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

道雨 2019. 10. 1. 16:47




그리스 - 페르시아 전쟁



동서양 문명의 첫 충돌, 페르시아 전쟁




발생   기원전 492년
종결   기원전 479년

목차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는 페르시아                                  

    1.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겨냥한 까닭
      1. 1차 전쟁-하늘이 도운 그리스
        1. 2차 전쟁-마라톤 전투
          1. 3차 전쟁-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1. 전쟁 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변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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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의 제국이 되는 페르시아

              기원전 671년 오리엔트를 처음 통일한 나라는 아시리아각주1) 였다. 그러나 통일을 이룬 후 기원전 612년에 이르러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주요 도시인 아슈르와 니네베가 차례로 함락 당했고, 통일한 지 30년 만에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제국의 멸망 후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 강 삼각지)까지 넘보았다. 이 무렵 신바빌로니아의 나보니두스 왕은 지금의 이란 남부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아케메네스 왕가의 키루스(키루스 1세)와 동맹을 맺고 메디아에 대항했다.

              그의 아들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50년에 메디아를 정복하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워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때를 가리켜 서기 3세기 초에 등장하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구분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라고 부른다.

              이후 키루스 2세는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점차 소아시아 해안 지대까지 세력을 넓혀 그리스 도시들도 손에 넣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제3대 왕인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2~기원전 486년 재위) 시대에는 인더스 강에서 에게 해 북쪽 트라케에 이르는 지역까지 정복하여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제국의 주인이 된 다리우스 1세는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전국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정비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면서 제국내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여 상업을 발달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전국을 20여 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을 직접 파견하였고, 속주의 여러 민족에게는 그들의 언어와 종교 등 고유한 풍습을 존중하는 관용 정책을 펼쳐 정복한 지역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겨냥한 까닭

              그러나 문제가 되는 지역도 있었으니, 바로 소아시아(아나톨리아. 현재 터키의 아시아 지역을 이루고 있는 반도) 지역이었다. 일찍이 페르시아 왕국의 문을 연 키루스 왕 시대에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아시아 서쪽 지중해 연안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지방의 옛 이름)를 정복한 적이 있었으나, 그 후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이 세력을 키우면서 하나 둘씩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에 다리우스 1세는 바다와 가까운 이오니아 정복을 위해 새 수도 파르사(오늘날 파르스. 그리스 인들은 이를 ‘페르세폴리스’라 부름)를 건설하였다. 지중해로 세력을 확대하려던 다리우스 1세의 꿈은 당시 이오니아의 폴리스각주2) 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이룰 수 있었다. 특히 그 지방에서 가장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던 밀레투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이오니아 지방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인더스 강에서 에게 해 북쪽 트라게에 이르는 지역까지 정복하여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페르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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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기원전 500년 다리우스의 군대가 스키타이(기원전 6~기원전 3세기에 남부 러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활약한 기마 유목 국가)에게 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이때를 노려 다리우스 1세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 당시 이오니아의 중심이었던 밀레투스는 그리스 본토에 무장 지원을 요청했고, 기원전 498년에 그리스 본토의 에레트리아, 아테네 양국이 지원군을 보내왔다. 이 일에 분노한 다리우스는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폴리스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492년에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려는 원정에 나섰다. 이때부터 기원전 479년까지 계속된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 이다.



              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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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전쟁-하늘이 도운 그리스

              기원전 492년 총사령관인 마르도니우스(다리우스 1세의 사위)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육·해군은 헬레스폰투스(터키 북서부의 좁은 해협. 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에 모여, 그리스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육군은 마케도니아를 파괴했고, 해군은 타소스 섬을 정복했다.

              이처럼 기세등등하게 진군하여 그리스 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페르시아 군을 가로막은 것은 하늘이었다. 페르시아 군은 풍랑이 심하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지나는 길에 아토스 곶(바다나 호수로 가늘게 뻗어 있는 육지의 끝 부분) 근처에서 폭풍을 만났다. 이때 함선 300여 척이 파손되고 만 명이 넘는 군사가 물에 빠져 죽는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엄청난 타격을 입은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향한 첫 번째 원정을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2차 전쟁-마라톤 전투

              2년 후 다리우스 1세가 보낸 제2차 원정군은 먼저 에레트리아(그리스 중부에 있던 고대 도시)를 점령한 후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페르시아 군은 사모스 섬(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에서 출발하여 아테네로 직진하는 해로를 선택했다.

              약 2만 5천 명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쫓겨난 히피아스각주3) 의 안내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라톤 평원에 이르렀다. 페르시아 군이 이곳을 싸움터로 잡은 것은 마라톤의 넓은 평원이 페르시아의 기병이 싸우기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이 사실을 스파르타에 알리고, 힘을 합해 침략자와 싸우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당시 아폴론 신전에 제사를 지내는 기간인데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는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는 것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아테네는 1만 명의 자국 병력만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서야 했다. 이때 아테네 군을 도와준 것은 플라타이아이(코린트 만의 동북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보이오티아 지방에 있는 넓은 지역)에서 온 1,000명의 지원군뿐이었다.

              아테네의 군사 규모는 페르시아에 비하면, 거의 3배나 차이가 나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아테네 군의 밀티아데스 장군은 방어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다. 그 당시 전쟁에서는 진(군사들의 대열을 배치한 것)의 중앙에 강한 주력 부대를 먼저 배치하고, 양쪽 날개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는 반대로 진의 양쪽 날개에 강한 부대를 보내고, 중앙에는 약한 부대를 배치했다.

              마침내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을 공격했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전진하면서 페르시아 군 궁수의 공격을 피했다. 처음에 페르시아 군은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숫자였던 아테네 군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네 군의 예상 밖의 전략에 당하게 되자, 페르시아 군은 당황하여 마라톤 평원에서 물러났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 군은 6,400명, 아테네 군은 192명이 전사하였다. 아테네의 대승이었다. 이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로 함대를 출동시켰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소아시아로 돌아갔다.

              한편 마라톤 평원의 전투 결과를 걱정하며 광장에 모여 있던 아테네 시민들 앞에 달려 와승전 소식을 전한 전령이 있었다. ‘에우클레스(페디피데스라고도 함)’라 불리는 그는 아테네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41.6km를 달려와, “기뻐하라. 우리가 승리했다!”라는 말을 전하고는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기원으로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대회부터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테네가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


              첫째, 강한 정신력 때문이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면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에 놓일 상황이었다. 따라서 마라톤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대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민족이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속력과 승리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아테네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뛰어난 전술 때문이다.


