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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구니로 무덤을 판, 테레우스의 자멸 이야기

道雨 2019. 7. 24. 12:37




사타구니로 무덤을 판, 테레우스의 자멸 이야기




프로크네와 필로멜라


이웃나라의 왕들은 이 펠롭스를 위로하러 테베로 모여들었다. 도시국가 시민들이 왕들에게 테베로 가서 펠롭스를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르고스, 스파르타, 펠롭스의 고향 땅인 뮈케나이, 당시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으로부터 분노를 사지 않았던 칼뤼돈, 비옥한 오르코메노스, 구리가 많이 나는 것으로 이름 높은 코린토스, 사람들이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메세나, 파트라이, 크게는 국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클레오나이, 넬레우스가 지배하고 있던 퓔로스, 피테우스의 치하에 들기 전의 트로이젠, 두 바다를 낀 코린토스 지협 양쪽의 여러 도시국가들…… 이 모든 나라에서 왕들이 펠롭스를 위로하러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겠지만 아테네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바다를 건너온 야만족들이 성을 에워싸고 백성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라키아 사람 테레우스는 원군으로 아테네로 달려가 이 야만족을 물리치고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아테네 왕 판디온은, 테레우스가 군사적으로 막강하고 재물이 많은데다가, 저 위대한 그라디보스의 후손인 것을 마음에 두고, 그와 끈을 맺어두기 위해 딸 프로크네를 주어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식에는, 가정의 여신인 헤라도, 결혼의 신인 휘메나이오스도, 카리테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 대신 저 무서운 에뤼니에스가 화장하는 데서 옮겨붙인 횃불을 들고 찾아왔다.

첫날밤의 잠자리를 꾸민 것도 이 복수의 여신들이었다. 복수의 여신들이 나다니자, 올빼미도 한 마리 신방이 있는 집 지붕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러한 흉조는 프로크네와 테레우스가 결혼할 때도 나타났지만, 이들 사이에서 첫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나타났다. 트라키아 백성들은, 이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왕과 왕비가 맞은 경사를 축복했고, 왕과 왕비는 자기네 일족과 왕국에 내린 은총을 신들에게 감사했다.

테레우스는, 자신과 저 판디온의 딸 프로크네가 결혼한 날을 축제일로 선포한 데 이어, 아들 이티스가 태어난 날도 명절로 삼았다. 하기야 인간이 무슨 수로 한치 앞을 볼 수 있으랴!


세월이 흘러 가을이 다섯 번 지나간 어느 날, 프로크네가 어리광을 부리느라고 지아비 테레우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를 사랑하신다면 사람을 보내어 제 친정 동생을 이리 오게 하든가, 전하께서 좀 데려다주세요. 제 아버지께는, 곧 돌려보내겠다고 하시고요. 필로멜라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저에게 이보다 나은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테레우스는 곧 배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그러고는 날을 잡아 트라키아를 떠나 돛과 노의 힘을 두루 빌려 아테네에 이르렀다.

장인 판디온과 사위 테레우스는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그간의 긴긴 회포를 풀었다.


테레우스는 자기가 아테네에 온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청을 받고 처제를 데리러 온 것인 만큼, 함께 가게 해주면 오래지 않아 돌려보내 주겠노라고 말했다.

장인과 사위가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마침 필로멜라가 들어왔다. 필로멜라는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바탕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오히려 이 성장이 무색했다. 필로멜라의 용모는,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나 깊은 숲 속에 사는 드뤼아데스를 묘사하는데 어울리는 말로써나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이들이 필로멜라처럼 단장하지 않는다면 그런 말로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필로멜라를 보는 순간 테레우스의 가슴속에서는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길은, 마른 옥수수 대궁이 아니면 건초 창고를 태우는 불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테레우스의 가슴속을 번져갔다. 필로멜라의 아름다움이라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제 성격 탓에, 그럴 만한 정도 이상으로 애를 태웠다. 원래 트라키아 사람들은 지극히 감정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민족성과 테레우스 자신의 성격 때문에 이 불길은 삽시간에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레우스는, 자기 왕국을 털어서라도 필로멜라를 옹위하는 시녀들에게 뇌물을 주고, 필로멜라를 기른 유모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필로멜라 자신에게도 귀한 선물을 안기고 싶다는 충동, 필로멜라를 납치하여 멀리 데려다놓고는 이 아름다운 불모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 고삐 풀린 충동에 따른다면, 테레우스에게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가슴은 안에서 번지고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했다. 그에게, 장인의 궁전에 더 머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시 바삐 아내 프로크네가 바라던 대로 필로멜라를 데리고 떠나, 자기 속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사랑에 신들린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는, 필로멜라를 데려가게 해달라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면, 그 책임은 바로 그 일을 프로크네에게 있다고 강변했다. 그는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까지 했다. 마치 프로크네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듯이……

, 신들이시여, 이렇게 눈이 먼 인간들을 굽어살피소서.


