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김익렬(金益烈)장군 실록 유고 : 4‧3의 진실

道雨 2019. 4. 16. 12:12





김익렬(金益烈)장군 실록 유고

- 4‧3의 진실 -


 

서 문

 

4‧3과 김익렬(金益烈) 제9연대장.

4‧3 발발 전후를 통틀어 김익렬 연대장만큼 4‧3 진상의 핵심에 있었던 체험자도 드물 것입니다.

 

김익렬 연대장은 4‧3을 현지 군지휘관으로서 직접 체험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김달삼(金達三)과 담판, 평화적으로 사태해결을 모색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화평정책은 미군정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고, 이로 인해 9연대장의 자리에서 해임되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김익렬 장군은 이 글을 집필하면서, 4‧3의 기존기록들은 부정확하고 왜곡된 점이 많다고 지적, “제9연대장으로 재직했던 역사의 증인으로서 내가 경험한 사실을 진실되게 기록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김장군은 이 원고에 대한 재정리 작업을 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한채 1988년 12월 작고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앞서 “내가 죽은 다음에 이 원고를 역사 앞에 밝히라”고 유언했습니다.

 

필자는 또 원고말미에 “정직한 역사기록에 초점을 두었지만, 혹시 잘못된 것은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다”는 글을 남겨, 더욱 그의 기록의 정직성을 신뢰케 하는 바 있습니다.

 

한 예비역 대장은 그를 가리켜 “명예욕 보다는 정의감이 강했고, 물욕이 전혀 없었으며, 아첨배들을 멸시하는 직언파여서, 손해도 많이 봤으나 후배장교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강직한 군인상을 심어줬던 김장군의 유고가 난맥상을 빚고 있는 4‧3의 진상규명에 큰 보탬이 되는 한편, 4‧3초기의 미군정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몫을 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이 유고의 사료적(史料的) 가치가 워낙 막중한 것이기에, 친필 원문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단, 한자를 한글표기로, 옛 맞춤법을 새 맞춤법에 적용하는 기초 교정만 했으며, 보충설명이 필요할 경우엔 편집자 주를 괄호 안에 처리해 원문이 다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김익렬 장군 약력

 

△ 1921. 6 慶南 河東 출생, 學兵출신

△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소위임관(군번 47번)

△ 1947. 9 제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濟州에 부임

△ 1947.12 제9연대 3대 연대장(중령)

△ 1948. 5 제9연대장 해임

△ 1948. 5 제14연대장

△ 1948. 8 제13연대장 (6‧25 참전)

△ 1950. 8 北進작전 참가

△ 1952. 6 제8사단장

△ 1954-55 美참모대

△ 1955. 7 제7사단장

△ 1957-58 국방대학원

△ 1960. 제1관구 사령관

△ 1962. 제1‧2 군단장

△ 1964. 1 육군전투병과 사령관

△ 1967. 5 국방대학원장

△ 1969. 1 중장 예편

△ 1988.12 永眠 (국립묘지 안장)




제주도 4‧3사건의 발생 원인이 단순히 육지인과 미군에 대한 도민의 배타정신과 미군정하의 압정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민중폭동이냐, 또는 공산이데올로기적인 폭동이냐 하는 문제에 관하여, 아직까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고 있지 않다.

 

미군정에 관계한 관리들이나 경찰 또는 토벌에 관련된 군인 또 반공체제하에 있는 우리 사가(史家)들은 맹목적으로 제주 4‧3사건을 공산당의 사전음모에 의한 우리나라 공산화를 위한 여순(麗順)‧지리산 등지의 공산반란과 같은 사건으로 단정짓고, 정사(正史)와 기타 서지(書誌)에도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민 중에 중년이상의 지식인들이나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역사의 부정확과 허위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조의 땅 제주도가 사상 최초로 공산반란을 일으켰다는 불명예로 더럽혀지고, 미군정의 경찰의 압정에 못 이겨 살기 위해 일어났던 폭동이 공산폭동으로 낙인찍히고, 또 그 당시 살해된 사람들의 후손들은 대대로 공비의 후손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불운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한 운명의 억울함을 변명할 방법과 기회조차도 없이, 단순히 억울하다는 불만 속에 살고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4‧3사건을 정확하게 그 원인과 결과를 한국정사(韓國正史)에 기록하려고 도민운동도 하고 있으나, 이를 뒷받침하여 줄 아무런 역사적 증거도 인물도 없다.

 

나는 이런 점에서 후세 사가들이나 제주도민들이 정확한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그 당시 제주도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요한 직책에 있던 제주 제9연대장으로 재직한 역사의 증인으로서, 당시 나의 직권범위 내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다.

 

 

1. 사건 발생 前의 실정

 

내가 제주도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한 것은 1947년 9월 초였다. 그 당시 일반 미군관리들도 마찬가지였지마는, 국방경비대 장교들도 제주도 제9연대는 모두 가기 싫은 부임지였다. 대부분의 장교들이 경미한 상관과의 의견충돌이나 사고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추방)되는 부대이기도 하였다.

 

당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인 송호성(宋虎聲‧준장‧중국에서 독립운동 했음)장군은 풍모는 독립운동가나 장군다운 면이 있었으나, 중요한 군사지식이나 두뇌나 인격은 중국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보니 정규의 교육이나 군사교육을 받지 못한 관계로 보잘 것 없었다. 특히 인격 면에서 그리하였다.

 

자기의 비위에 어긋나면 “너는 제주도로 귀양이다” 호령하고, 즉시 9연대로 전근시키는 것이었다. 연대장 이치업 참령(李致業 參領)도 그리하였고, 부관 심흥선 부위(沈興善 副尉)도‧‧‧ 모든 장교들이 대부분이 그리하였다.

 

나도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서 장교 교육을 받던 어느 날 명동거리를 산보하다가, 송장군의 부인(중국인)에게 경례를 안 한 죄로 9연대로 추방되어 부임하여왔다.

 

목포에서 선로(船路)로 10시간 제주읍에 도착, 화산석으로 시야를 가린 일주도로를 따라 약 4시간 후에 대정면(大靜面)에 있는 제9연대에 부임하였다.

9연대는 연대라 하여도 실제 병력은 1개 대대가 조금 넘는 약 9백여 명이었으며, 병사들의 90%는 전라도 경상도 방면에서 모병하여온 병사들이었다. 제주도 청년들은 군대지원을 꺼려 지원자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어 일시적으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경비대를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제주도 청년들은, 역사적인 배경도 있었겠지마는, 관리나 군인으로 출세하겠다는 희망을 가진 청년은 육지청년과 비교하여 지극히 희소하였다. 또 다른 문젯거리로, 제주도 출신 병사들은 나태하며 육체노동을 싫어한다는 것이 정평이었다. 군사훈련이 심하거나 군대작업이 심하면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 일쑤였다. 그러므로 장교들은 제주도 출신 사병들은 으레 어느 땐가는 도망치리라 생각하고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다.

 

6개월 이상 복무한 사병은 불과 10명 이내였다. 이들은 장교들에 의해 대단히 중용되었으며, 제주도 풍속이나 물정을 아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또 이들은 제주도에서 모병하는 문제에서 전 장교들의 고문 역할을 하였으며, 군대와 대민(對民) 접촉의 매개체 노릇을 하였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전통적으로 배타성이 강하였으며, 제9연대 장병을 대하는 것이 일본 군인이나 미국인을 대하는 정도였다. 이렇게 자기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하였다.

노소남녀를 물론하고 군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제주도민들에 보이는 것을 꺼렸다.

 

장병들의 대부분이 육지출신이고 보니, 제주도의 독특한 방언으로 인하여 대화가 원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곤란한 것은 제주도민과 육지인들의 풍속의 차이였다. 제주도 풍속에 숙달되지 않은 육지출신 장병들이, 풍속 예의 언어 등에서 도민의 자존심과 긍지를 해치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므로 군인들을 백안시하고 교제를 꺼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군대와 접촉하는 한계는 지극히 제한되어, 교육받은 지도층 인사들이든지, 군대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상인이라든지, 관계자들과 그 가족들이었으며, 심지어 이들 가족들마저 군인들을 외면하는 형편이고 보니, 제9연대는 외국에 주둔하고 있는 인상마저 주었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제주도에서 모병은 사실상 불가능하였고, 육지에서도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지원하여 오려는 청년이 드물었다.

그러나 경비대 병력의 증가를 위한 급한 사정도 없고 보니, 9연대 병력증강을 서두르지 않았다. 현재 병력을 정밀히 훈련시켜서 장차 완전 연대 편성을 위한 기간요원 양성이 그 당시의 목표였다.

 

당시 연대는 모슬포(摹瑟浦)에 소재한 옛 일본군 항공대가 사용하던 광대한 병사(兵舍)를 사용하였다.

 

9연대의 첫째 문제는 보급이었다. 그 다음은 도민의 배타성과 비협조였다.

보급의 일체와 주식‧부식까지 육지에서 공급받아야 할 형편이었고, 병사의 수리‧신축까지 육지에서 공급받다보니 경비가 막대하였다.

부식의 일부인 어류마저 현지에서 생산되나 군에 납품할 사람이 없었다. 당시 광범위하게 사업을 하던 좌달육(左達六)씨를 방문하여 제주읍에 있는 유지들을 설득시켜 군에 협조하여 달라고 수차 빌다시피 했다.

그래서 좌달육씨는 공사 일체를 책임지고, 카나리야 상회가 부식 일체를 책임져 납품하겠다는 협조를 얻어 부대를 유지할 형편이었다.

 

연대 군사고문관은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이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민정(民政)에 바쁘다보니, 1~2개월에 1회씩 소위 혹은 중위를 연대에 보내어 연대장과 상의할 정도였으므로, 제9연대는 사실상 미군정 고문관도 없는 형편이었다.

 

연대 장비는 총기는 구(舊) 일본군의 99소총과 대검뿐, 그나마 탄환은 1발도 보유하지 못했다. 물론 기관총이나 미군무기인 M-1이나 카빈총은 1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반면 당시 경찰은 경비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원이 카빈소총과 구 일본군의 92식 중기관총, 미군 수송 장비에다 각종 미군 신식 무전기와 기타 통신장비 등 상당한 기동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정은 국내치안을 전적으로 경찰에 맡겼으며, 일체의 전투장비 보급도 경찰에 우선하였고, 미군정에 대한 충성심에서도 경비대 보다 경찰을 신인(信認)하였다.

 

경비대는 비상시에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다가 장차 독립되면 국군의 모체가 될, 그러니까 평시에는 놀고먹는, 말하자면 미군정의 천덕꾸러기며 객원 노릇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연 경비대의 미군정하의 존재 위치는 빛을 못 보았으며, 따라서 보급지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제9연대의 기타 장비를 보더라도 99식 소총과 대검 이외에, 수송 장비는 1과 1/2t 차량 1대, 3/4t 1대, 지프 1대가 전 부대의 보급과 연락용 전부였다. 무전기는 물론 없었고, 대내(隊內) 행정용으로 몇 대의 구식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연대와 상부와의 연락은 전근대적인 장교 전령과 일반 전령이 맡아 비밀명령과 문서를 전달하였고, 일반 행정문서는 민간우편과 전화전보로 연락되었다.

긴급을 요하는 연락은 연대의 1과 1/2t, 3/4t 차량, 지프 등 3대가 보급 전령 일체를 행하는데, 이 3대의 차량마저 노후와 부속품 부족으로, 1주일간 수리해서 가동하면 2~3일 쓰고 고장이었다. 부속품도 부산, 서울 등지에 가서 구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부대가 별다른 고통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수개월이 가도 급한 연락사항이나 중요한 문제도 없었고, 하등의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으므로 순조롭고 평온하기만 하였다.

 

그런 중에도 군대훈련과 군기는 엄격하였으며, 부대는 장병 공히 일치단결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하는 것이 교육훈련 뿐이고, 단결을 저해할 문젯거리들이 전연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연대통솔은 근무시간에는 열심히 훈련하고, 그 밖의 시간은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장교들과 서귀포로 가서 해수욕도 하고 유람도 즐겼다. 동기(冬期)에는 수렵(꿩)하여 장병이 회식하는 것이 낙이었다. 특히 당시 장교들 간의 단결은 상하간 보다는 형제간 같은 것이었다.

 

 

2. 도민 동향과 정치활동

 

4‧3사건 발생 전의 군‧관‧민의 관계는,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항복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돼, 전 국내는 해방의 기쁨과 자주독립의 희망에 벅차고 있었으나, 제주도의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1946년에서 1948년 4월 3일 폭동이 발생할 때까지, 도민의 표정은 일제시대나 미군정시대나 별다른 감격이나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해방이나 독립이 됐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자기 생업에 종사할 뿐이었다.

해방과 독립은 관리나 군인들이나 관심을 가질 일이지, 우리 제주도민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일제가 미군정으로 바뀌고, 제주도에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대신, 미군과 경비대 군인으로 대체되었다는 그런 단순한 감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밖의 표정은 없었다는 것이 그 당시의 도민의 감정에 대한 나의 솔직한 인상이었다.

 

4‧3사건을 계기로 하여 야기된 격앙된 인상들만이 여러 가지 기록이나 역사나 논평에 보도되고 있고, 어떤 전문가들은 제주도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고도(孤島)이므로, 해방 후부터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온상지였으며, 자유스럽게 공산주의 사상교육과 공산주의의 투쟁을 위한 조직과 훈련을 하여서 4‧3 공산폭등을 일으켰다는, 그럴싸한 이론을 전개시키고 4‧3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4‧3사건 발생의 원인과 그 당시의 제주도의 도민의 실정을 전연 모르는 자들이 떠도는 유언(流言)만 갖고 창작해 만들어 낸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당시 제주도민이나 우리 민족에 대하여 용납 못할 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미군정 시대 집권자들의 죄악과 과오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용자들의 작품에 지나지 않다고 나는 확언한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정직하여야 되며, 사실 그대로 충실히 기록되어야 후세 국민들이 그 역사를 참고하고 반성하고 배우게 될 것이다.

어느 특수 인물의 죄악을 은폐하거나 또는 영웅화시키기 위한 창작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적(史賊)이다.

제주도 4‧3사건의 역사는 재편집되어야 하며 재평가되어야 된다.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는 4‧3사건은 둘로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4‧3사건 발생원인과 발생, 또 하나는 발생 후부터 토벌과 진압까지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순수한 민중폭동이었으며, 그 후자는 민중폭동이 공산폭동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전연 상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나는 전자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생존자 중의 유일한 증인이다. 4‧3사건의 실상이 밝혀지더라도 나에게는 피해나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서 내가 경험한 사실을 기술한다. 사명감과 책임감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당시 도민들은 해방과 독립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그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제주도는 동일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지리적인 관계로 식민지 비슷하였으며, 본국의 관리들이 부임하여 통치하였고, 일제시대에도 관리들은 대부분은 책임자는 일본인이고 그 부하들은 육지인이었다.

 

해방이 된 미군정하에서도 군정장관은 미국인이고, 도지사‧군수‧경찰청장‧서장은 전원 육지출신이고, 행정관리와 경찰관의 대부분이 또한 육지출신이고 보니, 제주도민은 정치와 행정에 아무 관계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해방도 말단의 서민 농민의 눈에는 일제시대와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는 관습상의 문제가 있었다.

 

제주도는 화산도여서 토지가 척박한데다 석괴(石塊)가 많고, 또 계절풍의 통로여서 농업 어업 공히 풍랑으로 부적당하다. 자연히 경제는 지극히 빈곤하였으며, 활동성 있는 청년들은 일본 부산 목포 인천 서울 등지에 출타하여 취직해서, 그 송금으로 향리에 있는 부모 처자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고향에서 좀 경제적 여유가 있게 되면 식수 등이 불편한 농어촌에 살지 않고 제주읍으로 자리를 옮겼다. 더 부유한 자는 부산 서울 등지로 떠나버림으로 제주도 내에는 오고 가지도 못하는 빈민들만 남아있는 형편이었고 보니, 제주도는 인구도 늘지 않아 항상 30만을 전후하였다.

 

한편 근대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은 거의 전부가 제주도를 떠나서 육지에서 관리나 사업을 하는 것이 오랫동안의 관습이었다. 따라서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여 극소수의 지식인과 사업가들이 남아 있었고, 대부분의 도민은 빈민들과 문맹자들이었다. 그러나 도민들은 성격이 온순하여 주먹질하고 싸우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제주도는 빈곤하긴 하지만 육지와 같이 전통적으로 지주와 소작인과 같은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이 없었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항상 애용하는 계급투쟁의 구실을 줄 수 있는 착취계급이 없었다.

도민이 빈곤한 것은 지리적인 자연환경과 문화수준이 낮은 데에 원인이 있었으므로, 정부의 시책을 원망할 만한 건덕지도 없었고, 정부에 대한 불만이라 해보았자 기껏 원조가 적다는 정도였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공산주의 사상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일반 도민들에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을 형편이었다.

당시 도민의 정치와 사상활동은 거의 무풍지대였으며, 해방과 독립 민주주의 사상활동이라는 것도 현수막을 행정관청이나 경찰서에 걸어놓는 정도였지, 실질적인 계몽이나 활동은 지극히 미미한 실정이었다.