              아테네 군대는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유지했다. 이것은 그리스와 같은 산악 지형에 적합한 전투 방식이다. 이에 비해 페르시아 군대의 전술은 궁수들이 활을 쏘아 공격을 한 뒤, 기병이 적을 상대한 다음에 보병들이 마무리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넓은 평원 지형에 적합한 전술이었기 때문에 마라톤 지역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네가 공격하자 페르시아 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밀티아데스의 역배치 전술도 페르시아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3차 전쟁-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 패한 아픔을 뼈아프게 새기면서 다시 아테네 공격을 준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왕은 기원전 480년 봄 3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직접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3차 페르시아 전쟁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이라서 이동 속도가 느렸다. 그 덕에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30여 개의 도시 국가들은 동맹군을 조직하고, 페르시아의 공격에 맞설 준비를 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제1강국이었던 스파르타가 맡았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을 담당하였다. 테르모필라이(아테네 북서쪽 약 136km 지점에 위치한 고개)에서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가 지휘하는 육군이 페르시아 육군을 저지하는 동안, 아테네가 지휘하는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격멸시킴으로써 페르시아 군 전체의 기세를 꺾는다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라이의 좁은 길에 약 7,000명의 육군을 배치했고, 아르테미시움(그리스의 크레타 섬 다음으로 큰 섬인 에보이아 북쪽 해변에 있는 곶)에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전함 271척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한 페르시아 육군은 4일 동안 정찰을 한 뒤, 그리스 군의 세력이 대단치 않은 것을 보고는 5일째 되는 날에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많은 병력만 잃었다. 그러나 7일째 되는 밤, 그리스의 한 반역자가 페르시아 정예 부대를 좁은 길을 돌아 그리스 군의 뒤쪽으로 안내했다.

              날이 밝자 페르시아 군은 일제히 그리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남은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이렇게 테르모필라이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시내로 쳐들어왔지만, 이미 아테네 시민들은 다른 곳으로 피해 있었다. 페르시아 군은 텅 빈 도시를 짓밟고 다니면서 불을 질렀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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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그리스 해군을 지휘하고 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후퇴하는 척하며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키프로스 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고대 도시)의 좁은 해협으로 유인하는 교묘한 전략을 펼쳤다. 마침내 페르시아 해군이 그리스의 작전에 넘어가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리스 함대의 갤리선(그리스의 전함)들이 최고 속력으로 달려와 페르시아 함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으며 공격을 해 댔다. 이에 당황한 페르시아 군은 배를 돌리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네 배들끼리 충돌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밤이 되어 바람이 강한 서풍으로 바뀌면서 폭풍우까지 몰아치자, 그리스 함대는 재빨리 살라미스 해협 깊숙이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페르시아 함대는 폭풍우에 휩쓸려 4분의 3이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자신의 함대가 무참히 패하는 것을 본 크세르크세스는 그해 겨울에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의 군대는 기원전 479년 여름까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에서 일어난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미칼레(사모스 섬의 미칼레 반도) 전투를 끝으로 마감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싸움은 그 뒤에도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테네가 앞장서 새로 결성된 델로스 동맹이 이오니아에 있는 폴리스들을 페르시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계속 공세를 펼쳤던 것이다. 델로스 동맹국들의 공격은 대부분 성공했고, 기원전 448년경에는 아테네를 비롯한 동맹국들과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사이에 전쟁을 마감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현존하는 페르시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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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변화

              페르시아 전쟁은 지중해에 세력을 넓히려던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3차에 걸친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패배로 끝을 맺고 말았다. 대신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게 되었다.

              특히 아테네는 살라미스 해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며, 페르시아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기원전 478년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맹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아가 아테네는 50여 년 동안 미술, 정치, 시, 연극, 철학, 법학, 논리학, 역사, 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창조력이 넘쳤던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세력이 점점 약해져, 왕권 다툼과 속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페르시아는 기원전 331년에 마케도니아 왕국(그리스 북쪽에 있던 고대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 대왕)에게 무너져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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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지방 반란과 진압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아테네, 스파르타 등)페르시아 제국이 싸운 전쟁이며, 기원전 499~450년(약 50년 동안)에 벌어졌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이미지 출처 : 네이버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여러 지역을 정복하면서 현재의 그리스, 이집트, 터키와 중동을 아우르는 굉장히 넓은 영토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정복전쟁을 하면서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전쟁이 나면 수십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과 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발칸 반도에서 각 지역에서 생겨난 도시국가들간의 느슨한 연합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불화나 분쟁도 많이 있어거 도시국가들간의 전쟁 또한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정말 차이가 많이 날 정도입니다. 영토, 정치체제, 

              그렇다면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왜 싸웠는지

               

              1. 이오니아 지방 반란

              기원전 540년경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에게해로 진출할 수 있는 이오니아 지방을 정복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오니아 지방의 지역도읍이였던 사르디스를 중심으로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각 도시국가에 참주를 보내어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 중 밀레토스의 참주였던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낙소스 섬을 정복하기 위한 연합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페르시아는 에게해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뻗치기 위해 낙소스섬을 확보하기 위해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같이 원정을 갔던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사촌 메가바테스와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불화로 낙소스 섬을 침공할 시기를 놓쳤고, 낙소스 세력에게 섬을 방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게됩니다.

              그리고 낙소스섬은 원래부터 난공불락의 도시 중 하나였으며, 그리스 본토 상인들로부터 보급을 충분히 받으면서 4개월 간 농성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군자금과 보급품 부족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기원전 499년)


              아리스타고라스는 이 원정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부담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참주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결국 이오니아 전 지역 선동하여 페르시아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기원전 499년)


              우선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 도시국가에 있던 참주를을 추방시키고 민주정을 시행하여 이오니아의 시민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그리고 이오니아 도시국가들만의 군사력으로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이 때 아테네와 에레트레아가 함대 25척을 지원하게 되고, 에페수스에서 이오니아 반란군과 합류하여 사르디스로 진격하게 됩니다. 결국 이오니아 반란군은 사르디스를 함락시키고, 불태우게 됩니다.(기원전 498년)


              그러나 사르디스를 불태우고 에페수스로 귀환하던 이오니아 반란군은 도중에 페르시아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르디스 전투로 지쳤던 이오니아 반란군은 또다시 페르시아군과 싸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오니아 반란군은 와해되어 각 도시국가로 돌아가게 되고, 지원을 왔던 아테네와 에리트레아는 그리스 본토로 귀환하게 됩니다.

              에페수스 전투에서 이오니아 반란군은 페르시아군에게 대패하고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기원전 498년)


              이러한 만행을 참을 수 없었던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이오니아 외부지역부터 반란세력을 제압하기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카리아 지방까지 반란이 일어나 규모가 커졌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지만 페다수스 전투에서 이오니아 반란군의 매복에 따라 페르시아군은 궤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약 2년 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기원전 497~495년)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은 이오니아 반란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육군과 해군을 재집결하고, 반란의 본거지인 밀레토스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에 이오니아 반란군은 밀레토스는 밀레토스인들에게 맡기고, 페르시아 해군을 막기 위해 라데섬에 이오니아 함대를 집결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은 확실한 승리를 위해서 일부 이오니아 도시국가 세력에게 사신을 보내 투항하라고 부추겼습니다.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페르시아 군이 공격을 시작하자 일부 이오니아 세력이 이탈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오니 반란군의 전선이 붕괴되고, 라데해전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밀레토스가 점령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인해 이오니아 반란의 근거지를 소탕했고, 대부분의 이오니아 반란군을 진압하게 됩니다.(기원전 494년)

               

              이로써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소아시아를 다시 얻은 다리우스는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보복과 자신의 영토에 그리스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윽고 기원전 492년에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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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이오니아 반란을 제압한 페르시아 제국은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네에레트리아를 보복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전쟁준비를 마친 페르시아 제국은 드디어 제2차 그리스 원정을 나서게 됩니다. 