테레우스가 검은 마음을 품고 이렇듯이 고집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아테네 백성들은 그를 참으로 보기 드문 애처가라고 칭송했다. 결국 그들은 악행할 음모를 꾸미는 테레우스를 칭송하고 있는 셈이었다.

심지어는 필로멜라조차 그의 애절한 소망을 편들었다. 필로멜라는 두 팔로 아버지의 목을 안고, 형부를 따라가 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아버지는 딸이 좋아한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형부를 따라가라는 말 한마디가 딸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 리 없었다.


테레우스는, 아버지를 조르는 필로멜라를 보면서, 이미 마음속으로는 이 공주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의 목을 안은 채로 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었는데, 바로 이 광경이 테레우스의 불붙은 욕망에 끼얹는 기름이자 던지는 섶이었다.


딸이 아버지 판디온을 껴안는 것을 보는 순간, 테레우스는 자신이 판디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속을 끓였다. 하기야 필로멜라의 아버지였더라도 테레우스의 의도가 불순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마침내 아버지 판디온은 두 딸, 그러니까 동생을 보고 싶다는 큰딸 프로크네와 언니를 보고 싶다는 작은딸 필로멜라의 간절한 소망 앞에서 굴복했다.

필로멜라는 기뻐 날뛰면서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이 가엾은 필로멜라는 아버지가 승낙함으로써 자신과 언니 프로크네는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둘 다 파멸하게 되는 줄도 모르고……


왕실에는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황금 술잔은 포도주로 그득그득했다. 이 잔치가 끝나자, 손님들 모두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왕 테레우스는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주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잠이 올 턱이 없었다. 테레우스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짓을 그리며, 자기가 보지 못한 것,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필경은 자기 차지가 될 것을 상상했다. 요컨대 그의 욕정은, 잠을 이루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새벽이 오자, 테레우스는 귀국을 서둘렀다. 판디온 왕은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데려가는 딸을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한 다음, 이런 말을 덧붙여 했다.


"여보게, 자네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보니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네. 그래서 자네 간절한 소망에 따라 이 딸마저 자네를 딸려 보내네. 테레우스, 이제 나는 두 딸을 자네에게 맡기고 말았네. , 자네의 명예에 기대고, 하늘에 계신 신들을 증인 삼고, 우리를 이렇게 하나 되게 한 장인과 사위라는 관계를 믿고 부탁하네만, 이 아비를 대신해서 이 아이를 잘 돌보다주고, 되도록 하루라도 빨리 내게로 보내어주게. 나는 이 아이를 내 만년의 낙으로 여기고 사네. 때가 오면 이 아이마저 떠나보내야 하겠지만…… 그리고 너 필로멜라, 네가 이 아비를 사랑하거든 되도록이면 하루속히 돌아오너라. 네 언니가 친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이미 넉넉하게 아프다. 그러니 네가 이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이 말 끝에 판디온 왕은 소리 없이 울면서 이 딸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딸과 작별인사를 나눈 왕은, 테레우스와 필로멜라의 손을 잡고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게 한 다음, 이 둘의 손을 잡게 하고는, 멀리 떠나 있는 딸과 외손자에게 안부를 따뜻이 전하라고 당부했다.

목이 메었던지 판디온 왕은 더 이상은 말을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근심과 걱정과,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을 텐데도……


이윽고 필로멜라가 배에 올랐다. 바다가 노 끝에서 뒤로 밀려남에 따라 육지도 멀어지기 시작하자, 미개한 나라의 왕 테레우스는 외쳤다.

"내가 이겼다. 나는 드디어 그렇게 손에 넣기를 바라던 공주와 한 배에 올랐다!"


