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道雨 2019. 10. 31. 18:23



셀주크 투르크와 오스만 투르크


Extent of the Seljuq sultanate around 1080, when it was at its largest.
(1080년경 셀주크 투르크의 최대 영토)






오스만과 셀주크는 모두 투르크계 민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투르크계 민족의 기원은 고대 돌궐로부터 출발합니다.

중국의 한 무제(武帝)와의 대립에서 밀려난 투르크계 민족은 서진을 시작하면서, 페르시아계, 아랍계 민족과 때로는 대립하며 때로는 조화하며 변화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이슬람을 수용하면서 적응, 발전해 가지만 나름대로의 문화적 고유성은 유지됩니다.

(아시다시피 이슬람이 전파된 지역에서는 모두 아랍어가 사용되는 특이성을 가집니다. 수메르-지금의 시리아-등 독자적인 언어가 있던 민족들조차도 아랍어에 의해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와중에, 페르시아와 투르크계 민족만이 고유의 말을 사용하는 정체성을 지니게 됩니다. 물론 페르시아의 경우 정치적으로 아랍 민족과의 긴장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었고, 게다가 이슬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아랍과의 대척으로 시아파 이슬람이 발전하는 등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르크계의 경우 아랍 민족의 주류였던 수니파 이슬람을 수용하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한 특이한 경우라 하겠죠.)

어쨌든 투르크계 민족이 국가 비슷한 형태로 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셀주크 때부터입니다. 그 이전까지 투르크계 민족은 페르시아 및 아랍 지역에서 용병 시대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및 이집트 파티마 조의 성장을 두려워한 아랍의 압바스 조가 셀주크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에 응한 셀주크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압박하면서, 이 지역의 패권은 아랍 민족에게서 투르크 민족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맞습니다. (정치적, 군사적으로 지역의 패권은 셀주크가, 종교적 권위만 압바스가 갖는 방식으로 변화합니다.)

이후 현재의 아나톨리아 중부(셀주크의 수도는 Konya-앙카라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당시 셀주크의 주된 근거지가 아나톨리아 중부였음을 시사함)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과 이집트, 페르시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좌우했던 셀주크는 예루살렘 정복 이후, 유럽인들의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금지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럽에서는 십자군이 조직됩니다. (1~2차 십자군) 물론 이 십자군 원정은 모두 패배로 기록되구요.

이렇듯 맹위를 떨치던 셀주크가 패망한 것은 같은 투르크계인 오스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쪽에서 온 몽고의 군대에 의해서였습니다. (실제 셀주크의 마지막 군주가 눈앞에서 아내가 몽고의 장군에 의해 강간당하고 아들의 목이 잘리우는 것을 보고 실성하였고, 이로 인해 셀주크 시대가 종언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음.)

이후 등장한 오스만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셀주크를 비롯한 투르크계 민족들의 통치 방식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투르크계의 조상은 아시아 유목 민족인 돌궐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러다 보니 통치 방식 역시 아시아 유목민족의 특성을 잘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목 민족의 삶의 양식 자체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지역을 정복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한 이동 단위의 복종을 받아내는 것이 그 지역에서의 패권을 보장 받게 되는 방법이죠.
또한 같은 이유로 유럽과 같은 총독 문화가 아니라, 단위 지도자의 지위를 그대로 보장하는 방식으로 정복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동하는 단위에 총독을 파견한다는 것은, 총독도 이동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며, 총독이 그의 군사들과 계속해서 단위를 따라 이동한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새로운 단위를 점령할 때마다 군사력의 단위별로 분산되는 효과를 가져오므로, 당연히 총독 문화는 불가능.)

대표적인 예가 몽고로, 하나의 몽고라는 단위 내에도 오고타이, 차카타이, 킵차크 등 단위(4한국)가 나뉘어 각각 독립적으로 유지되었고, 또 각각의 한국 내에도 단위별로 지도자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죠.

셀주크 역시 이러한 전통에 따라 통치 지역 내에 다양한 단위가 존재하였고, 단지 세금과 국방의 의무만을 강요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이민족 단위 뿐만 아니라 투르크계 민족 간에도 적용되어, 셀주크 말기만 하더라도 셀주크 내에 존재하는 각 투르크계 민족단위만 13여개 이상이었습니다. (이민족 단위까지 따진다면....)

오스만 역시 이들 투르크계 민족 단위 중 하나로서, 셀주크의 십자군 전쟁에서 최선봉에 있었습니다. (오스만의 초기 수도는 Bursa, Iznik으로 이스탄불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

셀주크가 몽고에게 패망한 이후, 이 지역에서는 다시금 이민족 그룹 뿐만 아니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단위가 일한(Ilhan)과 오스만(Osman)이었고, 이 중 십자군과의 대척점에 서서 당당히 지하드(성전 원칙)을 표방하고 무슬림의 단결을 외쳤던 오스만이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물론 뭐 정치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통성을 확보했을 테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군사력이 다른 단위의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 결과 투르크를 대표하는 단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셀주크를 계승하는 단위로 인식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오스만은 3~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비잔틴의 모든 영토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마저 함락시키며, 결국 비잔틴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후 오스만은 약 400여년 이상을 건재하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운영하였고, 제 1차 대전에서 독일의 손을 들어 주었다가 패배하게 되고, 이후 이어진 각 지역의 독립(사실 이 배경도 유럽이 있지만... 투르크계 민족의 재기를 두려워하며, 아랍 민족을 부추겨 독립시킴. 윌슨 등이 나서서 민족 자결 주의를 외치며, 아랍 민족으로 하여금 민족이 다른 오스만과 결별토록 종용함. 솔직히 그리고 나서는 그 지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과 연합군의 영토 분할이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대제국은 초라하게 줄어갔고, 역사 속에서 오스만이 사라지려던 찰나, 터키 민족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우리나라에서는 케말 파샤라고 알려져 있음. 파샤는 터키어로 장군을 뜻하는 고어)이 독립 전쟁에 나서게 되고, 3년간의 전쟁을 통해 현재이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