 

정치단체나 청년단체도 있기는 했지마는 간판뿐이고, 실제 행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방직후 소위 ‘인민공화국 정부’라 하는 것이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에 있었으나, 그것은 대부분이 공산주의 이념과 거리가 먼 일부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야망에서 나온 것이지 별 것이 아니었다.

 

도민들이 정치활동에 무관심하였던 사실은, 현재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별다른 관심을 가질 사유가 없었다. 그것은 정치활동이나 청년운동을 할 만한 인물이 드물었다는 데도 원인이 있었다. 정치활동이나 청년운동을 할 만한 똑똑한 청년들은 대부분이 제주도에 남아있지 않고 육지에서 취업하고 있었으므로, 도내에는 문맹자들이나 노인 부녀자 어린 소년들뿐이었고, 가정적인 무슨 사정으로 제주도를 떠나지 못한 지식인들이 도내에 남아서 정치 청년운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운동이라는 것도 상부조직 뿐이고, 중간과 말단조직은 전연 존재하지 않기 십상이었다. 말하자면 간판만 지키는 사람들뿐이었다.

 

그 당시 연대 정보과에서 수집한 도민 실정은, 호적상으로 나타난 인구가 30만이었고, 성별로는 남자 14만이고 여자 16만이었다. 여자가 2만 더 많았으나, 실제로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남녀의 비율 차는 더 심하였다.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노동력이 활발한 남녀비율은 남자 1인에 대하여 여자 25명 정도였다. 이 통계를 보면 노동력을 가진 자는 대부분이 여자였다.

실제 내가 본 바로는 밭이나 어촌에서 노동하는 자는 대부분 여자였으며 청년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남자는 특수한 기술부문에서 일하고, 중노동은 주로 여자가 맡아했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나태하게 보였다.

 

이런 실정을 알고 나면, 정치활동이나 사회청년운동 하는 자가 지극히 미미하였다는 것과, 제주도 제9연대의 모병이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것이다.

 

제주도는 옛적부터 걸인과 도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민심은 순박하고, 정부에 잘 복종하는 전통적인 도민의 기풍을 가졌다.

범법자나 치안을 문란케 하는 위험성을 가진 자는 거의 전무상태였으므로, 경찰이나 행정관리 또는 군대를 번거롭게 하는 사건은 거의 없었다.

사건이라고 해야 항구나 읍내에서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하는 것과 교통사고 정도였다.

 

이런 평온한 치안상태이고 보니, 경찰관은 하는 일이 없어 한가를 달래기 위하여 백주에도 근무지를 비워놓고 술 마시는 것이 예사였고, 나의 9연대도 군대가 경계하여야 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전 연대가 탄환 한 발 없는 빈총을 가지고 있어도, 조금도 불안을 느끼거나 탄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지에서는 치안이 확보되지 못해, 야간이 되면 미군 MP나 경찰의 총소리가 그치는 날이 없는 불안한 치안상태였고, 각지에서는 민중의 시위‧폭동,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유언비어 정치밀회 등이 난무하였었다. 그러나 여기 제주도는 다른 세계와 같은 평온한 별천지였다.

 

 

3. 군인 사상과 軍‧警관계

 

당시 경비대의 군인들 중에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등 정치사상이나 이념을 가지고 군에 지원입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사상을 가진 자는 정치활동이나 사회운동을 하였지, 군에 지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였다.

경비대 총사령관 이하 대부분의 군인들의 사상이념은 ‘국토와 국가민족을 수호한다’는 전통적인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그 근본을 이루고 있었다. 잃어버렸던 조국이 해방되고, 가까운 장래에 독립되면, 독립된 조국을 우리가 수호하겠다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군인사상 일념이었으므로, 이들의 눈에 민주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와 다를 바 없었다.

수만 명 군인들 중에는 물론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신봉자도 있었겠지마는, 자기의 사상을 부대 내에서 발설하였다가는, 용납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군대에서 축출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껴 스스로 도망가는 실정이었다. 말하자면 경비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의 집합체였다.

 

그 당시 총사령관 이하 전 장교들은 민주주의 신봉자를 친미주의라고 하여 ‘미국놈의 앞잡이’, 공산주의자는 ‘소련놈의 앞잡이 적구(赤狗)’라고 공적인 연설에도 공공연히 비난하였다. 즉 민족주의자 이외는 ‘앞잡이’라는 말을 공적 석상에서 사용할 정도로 민족지상주의자들만 집합한 군대였다.

 

미군정하이고 보니 영어에 능통한 장교는 자연히 중용되고, 미군장교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이들은 사상행동도 민주주의 경향으로 개화되어, 민족주의 장교들과 자연히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민족주의 장교들은 이들을 ‘미국놈의 앞잡이’라고 백안시하였고, 자연 연회석상에서 주기(酒氣)를 띠면 논쟁 끝에 주먹질이 오고가는 일도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까, 친미장교들은 극렬한 민족주의자를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로 낙인찍어 무고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희생된 군인도 그 수가 상당하였다.

그러다보니 영어에 능통한 친미장교는 자연히 경원당하고 고립되었지만, 진급이나 출세는 빨랐다.

 

그 당시 경비대 장교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사상적으로는 미개하였다. 미군정은 이승만 박사를 주축으로 하는 정치인들에 대하여 민주주의 사상의 주입과 계몽에 주력했다.

 

정부 관리나 정치인들이 차차 민주주의 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 경비대의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집합체는 곤경에 빠졌다. 민족주의 군인들을 미군정이나 극우 민주정치 단체나 경찰은 반미주의자나 친 공산주의자로 백안시하였고, 공산주의자는 또 일제와 미제국주의자의 주구라고 비난하고 멸시하였다.

 

당시 통위부장 유동렬(柳東悅)씨는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으로 민족주의자였으나, 노령으로 인하여 전 군대를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사상적으로 영도할 만한 기력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당시 중앙정부 인물과 정치가 중에는 국군을 양성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말하자면 경비대는 정치적으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므로 각계에서 독립도 안 된 마당에 무슨 군대냐 하는 식으로 백안시하였으며, 특히 경찰은 군대를 음으로 양으로 질시하였다.

 

미군정 3년간의 주역은 당시 군정 경무부장인 조병옥 박사였다. 군정으로 볼 때 치안이 우선이고 보니 경찰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조박사의 세력이 강해진 것도 필연적이었다.

조박사의 세력이 강해짐에 따라 정적(政敵)들이 그를 질투하고 모함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나중에는 조박사가 독립이 되면 경비대를 해산시키고 경찰로 하여금 국군을 편성한다는 유언비어까지 군대 내에 돌았다.

 

사실은 여하튼 이 소문은 군대내의 전 장교가 확신할 정도로 퍼져, 경찰과 경비대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경찰과 경비대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전남 영암에서는 무력충돌까지 발생하여 쌍방간의 감정은 적대관계 정도로 내심 악화되고 있었다.

 

2개의 무력단체가 불화하게 됨에 따라, 일방의 세력을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였으므로, 미군정은 경비대의 증강을 서두르지 않았다. 경비대에 탄환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서였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경비대는 사사건건 조박사의 짓이라고 여겨, 그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어졌다.

 

경찰에 대한 이 같은 반감의 원인으로는, 사실 일부 몰지각한 경찰간부들의 과오도 있었지마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로 가장하고 군에 입대하여 경비대를 선동하고, 경찰과 충돌을 일삼은 것도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경찰과 경비대는 견원지간이 되었고, 이 둘 사이에 사건이 빈번해졌다.

 

한편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각 부대별로 경찰과 친목을 도모하는 조정위원회 등이 조직되었고, 그 결과 양자의 친목이 점점 향상되었다.

 

양자는 상호 불간섭을 원칙으로 하였다. 내가 지휘하는 9연대와 경찰과의 관계는 부임 이래 한 번도 불미스러운 불화사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4. 사건발생의 근본원인 ①

 

현재까지 기록된 역사나 전사(戰史)에 실려 있는 제주도의 4‧3사건의 발생원인은, 거의 전부가 허위 또는 막연한 추리, 그렇지 않으면 거두절미하고 무조건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기술하거나, 정치적인 목적에서 고의적으로 그럴싸하게 허위 날조하여 기술되고 있다.

 

이렇게 부정확한 사료가 금일까지 수정되고 있지 않는 데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이런 사료를 정확히 기록하여야 할 관(官)에서, 만일 4‧3사건의 발생원인과 진상이 사실 그대로 보도되면, 자기들의 과오나 죄상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역사에 영원히 남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또 당시의 사건책임자들이 그 후 정부의 상당한 고관이 됐거나 또는 정치적 지도자로서 상당한 기간 세력을 가졌던 것이 그 원인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재(在) 제주 지식인들의 무능과 무기력이다. 진상을 세세히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서 보신을 위해 덮어둔 것이다.

또 그 당시 정확한 사료의 증인이 될 만한 제9연대의 장교들이 대부분 6‧25전쟁 시 전사하였고, 사건 진압책임 부대장인 내가 현역에 장기간 복무한 관계상 언행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음으로 해서, 사료제공을 꺼렸던 것도 그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내가 당시 연대정보로 수집한 바에 의하면, 사건발생의 근본 원인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단시일 내에 간단하게 진압될 문제였다.

나는 소수의 희생으로 단시일 내에 폭동이 진압되리라고 전망하고, 상세한 정보와 진압작전 계획을 당시 제주도 군정장관이던 맨스필드 중령에게 보고하였다.

현지 미군정 당국에서도 나와 동일한 정보판단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나의 작전계획을 승낙하였다.

 

그 후 나의 판단과 작전계획은 적중해, 단시일 내에 진압의 전망이 보였다. 그러나 평화의 일보 전에서, 후술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사건은 확대되고, 3만 명의 희생자를 낸 공산폭동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최초 미군정이나 내가 판단한 폭동의 원인은, 제주도에 이주하여온 서북청년단원들이 도민들에게 자행한 빈번한 불법행위가 도민의 감정을 격분시켰고, 그 후 경찰이 서북청년단에 합세함으로써 감정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급기야 극한의 도민폭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공산주의 이념투쟁 폭동으로는 볼 수 없었고, 또 경찰력에 대항할 만한 그러한 조직이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군정의 책임자나 연대장인 나의 일치된 판단이었으므로, 작전계획은 ①제9연대가 진압책임을 지고 ②사건발생 당시 폭도들은 경비대를 적으로 삼는 것을 회피하였으므로, 경비대가 중간에서 쌍방을 격리하고 ③일정한 냉각기를 둔 후, 범법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면 사건은 진압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것은 제주도 군정장관도 동의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판단한 것은 폭동발생 근본원인으로 다음과 같은 정보가 수집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북 공산폭정에 견디다 못해 자유를 찾아서 남하한 이북동포들이 수백만이 넘었다. 이들 중 일부가 서북청년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성과 북한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 피난민들의 구호와 정착을 위하여, 각 도‧읍‧면으로 이들을 분산 수용하였다.

제주도에도 그 당시 약 1백 명 전후의 서북청년들이 들어와, 각 읍‧면에 분산 거주하고 있었다. 대공(對共)사상 계몽 관계도 있고 하여, 이들 중 희망자는 군‧경‧관리로 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는 도민들도 따뜻한 동포애로 이들을 맞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도민들과 서북청년들 간에 감정대립이 야기되었다.

이들 열렬 청년들은 고향을 버리고 남하한 만큼, 향수와 고독을 달래기 위하여 제주도 각지로 돌아다니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각 면‧지서 등지에 근무하는 동료 서북청년들을 찾아 술로 소일하는 형편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제주도의 풍습과 배타적인 도민성을 모르는 이 청년들은, 산간부락을 찾아 다니며 말썽을 빚기 일쑤였다.

호기심이 많은 젊은 청년들이고 보니 부녀자들에 대해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주민들이 경찰에 호소하여도, 많은 경우 경관들과 개인적으로 과거 친구지간이고, 또 경찰에서 보호하고 있는 그들인 만큼, 항상 결과는 무마 은폐되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이런 일들이 증가되고, 도민들의 불만과 원한은 격화되어갔다. 드디어 모든 육지인들에 대한 경원과 배척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가 제주도에 부임하고 보니, 제9연대 장병을 포함한 육지인들에 대한 도민의 태도는, 과거 일정 때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서북청년들을 잘 분별할 줄 모르는 도민들은, 육지인이나 경찰관이나 군인이면 무조건 경원하였다.

사법권을 가진 경찰의 비호 하에 있는 서북청년들은, 경찰지서가 위치하고 있는 부락에서가 아니면 거주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험악하였다.

 

그 다음 직접 도화선이 된 원인의 하나는, 제주도민이 과거 일제시대부터 생업이 돼오다시피 했던 일본-제주-육지 간의 중간무역에 대한 위협과 침해였다.

 

농토가 척박한 이곳 도민들은 젊은 남자들은 가족을 두고 육지나 일본에 출가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일본 대판 등지에 많이 취업하고 있었다.

제주도민 특유의 협동과 단결심으로, 자신들의 생산품이나 생활필수품들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 보내왔다.

도민들끼리 운영하는 소형선박들도 다수 있었다. 이들 선박들은 일본 각지를 운항하면서 값싼 상품들을 가지고 와서, 제주도와 육지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해방 당시 수십만의 재일 귀환동포들의 수송과 재산 운송에 이 선박들이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그 후에도 이렇게 귀환동포들의 재산반입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미군정하에서는 생활필수품이 부족하였으므로, 귀환동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재산은 대부분 생활필수품이었다. 서울 상인들은 부산과 제주도로 가서 이 상품들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제주읍에 왕래하는 육지 상인들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반입되는 이 상품을 사러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났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서북청년과 주민들 간에 감정이 격화되고 보니, 누구 한 사람 이들에게 술 한 잔, 밥 한 끼 사주는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이들로서는 의식주가 큰 문제였다. 그래서 일본에서 수입해 들여오는 이 무역품을 압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시대부터 미군정 3년간 제주도의 각 항은 자유항 비슷하게 세관도 명목뿐이었고, 당시는 법질서 상으로 각종 선박들이 자유롭게 출입하여 상품들을 거래하였다.

상품구입을 위해 일본에 밀항을 하려는 상인들 또는 상품을 거래하려는 상인들이 제주도에 몰려와서 경기는 갈수록 좋아지고 생활은 풍부해졌다.

 

그런데 이 무역상품들을 세관 아닌 경찰과 서북청년들이 압수하고는, 몰래 상인들에 매도하여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미군정의 지시거나 상부의 지시도 아니었으며,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사법(私法) 행위였다. 그보다는 일종의 약탈행위였다.

그러나 이 불법행위를 막을 방법도 법기관도 없는 불법천하였다.

경찰의 운영비로 충당한다는 명목 하에, 경찰 상부에서는 이런 불법이 공공연히 묵인되었고, 거기에는 축재와 상납의 목적도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갑자기 제주도 각 항에 출입하는 무역선이 줄어들고, 그 기항지가 부산‧여수‧목포항으로 변경되고, 제주도에서는 무역이 지하로 잠입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서북청년들을 앞세워, 시내는 물론 산간부락까지 밀수품 수색에 나서, 그것이 일상 임무가 되고 말았다. 돈벌이가 되니까 그럴만도 했다.

이렇게 되니까 도민들은 경찰이나 육지인들하고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밀고자라고 의심받기 싫어서였다.

 

1948년에 들어서자 도내의 치안 공기는 지극히 험악하여졌다. 도민과 관 사이의 불화는 극도에 달해, 마치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의 식민지에서 사는 기분이었다.

 

 

5. 사건발생의 근본원인 ②

 

각 지서마다 밀무역의 피의자와 그 가족들의 문초가 날이 갈수록 증가되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나와 개인적으로 가까웠던 제주도 출신 지식층의 친구들이 이 참상을 제주도 군정장관인 맨스필드 중령에게 보고해 달라고, 실정을 밝힌 상세한 정보와 함께 수차 요청해 왔었다.

나는 이 정보들이 연대에서 수집한 정보와 일치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참상이 보고된 것보다 더 비참하다는 것을 알고 동정한 나머지, 나의 임무는 아니지마는 군정장관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 경비대는 주민들과 직접 관계된 업무상의 임무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도민들에 이익이 되는 일이 있으면 있을까, 해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나 개인이나 제9연대 장병들도 비난받을 일이 없었다.

그러나 부대주둔 부근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다. 나는 부대출입 상인이나 유지‧지식자들 중에 수명의 친구들이 있었을 뿐, 기타 지역에서는 친구라고 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 미군정장관 맨스필드와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였다. 그는 내가 소위시절(부산 제5연대 근무시)부터 친근한 사이였다.

 

1948년 2월 초, 내가 맨스필드 장관을 방문해 제9연대가 수집한 도내 민정 상황을 보고하였더니, 그는 대단히 고마워했다.

미군정에서는 이런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관심을 가지고 선처하겠다며, 읍내에 있는 나의 친구를 자기에서 소개하여 달라고까지 하였다.