승리에 도취된 테레우스는 그토록 기다리던 그 사랑의 순간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던지 안절부절했다. 그는 자신의 전리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발톱으로 산토끼를 채어 제 둥지에다 내려놓고, 오갈 데 없는 이 희생물을 탐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약탈자인 독수리와 흡사했다.


이윽고 긴 항해를 끝마친 테레우스는 제 나라 해변에다, 이 긴 여행에 지친 배를 대었다. 테레우스 왕은 판디온의 딸 필로멜라를 끌고, 태고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담이 높은 오막살이에로 데려가 거기에 가두어버렸다.

필로멜라는, 무섭지 않은 것이 없는 판이라 당연한 일이겠지만, 창백한 낯색을 하고 바들바들 떨면서 언니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테레우스는 프로크네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는 대신, 자신의 검은 마음을 고백하고는, 아무도 돕는 이 없는 이 불쌍한 처녀를 힘으로 차지했다.


필로멜라는, 아버지를 부르면서, 언니를 부르면서, 하늘에 계신 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와줄 것을 빌었으나 하릴없었다. 필로멜라는 내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잿빛 이리의 이빨에 뜯기고 쫓기면서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해 떨고 있는 어린 양, 아니면 제 피에 젖은 제 몸을 억센 독수리의 억센 발톱에 붙잡힌 채 떨고 있는 비둘기같이……


제정신이 돌아오자, 필로멜라는 초상난 집에서 곡하는 여자처럼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제 팔을 할퀴고, 제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그러다 두 팔을 벌리고 외쳤다.


"이 정떨어지는 야만인, 이 무정한 약탈자야! 나를 보내면서 눈물로 당부하던 내 아버지를 보고도 마음에 남은 것이 없더냐? 내 언니의 근심 걱정, 내 때묻지 않은 젊음, 네가 했던 혼인에 생각이 미치지 않더냐? 너는 인간의 도리를 짓밟았다. 이로써 나는 내 언니의 원수가 되었고, 너는 우리 자매의 지아비가 되었으며, 내 언니 프로크네는 내 원수가 되었다. 이 배신자야, 이런 죄를 지으려 했으면 왜 나를 죽여놓고 짓지 못했느냐,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나를 더러운 공모자로 만들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내 혼백만은 순결을 잃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그러나 하늘에 계신 신들께서 이 광경을 보셨다면, 신들에게 놀라운 권능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이 지경이 되었다만 신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온전하다면, 너는 언젠가 이 죄값을 물어야 할 게다. 나 역시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사람들에게 네가 한 일을 낱낱이 고할 테다. 그럴 때가 오면 네 백성들 앞에서 자초지종을 남김없이 고하리라. 내가 이 숲에 갇혀 있어야 할 팔자라면, 나는 이 숲을 소리로 가득차게 하여, 내가 턱없이 당하는 것을 목격했을 터인 저 바위까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리라. 하늘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하늘에 신들이 계신다면 신들이 이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 말이 이 폭군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그런 그에게 두려운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분노와 만용의 노예가 된 테레우스는, 한 손으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로멜라의 머리채와 두 손을 뒤로 모두어 쥐고, 있는 힘을 다해 아래로 내리눌렀다. 칼을 본 필로멜라는, 죽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던지 그에게 목을 들이대고는 그를 조롱하고 아버지를 불렀다. 그러자 테레우스는 손가락으로 필로멜라의 혀를 잡고는 칼로 사정없이 잘라버렸다. 남은 혀뿌리는 여전히 필로멜라의 입 안에서 부르르 떨었고, 잘려진 혀는 검은 대지 위를 뛰어다니면서 못다 한 말을 마저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잘라진 혀는 갓 잘린 뱀 꼬리처럼 오그라들면서 주인의 발 아래서 죽어갔다. 이 잔인한 테레우스는, 이렇게 못할 짓을 해놓고도 만신창이가 된 이 필로멜라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그 죄많은 정욕을 채웠다는 소문이 있다.