               

              1.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년)

              페르시아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차례대로 점령하고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육군과 해군이 그리스 반도를 향해 진군하지만, 아토스 곶에서 대부분의 함대가 침몰되면서 제1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은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알아두면 좋은 상식>

              당시 나침반이나 천문학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선은 반드시 지상을 옆에 두고 항해해야 했고, 야간에는 항해를 하지 못하는 제한사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군의 무기나 보급품, 식량을 대부분 배를 이용해서 보급했었기 때문에 육군과 해군은 반드시 같이 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토스 곶에서 침몰된 함대 중에서는 아마 보급품이나 식량을 실은 배도 침몰되었을 수 도 있었기 때문에 육군 단독으로 갈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해봅니다.

               

              2.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0년)

               

              제1차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다시 전쟁 준비를 하게 합니다. 기원전 490년에 준비를 마친 페르시아 제국은 제2차 그리스 원정을 나서게 됩니다. 원정군 규모는 보병 2만 5천명과 기병 1천명으로 구성되었고, 600척의 군함이었다고 합니다. 제2차 원정은 제1차 원정과 달리 여러 섬을 거쳐 곧바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있는 아티카 반도로 갈 수 있는 해로를 이용해서 침공합니다.

              페르시아군은 낙소스섬에 상륙하고, 곧이어 델로스섬을 지나 에레트리아에 도착하여 6일만에 점령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곧이어 아테네로 향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군은 1만 5천명을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고, 나머지 1만명은 아테네 쪽으로 보내는 양동공격을 펼칩니다.


              페르시아 침공 소식을 들은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지원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지원을 약속했으나, 종교행사가 끝나는 11일 후에야 병력을 파견하겠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지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비를 취할 것인지, 아니면 해안지역에 병력을 내보내 페르시아군을 막을 것인지에 대한 격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자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밀티아데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약 1만명의 중장보병을 이끌고 마라톤 평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드디어 마라톤 평야에서 맞붙게된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

              여기서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의 특징을 잠깐 알아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전투의 결과만 알면 물론 좋지만, 이 전투가 어떻게 이겼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지식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페르시아군, 그리스군의 비교분석>

               

              ■ 페르시아군의 특징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지역에 대한 정복전쟁을 하면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고,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이집트 등 주요 정복지역에서 상비군을 운영하였고, 유사 시에는 각 지방에서 군대를 징집하여 약 30만명까지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군은 아주 다양한 병종과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 다국적 군대였습니다. 일명 불멸의 부대라고 불리던 "임모탈" 정예보병과,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궁병(탄바르바라), 이를 엄호하는 방패병(스파라바라),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정예창병(아르스티바라), 페르시아 최강의 전투력이라고 알려졌던 유목민족 사카족의 도끼병(타카바라)도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주로 기병과 궁병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주요 전술은 좌우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기병이나 전차부대를 측후방으로 우회시켜서 적의 후방을 차단하여 공격하고, 궁병으로 적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보병으로 백병전을 벌이는 진형을 주로 운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페르시아군은 보병, 궁병, 기병 등 여러 병종을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이 전술은 후대에도 사용되는 기본적인 전술이 되기도 합니다.

               

              ■ 그리스군의 특징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과 다르게 궁병과 기병이 없는 보병만을 운용하였습니다. 

               

              그리스군에서 기병과 궁병이 없었던 이유는 지리적인 특징과 그 당시 그리스인들의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병을 육성하려면 말을 키우려면 목초지가 있어야 하지만, 그리스는 산악지형이 많았기 때문에 말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궁병은 그 당시 "활은 비겁한 사람들만이 쓰는 무기다."라고 하며 활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그리스군은 기병과 궁병이 아닌 보병만을 이용한 전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스군은 중장보병이라고 불리는 중장갑옷을 입은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동제ㆍ철제 흉갑(토락스), 정강이받이를 착용하였고, 주력무기는 2.1~2.4m 길이의 긴 창(사리사)과 커다란 방패(호플론), 단검(파라조니움)을 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호플론을 들고 있는 병사라고 해서 그리스군 중장보병들을 "호플라이트"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이들은 그리스 체전 "올림피아" 경기를 통해 몸을 부단히 단련했고, 이를 통해 강력한 신체와 체력을 바탕으로 약 34kg에 달하는 장비와 무기를 장비하는 중장보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중장보병들이 통상 8열 횡대대형을 밀집 사각형 방진(팔랑크스)은 전투를 벌일 때 단단히 뭉쳐 밀집대형의 충격력을 이용해 상대편의 방진과 정면충돌하여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진형이었습니다.

               

              이 진형에서 중요한 것은 최전방열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며, 제3열까지의 중장보병 창들이 앞으로 노출하여 전방에 찌르기 경합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쓰러지는 병사가 생기면 뒷열에 있는 중장보병들이 자리를 메우는 방식으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진형에서는 주력을 주로 우익에 집중 배치하였었고, 방진 전체가 동시에 돌격하여 상대를 밀어붙여 싸웠다고 합니다. 또한 이 전투에서는 무엇보다 병사들간의 단결력이 필요했고, 또한 오랜시간동안 중장비를 갖고 싸워야 하기 때문에 체력 또한 중요했습니다.

               

               

              팔랑크스는 강력한 정면공격으로 정면의 적을 압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기병과 궁병이 없었기 때문에 다채로운 전술을 운용할 수 없었고, 또한 측ㆍ후방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 페르시아군 vs 그리스군이 싸운다면?

               

              그렇다면 기병을 이용한 측후방공격을 잘하는 페르시아군과, 전방공격은 정말 강하지만 측후방이 취약한 그리스군이 싸운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먼저 페르시아군은 궁병을 이용하여 초기에 그리스 보병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 사이에 페르시아 기병은 그리스군의 측후방을 우회공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보병은 적 보병과 백병전을 위해 앞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페르시아 궁병으로 지속적으로 그리스 보병에게 피해를 입히고, 페르시아 보병이 그리스 보병과 백병전을 벌이게 될 때 페르시아 기병이 측후방으로 우회해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해서 적을 섬멸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테네로 직접 공격하기 위해 우회해서 가고 있는 페르시아군 또한 방어해야하는 위급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밀티아데스 장군은 우선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을 격퇴하고, 아테네로 돌아가 우회해서 오는 페르시아군을 방어하자는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3. 마라톤 전투


              밀타아데스 장군은 페르시아군의 강점인 기병과 궁병을 무력화시키고, 그리스군의 장점인 중장보병의 팔랑크스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전술을 구상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아테네로 우회해서 오고있는 페르시아군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신속하게 마라톤 평원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밀티아데스 장군은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마침내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먼저 밀티아데스 장군은 페르시아 기병의 측후방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양측면을 하천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전장을 선정하여 페르시아군을 유인하게 됩니다. 지도에 보는 것과 같이 양측면에 강이 흐르는 곳으로 페르시아군을 유인하게 되고, 아테네군은 산비탈에 위치하여 페르시아군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세로 유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하게 됩니다.