나는 이런 일을 친구들에 전하고 동행하기를 청하였으나, 후환이 두려워 한 사람도 응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수일 후, 나는 군정장관에 불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군정장관의 말에 의하면, 경찰감찰청장 김영배(金英培)씨를 불러 문책을 하였더니, 내용일체를 부인할 뿐 아니라, 연대장의 보고는 경찰과 경비대간의 불화를 조성하는, 악의에 찬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군정장관 자신이 아는 몇몇 제주도 유지들을 불러 물어 보았지만, 그들도 사실무근이라고 한결같이 말하더라고 하면서, 차후 이런 문제는 경찰을 자극하고 불화를 조성할 원인이 되니, 이런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연대에서 훈련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제주경찰서장 문용채(文容彩)씨가 나를 방문했다. 그는 군정장관에게 내가 보고한 내용은 경찰에 대한 군대의 내정간섭이며, 밀수자를 취체하는 것은 경찰의 임무이니 차후 이런 내용에 관해서는 상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서장은 서북청년과 경관의 배행에 관하여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못하고, 정치적인 문제 등을 들어 자기도 보신 상 묵인을 하고 있으니, 나에게도 신상을 고려하여 자중하라고 했다(문용채씨는 전직이 군인이며, 나와는 동일부로 소위 임관한 동기였다.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는데, 군을 그만두고 제주경찰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후 군에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제주도 출신 유지들마저 후환이 두려워 내게 협조하지 않고 보니, 나만 우스운 사람이 되고,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나서 부대 내에 들어박혀, 용무 이외는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당시 경찰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경비대에 제공하여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부대 내 사병들 중에 공산주의자들이나 용공주의자들의 명단, 또는 군대가 알아야 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상황 등을 정기적으로 정보교환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경찰과 9연대 간에는 이런 정보의 교환이 전무할 정도였다. 그 이유는 제주도에는 공산주의자가 거의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인민공화국’에 가담한 자들은 공산주의 사상의 의미도 모르는 민족주의자들이었고, 그 수도 극소수였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제주도에서 축출되어 육지에 살고 있었다.

오직 염려되는 것은 육지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제주도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찰도 전적으로 그 방면에 중점을 둬, 외지에서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이 순박한 도민들에게 사상교육을 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미군정 부대는 아주 소수가 읍내 제주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도정(道政)의 대부분은 민간 도지사와 경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한 달에 1~2회씩 군정관들이 면‧지서 소재지를 방문하여 민정을 감독하였지만, 그것도 1일에 제주도 일주 4백80리를 순찰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제주읍 이외의 지역에 대한 상세한 사정은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 일이 있은 뒤, 연대 내에서 군무(軍務)에만 정신을 쏟고, 일절 민간인들의 동향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1948년 3월에 들어서자, 연대 정보부로부터 도내치안의 공기가 대단히 험악하며, 폭풍전야와 같은 불온한 분위기가 돈다는 보고가 있었다.

또 읍내에 사는 친구들과 부대출입 민간인들이 조만간 무슨 일이 발생할 것 같다는 징후를 알려왔다.

 

그 정보의 내용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내용들이었다.

경찰의 밀수품 압수로 인해, 제주도내에는 무역선들이 일체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고, 경찰은 수입원이 끊기자, 매일같이 흥청거리던 유흥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과거 밀수의 전력을 가진 자나 그런 자들이 도외로 도피해 버릴 경우는 가족을 붙들어다가 고문해서 돈을 뜯어내며, 이것도 여의치 못하면 그들의 가축을 끌어다가 잡아먹든지 팔아먹는다는 것이었다.

또 고문치사가 여러 곳에서 발생하였으나 상부에서 알까봐 바다에 암장한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경찰에 붙들려간 자 중에 유치장에 없고 행방불명된 자들은 대부분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등, 경찰과 서북청년들이 무리지어 산간벽지 부락을 배회하면서, 밀수피의자나 가족들을 수색하러 다니며, 폭행‧약탈이 일쑤며, 강간도 자행한다는 온갖 해괴한 정보들이 다 있었다.

 

장교들과 나는 산간에서 수렵 중에 경찰과 서북청년들이 순찰하는 것을 수차 목격한 일은 있지만, 이런 정보들을 아예 신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는 일제에서 해방이 되고, 전 국민이 숙원인 독립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을 때였고, 또 동족끼리 그것도 교육을 받은 경찰이 이민족에게도 자행하지 못할 이러한 야만적인 불법행위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인사들이 서북청년단원과 경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 중상모략하는 언행이며, 개인의 힘으로는 보복이 불가능하니 경비대 군인들을 선동하여 이간시키려는 유언비어라고 판단하였다.

또 제주도 친구들도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나로 하여금 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난처하게 만든 전례도 있고 하여, 그 후부터는 제주도민들의 말은 그리 신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평화스러운 제주도에서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벌써 이런 정보들은 연대 장병들 간에 유포되고 있었다. 제주도출신 사병들이 휴가나 외출 시에 자기 마을이나 친척들에게서 듣고 와서 부대 내에 유포시킨 것이 대부분이었다.

장병들은 이런 정보가 전하는 경찰과 서북청년의 소행에 대하여 대단히 의분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교와 하사관들을 집합시켜, 이런 유언비어는 침소봉대한 것이며, 경찰과 경비대 장병 간을 이간시키기 위한 중상모략이라는 것을, 지난번 내가 미군정관에 망신당한 전례까지 들어가면서 선동에 동요치 말라는 훈시를 했다.

한편 정보부에는 그런 정보 분석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제주도의 3월 복숭아꽃이 각지에 만개되고, 뒤를 이어 진달래꽃 벚꽃 등 각종 꽃이 만발하여 외면상으로는 평화스럽기만 했고, 봄빛이 전도를 물들여가고 있었다.

 

 

6. 내가 겪은 4월 3일

 

4월에 들어서자, 제주도는 완연한 봄이 되었다. 변덕스럽던 기후도 미풍으로 바뀌어 평화스러운 봄날씨가 계속되었다.

나는 약 1개월간이나 나가본 일이 없던 제주읍 나들이 기회가 생겼다. 나의 상관이었던 백선엽(白善燁) 대령이 제5여단장에서 총사령부 정보국장으로 전보발령을 받고, 과거 그가 5연대장 재임 시 연대 군사고문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절친했던 맨스필드 대령을 만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제주도 군정장관 사령부에 유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4월 1일 군정청을 방문하고, 백대령과 맨스필드 대령과 어울려 즐거운 하루를 지냈다.

다음날 낮 12시 서울행 C-46 비행기 편으로 백대령을 비행장에서 송별하고, 모슬포 연대본부로 향하였다(백선엽은 그의 회고록에서, 자신은 4월 3일 제주읍의 한 여관에서 모슬포의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사건발생 소식을 들었으나, 제주읍내는 평온했고, 9연대도 직접 폭도들과 교전이 없었으므로, 예정대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나의 승용차는 1과 1/2 트럭이었다. 동승자는 연대 부관 심흥선(沈興善‧훗날 대장으로 예편) 대위, 연대 군수참모를 하고 있는 유근창(柳根昌‧중장으로 예편) 대위를 면회오는 그의 형님, 모슬포중학교 교장, 운전병을 합하여 병사 5명 등 모두 9명이었고, 군 보급품을 일부 싣고 있었다.

 

부대를 향하는 길에 우리는 도로주변 돌담 위에 앉아있는 꿩을 사냥하기도 했다. 99식 소총으로 꿩을 쏘는 것이었다. 탄환은 구 일본군이 바닷 속에 버리고 간 탄환을 해녀를 시켜서 건져낸 것이었으나, 사용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밭 돌담 위에 앉은 꿩을 발견하면, 심대위와 나는 총 1정을 가지고 번갈아 가며 내기를 하면서 쏘았다. 명중하면 차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함성을 올리며 박수를 쳤다. 나는 당시 명사수로 전군에 명성을 떨쳤었다. 거의가 백발백중이었다. 물론 심대위도 훌륭한 사수였다. 우리 두 사람이 1백~2백m 거리에 있는 꿩을 백발백중시키는 솜씨에, 동승한 유대위의 형님을 비롯한 일행은 박수를 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차에서 뛰어내려 밭 돌담을 넘고 잡목을 헤치면서 꿩을 주워왔다.

우리 일행은 휴대한 음식을 먹으면서 화창한 날씨를 즐겼다. 피로한 것도 잊었고, 날이 저무는 것도 몰랐다. 피크닉하는 기분으로 4월 2일의 오후를 사냥에 열중하다 보니까, 날이 어두워져서 도착한 곳이 겨우 한림(翰林)이었다. 당시 한림 거리는 여관과 요리점도 있는 제법 큰 가로(街路)였다.

 

날이 어두워졌는데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 차 조명등이 고장이 난 것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한림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한림여관에 연대장 일행이 유숙한다는 것을 부대에 연락했다.

다행히 한림여관은 운전병의 친가여서 우리 일행을 가족처럼 맞았다. 사냥하여온 꿩을 요리하여 배불리 먹고 나니 주간의 피로가 일시에 닥쳐왔다. 일행은 한방에서 일찍 잠에 들었다.

여관의 1층은 우리 일행이 쓰고, 2층은 경찰관을 순회 위문하러 서울에서 내려온 총경이 인솔하는 약 20명의 위문단이 유숙하고 있었다.

 

시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벽 3시 전후해서였을 것이다. 고막을 찢을 듯한 다이너마이트의 폭음소리에 나는 잠을 깨고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을 깨고 보니 여기저기서 총성이 콩 볶듯이 나고 유탄이 난무했다. 마치 전쟁터처럼 함성이 나고 총성이 교환되고, 그 때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격전지에서와 같은 돌격소리도 들렸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이었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심대위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것과, 창 밖에 적이 있는 듯하며, 우리 일행을 보고 던진 폭발물이 창문에 맞고 창밖에서 폭발하는 바람에 우리는 구사일생했다는 것 등을 일러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방안에서 군화를 신고 소리를 죽이며 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침입하는 적을 쏠 태세를 갖췄다.

그 다음은 무엇보다 방안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했다. 부서져 열려있는 창문으로 제2탄의 폭탄이 들어오면 우리는 끝장이다.

나는 어두움 속에서 일행에게 나를 따르라고 손짓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 밖을 살핀 후, 총을 겨눈 채 해안가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우리가 여관을 나서자마자 우리의 침실 쪽에서 폭음이 났다. 제2탄이 투척된 것이다. 나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약 50m를 달려나가,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큰 바위 뒤에서 방어태세를 취하였다. 무기는 99식 1정과 32구경 권총 한 자루가 전부였지만, 탄환은 충분하였다.

유리한 지점까지 확보했으므로 20~30명은 사살할 수 있었지만, 우리 위치가 발각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소리 없이 엎드려서 적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투경험이 없는 민간인과 병사들은 총마저 없고 보니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9명의 생명이 나 한사람의 손에 달린 만큼, 그들은 나의 일거일동만 살피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지 않는 척해야 했다. 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여 그들을 안심시켰다. 살기 위해서는 침착해야 된다. 판단은 정확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렇게 자신을 타일렀다.

 

폭도들은 떼를 지어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시가를 뛰어 다녔다. 뭐라고 하는 소리인지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상하게 여긴 것은, 폭도들이 카빈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빈총은 미군과 경찰만이 보유하고 있었을 뿐, 다른 데는 없었다. 폭도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최초의 총소리는 지서 주변에서 났었다. 그리고 총성은 시가 밖으로 멀어져 간다. 폭도 수는 1백 명은 넘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지서에서 사이렌 소리(이날 경찰은 전혀 대응을 못했다. 사이렌도 집에서 습격을 받은 국민회 한림면위원장 玄周善의 딸이 지서에 달려와 울린 것이었다 - 편집자)가 들리고 카빈 총성도 났다. 아직 경찰이 지서를 사수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서로 가서 합세하기로 결심하였다. 날이 밝아서 폭도들이 우리의 위치를 발견하기 전에 야음을 이용해 지서에 합세, 폭도와 대적하기로 결심하고 지서를 향하여 약진을 하였다.

 

그러나 지서 안에서는 적인 줄 알고 우리를 향하여 난사해 왔다. 나는 고함을 질러 총격을 멈추게 한 뒤 전령을 보냈다. 서로 연락이 되어서 지서에 들어가 보니 지서 안은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중상자들이 있었으나 지서장은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건발생 당시 지서장은 운 좋게 출타 중이었으나, 총성을 듣고 지서로 뛰어온 모양 같았다. 폭도들이 철수한 뒤였다.

 

폭도들의 총성은 점점 멀어지고 시가는 평정을 회복하였다. 이곳저곳에서 공격을 당한 부상자들이 지서로 들어왔다.

시가에서도 통곡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지서 안에 피신해온 15~16명의 경관과 서북청년단원들 가운데 일부가 빈사상태의 중상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총탄에 의한 환자는 없고, 대부분의 환자가 곤봉 등에 의한 타박상이었다.

상황을 보니 경찰들은 방심하고 무경비 상태에 있다가, 각자 숙소에서 폭도들의 급습을 받고, 교전도 해보지 못한 채 당한 듯했다.

폭도들은 지서를 습격, 유치 중이던 피의자를 풀어주고, 거기서 빼앗은 무기를 가지고 시가를 행진하면서 총을 난사하고, 평소에 원한을 가졌던 자, 경찰과 서북청년들을 하숙시켰던 자, 또는 그 동조자를 찾아다니며 폭행을 한 뒤, 날이 새자 산 쪽으로 도주한 듯했다. 날이 밝아오자 더 많은 부상자가 지서에 운반되어 왔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상황을 판단하여 보고, 나는 밀수 피의자들과 그 가족들이 경찰에 구치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행한 실력행동인 동시에, 원한에 대한 보복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나 나는 사건 발생 시부터 그 때까지 몸은 한림에 있었지만, 마음은 모슬포 연대본부에 가 있었다.

 

 

7. 사건 초기의 상황

 

연대장 부재 시 아무런 경계태세도 갖추지 않고 있는, 탄환 한 발 없는 9연대가 무장된 폭도들의 기습을 당한다면, 결과는 한림의 경우와 대동소이할 것이다.

나는 책임감에 짓눌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날이 밝자, 나는 지서장에게 지원군과 응급구호를 약속하고, 서둘러 귀대하였다.

한림에서 모슬포까지 오는 도중에 살펴보니, 전주와 전선들이 대부분 절단되어, 제주도내의 통신은 완전 마비가 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전 8시경 부대본부에 도착하여 보니 부대는 무사했다. 모슬포 지서와 부대에는 폭도의 기습이 없었다. 나는 전 부대에 전투편성토록 비상명령을 내리고, 바다에서 건져 비밀히 보관돼 왔던 소량의 탄환이나마 분배했다.

이렇게 응전태세를 취하고, 부대주변 일대에는 척후를 파견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부대상황과 내가 경험한 일체의 정보를 미군정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장병의 전 가족이 부대 내에 수용 보호되자, 전투준비는 끝났다.

 

오후까지 연대장에게 보고된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폭도들은 4월 3일 미명을 기해 제주도내 지서를 기습하여, 제주읍과 2~3개소의 지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일시 점령당하였으며, 경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특히 무기와 탄약을 상당량 탈취 당했다는 것이다. 현재 제주읍 만이 경찰과 미군이 방어태세에 있으며, 기타지역은 치안부재 상태이다. 폭도 수는 수백에서 수천까지 추측이 구구하다. 폭동의 목적과 성격도 정확히 파악을 못한 채 혼미한 상태이다.

군정과 경찰은 자체방어만 급급할 뿐, 상황판단과 어떤 결심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이다.

 

군정과 경찰이 이 지경이었으므로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폭도들이 신식 카빈총으로 무장했다면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무기 없는 지서, 탄환 없는 경비대는, 그것도 서울에서 수 천리 떨어진 고도 제주도이고 보니, 증원군과 탄환이 도착할 때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고만 것이다.

즉 폭도들이 주도권을 쥐고 공세에 있고, 경찰과 경비대는 수세에 들어서고 만 것이다. 아군은 상호간의 연락도 여의치 못했다.

 

폭도들은 4월 3일 야간에 들어서자, 재차 각 지서와 부근 촌락의 관공서를 습격해 왔다.

4월 4~5일 사이에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습격을 감행하여, 완전히 폭도의 천하가 된 듯했다.

그러나 공격목표는 경찰과 그 동조자들로서 경비대와 경비대의 소재지인 모슬포 지서에는 얼씬도 않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당시 폭도라고 하면 으레 공산 폭도일텐데도, 이놈의 폭도들은 미군정과 경찰을 타도하자고 소리 지를 뿐, 공산주의 사상을 담은 구호는 없었다. 그리고 연대 척후가 알아온 정보에 의하면, 폭도들은 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부근 촌락에 민간인과 같이 있는 것이었다. 민간폭동인 것 같았다. 폭도의 지휘자나 숫자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폭동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만심(慢心)하고 있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고, 일시에 무기와 인원의 손실을 당한 경찰은, 당황한 나머지 사건의 진상마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통신이 전도에 걸쳐 두절되고, 정보를 수집하여야할 인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민들도 폭도들이 사건 첫날 경찰과 군정에 협조한 자에 대한 보복폭행이 철저하였으므로, 폭도들에 의한 후환이 두려워 경찰에 협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진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민출신 사병들을 민간복으로 갈아입혀 휴가명목으로 귀가시켰다. 그들이 각 부락에서 얻어온 정보는 이러하였다.

 

폭동발생의 주원인은, 밀수혐의 등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아 도민과 그 가족에게 가해진 경찰과 서북청년들의 횡포와 고문치사 강간 등에 대한 보복에서 비롯되었다.

