이유로 사찰대상이 되면서 사표를 제출했을 것으로
보는 측과,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는 아버지와 천재무용가 최승희를 만나러 평양에 가기 위해,
그의 음악활동을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는 둥의 추정이 그것이다)
조희관 교장의 총애를 받은 박기동과 안성현은, 한 사람은 시를 썼고 한 사람은 곡을 붙여서
‘부용산’을 만들었는데, 이를 지리산에 숨어든 여순사건의 빨치산들이 부른 것이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국이라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목숨 부지가 어려운 현실이고, 1949년 9월이면
지리산으로 들어간 여순사건의 빨치산들이 「부용산」을 노래하고 있을 때이므로, 박기동과
안성현 두 사람은 억울한 죽음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때에 조희관은 박기동에 앞서서 안성현을 의원사직의 명목으로 미리 피신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정부는 안성현의 제1작곡집 발표 이틀 전인 1948년 8월15일에 수립되었다.
여순사건은 여기에서 불과 두 달여 후인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곧바로 여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가와 일반
시민들을 구별하지 않는 초토화 작전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여순사건의 잔류군인
빨치산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본격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이때부터 「부용산」이
불려 졌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선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간이라도 ‘적대적’이면 목숨 부지가 어려웠고,
안전한 곳은 익명성이 보장된 보다 큰 세상인데, 그래서 오직 “음악활동만을 위해 서울로
갔을 것”이라는 증언 또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김재민은 그 무렵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6·25발발 이후 계속되는 인민군의 진주로 미군이 목포 유류저장 창고를 폭격하는 일이 있었고,
시민들은 피난을 가는 등 불안한 나날을 어찌 보낼까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목포시내에 함포사격이 개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공포분위기가 커져 있었다.
우리 내외가 전쟁을 피해 목포에서 20㎞쯤 떨어진 일로의 농가에다 문간 방 하나를 얻어
기거하고 있는데, 그 집에서 안성현과 조념趙念을 함께 만났다.
조념은 안성현이 직장을 그만두고 뚜렷한 이유 없이 (추정컨대 음악활동의 무대를 전국적으로
넓히기 위해)서울로 옮겨가던 무렵, 목포중 음악교사로 내려온 작곡자 겸 바이얼리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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