              또한 밀타아데스 장군은 아테네군 보병의 종심을 줄이고, 그 대신 전면을 페르시아군과 일치하도록 길게 늘렸습니다.

              그리고 중앙병력을 얇게 배치하고, 양측면에는 병력을 두껍게 배치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페르시아군에 비해 병력이 열세인 것도 있었지만, 페르시아군 기병이 우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한 것도 있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당시 페르시아군 보병은 무장이나 훈련, 위력을 그리스군의 중장보병과 비교해본다면 약하기 때문에, 정면으로 붙는다면 그리스군 중장보병이 우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테네군 중앙군을 얇게 배치하고, 대신 페르시아군의 강점인 기병에 대해서 더 많은 병력으로 대비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페르시아군은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고, 후방에는 궁병, 가운데에 보병을 배치하는 자주 사용하던 진형으로 배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방에는 페르시아에서 고용한 각종 용병들도 있었고, 그 중에서 용맹하다고 소문났던 샤카족 도끼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라톤 전투(3)


              원래대로라면 페르시아군 기병은 측후방을 우회하여 아테네군을 교란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양측면에 있는 하천과 넓게 배치된 아테네군의 진형 때문에 페르시아 기병은 우회공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군은 중앙을 집중공격해서 아테네군의 중앙부대를 격파하고, 아테네군의 좌, 우익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라톤 전투(4)


              이제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이 서로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하고, 페르시아 궁병들의 사정거리(약 162m)에 들어가자, 아테네군은 갑자기 페르시아군쪽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페르시아군 궁병에게 받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밀티아데스의 전술 중 하나였습니다.

               

              게다가 아테네군은 산 위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더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뛰어내려 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라톤 전투(5)



              궁병의 공격을 피하고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아테네군은 곧바로 페르시아군 기병 및 보병과 맞붙게 됩니다.

               

              처음에는 페르시아군의 집중된 중앙공격으로 아테네군 중앙부대는 뒤로 물러나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군의 샤캬족 도끼병들의 활약으로 잠시 아테네군에게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군의 양측면의 강화한 병력이 페르시아의 양측면으로 공격을 들어오게 되면서 전황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마라톤 전투(6)


              아테네군의 양측면 집중공격으로 페르시아군은 포위되었고, 점차 바다방향으로 밀려나게된 페르시아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아테네군에게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 상황은 단지 15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그리스군의 속도와 기막힌 전술에 놀란 페르시아군은 미처 준비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당했고, 결국 패배하게 됩니다. 

               

              이 전투로 아테네군은 192명의 손실을 입었으나, 페르시아군에게 6천 4백명이나 되는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전투를 끝낸 아테네군은 쉬지 않고, 곧바로 아테네로 급속행군하게 됩니다.

               

              약 40km이나 되는 거리를 36kg이나 되는 장비와 무기을 장비한 중장보병들은 단 3시간만에 아테네시에 도착하여 방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회하던 페르시아군은 이런 상황을 보고 공격을 단념하고,그대로 페르시아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또한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10년 동안 휴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황제가 되면서 다시 전운이 돌게 됩니다.

              그리고 이윽고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를 침공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게됩니다.

              1차, 2차 원정과는 다른 대규모로 준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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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 전투




              아테네군 장군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 기병대가 잠시 진영을 비운 틈을 타 페르시아 보병을 전면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다.
              아테네군 1만여 명이 페르시아군 1만 5,000명과 싸워 이겼다. 페르시아군 가운데 약 6,400명이 죽고, 나머지는 간신히 바다로 도망쳐, 페르시아 무기보다 그리스의 긴 창, 칼, 갑옷, 투구가 더 우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전설에는 아테네인 전령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달려와 그리스의 대승을 알리고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근대 마라톤 경주의 기원이 되었다.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마라톤 전투 군대의 주요 움직임을 나타낸 지도

              ⓒ wikimedia commons | wikipedia



              아테네군은 오후 한나절 만에 제1차 페르시아 침략을 물리 쳤다.

              페르시아가 침략하자, 아테네인들은 급히 군대를 소집해, 장군 10명이 각각 1일씩 돌아가면서 지휘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쪽과 적의 공격을 기다리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고, 마침내 문관인 칼리마코스가 공격을 결정함으로써 문제가 타결되었다.

              그뒤 장군 4명이 아테네 출신 장군 밀티아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어 그가 실질적인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스군은 넓은 평야에서 페르시아 기병대와 싸워 이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 그리스군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잠시 진영을 비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 보병을 전면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아테네군 1만 명과 플라타이아이인(人) 1,000명을 거느리고 페르시아군 1만 5,000명과 싸워 이겼다. 그는 그리스 전열 측면을 강화한 뒤 페르시아 주력부대를 중앙으로 유인해 포위했다. 거의 완전 포위되었던 페르시아군 가운데 약 6,400명이 죽고 나머지는 간신히 바다로 도망친 반면, 그리스군은 칼리마코스를 비롯한 192명만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무기보다 그리스의 긴 창, 칼, 갑옷, 투구가 더 우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전설에는 아테네인 전령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달려와 그리스의 대승을 알리고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근대 마라톤 경주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잘 훈련된 주자(走者) 페이디피데스(피디피데 스, 필리피데스라고도 함)를 보냈던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약 2일 동안 240㎞ 정도를 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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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페르시아 전쟁

              - 테르모필레 전투와 스파르타 300인 -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휴전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휴전기간 동안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의 정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 페르시아 제국의 전쟁 준비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게 패배했지만 곧이어 전쟁을 다시 준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반란 진압을 위해서 그리스 원정은 미뤄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집트 반란 진압을 준비하던 다리우스 1세가 죽게 되면서 그리스 원정은 무기한으로 연기됩니다.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 & 크세르크세스 1세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었던 크세르크세스 1세가 황위에 오르게 됩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곧바로 군대를 동원하여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였고, 부왕의 유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게 됩니다. 먼저 사르디스에 진영을 설치하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부교 제작 토스 곶 운하 건설을 지시합니다. 또한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페니키아, 이집트 등 여러 지역에서 약 16만명의 병력과 1,300척의 함선을 소집시키게 됩니다.

               

              기원전 482년에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부교가 완공되었지만 곧 폭풍으로 유실됩니다. 그러자 크세르크세스는 공사 감독을 참수시켜 버리고, 다시 건설을 지시한 끝에 기원전 480년에 부교가 완성됩니다.