폭도들의 최초의 목적은 경찰에 구치되어 매일같이 고문당하는 피의자들을 구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도들의 성분은 주로 그들 가족들이다.

 

해방직후 ‘제주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편승하여 이들을 선동하고 조직‧지휘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폭도의 대부분은 그들을 따르면 가족을 구출하게 될 것으로 믿어 가담하게 됐다.

 

폭도의 수는 전도를 통틀어 3백 명을 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최초에는 20~30명이 일단이 되어, 무기도 해녀들이 바닷 속에서 건져낸 구 일본군의 99식 소총에다 그것도 1개 편대에 많아야 4~5정 정도였고, 그밖에는 곤봉 따위였다.

그런데 지서를 기습하고 보니, 경찰은 폭도들이 생각하던 의외로 무력하였다. 폭도들은 거의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서에서 약탈한 최신식 무기(카빈총)를 가지고 경찰을 재차 습격하게 되니, 경찰은 문제도 안 될 정도로 허약했다.

 

원한에 찬 대중이 무기를 손에 잡으면, 상상할 수 없는 만용과 잔인성을 발휘하게 된다. 격분한 군중이 유혈을 보면 휘발유에 불을 지른 격으로 일시에 폭발하여, 자제할 수 없는 폭동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사태가 일단 터지고 나자, 제주도 폭도들이 바로 그랬다. 기세가 충천하게 되자, 예의 만행과 잔인성이 나타났다.

경찰에 협조한 자에 대한 처형은 특히 잔인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락 입구나 마을 복판에서 나무에 결박한 후 부락민들을 집합시켜, 그들이 보는 앞에서 폭사시키는 만행도 벌어졌다.

 

군정과 경찰은 육지에서 증원군을 청하여 우선 각 지서의 기능을 회복하고 치안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특별 경찰토벌대를 편성하여 폭도의 주력을 수색 격멸시키는 작전으로 나아갔다. 미군이나 경비대에 병력 요청 없이 자력으로 폭동 진압전에 나선 것이다.

 

당시 정세로 보아 군정 하에서 세력이 당당하던 조병옥 경무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우선 폭동발생의 주된 원인이 경찰의 실정에 있었다는 것이 알려질까봐 두려웠을 것이고, 또 전국의 치안책임자로서 일국지(一局地)에 불과한 외딴 섬 제주도의 소수민란을 단시일 내에 진압 못하면, 자기 위신이 크게 깎임은 물론, 정치적인 진퇴문제에까지 관계된다고 여겼을 터이다.

 

그는 호언장담으로 미군과 경비대의 지원이나 개입을 배제하고, 공안국장 김정호(金正浩)씨를 제주도 폭도토벌사령관으로 임명, 경찰의 대병력을 투입했다. 그리하여 제주읍내 경찰청 본부에 사령부가 설치되고,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폭도들의 작전은 경찰을 도민들과 고립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경비대 제9연대를 자극하는 일체의 행동을 조심하였다.

4월 3일 한림에서 연대장을 습격한 것은, 같은 여관에 들었던 겅찰관과 혼동 오인했기 때문이었는 듯하다.

폭도들은 9연대가 주둔하고 있는 모슬포 부근 대정면(大靜面)과 중문(中文) 일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북제주 조천면(朝天面)서 한림 항까지의 그 사이 지역에서 출몰하였다. 기타 지역에서의 출몰은 경찰병력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폭도들이 군대와 충돌을 회피하는 이유를, 첫째 폭동발생 이유가 군대하고 무관하며, 둘째 전투력에서 상대가 안 되는 훈련된 군대를 적대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며, 셋째 경찰과 군대를 동시에 치는 양면작전이 불가능하였고, 넷째 설사 군대가 경찰의 증원군으로 개입하더라도 그 시기를 될 수 있는 대로 지연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군 내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8. 경찰의 초토작전

 

육지에서 경찰의 증원군이 도착하여 지서의 병력이 보강되고 대병력의 경찰토벌대가 도착하자, 지서습격도 없어지고 치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나는 며칠 내에 폭도가 진압되고 평화가 회복되리라 확신하였다.

경찰은 폭도의 수가 수백 내지 수천 명이라고 과장하여 보도하였으나, 그것은 자기들의 책임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고, 연대의 정보 분석은 고작 2백~3백 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 폭도가 증가할 근거도 없었다(육지 같으면 타도에서 증원이 가능하겠지만).

 

반면 경찰토벌대는 당당한 병력과 최신식 무기와 기동력을 가졌으므로, 토벌이 시작되면 2~3일이면 대세가 결정되고, 그 후는 분산도피자들만 수색하면 되는 것이었다. 제주도 군정장관이나 경찰지휘관들도 그렇게 판단하였다.

 

그러나 토벌작전이 시작되고 보니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토벌대는 초전부터 도처에서 패전의 연속이었다. 사상자가 속출하고 무기마저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되니까 폭도들의 사기는 충천해지고, 백주의 지서습격이 재개됐다. 교통과 통신의 두절도 빈번해졌다.

 

나는 폭도들의 작전과 교전법을 관찰하기 위하여, 중요간부 장교들을 대동하고 수차에 걸쳐 경찰토벌대를 따라가 보았다.

실전을 관전하다 보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경찰토벌대가 폭도와 조우하면, 원거리 사격만 할 뿐 전진하는 자가 없었다. 2백~3백m의 거리를 두고 돌담 뒤에 숨어서, 몇 시간씩이나 사격만 하고 전진할 생각을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폭도들은 지원사격을 받으며 용감하게 토벌대를 향하여 돌격을 하여온다. 그러면 토벌대는 전의(戰意)를 잃고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 이것이 매일같이 계속되는 토벌대의 실황이었다.

 

토벌대의 전력은 날로 약화되고, 토벌대가 폭도들에게 무기와 보급품을 공급하여 주는 꼴이 되어 버렸다. 폭도는 날이 갈수록 무장이 강해지고 있었다.

경찰이 이렇게 가다가는 토벌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나는 판단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토벌사령관 이하 간부들이 공명심과 허세, 권위만 과시할 뿐, 실전에 대한 준비도 없고, 폭도에 대한 아무런 전투정보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기습당하기가 십상이었다.

또 토벌대가 육지의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되어온 경관들로 편성되어 있었으므로, 조직적인 편성이나 전투훈련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토벌사령부가 폭도를 얕잡아 보고 성급히 작전한 것이 패인이었다. 토벌이 시작되고 1주일이 못되어 폭도의 세력은 강해지고, 경찰은 읍내를 수비하는데 급해졌다.

 

이렇게 토벌이 실패하자, 호언장담하고 내려온 김정호 사령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수립된 작전계획이 ‘초토작전’이다. 이 작전이야말로 제주도를 대폭동사건으로 확대시킨 근본원인이 된다.

초토작전에도 전략적으로 여러 가지 유형이 있으나, 근대사에선 2차대전 때 일본군이 북지(北支)‧만주 등지에서 적의 유격군을 토벌할 때에 행한 작전으로 그 잔인성에서 특히 악명이 높다. 일본군은 점령지역내의 적 유격대의 활동과 인적‧물적 지원의 근원을 봉쇄하기 위하여, 점령지 주민들로 하여금 부락단위로 유격대의 침입을 자치적으로 방어하거나 토벌군에 보고케 하도록 했다.

만일 유격대가 부락에 침입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은닉하거나 비밀히 지원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락의 전 주민을 깡그리 죽이고 가옥과 가재를 소각하여, 전 부락을 문자 그대로 초토화하는 작전을 폈다.

주민들은 목숨의 보존을 위하여 유격대 침입을 거부하게 되므로 유격대의 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고, 유격대에 협력한 부락과 주민은 초토화되므로 유격대는 활동근거지를 잃게 된다.

반면 토벌군은 병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된다.

 

이 작전은 근대전에서 국제법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비전투원 학살의 죄목으로 이 작전을 명령한 사령관은 전범(戰犯)으로 규정, 처벌을 받게 된다.

경찰 책임자와 김정호 사령관은 적국 아닌 국내에서 동족에게, 이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초토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최초의 작전은 극비밀리에 조천면(朝天面)과 애월면(涯月面) 일대의 산간부락에서 행해졌다. 그 초토작전은 철저하게 이루어져 비밀의 누설을 방지하였으므로, 당사자들 이외는 아무도 몰랐다. 제주도 미군정장관이나 9연대 정보부에서도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인접부락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산간부락 주민들은 치안부재 상태에서 생명보전을 위하여서는 할 수 없이 폭도들에 조금이라도 협력 안한 부락이 전무할 정도였다. 따라서 초토작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부락은 거의 없었다.

산간부락의 주민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서는 폭도에게 가담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주읍이나 일주도로 주변의 치안이 확보된 해변부락으로 피난하든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대부분은 폭도에 가담하였다. 해안부락으로 하산한 주민들에 대하여 또 경찰들이 귀찮게 굴었기 때문이다.

 

초토작전의 비밀이 누설되고,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안 미군정은 강력히 이를 제지하고, 수차 현상조사도 하였다.

경찰사령관은 초토작전은 폭도들의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며, 주민피해와 부락의 파괴는 폭도들의 소행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럴 듯한 주장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폭도들이 발악적인 최후수단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보았다.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자라면 경찰이 이 같은 초토작전을 감행하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사실은 경찰 소행이었던 것이다. 각종 정보기관에 이를 경찰소행으로 확인해 주는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초토작전중인 경찰의 현장사진, 그리고 토벌사령부에 산적된 산간부락에서 약탈한 금품 등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현재까지도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당시 산간부락의 주민들이 많은 현금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 군사고문관이 나에게 제공한 사진에는 6부대나 되는 몰수현금이 경찰사령부에 쌓여 있었다).

 

미군정은 처음엔 강력히 초토작전을 반대하였으나, 다음부터는 어찌된 셈인지 묵인하는 태도로 나오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장려하는 태도로 변하였다.

미군정에서도 양론이 있었다. 치안책임 관계관은 찬성하고, 군대에 배치된 군사고문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 기술하겠다.

 

아무튼 미군정이 초토작전을 묵인하게 되자, 경찰은 공공연하게 한마을 한마을을 초토화시켜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일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돌변하였다. 대부분의 산간부락 주민들이 산으로 도주하여 폭도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폭도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가하여, 갑자기 수백이 수천이 되어 그 수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그들은 결사적으로 경찰에 대항하여 왔다. 경찰은 다시 중과부적이 되어 산에서 쫓겨 내려오고, 제주도 산간부락은 대부분이 폭도에 가담한 형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남한의 경찰병력을 전부 투입하더라도 토벌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장관인 ‘딘’장군은 경비대를 투입하여 토벌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책임이 바로 나에게 부여됐다. 즉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제주도 폭도진압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민족적 양심에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이 기록이 세상에 발표될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죽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 이 글이 빛을 보게 될지 모르지마는, 이 국토에 여하한 형태의 정부가 서든지, 여하한 정당이 영도하는 정권하에서든지, 한국민족의 정부라면 이들로 하여금 역사의 비판을 받게 하여, 이 국토에 다시는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후손들에게 유언한다.

 

악인들도 무리가 많으면 역사에 행세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소행을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정의라는 미명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는 항상 고독한 것이며, 깊은 신념을 가진 용감한 자만이 실행할 수 있다. 신념을 가졌더라도 비겁한 자는 입으로만 주장한다. 그들은 위선자다.

 

 

9. 경비대의 토벌개입

 

4월 3일 이른 아침 한림에서 구사일생으로 부대로 귀환한 나는, 전 부대에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한 후, 보급관 전순기(田順基‧6‧25때 대대장으로 전사) 대위를 긴급전령으로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에게 보냈다. 제주도 폭동사건에 관한 일체를 보고하고, 9연대가 취하여야 할 행동에 관한 명령을 받기 위해서다.

보고내용은 폭동발생의 전후 정보와 제9연대가 현재 취하고 있는 상황, 폭동발생에 관한 장병들의 심리적인 동태 등이었다. 그리고 사태가 장차 어떻게 전개될 지 예측을 불허하므로, 긴급히 탄약과 기타 보급물품을 보충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 한편 나는 전 대위에게 경비대 총사령부의 각 참모부를 찾아다니며, 제주도 폭동발생에 대한 반응과 서울의 공기를 면밀히 수집하여 오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총사령부 참모장은 정일권(丁一權) 대령, 작전참모는 강문봉(姜文奉) 대령이었다.

 

전순기 대위는 출발 3일후 총사령부의 지시사항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시내용은 대략 제주도 폭동사건은 치안상황이며 경찰의 책임 상황이므로, 상부 명령 없이는 절대로 행동하지 말 것이며, 경비대는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인 만큼 국민신망과 존경을 받도록 하여야 하며, 9연대의 행동은 장차 경비대의 운명을 좌우할 문제이니, 연대장이 경솔한 판단이나 개인적인 영웅심이나 공명심으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도록 엄중히 금하며, 명령 없이 행동하면 엄벌에 처할 것이므로, 부대단결과 훈련이나 잘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탄약은 지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경비대 총사령부의 명령은 미군정이나 군사고문에게 극비로 하라는 지시였다. 총사령부 장교들의 일반적인 공기는, 국토방위를 주 임무로 하는 군대는 외적하고 싸우는 것이므로, 국내문제는 경찰의 소관이며, 폭도진압에 군대투입은 반대라는 입장이라고 했다.

 

실상 당시 제9연대는 전투에 투입될 형편이 못됐었다. 연대라 하지만 실제로 전투에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은 1개 대대 남짓에 불과했고, 전투훈련은 초보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형편이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실탄사격 경험이 없었다. 한마디로 전투는 불가능 상태였다.

 

나는 이런 명령을 받고 마음 한구석으론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경찰이 저토록 무력하다면, 장차는 군대투입이 필연적이라고 판단되어, 전투훈련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장차를 위하여 전투정보 수집과 상황의 진행을 살피는데 소홀하지 않았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벌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채 1개월도 못되어 전술한 바와 같이 경찰의 토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나는 결국 폭도토벌의 총책을 맡게 된다.

경비대 총사령관의 지시는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전속 군사작전고문이 파견되고, 탄환과 장교들의 보충이 이루어졌다.

 

9연대 병력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부산 5연대 소속의 진해(鎭海)주둔 1개 대대가 9연대에 배속되어, 그 선발대가 제주읍 비행장에서 설영(設營)준비를 하는 등, 토벌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었다.

경찰토벌대가 아무런 준비없이 공명심만 탐내 작전을 시작했다가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신중하고 치밀한 준비를 갖춰나갔다.

 

부임한 미 군사고문은 전에 친면이 있는 장교였다. 그는 내가 광주 4연대 작전참모로 재임 시 연대 고문이었던 드루스 대위였다.

그는 계급은 대위였지만 정규군 출신에 주특기(MOS)가 정보장교였으므로 특히 이 작전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당시 영어가 능숙한 편은 아니지마는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도 구면이고, 드루스와 나, 이렇게 3인이 과거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연고로 서로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관계였다.

통역관이 따로 없이 필요하면 3인끼리만 합의할 수 있으니, 작전기밀이 누설될 염려도 없어 더욱 좋았다.

 

부대가 전투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우리 3인은 매일같이 작전계획을 토의하였다. 맨스필드 대령은 폭동발생 전 내가 제공한 정보가 정확하였다는 것을 이제야 수긍하면서, 그 때 처리를 잘못해 이런 폭동이 발생하였다고 후회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3인이 당면하고 있는 난처한 문제들을 설명하고, 자기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하던 국제정치 문제였다.

 

당시 유엔은 유엔의 감시 하에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북한은 이 안을 거절하였고, 남한은 1948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반대하여 소련은 4월 유엔에서 “2차대전 후 미‧소 양군의 점령지역 내에서 소련 점령지역의 주민들은 평화롭기만 한 반면, 미군점령 하에 있는 지역에서는 국민에 대한 미군의 약탈이 심하다.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의 폭동사건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 미국정부를 국제적 선전무대에서 비난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한국에 있는 미군정장관 딘장군을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제주도 폭동사건은 이와 같이 한국의 독립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내가 책임지고 조속한 시일 내에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공산주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하여, 제주도 폭동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지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해 그러한 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이고, 그것이 공산폭동이냐 일반민중의 폭동이냐 하는 것은 진압작전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이며, 더구나 그런 문제들은 나의 책임소관 이외라고 답변했다.