이런 짓을 해놓고 테레우스는 염치좋게도 아내 프로크네에게로 되돌아갔다. 왕을 본 왕비 프로크네는 동생은 어떻게 하고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테레우스는 이야기를 꾸며, 아내에게 그럴듯하게 둘러대었다. 즉 슬픔에 잠긴 목소리, 비탄에 잠긴 얼굴로 필로멜라가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꾸민 목소리, 만든 얼굴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듣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프로크네는, 금실로 가장자리를 한 옷을 어깨에서부터 단숨에 찢어버리고는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주검 없는 무덤을 만들게 하고는, 있지도 않은 필로멜라의 혼백에 제물을 바쳤다. 프로크네는 이렇게 하고 동생의 기구한 팔자를 애곡했다. 그러나 프로크네가 정말 애곡했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태양신이 태양 수레를 하늘의 12군 사이로 두루 몰고 지나가자 1년이 갔다. 필로멜라는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었는데다, 단단한 돌로 쌓아올린 담은 여자가 깨뜨리기에는 너무 튼튼했다. 게다가 필로멜라는 혀를 잘려 벙어리가 되었는지라, 자기가 당한 일을 누구에게 발설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슬픔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역경과 곤경은 사람을 창조적이게 하는 법이다. 필로멜라는 베틀 같지도 않은 베틀에다 실을 걸고는 흰 바탕으로 베를 짜면서 거기에다, 자기가 그런 고통을 받게 된 사연을 붉은 글씨로 짜넣었다.

이 일이 끝나자 필로멜라는 이것을 몸종에게 주면서 손짓발짓으로, 그 나라 왕비에게 전하게 했다. 몸종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필로멜라가 부탁하는 대로 이것을 프로크네에게 전했다.


폭군의 아내는 그 천을 펴보고 나서야 사연을 알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불행을 알리는 사연이었다.

프로크네는 쓰다달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프로크네는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연은, 한마디 말로 그 반응을 나타내기에는 지나치게 슬픈 사연이기 때문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응분의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슬픈 사연이었다.

프로크네에게는 눈물을 흘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프로크네는, 복수할 계획을 세우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이 복수 계획은, 선악의 잣대를 깡그리 벗어난, 참으로 상궤를 멀리 벗어난 것이었다.


트라키아의 젊은 여자들이 디오니소스를 기려 3년마다 한 번씩 여는 엄숙한 축제 기간이었다. 이들이 베푸는 의식은 밤에 시작되는데, 이 의식이 시작되면 로도페 산은 신도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와 바라소리로 쩌렁쩌렁 울린다.

밤이 되자, 왕비 프로크네도 이 신을 경배하는 데 필요한 제구를 모두 갖추고 집을 나섰다. 머리에 쓰는 포도덩굴 관, 왼쪽 어깨에 드리우는 사슴 털가죽, 오른쪽 어깨에 둘러메는 짧은 창, 이러한 것들이 디오니소스 신을 경배하는 제사에 필요한 제구이자 무기였다.


프로크네는 몸종들을 거느리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가슴은 갖가지 생각으로 착잡했다. 프로크네는, 디오니소스 신의 광란에 쫓기는 신도로 가장하고 있었으나, 사실 프로크네가 쫓는 것은 슬픔 뒤에 오는 분노였다. 이윽고 프로크네는, 동생이 갇혀 사는 오두막에 이르렀다. 오두막 문은, 디오니소스 신도 특유의 외마디소리와 광란의 몸짓과 함께 부서져나갔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다가, 디오니소스 신도들 의상을 동생에게 입히고는, 머리에 담쟁이덩굴 관을 씌워 얼굴을 가려 왕궁으로 데려왔다.


필로멜라는, 자신이 그 저주받을 자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낯빛도 잃고 부들부들 떨었다. 프로크네는 동생의 머리에서 디오니소스 신도의 관을, 몸에서는 니오니소스 신도의 옷을 벗겼다. 프로크네는 동생을 껴안았으나, 필로멜라는 얼굴을 들고 언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못했다. 자기 때문에 언니가 불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로멜라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필로멜라는 이로써, 말로써 전하는 것 이상으로 명백하게 자신의 뜻을 언니에게 전하고 있었다. 필로멜라는, 하늘에 계신 신들에 맹세코, 테레우스의 폭력에 저항할 힘이 없어 순결을 잃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프로크네는 흐느끼는 필로멜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칼을 갈아야 할 때다. 아니, 칼보다 나은 무기가 있다면 그것을 버려야 할 때다. 필로멜라, 내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왕궁을 불바다로 만들고 테레우스를 그 불길 속에 던져넣으면 네 분이 가라앉겠느냐, 이 자의 혀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너에게 범죄한 사지를 잘라 육신으로부터 죄많은 영혼을 풀어내면 네 분이 풀리겠느냐. 시시한 복수는 안 된다. 받은 것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방도를 모르겠구나."