               

              기원전 480년 봄에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완성된 부교를 통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게 되면서 제3차 그리스 원정이 시작됩니다. 크세르크세스의 목표는 그리스 반도를 장악하고 도시국가들을 복속시키는 것이었고, 이 중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에게 패배를 안겨준 아테네에게 복수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을 것입니다.

               

              2. 아테네의 해군 창설

               

              마라톤 전투 이후 아테네에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재침공에 대한 대비방법을 두고 육군 강화와 해군 강화로 의견이 갈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3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맹활약하게 될 테미스토클레스 장군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 장군의 제자였으며, 마라톤 전투에도 직접 참전하였습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


              마라톤 전투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생각하게 됩니다.

              아테네는 대부분 산악지형이고 토양이 비옥하지 않아 농사 지을 토지가 매우 부족했고, 또한 천연자원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빈약한 자원을 해소하기 위해 아테네는 일찍부터 무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을 창설시켜 강력한 함대를 통해 무역로를 보호하고, 이를 통해 부를 쌓을 수 있는 해양국가로 거듭나야지만 아테네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또한 페르시아군의 침공을 저지했지만 또다시 침공을 해온다면, 아테네 육군만으로는 저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육군보다는 해군을 통해 바다에서 페르시아군을 무찔러야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육군강화를 주장하던 정적 아리스티데스를 "도편추방제"로 추방시켜 버리고, 우연히 티카 반도의 라우리움 산 은광에서 은맥이 새로 발견되어 함대를 만들 수 있는 자본을 얻게 됩니다. 원래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공공재산은 시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주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라우리움 산의 은을 해군 창설에 투입시키기 위해 책략을 펼치게 됩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책략이란 이웃나라인 아이기나와의 경쟁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기나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테네와 아이기나 사이에 작은 마찰이 있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을 이용하게 됩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이기나와 싸우기 위해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대부분 민중들이 동의하게 되어 라우리움 산의 은으로 함대를 건조하게 됩니다. 그 결과 테미스토클레 주도로 약 300척의 함대를 건조하여 아테네만의 해군함대를 창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테네는 왜 육군강화와 해군강화로 의견이 갈렸던걸까요?

               

              당시 아테네의 중장보병은 자유인인 동시에 경제적 능력이 있는 아테네의 시민이어야 지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장보병의 전투장비는 약 30드라크마의 비용이 들었고, 당시 1드라크마는 4.3그램의 순은으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과 같았다고 합니다. 또한 약 70파운드(약 31kg)의 장비를 운반하고, 정비할 수 있는 노예를 거느릴 수 있는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경제적 능력이 없는 하층민들은 절대 중장보병이 될 수 없었고, 대신 궁수나 함대의 노잡이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중장보병들만 투표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고, 빈민층들은 정치에 배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군을 창설하게 된다면 이러한 정치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해군이 창설하게 되면 전함 1척당 200명의 노잡이를 고용해야 하고, 이들이 공을 세우고 수군으로서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면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수군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존 기득권층이었던 상류층 시민들은 이를 곱게 보일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민중들은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해군 창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고 합니다.

               

              3. 그리스 연합군 결성

               

              아테네는 해군함대를 창설하였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페르시아군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협조가 절실했습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 제국이 기원전 481년에 아테네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항복을 의미하는 흙과 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는 특사를 파견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제 2차원정 때 항복을 요구하는 페르시아의 특사를 죽인 적 있었기 때문에 배제하고, 다른 도시국가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북부와 중부 도시국가들과 테베는 일찌감치 페르시아군에게 항복을 하게 되게 되면서 아직 항복을 하지 않은 테네, 스파르타 주도로 동맹을 결성하고 그리스 남부 도시국가들이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도로 코린토스에서 연합회의가 열리게 되고, 정식적으로 연합을 구성하고 연합에 가입된 국가 중에서 병력 지원요청을 하게되면 병력 파견을 할 수 있는 협약을 맺게 됩니다.

               

              4. 페르시아 3차 그리스 원정의 시작


              크세르크세스의 최종목적은 사르디스에서 출발하여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지나 아티카 반도로 남하하여 아테네를 복속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진출하여 그리스 전 지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페르시아군의 육군과 해군은 사르디스포카이아에서 각각 출발하게 되고, 부교를 통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이 출정했다는 첩보를 얻게된 그리스 연합은 다시 모여 전략회의를 하게 됩니다.

              이 회의에서 테살리의 대표가 템페의 좁은 계곡을 통해 페르시아군을 막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고, 그 의견이 채택되어지면서 그리스 연합군은 약 1만명의 중장보병을 템페 계곡으로 파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파견된 템페계곡으로 오게된 그리스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1세에게 뜻밖의 경고를 듣게 됩니다.

              사란토포로 고개를 통해 페르시아군이 진군한다면 템페협곡을 지나지 않고도 그리스로 진격할 수 있다는 점과 페르사아군이 1~2차원정과 비교가 안되는 대규모의 병력이 침공해오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게 됩니다.

               

              회의 끝에 그리스 연합군의 중장보병들은 결국 철수하게 되고, 이 때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본격적으로 그리스 침공을 위해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곧장 전략회의를 열게 되고,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페르시아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육군과 해군이 올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육군은 테르모필레에서, 해군은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군을 막을 것을 제안을 하였고, 회의 끝에 이 의견은 채택되어 집니다.


              그래서 그리스 연합군의 육군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해군은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이 지휘하여 각자 방어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왜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을 막자고 하였을까요?

              만약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온이 페르시아군에게 돌파된다면, 에우보에아 해협의 제해권이 페르시아군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에우보에아섬을 고립시킬 수 있었고, 아티카 반도 이북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레를 지나지 않고 우회해서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쪽은 대부분 산악지형이었으며, 산악지형으로 가게 되면 해군으로부터 보급을 받을 수 없는 제한사항이 있습니다. 또한 가져온 보급품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그리스를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군은 바다와 밀접해있고, 아티카 반도로 곧장 진격할 수 있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해군은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지나야만 페르시아 육군에게 보급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5. 테르모필레 전투

               

              그리스 연합 육군은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테르모필레에 주둔하게 되고, 방어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 육군 지휘관 레오디나스 왕은 스파르타 병력 3,000명과 근위대 300명,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도 병력을 지원해온 4,000명을 더한 총 7,000명의 병력을 이끌었습니다.

               

              그에 비해 페르시아군은 약 16만명이었기 때문에 레오니다스 왕에게 있어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연합군 육군의 수가 적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냐하면 이 때 당시 스파르타에서는 평화를 축복하는 축제 중이었고, 이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해서는 안되는 축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워낙 다급한 상황이어서 스파르타 2명의 왕 중 1명인 레오디나스 왕이 근위대와 자식이 있는 중장보병 3,000명만을 이끌고 테르모필레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도 레오디나스 왕은 지형적 특징을 이용해서 대규모의 페르시아군을 방어하고자 하였습니다.