 

실상 폭도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도 사회주의자‧배타주의자 등 각양각색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의 투쟁목적을 내세워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이념의 구호들은 거의가 위장적이거나 차용적인 것일 뿐, 그 내심을 들여다보면, 경찰에 대한 공포와 원한이 폭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단, ‘공산반란’으로 규정짓는 것은, 폭도들을 진짜 공산주의자들과 분리시키고, 또 군대가 개입하여 토벌하는 대의명분도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 3인이 심사숙고한 끝에 수립된 작전계획은, 1단계로 폭도 분리작전을 실시한 후, 2단계는 실력으로 토벌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1단계 폭도분리 작전의 주요골자는, 폭도 중 극렬분자는 불과 2백~3백 명 이내이고, 대부분은 부화뇌동한 자이므로, 이 극렬분자와 일반을 분리시켜, 극렬분자만 토벌하는 한편, 폭도와 일반 제주도민과를 정신적으로 분리시켜, 폭도들을 도민으로부터 고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목적을 달성키 위해 1단계로 시도한 것이 ‘화평‧귀순공작’이었다. 즉 강력한 군대병력을 배경으로 냉각기를 두면서, 화전(和戰) 양면의 귀순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이외는 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죄과의 대소를 불문에 부칠 것이며, 공산주의자라도 귀순하면 용서할 것이라는 관대한 포고령을 내렸다. 이것은 공산주의자와 폭도 도민을 분리시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나는 부대별로 지역을 분할하고, 전술적인 각 지점에는 대부대를 집결시켰다. 그리고 지역 내에 소수의 정찰부대를 파견하여 적정(敵情)을 수집하되, 적이 공격하기 전에는 교전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분간 정찰에만 주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10. 귀순‧화평공작

 

제주도 미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에게 자신이 시도했던 귀순공작이 실패하게 된 경과를 설명하여 주면서, 새로운 복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초기에 경찰이 저지른 실패로 인해 오히려 폭도가 증가되는 결과를 초래하자, 귀순공작의 필요를 느끼고 시도해 보았지만, 관민(官民)의 비협조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그간의 경과를, 당시 사용했던 군정 포고문의 전단 등을 보여주며 설명하였다.

 

처음 귀순공작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유해진(柳海辰)씨였다. 그러나 유 지사는 군정장관이 폭도들과 약속한 교섭회담일이 되자, 겁을 집어먹고 급병(急病)을 구실로 불참하고 말았다.

 

그 다음의 공작책임자는 당시 경찰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임명됐다. 김씨 역시 겁이 났던지, 폭도와 회담하기로 된 날짜가 되자, 급한 출장을 이유로, 군정장관의 허가도 받지 않고, 이른 아침에 민관(民官) 선박(제주-목포간의 정기선)을 징발하여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세 번째로 임명된 책임자는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씨였는데, 그 역시 회담 당일 급병을 핑계로 불참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주도 민족청년단장이 네 번째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이 자만이 용감해서, 수명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민족청년단 깃발을 앞세우고 약속된 회담장소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도의 대표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맨스필드 대령은 폭도가 약속을 위반하였는지, 또는 이쪽이 겁이 나서 지정장소에 가지도 않고 둘러대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십중팔구 중간에서 돌아와 버린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더러 폭도와 직접 만나 담판을 하라는 명령이었다. 내가 다섯째의 지명자가 된 것이다.

그는 “당신도 회담일에 일본으로 도망을 가는 것 아니냐”고, 농담조로 한국인에 대한 불신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맨스필드 대령은 귀순공작의 요점으로 민간인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민간인은 제주도의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도민의 감정을 판단하는데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했다. 단, 도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지, 원성을 사는 자를 기용하면 도민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명단을 내놓았다. 각자의 성분까지 분석한 잘 조사된 명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3명을 추천하면서, 이들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주신보 사장 김씨와 朴景勳씨 형제 등 3인이었다.

 

나는 참모들에게 지시해 폭도 공작원들과 접촉을 시도하는 동시에, 폭도나 그의 협조자나 친척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고, 막후교섭을 해 줄 민간인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지들은 한결같이 협조를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명백하였다. 귀순공작이 실패하면 폭도들에게, 성공하면 경찰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만일 귀순공작과 화평작전이 실패하여 무력토벌이 시작될 경우, 그 중재인은 폭도 측으로부터 도민의 배반자로 낙인찍히는 한편, 경찰로부터도 폭도들의 협조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 뻔했다.

설사 화평공작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찰은 내심 화평공작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었으므로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경찰은 화평이 이루어진 후, 폭동의 발생 원인이 밝혀지고, 자신들의 죄상이 폭로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십수명의 협력자를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여하한 경우에도 미군정과 군대책임자인 내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과 가족들의 안전을 확약해 줄 것과, 이를 위해서는 자기들의 명단과 협조내용을 극비에 부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극비리에 막후에서만 나에게 자문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맨스필드와 나는 물론 이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리하여 나의 비밀참모 역할을 하게 된 인물들은,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 한 박경훈씨 형제, 좌달육‧김대용(金大用)씨, 그리고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였다. 도내 민정의 말단에 관한 정보는 천주교 신자들의 공이 컸다.

 

우리는 비밀회합 장소로 박경훈씨 댁을 결정하고, 귀순유도를 위한 선무문(宣撫文)과 전단문을 작성하고, 폭도들과 접촉방법을 연구하는 등, 화평공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체의 인쇄는 비밀리에 제주신보사에서 책임졌다.

내가 제주도민과 폭도들에 살포한 전단문의 주요내용은 ①국토를 방위하고 외적과 전투하는 것이 주 임무인 군은 동족상쟁을 원치 않는다. 제주도민을 적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②주의‧사상과 일체의 불만은 정치적으로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해결하여야지, 무력수단에 호소하는 것은 무고한 도민의 유혈만 조장시킬 뿐 해결방법이 되지 않는다 ③즉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면 내가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겠으며, 일체의 전과를 불문에 부치고 귀가시키겠다. 이에 대한 요구가 있으면 그 요구조건을 다룰 회담을 하자. 연락을 하라 ④이상과 같은 관대한 처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우고 무력을 사용한다면, 민족분열을 조장하고 조국독립을 방해하는 민족의 공적(共敵)으로 규정하고, 군은 철저한 무력징벌을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각종 전단을 L-5 비행기로 제주 각지 부락에 살포했다. 때로는 지형정찰도 겸하여, 내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당시 우리는 각종 정보활동에도 불구하고, 누가 폭도 지휘자이며 폭도의 근거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구한 낭설과 허위선전만 떠돌았다. 폭도와의 연락은 전단 살포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단이 살포된 다음 날, 회답 삐라가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화평 방해자들이 나를 인신공격하는 전단이었다. 그 중에서 모슬포 연대본부 근처에서 발견된 전단은 폭도들의 연락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연대 정보주임 이윤락(李允洛) 중위로 하여금 전단 내용을 분석케 하고, 즉시 공작에 들어갔다.

폭도들의 전단은, 내가 전단으로 제의한 내용의 일부는 수락할 만하지만, 일부 내용은 의심스러우며, 자기들의 근거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지휘자를 체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 또는 군대가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기만작전이 아니냐는 등, 다각적으로 나의 진의를 타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11. 선무공작의 진행

 

나는 이 무렵 또 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미군 고위층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제주읍내에 있는 미군 CIC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이 와 있다고 지시했다.

 

지시한 시간에 CIC에 가 보았더니, 군정장관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라는 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그는, 국제정세와 한국장래 문제를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제주도 폭동이 빠른 시일 내에 진압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고, 한국의 독립에도 유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하고, 이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군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료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한마디로 ‘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 돌아 나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부의 명령이니 매일같이 자기와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며,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다시 설득을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당신은 정의감이 강한 청년이고 민족주의자며 애국자이고 훌륭한 군인이라고 칭찬을 하면서,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과 손실을 분별할 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자기에게도 나와 동년배의 아들이 있으며 성격이 나와 비슷하다고도 했다. 자기와 같이 찍은 25~26세 가량 되어 보이는 미 해군 수병의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이것이 자기 아들인데 이 애도 성격이 너무 강직해서 탈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비의 충고를 듣지 않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지금은 어느 곳에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신도 자기의 말만 들으면 출세도 하고 부(富)도 누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올텐데 고집만 부린다고 말했다.

인간은 뭐니뭐니해도 출세하고 부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이며, 자기가 목적하는 행복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출세와 돈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설득하려고 했다.

 

내가 초토작전을 감행하여 임무를 완료한 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국에서 살기 어렵게 된다면, 나의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 가 살도록 해준다고도 했다. 미국은 황금만 있으면 모든 행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생활을 소개하는 각종 잡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다가 또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얼마가 필요하냐고 마치 어린아이 달래 듯 하는 것이었다. 요점은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고 10만 달러를 챙기고 미국으로 도망가라는 것이다.

 

내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고 응하지 않자, 그 자는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서 심사숙고해 보고, 내일 다시 만나서 대답을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군정장관 딘 장군이 본국 정부의 독촉에 쫓긴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정치고문을 보내서 경찰이 건의한 초토작전을 내가 실시하도록 세뇌공작을 하여본 것일 터이다. 이런 절반 위협적으로 절반 유화적인 설득이 매일같이 2~3시간씩 계속되었다.

그런 그 자도 끝끝내 내가 반대를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는 당신이야말로 애국자이며 훌륭한 군인이라고 칭찬하면서 설득을 포기했다.

 

한편 제9연대의 귀순 선무공작은 성공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의 선무 전단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도민들에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가 폭도토벌의 제1선에 나선다고 하자, 경찰보다 더 무자비하게 살륙을 감행할 줄 알고 공포에 떨고 있던 도민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중지하고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연대장의 선무전단에 공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경비대의 선무에 신뢰와 협조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산간부락에 정찰나온 군인들은 친절하고, 닭 한 마리 곡식 한 톨 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들은 양식을 가지고 와서 스스로 해결했고, 간혹 민간에 취사를 의뢰할 때도 반드시 대가를 치렀다. 그 뿐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양식을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병자들에 약을 주는 일도 있었다.

 

군인들의 이같은 친절과 행동은 곧 전도에 알려졌다. 도민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므로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산에서 내려와 군대주둔지 부근에 거주하면서 군의 보호를 원하는 주민이 나날이 늘어갔다. 도내에 평화분위기가 회복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선무공작이 이런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제주신보 사장을 중심으로 한 제주읍 유지들의 협조와 헌신적인 노력이 절대적으로 공헌했음을 필히 밝혀둔다.

당시 상당수의 제주 유지들과 지식인들은 보신을 위하여 육지로 피신하고 있었으나, 이분들은 도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끝까지 제주도에 남아 군과 나에게 협조하여 주었다.

 

선무공작이 진전되어감에 따라 제주도는 일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폭도들도 만행을 삼갔다. 경찰지서 습격은 계속되었지만 그것도 산발적이었다. 그들은 군대와의 교전은 극도로 회피하여, 군 정찰지역 내에서는 완전히 철수한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귀순‧화평을 위한 회담의 교섭을 적극 진행시켜 나갔다.

연대 정보주임인 이윤락 중위와 제주 유지들이 헌신적으로 수차 적지를 왕래하면서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다.

 

 

12. 귀순‧화평 회담 ①

 

그때의 판단으로는 폭도의 조직이 여럿인지 단일 조직인지, 지휘자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간 두목으로 지목된 수많은 이름이 명단에 올랐고, 또 자칭 우두머리라는 자도 많았다.

 

나는 우리의 회담당사자는 ①전도의 폭도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실력과 권한을 가진 자라야 된다 ②본인이 직접 나와야지 대리인은 안 된다 ③회담에서 결정한 사항은 즉석에서 결정되고 실행되어야지, 타인(다른 실력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자는 만나지 않겠다는 등, 이상과 같은 조건을 내세웠다.

 

한편 폭도 측에서는 ①연대장이 직접 회담에 나와야 한다 ②연대장 혼자서 와야지, 수행인이 2인 이상이면 안 된다 ③장소와 시일은 자기들이 결정하되, 장소는 폭도진영이라야 한다고 못박았다. 즉 동등한 입장에서 연대장과 자기네 본부에서 1대 1로, 그것도 폭도들의 본부에서의 회담이고 보니, 나는 자존심이 상했고, 다구나 군대의 권위를 얕잡는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러나 나는 유혈을 최소화하고, 이 폭동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물불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결심하였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있었다. 적의 본부에 연대장이 단신으로 갔다가, 폭도들이 배신해 내가 살해될 경우, 군이 받을 타격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물론 군 지휘관의 전사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지휘관이라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이 군문(軍門)의 상도(常道)이다.

그러나 당시 연대장인 내가 죽는다면, 9연대는 후임 연대장이 부임하여도 당분간은 전투가 거의 불가능한 형편에 있었다. 나만큼 부대 실정에 밝고, 실제 지휘경험이 있고, 제주도의 지형과 실정을 잘 아는 지휘관은 전군을 통틀어 없었다.

 

참모들은 폭도들이 바로 이런 사실을 알고 연대장을 유인 살해하기 위해 기만술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나도 그 점을 부인 못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그들대로 지휘자의 피살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므로, 사정은 양측이 마찬가지였다. 나의 참모들은 회담 장소를 쌍방이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중간지점에서 1대 1로 회담하자는 등, 여러 가지 안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폭도측은 우리가 파놓을 지도 모를 함정을 우려하여, 자기들 진영에서의 회담을 고집하였다.

 

드디어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을 전부 수락하고, 홀로 적지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연대장과 폭도두목과의 평화회담의 날짜가 4월 말로 결정되었다.

장소는 경비대의 기습을 우려하여 폭도들이 회담 2시간 전에 통지하여, 자기네 사람이 비밀장소로 안내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하고 상세한 지시를 요청했다. 당시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경찰의 패전과 무능력에 실망하고 있었고, 장차 자기에게 떨어질 상부의 문책을 염려하던 중이었으므로, 희망과 용기를 되찾아 회담에 임하는 요령 등을 즉시 나에게 알려왔다.

 

그의 지시 내용은 ①제9연대장 김익렬은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책임진다 ②우리 측의 요구조건은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행자 명단의 작성 제출이었다(이 명단의 작성은 여기에 등재된 자 이외에는 모든 폭도들을 불문에 부쳐 수사‧심문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자유로이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토록 보장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군사고문 드루스 대위로부터 지침을 지시받고, 오래간만에 모슬포에 있는 연대본부의 숙소로 돌아왔다. 최후가 될 지 모르는 저녁을 가족들과 같이 지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가족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므로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폭도와의 이 회담이 성공해서 연대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았다.

폭도의 두목이 과연 약속을 이행할 만한 인격자인지, 연대장을 유인 살해하고 자기명성을 올리기 위한 기만행위는 아닌지 -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살인‧방화를 저지르고, 경찰의 생명마저 빼앗은 반란자의 소굴에 홀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무모한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상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참모들이 극력 반대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고집할 이유와 확고한 신념과 자신이 있었다. 그것은 ①성공하면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 ②만일 폭도들이 평화를 희구하는 나를 살해한다면 제주도민들이 폭도들을 원망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최소한 폭도들을 제주도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는 것 ③당시 9연대 장병들은 폭동발생의 원인을 알고 있었으므로 폭도에 대한 적개심이 덜했다. 그러나 만일 동족간의 유혈을 막으려던 내가 살해되면, 폭도들의 본색이 드러나고 전 장병의 정의감과 적개심에 불을 당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명분 있는 모험은 후배장병들의 교훈을 위하여서도 청년장교로서 얻기 어려운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저녁이 끝나고 가족이 모두 잠든 것을 보고,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생후 6개월 된 장남 성우(聖宇)의 잠자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내일 회담에서 해야할 일을 숙고하고, 만일을 위하여 상관‧친구‧처자‧형제에게 남기는 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만일 내가 죽고 못 돌아올 경우 대처할 부대의 작전행동 등을 기록해 두었다.

유서를 쓰다 보니 생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약한 마음과 공포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 마당에 명예를 생명으로 하는 군인으로서, 일체의 잡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을 고쳐먹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아침에는 평소와 같이 출근을 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는 평소와 같이 나를 전송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르는 출근이고 보니 몇 번씩이나 처자를 뒤돌아보게 되었지만, 기색은 나타내지 않고 태연히 부대로 출근하여 폭도들로부터 연락오기를 기다렸다.

 

오전 11시께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가 폭도들의 연락을 가지고 왔다. 시간은 오후 1시이며, 장소는 폭도들이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연대의 전 장교와 하사관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늘 회담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나는 전 장병에게 동요치 말고 군무에 전념하라고 당부를 하고, 만일 폭도들이 공산주의를 앞세워 우리들의 애국애족하는 충성심을 외면하고 연대장인 나를 살해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민족반역자이니 남은 장병들은 철저히 공산폭도를 타도하고 전멸시켜, 나의 원한을 갚고 나의 영혼을 위로하여 달라고 훈시하였다. 장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맹세하였다.

그리고 나서 내가 죽을 경우 나를 대행할 지휘관을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오후 5시까지 귀대하지 않으면, 살해된 것으로 판단하고 전투작전을 개시하라고 지시하였다. 12시 정각 나는 장병들이 도열한 사이를 걸어서 정문을 나섰다.

 

 

 

 

13. 귀순‧평화 회담 ②

 

수행자는 지프운전병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이렇게 3명이었다(이윤락씨는 박경훈씨도 동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 편집자).

날씨는 청명하고 산야는 완전히 녹색으로 물든 가운데, 군데군데 철쭉꽃이 만발하였다. 제주도의 자연은 평화스럽기만 하였으나, 사람들은 원한과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부대를 나온 우리는 대정면 면사무소를 지나, 곧장 산길도로를 따라 한라산을 향했다. 부대에서 직선거리 약 15Km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곳은 연대본부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높은 고지 부락이었다.

소를 몰던 목동이 돌연 소로 지프를 가로막아 제지한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연대장이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황색기를 흔들며 신호를 하고는, 국민학교로 가라고 안내했다.