프로크네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아들 이티스가 제 어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프로크네의 머리 속에는 한가지 방도가 떠올랐다. 매정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면서 프로크네가 내뱉었다.

"어쩌면 제 아비와 이렇듯이 똑같이 생겼느냐?"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프로크네는 속으로 분을 감춘 채 복수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어미의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 가녀린 팔로 어머니의 목을 안고 뺨에다 입을 맞출 때는 프로크네의 마음도 흔들렸다. 프로크네는 마음의 고삐가 풀려가고 있는 데 당혹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는데도 프로크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복수의 결심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프로크네는 시선을 이 아들에게서 동생 쪽으로 옮겼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프로크네는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어째서 하나는 나에게 사랑의 말로 응석을 부리는데, 하나는 혀가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티스는 나를 어미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필로멜라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지 못하는가. , 이 어리석은 판디온의 딸아, 네가 누구와 혼인하였느냐? 너에게는 판디온의 딸이라고 할 자격도 없다. 테레우스 같은 자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프로크네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호랑이가 새끼사슴을 깊은 숲 속으로 끌고 가듯이, 아들 이티스를 왕궁에 있는 한적한 밀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치고 있음을 예견했는지, 두 손을 내밀고 두 번이나, "어머니, 어머니!"하고 부르면서 프로크네의 목을 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프로크네는 칼을 꺼내어 아들의 옆구리를 찌르고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상이었으나, 프로크네는 거기에서 손길을 몸추지 않고, 다시 칼로 아들의 목을 도려버렸다. 이 이티스의 몸이 산 사람의 몸과 다름없이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데도, 자매는 이 아이의 사지를 몸에서 발라내었다. 방바닥은 이 아이의 피로 바다가 되었다. 자매는 이 사지의 살을 요리하되, 일부는 청동솥에 넣어 삶고 일부는 구웠다.


프로크네는 준비가 끝나자, 아무것도 모르는 테레우스를 특별한 음식을 대접하겠다면서 불렀다. 부르면서, 친정 나라의 풍습인 신성한 의식이라는 토를 달고, 반드시 혼자 와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

프로크네는 이로써 경호병이나 시종이 왕을 따라나서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테레우스는, 신성한 의식이라는 말에 조상 전례의 예복으로 치장하고, 왕비의 초대에 응하여 앞에 놓인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물론 제 살인 줄도 모르고 맛나게 먹었다. 무슨 고기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먹던 그가 말했다.

"이티스를 이리 불러오오"

프로크네는 더 이상, 감격의 순간을 유예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프로크네는, 자기의 입으로 이 복수가 성취되는 순간을 선언하고 싶은 마음에서 지아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찾는 아이는 여기에 있소. 바로 그대 뱃속에 있소."


테레우스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티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는, 다시 이티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티스 대신, 조금 전에 죽은 이 아이의 피로 피투성이가 된 필로멜라가, 피 묻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이티스의 머리를 들고 나타났다. 필라멜라가 테레우스에게 내미는 이티스의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들었다.

필로멜라는, 자기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을까?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순간에 어울리는 말을 적절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대로한 테레우스는 식탁을 걷어차고, 스틱스 나라에 사는 에뤼뉘에스 자매 이름을 불렀다.


테레우스가 만일 복수의 여신들을 부를 수 있었더라면, 저 자신의 가슴을 찢고, 제 손으로 발라먹은 인간의 살, 제 자식의 살도 토해 낼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테레우스는 이제는 자식의 무덤이 되어버린 제 육신을 저주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러던 그는 칼을 뽑아들고 판디온의 두 딸을 뒤쫓았다. 판디온의 두 딸은, 도망치다 말고 문득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에게 날개가 생긴 것이었다.

이들 중 하나는 숲으로 날아들어갔고, 또 하나는 지붕 밑으로 날아들어갔다. 프로크네는 꾀꼬리, 필로멜라는 제비가 된 것이다.

지붕 밑으로 날아들어간 새의 가슴에는 살인한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진홍빛 핏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슬픔에 잠긴 채 복수를 서둘던 테레우스 왕도 새가 되었다. 머리에는 깃털로 된 긴 볏이 돋고, 부리가 칼날만큼이나 긴 새가 된 것이다. 금방이라도 싸우려는 것처럼 무장하고 있는 듯한 이 새를, 사람들은 후투티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