              테르모필레 협곡은 겨우 전차 1대가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협곡이었으며, 과거 포키스인들이 테살리인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방벽이 있어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이러한 지형은 그리스 중장보병의 약점인 측ㆍ후방을 보완할 수 있었고, 강점인 전방 충격력을 이용해서 페르시아군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또한 테르모필레 협곡을 우회할 수 있는 샛길에 포키스군을 배치하여 혹시 모를 페르시아군의 우회공격에도 대비하였습니다.

               

              방어준비를 마친 그리스연합군은 곧이어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페르시아군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5일 뒤에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어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먼저 페르시아군은 궁병을 이용해서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대규모 보병을 투입시켜 그리스군을 섬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의 궁병 공격은 그리스 중장보병의 방패와 갑옷으로 인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고, 전투력을 약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한 테르모필레의 좁은 협곡으로 인해서 페르시아군의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투입할 수가 없었고, 훈련이 잘 된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팔랑크스로 인해 페르시아군은 각개격파되어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연합군은 일정한 시간이 되면 교대를 해주어 전투 피로를 줄여 장시간 동안 전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양상으로 페르시아군은 패퇴할 수 밖에 없었고, 급기야 페르시아의 정예군 "이모탈" 부대도 투입시켰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효과적인 방어작적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투는 둘째날까지 이러한 양상으로 진행되어 크세르크세스 1세는 초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근 도시에 살고 있던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군에게 테르모필레 협곡을 우회할 수 있는 샛길을 알려주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게 됩니다. 게다가 에피알테스가 페르시아군에게 길잡이로 그 길까지 안내를 해주게 됩니다.


              에피알테스의 유도로 샛길로 우회한 일부 페르시아군은 이를 지키고 있던 포키스군과 마주하게 됩니다. 

              곧이어 교전이 벌어지고, 포키스인들은 끝까지 방어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전투와 병력차로 인해서 포키스군은 결국 철수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레오디나스 왕은 결국 그리스연합군 대부분의 군대를 후방으로 철수시키고, 스파르타 군대와 근위대, 일부 도시국가군을 포함한 약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군과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과의 병력 차와 후방이 차단되어 포위된 그리스 연합군은 결국 전멸하게 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디나스


              테르모필레 전투는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서 대규모 병력을 효율적으로 방어했던 전투였으며, 이 전투를 통해 아티카 반도,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주민 대피과 방어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전투였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배 소식은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잘 방어하고 있던 그리스 연합 해군에게도 전해졌고, 결국 철수하게 됩니다. 이제 에우보이아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한 페르시아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 반도 방향으로 남하하게 됩니다. 

               

              이제 그리스 연합군은 풍전등화의 운명이 놓여져 있게 됩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페르시아군에게 이길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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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테미시온 해전



              테르모필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해상에서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개전 초기부터 줄기차게 해상에서의 항전을 주장해온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르테미시온 (Artemisium)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아르테미시온은 충분한 식수가 있는 항구였으며, 테르모필레를 지원하기에도 적절한 위치였기 때문이죠.

              페르시아의 입장에서도 아르테미시온이 간절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우보에아 (Euboea)섬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아르테미시온을 점령해야 했는데, 페르시아의 함대가 당도했을 때는 이미 그리스 함대가 진을 치고 있었죠.


              한편, 아르테미시온을 선점한 그리스였지만, 그리스는 심각한 내부 분열에 직면했습니다. 그리스 연합 함대의 지휘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의견 차이를 나타낸 것이죠.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항하여 그리스 연합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스파르타는 지난 마라톤 전투 이후 지위를 공고히 하는 아테네를 은근히 견제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갈등은 함대 지휘권을 놓고 지루한 공방을 이어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규모의 페르시아 함대가 아르테미시온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폭풍의 신, 보레아스의 구원?


              한편, 기세 좋게 아르테미시온으로 진격하던 페르시아 함대는 뜻밖의 일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아닌 '자연'에게 말이죠. 마치 이 상황은 고구려를 침략하던 수나라의 수군이 서해에서 계절풍에 의하여 함대가 전멸하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전 포스트를 참고하세요 http://metalcast.kr/221342631048)

              차이가 있다면 수나라 주라후의 함대는 서해 한가운데에서 폭풍으로 인하여 함대를 모두 잃은 것이었고, 페르시아는 전멸까지는 아니었지만 400척에 가까운 함선을 잃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출정 시 대략 1,200척)

              폭풍이 가라앉은 후에야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의 맞은 편에 있는 아페타이항에 정박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폭풍을 두고 아테네인들은 폭풍의 신, 보레아스가 그리스를 수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


              폭풍에 할퀴었지만 페르시아 함대의 위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마주하고 항전을 결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부에서는 철수하여 훗날을 도모하자는 의견이 우세하였습니다.

              연합군의 철군 소식을 들은 에우보에아인들은 페르시아군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스파르타의 장군, 에우리비아데스는 이들의 청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거절당한 에우보에아인들은 이번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를 찾아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연시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압도적인 규모의 차이로 인하여 항전에 대한 명분을 찾기 어려웠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에우보에아인들의 요청이 이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지휘부의 회합에서 동맹 (에우보에아)의 인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결국 에우보에아인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아르테미시온에서 잠시 페르시아에 대항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한편 페르시아는 함선 200여 척을 에우보에아 섬의 남쪽으로 보내 그리스 함대의 퇴각을 차단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 때 선발대로 출정한 페르시아의 함선 15척이 길을 잘못들어 아르테미시온으로 들어오게 되죠. 그리고 그리스는 힘을 들이지 않고 이 15척의 함선을 나포하게 됩니다.


              비록 선발대가 어이없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전투에 대한 어떠한 부담감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압도적인 물량의 차이를 그리스군이 뒤집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해상 항전을 각오한 테미스토클레스와 아테네 해군의 저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개조한 삼단노선 (trireme)은 맹렬한 기세로 페르시아 함선의 측면을 들이 받았고, 삼단노선의 선수에 부착된 청동 충각은 페르시아 함선을 일격에 파괴하였습니다.


              흉악한 기세(!)로 달려드는 그리스 연합 함대의 공격에 페르시아군은 크게 당황했고, 페르시아군이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스 연합 함대는 적선 30여 척을 나포하고, 수많은 페르시아 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페르시아는 폭풍과 패전의 결과로 600여 척에 달하는 함대를 잃게 됩니다.)

              테르모필레의 함락 그리고 대규모의 피난 행렬


              승전의 기쁨도 잠시, 테르모필레에서 달려온 전령은 레오니다스왕과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테르모필레에서 전사했다는 소식과 테르모필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전해옵니다. 그리고 테르모필레를 통과한 페르시아의 대군이 엄청난 속도로 이타카 평원을 향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접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진군 소식을 접한 아테네인들은 사전에 약속된 대로 3곳의 피난처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사전에 약속된대로? 그렇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미리 여러 가지 대처 방안들을 세워놓았던 것이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쪽에 위치한 트로이젠과 아이기나 섬으로, 그리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남자들은 살라미스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전 약속'은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요? 항복과 항전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아테네 시민들은 왜 테미스토클레스의 항전 의견에 힘을 실어주고, 거주지 이전까지 결정하게 된 것일까요?

