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의 아주 미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공영언론 보도책임자들이 연이어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영언론이란 한 마디로 특정 사주가 없는 언론사다)
연합뉴스 이성한 국장(10월 초)에 이어, KBS 엄경철 보도국장이 최근 임명동의투표를 통과했고, YTN 노종면 앵커가 차기 보도국장으로 내정돼 임명동의투표를 앞두고 있다. 지난해 임명받은 MBC 박성제 국장까지 포함해, 이들은 그동안 ‘참언론’을 위해 열심히 싸웠던 언론투사들이다.
먼저 박성제 국장은 2012년 MBC 파업투쟁 때 해고돼, 뉴스타파를 만들어 활약하다가, 최승호 현 사장과 함께 복직한 인물이다.
노종면 앵커는 그보다 먼저 2008년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을 벌이다가 해고된 후, 오랜 풍찬노숙 속에서도 참언론의 꿈을 잃지 않았다.
엄 국장도 KBS내 민주노조의 기둥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혹은 보도국장은 참으로 막중한 자리이다. 내가 2002년 경향신문에서 기자 직접선거로 편집국장으로 선출되자, 역시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회사 대선배 한 분이 미국 저명 언론인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무거운 덕담을 건네 왔다.
“편집국장은 연합 함대 사령관, 프로야구 감독과 같은 자리다. 회사의 운명을 책임지고 한 번 해볼 만하다.”
사회와 기업-국가도 마찬가지-의 대부분의 자리가 위계질서상 상급자의 지시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함대사령관은 망망대해에서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기가 가진 병력과 장비로 순간순간 판단해서 승리냐, 전멸이냐의 운명을 가르게 된다.
프로야구의 감독도 마찬가지다. 구단주에게 언제든지 잘릴 수도 있지만, 일단 경기장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선수기용과 판단으로 경기의 승패를 가른다.
신문사 편집국장도 그런 면에서 비슷하다고 본다. 국장 위에 편집인, 사주가 있기는 하지만, 그날그날 수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지면을 제작하는 일은 편집국장 전권에 속하는 사항이다. ‘고독한 결단’의 연속으로 고뇌가 크지만 보람도 있다. 특히 특정 사주가 없는 공영언론사(한겨레 경향 서울신문 포함)에서 편집국장 혹은 보도국장 자리의 의미는 더욱 막중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후 편집국장 비슷한 직업으로 연합함대 사령관, 프로야구 감독에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하나 더 붙였다.)
나는 이명박 박근혜 9년 간 거의 정규 언론 활동을 하지 못했다. 또한, 이들 신임 국장들과는 약간의 세대 차가 있어 지극히 한정된 접촉만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의 겉으로 드러난 활동과 모습에서 그들의 언론관을 짐작만 할 뿐이지, 지금도 과연 과거와 같은 ‘참언론’의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지, 심지어 정확히 그 언론관이 정획히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최근 MBC 보도국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기미를 보면서, 내 기대가 그리 크게 틀린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은 한다.
특히 엄경철 국장이 임명동의투표 국면에서 ‘출입처 철폐’를 내세웠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깜짝 놀랐다. 과연 언론개혁의 핵심을 짚은 것이다!
출입처 제도를 바꾼다고 한국 언론이 단박에 일신한다고 보지는 않지만, 지금 ‘윤석열의 검난’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듯, 출입처 제도에서 비롯된 출입처 취재원과의 유착이, 작금 언론의 고질적인 상업성, 선정성, 정파성 이상의 심각한 문제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믿고 있다.
따라서 나는 출입처 제도를 개혁하면서, 기자실 폐쇄 문제도 함께 제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을 온실에 가두어놓고 착하고 말 잘 듣는 화초로 키우는 것이 출입처 기자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실 폐지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제시대 이래 한국 언론의 100년 묵은 적폐 중의 적폐다. 언론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참여정부 때 정부가 앞장서 출입처 폐지를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언론 전체와 척을 졌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때 한겨레 경향 기자들이 뜻밖에도 강경하게 반발했던 기억이 내겐 있다.)
언론개혁은 언론 자신이 앞장서거나 최소한 호응해야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하지만, 언론이 자기 개혁하는 일에 쉽게 앞장서려고 하겠는가.
이번 KBS 엄경철 국장은 임명동의 투표에서 60%를 간신히 상회하는 찬성표를 얻었다고 한다. 양승동 사장 체제가 들어 선 후 첫 국장 후보가 80%대, 그 다음 직전 후보가 70%대 찬성표를 얻은 것에 비하면 대단히 실망스런 결과다. 특히 그가 받고 있는 신망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KBS 보도국 사정에 밝은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가 출입처 폐지를 들고 나왔기 때문에, 보도국 내 반대세력의 조직적 저항과 함께 일부 젊은 기자들의 경계의식이 발동한 결과라고 한다.
출입처 기자실이 주는 편안함과 안도감을 포기해야 하고, 대신 취재원과 멀어지는 데서 오는 불안감, 취재 분야가 넓어지고 모호해진다는 부담감, 매일 보도자료와 다른 색다른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엄습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KBS가 아무리 큰 언론사이고, 국장과 기자들이 아무리 각오를 단단히 하고 덤벼들어도, KBS 홀로 100년 적폐를 청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입처 제도를 지켜야 유리하고 기자실이 없으면 죽는 줄 아는 다른 언론사들, 그리고 출입기자들과 기자실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려는 각 기관들이 짜고 KBS를 물 먹이려는 온갖 책동을 벌인다면 KBS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출입처 폐지는 KBS와 성격이 비슷한 언론사, 즉 다른 공영언론사와의 공조가 절대 필요한 것이며, 이들 공영언론사의 보도책임자들이 한꺼번에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언론개혁의 첫걸음을 떼는 최적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가 언론개혁에 대한 자그마한 기대, 그것도 과분하다면 아주 작은 희망을 품게 된 이유다. 물론 KBS MBC YTN 연합뉴스 뿐 아니라, 한겨레 경향신문 서울신문처럼 ‘공영적 성격’을 가진 신문사들도 합류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좋을 것이다.
내가 맨 앞에 공영언론을 사주없는 언론사라고 말한 것은 일부 잘못된 표현인지 모른다. 특정 사주는 없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주인이다.
지금 주인인 국민이 공영언론에 요구하는 것은, 조중동, 족벌 사영언론들이 수구세력과 짜고 장악하고 있는 언론생태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