 

이 학교는 제주도에서 제일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부락 국민학교였다(九億국민학교 - 편집자). 학교의 위치는 한라산의 밀림지대가 동북으로 지척지간에 있으며, 동남으로 중문면 일대에서 해안선까지, 서남으로는 대정면 일대와 모슬포까지, 특히 9연대의 영내가 육안으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렇게 조감할 수 있는 지점이었으므로, 폭도들은 내가 부대를 출발할 때의 전후 광경을 일일이 관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지프를 학교 쪽으로 몰았다. 학교 정문에는 2명의 보초가 입초하고 10여 명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다. 보초는 구 일본군 식으로 나에게 거총의 예를 하며 통과시켰다. 그들의 복장은 구 일본군복‧일반농민복‧작업복, 여자는 치마저고리 등 가지각색이다. 정문의 보초들은 일본군복이었다.

학교는 1백 명 내지 2백 명을 교육하던 곳으로 조그마했다.

 

내가 학교 안에 들어서자, 교정과 학교 주변에 있던 5백~6백 명으로 보이는 폭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차에서 일어서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인사의 표시를 했다. 그러나 폭도들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나의 손짓인사에 당황한 듯 어떤 사람은 손을 흔들다 그만둔다. 대부분은 굳은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현관 앞에서 차를 내려, 안내자의 인도로 어느 실내로 들어섰다. 7~8평 되는 햇볕이 잘 드는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다. 아마 교장의 내실인 듯 싶었다. 가구도 다 있었는데, 의외에도 이런 산간에서는 보기 드문 꽤 훌륭한 실내장치고 가구들이었다. 다다미방 중앙에는 예쁘장한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방에 들어서니 5~6명의 폭도들이 나를 맞았다. 그 중에서도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작지 않은 체격(1백70cm)을 한, 나와 동년배 쯤 되어 보이는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앉기를 권한 후, 자기가 대표자이며, 이름은 김달삼(金達三)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방문에 감사했다.

유창한 서울 표준어를 사용해 나는 이 자가 서울사람이 아닌가했다. 서로 좌석이 정해지고 인사가 끝나자, 담배와 차를 나에게 권한다. 담배는 미제 ‘럭키’였고, 차는 일본 녹차였다(이윤락씨 증언은 ‘미제 담배’를 부인하고 있다 - 편집자).

 

나는 김달삼의 인물을 살펴보았다.

안색은 하얗고 홍조를 띤 것이, 여자가 옅은 화장을 한 것 같았다. 눈썹은 검고 뚜렷했고 눈‧코‧귀 한 군데 빠짐없는 미남형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만한 청년이었다. 또 대단히 겸손했고 침착하게 보였다. 그 밖의 인물들은 거의 나이가 사오십을 넘긴 자들이었다. 햇빛에 탄 검은 얼굴들에 주름살이 드문드문했고, 한결같이 무식하고 교활하여 보였다. 그들은 줄곧 눈을 내리깔고 곁눈으로만 나를 흘끔흘끔 노려보았다.

대조적으로 김달삼은 ‘군계일학’이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연소한 이 김달삼이 사오십이 넘은 중년괴한들을 지배하는 자로는 믿기 어려웠다. 이자가 서울 표준어에 능하고 달변인 점을 이용해 로봇으로 내놓은 것이고, 실권자는 이 중에 따로 있겠지 -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들의 동태를 탐색하고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김달삼을 보고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고, 실권자냐”고 물었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하느냐”하고 반문했다.

나는 “하도 미남이고 영화배우 같아, 내가 상상하던 살인을 하는 무지무지한 사람 같지 않다”고 하였다.

김달삼은 미소만 지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김달삼은 곧 나에게 당신의 질문의 요지를 알겠다며, 사람은 애국심과 정신이 중요하지 나이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 자기가 확실한 실권자라는 것을 암시했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탐색을 계속하고 있는데, 인상이 험하게 생긴 자 하나가 돌연 성난 목소리로 나의 허리에 찬 권총을 가리키며 “약속이 비무장인데, 어찌하여 무장을 하고 왔느냐”며, 회의 중에는 권총을 자기들이 보관할테니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당신들은 왜 그리 겁이 많으냐. 당신들 수백 명이 이 권총 한 자루가 그리 무서우냐. 이 권총은 군인들이 비겁한 자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자기의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자살용이니, 그리 염려 말라”고 했다.

김달삼은 즉시 그 자를 제지하면서 무례를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김달삼은 이제 회담에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여기까지 찾아오면서 피곤도 하고, 여기가 하도 경치가 좋으니 잠시 구경을 하고나서 회의를 하여도 시간이 충분하겠다”는 말로써,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회의할 기분이 안 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 방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밖에는 수십 명의 폭도들이 무장을 하고 2~3m 간격으로 순찰을 하고, 학교 운동장에는 5백~6백 명의 폭도들이 밀집하여 있었다. 순찰하는 자들은 실내에서의 우리들의 행동을 들여다보곤 하였다. 나를 위압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순찰자들에 손을 흔들며 수고한다는 뜻을 표했다. 교정에 모인 폭도들은 대부분이 농민 청년 남녀이며, 여자가 과반수는 될 것 같았다. 무기는 미제 카빈이 많았고, 일부는 구 일본군 99식 소총이었다.

전부 합하여 2백 명 정도가 무기를 가졌고, 그밖에는 비무장 맨손이었다. 실내에 있는 우리는 약 1시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회의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잡담을 하다가 보니까 창밖에서 순찰위협을 하던 폭도들은 어느 새 간 곳이 없다. 아마 김달삼이 중지시킨 모양이었다.

잡담 중 나는 교정과 창밖에 있는 폭도들에도 내 말이 들리도록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였다.

 

잡담의 내용들은 산에서의 의식주가 불편하지 않으냐, 서로의 통신은 어떻게 하길래 연락이 그토록 정확하고 신속하냐, 보급은 충분하냐 등등이었다. 겉으로는 잡담하듯 했지만, 의중은 상대방의 진의를 탐색하는 불꽃튀는 이야기들이었다. 김달삼은 ‘만사가 OK’라고 허세를 부리며, 고정(苦情)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14. 귀순‧평화회담 ③

 

나도 허세를 부려, 경비대 제9연대가 지금까지 전투를 개시하지 않는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김달삼은 그것은 군대가 자기들이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원인을 알고 있으므로, 장병들이 자기들에게 동정과 호의를 갖고 있고, 그래서 상부에서도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고 말하고, 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번에는 당신과 나는 전투장에서 상봉하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내가 경찰과 당신들의 교전상황을 관전하여 보았더니, 석다(石多)의 제주도에서 돌담을 방책으로 하는 사격전은 피해가 많고 효력이 없는 것을 알았소. 나는 돌담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박격포가 제일 좋은 무기인 줄 깨달았소. 그래서 상부에 신청을 하였더니 박격포 부대를 파견하여 주겠다기에, 그 부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하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당시 9연대는 물론 전 경비대를 통틀어 박격포는 단 1문도 없었다. 그것은 허세를 부려 위압을 하여 본 것이었다.

김달삼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하였다. 이런 허세의 잡담은 서로가 반신반의하며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에 긴장된 분위기가 풀리기를 기다려 회담을 시작하였다.

 

김달삼은 먼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연대장이 개인자격으로는 이런 회담에 참가할 권한이 없는 법이다, 1차서부터 4차까지의 회담(김익렬‧김달삼 회담에 앞서 시도됐던 4차례의 회담. 이 회담의 실패과정은 앞에 이야기된 바 있다 - 편집자) 제의 때와 같이 미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김달삼은 “그러면 회담이 된다”며, 자기 역시 마찬가지로 폭도(김달삼은 ‘제주도 도민의거자’라고 불렀다)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말하고, 미리 준비했던 노트의 메모를 보면서, 공산당들이 흔히 사용하는 연설조의 어조로 약 30분간 열변을 토했다.

 

그는 앉은 채 연설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민족자주독립을 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의 민족반역자인 경찰과 일제의 고관을 지낸 자들이, 자기들의 죄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미국 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해방된 조국의 제주도에서도 일제시대의 몇 배되는 압정을 가하고 있으며, 특히 경찰은 무고한 도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살인 강간 고문치사 등을 일삼고 있다며, 폭동 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일일이 열거하였다.

또 만주와 이북에서 일제시대에 악질경찰이나 민족반역자 노릇을 하던 놈들이 월남하여 반공애국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북청년단을 조직하여, 수백 명이 제주도에 와서 경찰과 합세하여 도민의 재산약탈을 자행한다고 성토했다.

그래서 선량한 도민들은 견디다 못해 친일파와 일제시대의 악질 경찰들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무장의거’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미군정은 이 ‘의거’를 수습하기 위하여서는 제주도내에 있는 일제경찰과 민족반역자 관리들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된 경찰과 관리를 채용하여, 제주도민을 위한 행정과 치안을 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매일반이니, 최후의 1인까지 사투하여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결의를 표한다.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이 대단히 단순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십중팔구 폭도들이 내놓으리라고 예측하였던, 경찰이나 서북청년들 중 살인‧고문‧강간‧약탈한 자를 인도하거나 처형하라는 요구조건은 한마디도 없었다.

나는 이 요구조건이 상당히 정당하고, 폭동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대가치고는 과히 비싸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폭도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기 위하여서는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달삼에게 “해방이 되고 3년 동안 나는 미군정하에서 군인 노릇을 하면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배웠는데도, 아직까지 민주주의가 무엇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게다. 3년 동안에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했었다고 한들 얼마나 알겠느냐. 똑똑히 알지도 못하는 공산주의니 민주주의니 하면서 아까운 청춘과 생명을 버리는 일은 죄악이다. 우리가 현재 확실히 알고 믿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민족을 위한 자주독립이니, 어서 무기를 버리고 귀순하여 나와 합심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고 했다.

 

그러자 김달삼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목에 핏대를 세워 화를 벌컥 냈다. 그는 언성을 잔뜩 높여 “나는 연대장은 정의감이 강하고 선과 악을 식별할 줄 아는 분별 있는 자인 줄 알았는데, 민족반역자나 일제 악질경찰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아무나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우듯이, 당신도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덮어씌우기냐”고 떠들어 댄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놈들도 덩달아 나에게 일제히 욕설을 퍼부었다.

김달삼은 분을 참지 못해 하면서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이 이상 회담을 진행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싸울 것이고, 이제는 더 믿을 곳이 없으니 이북에 연락하여 최후로 소련군에나 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다”고 자포자기적인 언행을 마구 해대었다.

내가 소련군에 연락할 방법이 있느냐고 되묻자, 그는 “있고 말고”하면서 허세를 부린다.

 

나는 김달삼을 진정시키기 위해 “당신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어찌하여 이 어마어마한 유혈폭동을 일으켰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며, 도민을 구출하기 위한 의거자라고 했다. 그리고 최초에는 경찰에 구금되어 고문치사를 당하는 도민들을 구출하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나, 경찰을 습격하고 보니까 경찰이 의외에도 무력하고, 경찰에 대한 도민의 악감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격렬하여 이리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는 바가 있었다. 나는 “당신들이 진정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회의를 진행하자”고 제의했다.

김달삼은 “누가 폭동을 일으키고 싶어 일으켰겠느냐, 할 수 없이 살기 위하여 일으켰지, 지금이라도 우리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자유스럽게 살 수만 있다면, 오늘이라도 집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회담이 속개되었다.

 

 

15. 귀순.평화회담 ④

 

나는 먼저 오늘 당장 지서습격 등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김달삼은 전도에 연락하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즉각 전투행위 중지는 불가능한 일이며, 5일후 전투중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의 그런 대답에 나는 불쑥 의심이 들었다. 김달삼이 유일한 폭동두목이 아니라 다른 두목들이 여러 명 있어서 닷새간에 자기들끼리 회합을 가져 합의에 의하여 결정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와의 합의가 무의미했다.

만일 폭도의 두목이 몇 명 더 있다면 각자의 견해가 다를 것이며, 그 중 공산주의자가 한 명이라도 끼어있으면 합의는 불가능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유일한 실권자가 아니고 또 다른 실권자가 여러 명 더 있어서 합의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5일이 필요한 것이냐”고 물었다.

김달삼은 즉각 부인하면서 단지 연락에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다시 그렇다면 대정면‧중문면은 오늘 즉각 전투중지하고 그밖의 지역은 24시간 이내로 하자고 하였다.

김달삼은 5일은 꼭 걸린다고 설명한다. 생각하여 보니 도보로 산간부락까지 전도에 연락하자면 수삼일은 걸릴 것이고, 또 연락을 받고 자체모임을 갖고 하다보면 그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투 완전중지가 72시간 이내에 이루어져야 하고, 기타 산발적인 전투는 연락미달로 간주하되, 5일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단정하기로 합의 결정되었다.

 

제 2의 조항은 즉각 무장해제였다. 김달삼은 먼저 비무장 주민들을 하산시켜 약속이 이행되는가 확인하고 나서, 약 3개월 후에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면 대원의 무장해제를 받겠다고 고집했다.

나는 그것은 무장해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전원 완전 무장해제만이 회담의 성패에 관한 요점이며, 폭동진압의 완료이고 평화의 회복이라고 무장해제를 강요하였다.

결국 단계적으로 무장을 해제하되, 약속을 불이행하면 즉각 전투에 들어간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 3조항은 범법자의 자수와 명단의 작성과 제출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김달삼은 완강히 거절했다. 살인‧방화는 ‘정당방위’였고, ‘의거’전투에서 있게 마련인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유야 어떻든 법치국가에서 법에 호소하지 않고 살인‧방화한 행위는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불법이며, 재판을 받아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김달삼은 이 문제에서만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기들의 행동은 정당방위였고 합법적 행위라고 완강하게 주장했다.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그것은 나중에 토의하기로 하고, 나의 요구는 이상 3개 조항이 전부이므로, 이번에는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들어보자고 하였다.

 

그가 내놓은 첫째 조건은 제주도민으로만 행정관리와 경찰을 편성하고, 민족반역자와 악질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들을 제주도에서 추방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관리‧경찰은 사실이 증명되면 해직 추방할 것이며, 서북청년단원들도 범법자는 처벌하고 추방하겠지만, 제주도민만으로 행정기구‧경찰을 편성하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군인으로서 나의 권한 밖이다, 그러나 독립이 되고 우리 정부가 들어서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 그리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 선에서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기로 하고, 첫째 조건은 합의 결정되었다. 합의가 이루어지자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두 번째 조건은 제주도민으로 편성된 경찰이 구성될 때까지 군대가 제주도의 치안을 책임지고, 현재의 경찰은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평화회담이 성립되면 자연히 군대가 치안을 담임하고 경찰은 군대의 보조역할을 하게 되어 나의 지휘를 받을 것이므로, 경찰은 해체할 필요가 없고, 다만 인원은 감축 개편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문제도 합의 결정된다.

 

세 번째 조건은 의거(폭동)에 참가한 여하한 사람도 전원 죄를 불문에 부치고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나는 ①교전 시 이외에 발생한 살인‧방화범을 제외하고는 전원 범죄 일체를 불문에 부칠 것이고, 군에 귀순하면 군에서 책임지고 생명‧재산의 안전과 자유 활동을 보장하겠다 ②살인‧방화자들과 기타 사람들을 구별하고 책임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살인‧방화를 저지른 장소와 일시를 기입한 명단을 작성하고, 범인들이 자진 귀순하면 관대한 처분을 할 것이며, 절대로 사형이나 종신형 같은 중형에 처하지 않도록 보장한다고 했다.

김달삼은 완강히 반대했다. 이번에는 도무지 굴복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4시30분이 되어 있었다.

 

나는 김달삼에게 “나는 지금 돌아가야 한다. 내가 5시까지 연대본부에 돌아가지 않으면 나의 부하들이 회담이 결렬되고 내가 당신들에게 살해된 것으로 단정하고 보복의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불필요한 오해와 유혈이 발생할 것이니, 오늘은 이것으로 일단 휴회를 하고 내일 또다시 시간을 결정하고 이 장소에서 회담하자”고 했다.

 

갑자기 회담 장소는 긴장되었다. 김달삼은 회담이 오늘내로 결말을 짓지 못하면 사실상 회담은 결렬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품이, 회담에 관한 나의 성의를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어조였다. 말하자면 평화회담이 주목적이 아니고 평화회담을 빙자하여 사실은 정탐이나 분열공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냐 하는 말투였다.

 

나는 다 되어가는 회담이 결렬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회유책을 쓰기로 하였다. 나는 김달삼에게 최후로 나의 제안을 하겠다며, 합의되지 않으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나는 범법자의 명단은 작성하여 범법 책임자를 분명히 하되, 명단에 기재된 범인들의 자수‧도망은 자유의지에 맡기겠다. 그리고 김달삼 당신과 두목들은 중벌을 면하기 힘들터이니, 책임지고 모든 폭도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시켜준다면, 합의서에 명문화할 수 없으나 나 개인적으로 도외나 해외(일본을 뜻함) 탈출을 배려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회담장 내는 반기는 기색으로 술렁대고 김달삼은 쾌히 수락했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악수를 청했다.

 

이 제안은 정부의 권위와 대의명분이 지켜진다는 전제하에, 범법자들이 자수하든, 생명이 아깝고 벌이 무서워 해외로 도망가든 말리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즉 폭도전원에 대한 무죄사면이나 다름없었다. 단 표현상으로 정부의 권위만은 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김달삼과 폭도두목들의 탈출을 위하여 성능이 좋은 선박을 1척 제공할 용의도 있다고 약속하였다(그 당시 모슬포 항에는 나포된 일본 어선이 10여척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약속은 나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준수하겠다고 하였다.