              나무성채만이 난공불락으로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


              1년 전, 페르시아가 그리스 침공을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에 항복과 항전 의견이 갈리자, 아테네인들은 신탁을 구하여 마지막 결정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국가 중대사를 신전에 있는 신녀에게 고한 후, 신녀가 신의 계시를 받아서 전달하는 방법으로 신탁을 받았습니다. 신전은 교환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죠.


              아테네인들은 델포이의 신전 (델피 신전)으로 몰려가 아폴론 신의 계시를 받기로 했습니다. 신전으로 들어간 신녀는 잠시 후 아폴론 신의 계시를 전달하게 됩니다.


              가여운 이들아!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더냐?
              집도, 도시도,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산도 버리고
              지상 끝으로 달아나라!


              델포이의 신녀는 동쪽에서 달려오는 사나운 군신 (페르시아의 크세륵세스를 의미함)에게 모두가 죽고 도시가 불타게 된다는 불길한 계시를 전하게 됩니다. 비탄에 빠진 아테네인들은 신녀에게 다시 한번 아폴론 신의 계시를 전해줄 것을 간청하였고, 신녀는 다시 한번 신탁을 내리게 됩니다.


              제우스께서는 아테네를 위해
              나무 성채만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태어나게 하여
              너희와 너희 자식들을 구원해줄 것이다!


              다소 난해한 신탁에 이를 해석하려는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채가 '배'를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평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은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페르시아군이 테르모필레를 통과하게 된다면 살라미스를 비롯한 장소로 피신한 후, 해상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어기로 결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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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라미스 해전과 테미스토클레스



              델포이의 신탁대로 (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계획대로)그리스는 살라미스를 비롯한, 사전에 계획된 피난처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테르모필레를 넘은 페르시아군은 이타카 평원을 가로질러 아테네로 입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텅빈 도시였죠. 당시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보편적인 방법은 '점령지의 약탈'이었습니다. 하지만 힘겹게 아테네로 입성한 페르시아군이 가져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죠.

              피난을 거부한 아테네인들은, 결국 한명도 남김없이 처참하게 살육당하게 됩니다.

              장군에게 그리스의 미래가 달렸소


              아테네로 진군한 페르시아가 도시를 불살랐다는 소식이 그리스 연합군에도 전해지자,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수뇌부에서는 코린트의 이스트무스까지 퇴각하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게 되죠.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만약 그리스 연합군이 이스트무스로 퇴각하게 된다면, 페르시아와 일전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테미스토클레스가 퇴각을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페르시아 함대에 비하여 그리스 연합 함대는 그 수가 터무니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코린트 지협으로 함대를 물리게 된다면, 넓은 해역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해야 합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선보인 충파 전술을 펼칠 수는 있지만, 많은 수의 페르시아 함대에 포위당하게 된다면 승산이 없는 전투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전장으로 내세운 살리미스 섬은 좁은 협곡을 끼고 있는 곳으로, 다수의 함대가 지나갈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페르시아 함대가 가진 숫적 우위를 전혀 발휘할 수 없는 지역이었죠.
              (이는 마치 좁은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명량대첩'과 유사한 면모를 보입니다)


              코린트로 퇴각하자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에우리비아데스 (스파르타의 장군, 그리스 연합군의 사령관)에게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리스의 구원은 장군의 손에 달렸소.
              살라미스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하지만 에우리비아데스는 쉽게 결심을 하지 못합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이 그럴 듯하기는 했지만, 만약 이 전략이 실패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었죠.

              테미스토클레스, 거짓 항복으로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치다


              살라미스에서의 항전과 코린트로의 퇴각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시간이 흐르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점점 초조해집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연될수록 겁에 질린 연합군의 지휘부가 퇴각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참으로 대담한 술책을 꾸밉니다.크세륵세스 (페르사의 왕)에게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그리스 지휘부의 회의 내용을 모두 공개해버리는 것이죠. 적의 수뇌부에 아군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발설한 셈입니다.


              그리스 함대는 지금 페르시아군에 대한 공포로 철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의 함대가 먼저 협곡의 퇴로를 봉쇄한다면 그리스 연합 함대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전갈을 받은 크세륵세스는 그의 진위가 의심되었으나 척후병의 정탐 결과, 실제로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부는 코린트로 퇴각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정찰 결과로 의심을 완전히 걷어낸 크세륵세스는 함대의 일부를 빠르게 움직여 그리스 함대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버립니다.

              재밌는 것은 테미스토클레스가 크세륵세스에게 보낸 내용은 대부분 사실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면
              1. 그리스 연합 함대는 대규모의 페르시아군에 겁을 먹고 코린트로 퇴각을 계획 중이다 (True)
              2. 지금이라도 항복하자는 의견과 끝까지 맞서 싸우자는 의견으로 갈려 논쟁 중이다 (True)
              3. 전투가 시작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진영으로 넘어가 항복할 예정이다 (False)


              대부분의 내용은 사실이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이 항복하리라는 것은 거짓이었죠.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중요한 내부 정보를 발설하면서까지 위협을 자초했을까요?

              첫째, 그리스 연합군의 지휘부는 소모적인 논쟁만 이어갈 뿐, 뚜렷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만약 코린트로 함대를 철수시킨다면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죠.
              셋째, 페르시아 함대와 대치 중이었지만, 그리스 연합 함대는 언제든지 코린트쪽으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달아날 방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 연합군의 절박함도 상대적으로 덜했던 셈이죠.
              넷째, 만약 페르시아군이 퇴로를 차단한다면 이제 그리스 연합군이 선택할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습니다. 바로 살라미스 해협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테미스토클레스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페르시아 함대가 퇴로를 차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리스 연합군은 소모적인 논쟁을 전면 중단하고 즉각 항전을 준비하기로 결심합니다.
              테미스토클레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러한 사건의 전개가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죠.



              기적과도 같은 승리, 살라미스 해전


              테미스토클레스의 사항계 (거짓 항복 계책)에 넘어간 페르시아는, 그리스 연합 함대가 엘레시우스만을 거쳐 퇴각 중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깊은 밤을 틈타 함대를 조용히 이동시켰죠.
              페르시아는 함대를 둘로 나누어 지금 대치하고 있는 살라미스의 북쪽과 우회한 함대로 일대의 해역을 완전히 봉쇄한다는 전술을 세웠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사항계는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데,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함대를 분리한 덕분에 살라미스에서 상대해야 할 페르시아의 함대는 상당수가 줄었죠.