 

 

16. 귀순활동의 진행

 

그러나 김달삼은 귀순과 무장해제가 끝나고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자기는 당당히 자수하여 폭동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겠으며, 법정에서 폭동참가자들의 행동은 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였음을 밝히고, 경찰의 압정과 만행을 만천하에 공표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런 쾌남아다운 면모가 폭도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합의된 귀순절차는 내일 낮 12시를 기하여 모슬포 연대본부 내에 1개소, 제주읍 비행장에 1개소의 귀순자 수용소를 설치하되, 군대가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서귀포‧성산포 등에도 수용소를 설치하기로 하는 외에, 기타 연락 등에 관하여 합의함으로써 귀순평화회담은 마침내 성사되었다.

이제는 성실한 약속이행만 남았다. 이렇게 되면 평화가 오고 제주도 폭동사건은 완전 진압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합의되고 나자, 나는 일종의 허탈감마저 느꼈다.

김달삼과 폭도들은 합의서의 약속이행을 거듭 강조하며, 진짜 약속대로 되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의문과 불안을 느껴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약속에 대하여 정녕 신뢰와 안도를 갖지 못한다면, 내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두어도 좋다고 하였다. 폭도들이 나 하나만 믿고 모든 생명을 맡기고 귀순하는 만큼, 혹시 내가 배신하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폭도들에 나의 전 가족을 인질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했더니, 여기저기서 감격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는 제주도에 평화가 오는구나” “우리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하며, 여자들 중에는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퉁퉁 부은 젖가슴을 나에게 보이면서, 속히 집에 돌아가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여인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와서 감사와 애원의 말을 쏟아 놓았다.

폭도들은 갑자기 김달삼의 부하가 아니라 연대장인 나의 부하가 된 것처럼 내 주위에 몰려들어 둘러쌌다. 그리고 귀순 후 경찰의 보복박해로부터 연대장이 보호해 달라는 등 여러 가지 호소를 하였다.

 

나는 인질이 될 나의 가족들을 인수할 장소와 일시를 말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김달삼은 감격하여 눈물어린 눈으로 나를 한참 주시하더니 “감사합니다. 그렇게까지 애족(愛族)하시니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송구스러워서 노령하신 노모님과 연약한 부인과 아드님을 불편한 산에서는 모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원이 약속이행에 대해 불안해 하니, 가족들을 연대 내에서 (그 당시 장교가족들은 연대 내에 수용되고 있었음) 자기가 지정하는 민가에 옮겨와 살도록 하고, 부근에 일체의 군인 배치를 금하며, 출입도 금해달라”고 했다.

그 민가는 전 면장의 집으로 나도 한때 숙소로 사용했던 집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이 주변에서 감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귀대키로 약속된 시간이 넘었으니 이제 귀대하겠다고 하였다.

 

회담장소에선 연대본부가 내려다 보였다. 부대는 전투무장한 병사들이 수대의 트럭에 타고 출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부녀자들의 애원과 폭도들의 칭송이 뒤범벅된 환송을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하산하여 연대본부에 귀대하였다. 귀대즉시 회담성공을 알리고 무장을 해제시킨 뒤, 수용소 설치를 명령하고는 급거 제주읍으로 향하였다.

 

밤늦게 제주읍에 도착한 나는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일체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맨스필드 대령은 나의 성공을 대단히 기뻐하며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요청에 의하여 전 경찰은 지서만 수비 방어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절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지서 울타리 밖의 일체의 치안책임은 경비대에 일임되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폭도진압이 단시일 내에 평정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용기를 되찾고 나를 적극 지원하여 주었다. 전단을 만들어 이 회담의 내용을 전도에 살포하여, 폭도들에게는 무모한 유혈을 삼가고 귀순하라고 권고하는 한편, 폭도들이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시하였다.

 

폭도들은 약속대로 대정‧중문면 일대에서는 그 날로 즉각 전투 중지하고, 점차적으로 서귀포‧한림‧제주읍에 이르는 일대에서도 전투를 완전히 중지해 나갔다.

다만 조천면 관내 몇 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있었으나 그것도 곧 중지되어, 오래간만에 제주도는 총소리가 그치고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투는 일단 멈췄으나 귀순과 무장해제는 처음에는 지지부진하였다. 첫날에는 연소자와 부녀자만 귀순하였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그 수는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가지고 온 무기도 대부분이 사용 불가능한 것이고, 카빈은 1정도 없었다.

폭도들은 귀순자와 무장 해제자에 대해 군대가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을 모든 정보를 총동원하여 조심스럽게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군대는 군대대로 귀순자의 처리에 특별히 조심하고 손님 모시듯 하였다. 그러자 귀순자는 갑자기 늘기 시작해 수용소에 준비한 천막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 귀가를 희망하는 자들은 필요한 처리를 하고는 귀가를 시켰다. 다만 귀가 후의 행동은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까 제주도는 생기를 되찾았다. 군대는 대단히 분주해 졌으나, 군인들은 신이 나서 천막을 치고 수용소를 증설하고, 또 선무공작에 나서는 등, 피곤도 잊은 듯하였다.

 

 

17. 귀순 방해공작 ①

 

휴전 4일째 되는 5월 1일은 노동기념일인 ‘메이 데이’ 날이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중산간 부락 오라리(吾羅里)에 정체불명의 일단(一團)이 습격하여, 부락민을 죽이고 부락을 방화하는 난동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두고 경찰은 공산폭도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폭도들은 경찰이 서북청년들을 시켜 만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군정장관과 나는 경찰의 소행으로 심증을 굳혔다. 그 이유는 당시 육지의 각지로부터 연대 증원군이 속속 제주도로 들어오고 있었고, 평화로운 가운데 귀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이때에, 폭도측이 아무 이유도 없이, 전술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오라리라는 단 한 마을에 대해서, 그것도 백주에 만행을 하리라고는, 정세의 대세로 보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귀순이 시작되자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들어간 악선전 중의 하나는, 연대장이 폭도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폭도들이 귀순을 가장하고 시간적 여유를 얻어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대대적인 기습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정식보고서로 작성해 군정청에 제출했다.

반면에 제주읍과 각 부락에는 ‘연대장이 폭도를 기만하여 폭도 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한다’는 낭설이 돌고 있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이 모든 것들을 경찰들에 의한 귀순방해 공작으로 판단하고, 나에게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나의 신변안전에 유념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경찰의 방해공작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자기도 확실히 모른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용의 요점은 수일 내에 귀순 작업이 종료되어 폭도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그 추종자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폭동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씨가 진두지휘하여 토벌을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진압은 고사하고 경찰은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패전의 연속으로 육지에서 파견되어 온 대부분의 경찰관들은 무기를 버리고 흩어져, 제주도 각지 항구에서 밀선(密船)을 타고 육지 자기 고향으로 달아나 버린 반면에, 폭도는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숫자로 증가되고, 토벌나간 토벌대가 폭도들에 무기 공급원이 되고 말았음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완전히 전의를 잃은 경찰은 토벌을 포기하고 제 2선으로 후퇴하고, 경비대가 폭동진압의 책임을 지게된 것이다.

 

이런 사실이 서울의 정계에 알려지고, 미군정청에 상세히 알려지면, 조병옥씨의 입장이 난처하여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더구나 경비대가 폭도진압의 책임을 맡은 지 불과 열흘이 못되어, 연대장인 28세의 백면(白面)의 청년이 전투도 해 보지 않고, 단신 적지에 들어가 회담으로 귀순공작에 성공한 것이다.

사정은 어떻든지 간에, 수삼 일에 전도에 걸쳐 전투가 종식되고 평온을 되찾았으니, 폭동은 사실상 진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자잘한 뒤처리만 남았으니, 조병옥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주도 현지경찰의 허위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였을 적엔 때는 이미 늦어버렸던 것이다.

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어 뒤처리 문제로 들어가, 폭동발생의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하여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조병옥씨 일파는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서는, 화평‧귀순공작을 방해하고, 폭동을 재연시켜, 자기들이 주장해온 공산폭동으로 조작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해공작을 극비리에 제주도 현지경찰에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경찰의 이 비애국적인 처사에 대단히 분개하면서, 경찰의 방해공작을 철저하게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심지어 방해공작의 하나로 연대장을 암살할 수 있다는 경고까지 해 주었다.

나는 이 정보를 듣고 설마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하였더니, 그들은 “당신은 나이 어리니 잘 이해가 안 갈는지 모르나, 사실은 사실이니 주의하라”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무엇이 무엇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고, 아무리한들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반신반의하였다. 그 후 부대참모들에게 상의를 하였더니,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는 자기 정보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와 있다며, 연대장에게 보고하려던 참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경비대는 폭도와 경찰 양면으로 신경을 쓰게 되었고, 고급장교들은 자위수단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던 차에, 예기하던 불길한 사태가 드디어 5월 3일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그날 오후 3시경 귀순폭도 2백~3백 명이 오라리 부락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연대 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병사 7명이 하산하는 귀순폭도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폭도들과 미군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폭도들은 총에 맞아 죽고, 생존한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경찰은 계속 미군과 9연대 병사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였다. 그들은 중기관총 엄호 하에 드루스 대위 일행에게 공격을 가해왔다.

경찰은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드루스 대위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였다. 2명의 미군병사를 시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일제히 경찰지휘관을 집중사격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명의 사체를 버리고 제주읍 방면으로 도주했다. 쓰러진 자는 제주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위였으며, 양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중상은 아니었다.

구사일생한 드루스 대위 일행은 격분했다. 부상한 경위를 미군정 본부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여 주고 나서, 드루스 대위 일행을 기습한 이유를 심문하였다.

그 자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하였다.

 

 

18. 귀순방해 공작 ②

 

격분한 맨스필드 군정장관과 드루스 대위는, 제주경찰서장을 군정본부로 소환하여 문책하였다.

문용채 서장은 도망하여온 부하들에게 들어서 사건의 진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조사하여 내일 보고하겠다고 하고, 부상자와 중기관총을 인수하여 돌아갔다.

 

다음날 미군정장관은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을 소환하여, 어제 발생하였던 사건의 경과를 따졌다.

 

김정호씨는 뻔뻔스럽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 사건은 공산주의 폭도들이 경찰을 중상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잡아떼었다. 경찰을 미군정과 군대와 이간시키려고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해 기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드루스 대위에게 총격을 가한 경찰들도 사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제주도출신 경찰이며, 이 자들은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중기관총 등 무기를 가지고 공산폭도들에 가담하여, 현재까지도 경찰복장과 무기를 가지고 민가를 습격하고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루스 대위를 습격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생포된 경위도, 사건발생 전에는 제주도 경찰서 본부에 근무하던 자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부하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간 사람이라고 하였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 자가 어젯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 소홀을 틈타서 자살하였으므로, 사체를 검증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잔인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들의 음모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자기 부하를 살해하고 나서, 김정호는 대사(臺詞)를 작성하여 우리들 앞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허위조작을 믿을 리 없었다. 우리는 격노하였다.

 

그랬더니 김정호는 미소를 띄우며 천연스럽게 “당신들이 나의 보고를 신뢰하지 않는 것은 바로 공산폭도들이 원하는 것이다. 공산폭도들은 미군정과 경찰을 이간시켜 경찰을 제주도에서 쫓아내고, 제주도에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다. 당신들은 지금 그들의 기만작전에 걸려든 것이며, 경찰의 보고를 신용하는 것만이 공산주의자를 타도하는 길이다”하며 우리를 설득하다가 돌아갔다.

 

나는 너무 분노가 치밀어 신(神)을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신이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악인들을 우리 민족 중에서 태어나게 하였는가!”하고.

나는 김정호씨나 제주도경찰 감찰청장 최천(崔天)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아무런 이해관계나 원한관계도 없었으며, 그 후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자들은 인도적으로 영원히 저주받아야 될 사람들이다.

 

그 후 사태는 소문 듣던 대로 발전해 나갔다.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귀순공작에 대한 방해공작이 노골화되어 갔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그리고 귀순하여 귀가하였던 폭도들이 각지에서 살해되었다.

폭도 측에서는 나에게 귀순 약속의 위반이라고 결사적으로 모든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경찰 측에서는 귀순폭도의 살해는 폭도들이 자기들의 배반자를 처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저기서 민가가 방화되고, 양민이 학살되었고, 이에 대해 경찰과 폭도는 서로 상대방의 소행으로 책임을 전가하였다.

 

나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폭도 측은 나에게 기만했다고 비난하고, 경찰 측은 내가 폭도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중상모략을 일삼았으므로 실로 난처하였다.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중지되었던 전투가 재발되니 대로하였다. 내가 격분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 인간들의 더러운 행동을 보고, 나는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되기까지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바뀌자, 귀순하였던 폭도들은 다시 산으로 도망가 버리고, 일주도로 주변에 피난하였던 양민들마저 산으로 피신하는 자가 늘어났다. 양민들이 산으로 피난하는 데는 한 가지 중요한 까닭이 있었다.

당시 일선지서에는 제주도 출신 경찰관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찰 수뇌들은 이들이 산의 폭도들에게 경찰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여, 일제히 제주읍 본서로 불러들여 근무를 시켰다. 이것이 도민들에게 일대 불안을 주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실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쯤으로 비관하지 않을 만큼 나의 고집도 강하였다.

나는 즉각 제9연대에 명하여 부대를 각 지서 부근에 배치하여, 지서를 습격하는 폭도든, 지서를 나와 민가와 폭도를 습격하는 경찰이든 가릴 것 없이, 군대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사살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이 사실을 경찰과 폭도 양측에 통고하고,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 단호한 조치에 경찰과 폭도 측은 겁을 먹고 일시에 조용해 졌다.

다시 총성은 멈추고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도의 공기는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19. 최고 수뇌회의 ①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진압이 눈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에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와 함께 회의준비를 하였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 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회의는 맨스필드 대령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회의의 첫머리에 맨스필드 대령은,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며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선언하고,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 감찰청장 최천씨가 상황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백 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 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적의(敵意)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②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③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 (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 것 어떻게 된 일이요,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씨‧송호성 장군‧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씨에게 달려들었다.

 

 

 

20. 최고수뇌회의 ②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 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 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 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 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 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 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두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조용히 하라)”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안재홍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씨와 조병옥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비행장으로 직행한 딘 장군이 두 사람에게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행은 제주에서 1박할 당초의 예정을 바꿔, 딘 장군을 따라서 상경하고 말았다. 회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못 내린 채 난장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21. 연대장의 교체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 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소재 연대임시본부 겸 연락소(일제 때 금융조합 건물)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朴珍景)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밀명 - 그것도 내가 염려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런 밀명을 받고 왔구나 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즉각 본부 장병들을 집합시켜 연대장의 이취임식을 끝내고 나자, 서둘러 상경준비를 하였다.

그런 나에게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을 통해 뜻밖의 상부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이 됨과 동시에 작전지휘를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작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비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책임한계였다.

정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사정으로서는 이해됨직한 일이기도 하였다.

 

신임 박진경 중령은 소위 임관 후 그 때까지 고급 부관직을 지낸 행정장교 출신이므로, 부대 작전지휘는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당장 연대지휘를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곤란한 문제였다.

또 지금과 같이 막중한 시기에, 제주도의 지리 지형에 밝고 부대의 파악과 지휘 등 군사적인 유경험자인 나를 경질하는 것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할 때 대단히 불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변칙적인 임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표면적인 명분상으로는 당시 미군정하의 제1인자였던 조병옥씨를 폭행한데 대한 문책 경질이었지만, 내용은 그 것만은 아니었다.

딘 장군은 박진경 중령에게 극비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제주도 전역에 대한 초토작전 명령이었다.

 

현지 연대장인 나와 맨스필드 대령은 절대 반대해 온 작전이었다.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戰後) 평화 시에, 자기가 군정하는 영토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 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내가 한사코 초토작전을 반대하므로, 명령으로 강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딘 장군은 자기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여줄 연대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딘 장군은 미국정부로부터 제주도 폭동의 조속한 진압을 독촉받고 있었다.

 

나는 연대장의 임무한계에 대하여 동의 않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박진경 중령과 나는 고향 친구로 절친한 사이였다. 박중령의 결혼식 때 내가 들러리를 설만큼 가까웠다.

박중령은 일제 때 대판(大阪)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였다. 구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그 경력이 제9연대장으로 임명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전투준비를 마치고 전투명령을 대기 중이던 부대로 신임 박진경 연대장을 안내하여, 거기서 또 한 차례의 이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 자리에서 박진경 연대장은 취임식 인사 중 연대장의 통솔과 작전방침을 밝히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부대통솔 경험이 없는 철부지의 이 실언에 대하여 나무라고, 다음부터는 중지하도록 강력히 충고하였으나, 박중령은 소신대로 자기의 의지를 부대 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오히려 나에게 대들었다. 그는 각 부대를 순방하면서 예의 훈시를 계속하였다.

이 실언이 장차 박진경 중령이 불행을 당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실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자신의 혈통에 관한 소개가 우선 실수였다. 자기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집단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간부였다고 소개했다.