              기원전 480년, 동이 트기도 전에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연합 함대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을 두고 대치했습니다. 해협이 좁은 탓에 페르시아 함대는 넓게 진을 형성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선 진을 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쪽에 도열한 함선이 진격하거나 침몰되기 전에는 뒤쪽의 대다수 함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죠.


              좁은 해협의 출구에서 숨죽여 기다리던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의 함대가 천천히 다가오자 공포에 질려 배를 뒤로 물립니다. 하지만 그 중 아테네의 용맹한 장수, 아메이니아스가 지휘하던 삼단노선이 앞으로 치고 나오며,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선두에 선 페르시아 함선을 돌파합니다. 직전의 포스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의 삼단노선 선수에는 청동 충각이 달려있었죠. 아메이니아스의 돌진으로 용기를 얻은 그리스 연합 함대는 일제히 돌진하여 페르시아의 함선에 총 공격을 가합니다. 순식간에 두 함대가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죠.

              병력에서는 열세였지만, 살라미스의 좁은 해협은 페르시아의 숫적 우위를 전혀 활용할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각 지역에서 차출된 병력은 그리스 연합군보다 훈련 정도나 전쟁의 명분과 당위성, 병사들의 사기가 매우 미흡한 상태였죠.
              그리스 연합군은 혼전 중인 와중에도 전열을 유지하고 침착하게 페르시아의 함대를 상대했습니다. 그리고 전선이 고착되자, 일부 그리스 함대는 우회하여 페르시아 함대의 측면을 공격하게 됩니다.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페르시아 함대는 전열이 무너지며 자국의 함선끼리 엉키게 되었고, 때마침 불어온 북풍에 좁은 살라미스의 해협의 파도는 거친 파도로 돌변하게 됩니다. 거칠어진 파도에 페르시아 함선을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었고, 선상에서 활을 쏘던 페르시아 병사들은 파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그리스 연합군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게 됩니다.

              혼란한 틈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선들은 노출된 페르시아 함선의 측면에 돌진하여 함선을 격파해나갑니다. 또한 선상의 백병전에서도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몰살시켰던 위력을 또 한번 발휘합니다.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의 경보병들은 근접전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들을 당해내지 못했죠.


              격전이 이어지고 그리스의 우세가 지속되는 가운데 밤이 되자, 페르시아의 사기는 꺾여버리고 맙니다. 거듭되는 혼전 속에 크세륵세스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페르시아의 장수들이 전사했고, 200여 척에 가까운 함선이 침몰했기 때문이죠. 그리스 함선의 충파에 의해서 격침당한 함선도 많았지만, 그 보다 많은 함선이 아군끼리 충돌하다 파손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게다가 육상에서의 전투에 능한 페르시아 군사들은 대부분 수영을 할줄 몰랐으며, 바다에 빠진 페르시아의 군사들은 허우적대다가 대부분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연합 함대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페르시아에 비해서는 크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함대 피해 : 200척 대파 또는 침몰
              그리스 연합 함대 피해 : 45척 대파 또는 침몰


              수전에 익숙한 그리스의 병사들은 바다에 빠지더라도 대부분 익숙한 수영으로 살라미스 섬까지 살아나올 수 있었기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페르시아 함대는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 지역을 장악하려던 크세륵세스와 페르시아의 야심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최강국으로 부상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금의 그리스 지역)를 넘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됩니다.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격돌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을 영향으로 아테네는 그리스를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지만, 이러한 아테네의 움직임은 동맹국 스파르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죠. 그리고 이러한 양국 간의 관계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사람은 테미스토클레스였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와의 분쟁을 대비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아테네 보수층을 자극하게 되죠.

              다음 포스팅에서는 마무리로 살라미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최후(:O)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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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전투




              이듬해 봄이 되자,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그리스의 본토로 침입할 것을 명령했다. 그들은 점차 남하하여 아테네 북동쪽 50킬로미터 지점인 플라타이아이(Plataiai)의 평원에 포진했다.

              여기에 맞서는 그리스인들도 다시 단결하여 연합군을 구성했다. 이들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인해 자신을 갖고 임했기 때문에 용기백배하였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였으며, 병력은 약 3만 명 정도였다.


              전쟁 도자기

              그리스 군사와 페르시아 군사의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는 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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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그리스군은 장창과 방패를 갖고 공격을 하는 중장보병의 밀집대를 중핵으로 하고, 경장보병들이 측면에서 지원을 하는 전술을 썼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기병과 궁수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폈다. 그 결과 중장보병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그리스의 해군은 이오니아 해안의 미칼레에서 페르시아의 해군을 격퇴시킴으로써,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의 속박에서 독립시켰다. 이렇게 해서 도합 3회, 20여 년에 걸친 대전쟁은 페르시아 측의 패전으로 끝났다.


              그러나 일단 물러간 페르시아군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또 겨우 페르시아의 지배를 벗어난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직이 필요했다.

              이때까지 스파르타는 그리스 제1의 폴리스로 취급되었고, 또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육군·해군의 모든 최고 지휘권이 스파르타에 있었다. 때문에 마라톤과 살라미스에서의 승리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지지 않는 강국이란 것을 그리스인들에게 널리 알린 셈이었다.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 이후에는 스파르타의 섭정 파우사니아스가 연합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쇄국주의를 표방하는 스파르타가 에게 해 일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활동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플라타이아이에서의 승리자이며, 또 함대를 인솔하고 페르시아 세력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파우사니아스는 그의 건방지고 난폭한 태도로 인해 이오니아인의 미움을 샀다. 그들이 아테네인에게 파우사니아스 대신 연합 함대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마병

              파르테논 신전의 정상부에 있는 기마병의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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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아테네라는 새로운 지도국을 중심으로 기원전 477년에 결성된 것이 바로 델로스 동맹이다. 이 동맹에 가입한 여러 폴리스들의 공납금이 에게 해 중앙에 있는 작은 섬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에 보관되고, 또 동맹의 회의도 여기서 열리게 되었다.


              동맹에 가입한 폴리스는 군함과 선원을 직접 제공하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군비를 현금으로 대신 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를 비롯한 몇몇의 폴리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군대를 제공하지 않고 군비를 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아테네의 해군력은 날로 증강되어 갔다.


              도편추방

              오스트라시즘을 번역한 말이다. 패각추방이라 하며 전 시민이 모여 위험인물을 조개껍질에 적어 국외에 5년 또는 10년간 추방했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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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무렵 아테네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도편추방(Ostracism)의 대상에 올라 있었다. 전쟁 후 인기절정에 있던 그는, 급히 아테네 시가에 견고한 성벽을 쌓아올리고 방위력을 강화했다. 이때 아테네의 전 시민은 돌을 나르는 중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러자 항간에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결국 민회는 그의 체포를 결의했다.

              그의 죄는 대부분 억울한 것이었지만 도편추방되고 그는 이곳저곳으로 도피를 한 끝에 최후에는 페르시아로 들어갔다. 그 후 3년간 페르시아 대왕의 후한 대접을 받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