이 필요 없는 소개를 왜 해야만 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자기는 절대로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②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라도 독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고급지휘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실언이었다. 이런 언행은 부대지휘 경험이 없는 참모출신이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출세한 장교들이 흔히 범하는 과오다.

그것은 군대는 명령만 하면 복종한다는, 통솔의 기술을 무시하는 환상에 기인한다.

 

군인들은 이해관계에 얽매인 조직체는 아니다. 군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으로 결속된 조직체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이라는 대의명분 없이는, 귀중한 자기 목숨을 희생하려고 생각지 않는 것이 군인이다.

상관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하여 그릇된 사병(私兵)놀이를 하지 않는 것이 군대와 시정 폭력조직과 다른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군인은 목숨을 바칠만한 명분 -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가 있어야 복종한다.

이런 사실을 박진경 중령은 망각하고, 군인은 무슨 명령이라도 복종하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박진경 중령과 나는 다음 날부터 토벌에 관한 상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작전에 관한 개념이 서로 달랐다. 그러니까 의견이 상통할 리가 없었다. 불과 1시간도 못되어 의견충돌이 생겼다.

박중령은 자기의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니 제주도를 떠나 달라고 하였다. 나도 화가 나서 떠나달라면 떠나겠다고 내뱉고는, 그 길로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마침 대기 중이던 비행기를 타고 상경하여, 나는 총사령부로 직행하였다. 이것이 나와 제주도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 후 5년간을 제주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악몽같은 제주도 사건의 기억때문에‧‧‧.

 

22. 박진경 연대장의 암살

 

서울에 도착, 총사령부로 들어간 나는, 송호성 사령관에게 그 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면서, 제주도민의 생명을 걱정하였다.

 

한편 서울의 경비대 장교들은 나의 행동을 전해 듣고 한결같이 칭찬하고 지지하여 주었다. 나의 행동은 나 개인의 행동이기 보다는 당시 군인들의 정신을 보여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조병옥씨 일파의 나에 대한 집요한 중상모략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이 나를 절대 지지했기 때문에, 전 경비대 군인들이 경찰과 조병옥씨에 대한 적개심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될까봐, 미군정도 감히 나를 박해할 수 없었다.

 

나는 3~4일간 서울에서 휴식을 취한 뒤, 여수 소재 제14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내려갔다. 그것은 나 개인적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그러나 인생유전(人生流轉)의 무상(無常)이 여수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수 14연대장으로 부임한지 1개월이 못되어, 나의 후임 제주 제9연대장 박진경 대령(그동안 대령으로 진급)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무부장 조병옥씨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 대령의 암살 지령자는 김익렬이라고 무고하였다.

 

나는 박대령 암살주범으로 의심을 받고 서울로 소환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무고가 전화위복이 되어, 나는 4개월 후에 발생한 여수 14연대의 여순반란 사건의 책임을 모면하게 된다.

나의 후임 14연대장 오동기(吳東起) 중령은, 반란발생을 미연에 방지 못하였다는 죄명을 쓰고,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사망하였다.

 

내가 제주도를 떠난 후, 박진경 연대장은 ‘소신껏’ 폭도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토벌방법은 과거 일본군이 만주‧중국 등지의 점령지에서 유격대를 토벌했던 것처럼,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않고 폭도 출현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은 무차별 토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의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경비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는 반면에, 폭도 측에 가담하는 도민들이 날로 늘어서 폭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해 갔다.

 

약 1개월이 경과된 후, 군정장관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하여 몸소 제주도에 내려가, 연대장을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진급 당일 제주도 관‧민 유지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진급축하연을 열었다. 박진경 대령은 만취하여 밤늦게 연대본부의 자기 숙소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만취하여 취침 중인 그를 연대장 숙소 근무병(당번병)이 M-1소총으로 사살하고 자수하였다. 박대령은 말 한마디 못하고 즉사하고 아까운 청춘을 이렇게 끝내고 만 것이다.

 

범인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수십 명의 피의자를 색출, 주동자 일당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문상길(文相吉) 중위를 주범으로 하는, 하사관 1명과 이등병 1명 등 모두 3명이었다.

연대장을 직접 사살한 자는 이등병이었다. 문상길 중위는 경북 출신이었고, 나머지 2명은 경남 출신이었다. 제주도 출신은 없었다.

특이한 것은 문중위 등 3명이 모두 기독교 신자로, 문중위는 특히 신앙심이 강하였다고 한다. 당시 나이 23세였다.

 

자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던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하자, 딘 장군은 대로했다. 그 뿌리를 뽑기 위하여 미군 CIC를 총동원, 철저한 수사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9연대 전 장병을 심문하고, 또 비밀 무기명으로 여론조사도 실시하였다.

 

 

23. 미 CIC의 소환조사

 

그 여론조사는 ①현재 경비대 군인 중에서 존경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②그 이유를 물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군인들은 존경하는 군인으로 김익렬 전 연대장, 증오하는 군인으로는 박진경 대령을 꼽았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김익렬 전 연대장은 항상 군인은 국가방위가 주목적이고, 애국애족만이 충성의 본질이라고 말해왔다.

 

제주도 폭도토벌 작전 때도 군기(軍紀)지시에서 ①무기를 가지지 않은 비전투원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살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②민간에서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약탈해서는 안 되며, 야채 등은 필요할 경우 현지에서 조달하되, 타당한 대금을 지불하든지 물물교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행위는 약탈로 간주한다. 식수도 주인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다(나는 각 개인에게 충분한 보급과 식량과 금액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부대가 통과한 지역은 반드시 조사반을 뒤딸려 보내 피해유무를 조사하고 본의 아닌 피해가 있을 경우 반드시 보상을 하였다) ③무기와 탄약을 절대로 분실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이상 3개 조항을 위반하면 군법회의에서 엄단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폭도에 시달리는 도민을 구출하라고 당부하였다.

 

반면 박진경 연대장은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사람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이며 폭도들이다. 명령에 불복하면 무조건 사살하라. 그리고 보급은 일체 현지에서 조달(약탈)하라며 무기 탄약만 지급하였다. 박진경 연대장은 민족반역자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으니, 내가 무사할 리가 없었다. 나는 박진경 대령이 피살된 이틀 후에 서울로 소환되어, 미 CIC 특별정보반에서 박대령 암살 최고지령자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지금의 명동 천주교 성당과 성모병원 길 건너 을지로 방면으로 내려가는 골목길이 있다. 그 골목길로 50m가량 내려가면 오른쪽에 1백여 평 되는 큰 일본식 가옥이 있다(한때는 요정으로 쓰이기도 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을 미군정의 CIC특별반이 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여 보니 미 MP와 한국 MP 1개 중대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나는 그 삼엄한 경계를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히 연대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그랬는지 또는 장병의 지지를 받는 위험인물이라서 그랬는지‧‧‧.

 

거기에서 나는 약 1개월 편안하게(?) 지냈다. 주로 독서를 하면서 무료를 달랬다.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사실 나는 당시 누가 어디서 무슨 사유로 암살당했는지 아무 것도 몰랐다. 통신이 불편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간 나는 경찰과 조병옥씨 일파에 의해 갖은 중상모략을 당한 모양인데, 그 사실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 건물 내 침실‧휴게실‧독서실‧욕실이 달린 호화로운 실내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면서, 약 한달 간을 아무 탈없이 보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맛보는 유한(有閑) 생활이었다.

 

물론 몸처럼 마음도 편안한 나날은 아니었다. 그간 나를 죄인으로 몰아서 딘 장군과 조병옥씨에게 공을 세우려는 군인‧경찰‧민간인 등, 친일파였던 여러 종류의 민족반역자들이 나에게 접근하여 왔다. 때로는 신경전과 위협으로, 때로는 유치한 감언이설로 나를 설득하려고 들었다. 그 중에는 불쌍한 느낌이 들 정도의 소인잡배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대장의 권위와 예의를 지켜주지 않는 자에게는 일절 대화나 면회를 거절하였다. 그런 자들도 마음의 일각에는 민족적 양심은 있었는지 대부분은 대단히 겸손하게 나를 대하였다.

 

약 1개월간 하는 일 없이 독서와 산보(시내 산보에는 감시자가 동행했다)로 지내는 동안, 사건은 아무 결론 없이 흐지부지되고, 나는 8월 초 온양(溫陽) 제13연대장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내가 온양에서 편성, 훈련한 13연대는, 6‧25가 발발하자, 임진강‧문산 등지에서 전차를 앞세운 적의 대부대와 맨손으로 맞서 싸워, 국군 전사(戰史)의 첫 장을 장식하게 된다.

제13연대의 용기는 지금도 전훈(戰訓)으로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다.

 

 

24. 암살범의 군법회의

 

1948년 7월 말, 박진경 대령 암살범인 주범 문상길 중위와 하수인 2명의 군법회의가 개최되었다. 장소는 지금은 남산도서관이 된 경비대 군기감 본부였다. 일제 때는 일본 신사(神社) 자리였다.

 

재판장은 이응준(李應俊) 대령, 법무사는 김완룡(金完龍) 소령이었다(이응준 대령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이며, 김완룡 소령은 육군법무감을 역임하고 소장 예편함).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이 군법회의는 군인들과 그 관계자들만 참관‧방청할 수 있는 군법회의였으나, 사건이 워낙 컸고 정치적인 성격도 띠어 연일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재판은 예상하였던 것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검찰관의 심문에 범인들은 3인 모두 죄상 전부를 순순하게 인정하였으므로, 재판은 1시간도 못되어 끝났다.

그들은 범행동기에 관하여, 자기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다른 정치적 목적도 없었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는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해치는 민족반역자를 총살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끝끝내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고를 저질러서 본의 아니게 김익렬 연대장에게 피해를 주어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다.

 

재판장 이응준 대령은 범인들에게 최후로 법정에서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범인들은 사전에 심적으로 서로 상의하여 두었던지, 문상길 중위가 3인을 대표하여 “진술할 말은 별로 없으나,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익렬 연대장에게 최후의 부탁이 하나 있으니 들어 주겠느냐”고 하였다.

재판장은 “들어줄 만한 말이면 들어줄 터이니 말하여 보라”고 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정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박진경 연대장님을 사살하였으나, 본인 개인에 대해서는 대단히 죄송하게 여긴다”(처음으로 ‘연대장님’이라는 존칭어를 썼다. 그 전에는 줄곧 ‘민족반역자’라 하였다)고 말하고, “이 법정은 미군정의 법정이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의 총애를 받은 박진경 대령의 살해범을 재판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법정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 안다. 우리 3인에게 총살형의 선고를 내리는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이 법정의 성격상 당연히 총살형이 선고될 것이며, 우리는 그 선고에 마음으로 복종하며,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과 김연대장도 장차 노령하여지면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하여주기를 부탁한다”.

 

일순간 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단상과 단하의 방청객 할 것 없이 전부가 안색이 굳어졌다.

이응준 대령은 창백한 안색을 짓고 한참 말없이 앉았더니, 법정휴회를 선언했다.

재판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었다. 물론 전원 총살형이었다. 총살형은 수주일 후에 수색에서 집행되었다.

나는 임석하지 못하였으나, 참관하였던 군인들의 말은, 총살형 집행 당시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3인의 태도는 참으로 군인다웠다고 한다. 3인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해괴한 것은, 참관한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는 것이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대령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총살현장의 광경은 참관자들의 마음속에 이렇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문인 신문기자 중에는 그 장면을 승화시켜 감상적인 기사를 써서, 경찰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25. 김달삼의 사체검진

 

결과적으로 제주도민 수만의 생명을 앗아가게 만든 폭동의 두목 김달삼은, 그 후 제주도를 탈출, 월북하여 해주(海州)에서 공산당에 입당하고, 공산주의자의 영웅이 되었으며, 그 후 다시 남파되어 태백산 지구 또는 지리산 지구 공산유격대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6‧25직전에 태백산 지구에서 국군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전사(戰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이다. 김달삼을 직접 상면한 자는 국군 현역장교 중에 나 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김달삼을 사살하였다는 현장마다 내가 가서 그 사체확인을 해야 했었다.

나는 7~8회에 걸쳐서 사체확인을 하였다. 그 중에는 공비들이 김달삼을 살해하여 투항했다는 경우도 있었고, 김달삼 부대를 포위 전멸시키고 김달삼의 사체를 찾아냈다는 경우 등등, 10여 회에 걸쳐 ‘사체 소동’이 있었다. 공식적인 검시만 해도 7~8회가 된다.

그러나 내가 사체를 확인할 결과는, 공명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들이 꾸며낸 조작극이었으며, 끝내 김달삼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달삼에 대한 그 후의 여러 가지 영웅담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인, ‘가짜 김달삼’을 내세워 선전에 이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진짜 김일성이가 따로 있음에도 김성주(金成柱)를 김일성이로 둔갑시켰듯이, 태백산 지리산 지구의 공비 두목 김달삼도 여러 명의 ‘가짜 김달삼’이라고 보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김달삼의 사상 성분 등에 관하여서는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가 골수 공산주의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와의 담판 때도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등등의 용어는 여러 차례 나왔으나,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노동 대중이니 부르주아니 착취계급이니 하는 언사는 일언반구도 사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사상을 논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밝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제주도민을 조직 선동하여 폭동을 야기시켰다고는 보기 어렵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도민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고, 시종일관하여 폭동이 경찰이 도민재산을 불법 약탈하고, 고문치사 강간 등을 자행하는데 항거하여 일으킨 자위수단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었다. 거기에 군집한 폭도들도 같은 주장이었다.

 

설사 김달삼 일당이 공산주의자였다고 가정하더라도, 폭동발생 초기의 상황에서는 공산주의 이론을 앞세워 폭도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제주도 대중의 지식수준으로 보아, 공산주의 사상으로 폭도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김달삼이 유창한 서울 표준어를 사용했던 점이든지, 도민의 생존과 자위 운운 했던 점 등으로 보아, 김달삼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사상이 강한데다, 객지생활에서 제주도 출신이라 하여 지방적인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어 깊은 반감을 품게 된 자가 아닌가 한다. 그 점에서 그는 대다수 도민과 폭도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다.

 

또 김달삼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나, 일제 때에 고등교육을 받은 자가 그 때까지 제주도에 잔류하여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당시 제주도에서 성행하던 일본과의 밀무역에 관련된 자가 아닌가 한다.

김달삼과 동석하였던 나머지 폭도두목 대부분이 해풍에 그을고, 선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자주 튀어나왔고, 당시 나포되어 있던 일본어선에 관한 성능과 일본까지 탈출하는데 필요한 연료의 소요량과 시간 등에 능통하였던 점 등이 나의 그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폭도들과 면밀히 내통하던 자들 중에는 선주나 선원이 많았고, 이들은 발각되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나는 김달삼이 밀무역에 관계하다 쫓기는 몸이 되자, 대의명분에 걸맞는 여러 가지 근사한 정치적인 용어로 폭도들을 규합했던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김달삼의 본명은 李承晋. 日本 京都 城峯중학교와 東京 중앙대 예과를 다니다, 학병을 기피 귀국, 부친이 살던 대구에서 8‧15해방을 맞았으며, 46년 귀향, 大靜中에서 사회과 교사로 역사와 공민을 가르쳤고, 남로당 대정면 조직책을 맡았음. 교편을 그만둔 뒤 47년 ‘3‧1사건’ 이후에는 남로당 도당간부로 활동했으며, 4‧3발발 무렵에는 무장대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 金을 밀무역 관련자로 본 필자의 견해는 주관적 체험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26. ‘4‧3’에 대한 나의 소견

 

나는 제주도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군정청장관 딘 장군 중에 한사람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사건처리에 임하여 군정장관 딘 장군 이하 미국인들은 언어불통으로 정보를 오판해, 결과적으로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실책을 저질렀고,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옥씨 이하 경찰은, 사건해결 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하였다. 거기에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박진경 대령까지 끼어들어, 사건을 원인으로부터 살펴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각자가 사건처리와는 거리가 먼 자기의 목적달성에만 전념하다가 대폭동화한 것이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을 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국민들은 이 기록을 보고, 소수의 악인들이 저지른 죄가 수만 명 국민의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삼기 바란다.

 

제주도 4‧3사건에 관하여 사심없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나는 이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자들 중에 사건의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전부가 제주도민에 대하여 크건 작건 범죄적 과실을 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상을 정직하게 역사에 기록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쓰여진 4‧3사건 기록을 훑어보면,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당시 천하가 알다시피 민족적으로나 제주도민에 대하여 무죄하다. 오히려 도민들을 구출하려다 갖은 박해를 당한 사람이다.

또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이득이나 손해볼 것도 없다.

 

역사는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야만 후세에 참고가 되는 법이다. 허위조작된 것은 역사의 가치가 없다.

나는 이러한 정신에서 이 기록을 남긴다.

그런데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무식의 소산이거나 교양부족에서 생긴 편견일 것이다.

 

특히 조병옥씨 일파의 죄상에 대하여 나의 규탄 질책이 지나치다고 꾸지람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이들의 죄상을 규탄하여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과 교양에 비추어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민족적 정의와 양심으로, 도무지 용납될 수 없고 묵과할 수 없는 죄상들만 기록한 것이며,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내가 기록한 사실의 몇 배가 될 것이다.

 

나의 소감을 정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조병옥씨나 박진경 대령과 같은 군인은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고인의 죄상을 덮어두는 것이 인간적 예의라고 생각하나,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