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과 서계 박세당
- 수락산이 맺어준 200년의 인연
# 매월당(梅月堂) : 매화와 달을 사랑했던 광사(狂士)
김시습은 천재였다. 수많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가 인정하는 유일한 천재였다. 아홉 번이나 과거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천재 율곡 이이가 천재라는 기록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 김시습이다. 율곡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 역시 김시습의 타고난 천재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적었다.
··· (김시습은) 태어날 때부터 천품(天稟)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세상에 나온 지 불과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주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놀라워서, 글을 보면 입으로 읽지는 못했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 『율곡전서』, 「김시습전(金時習傳)」
‘시습(時習)’은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에서 취한 이름이다. 김시습은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에 『대학』과 『중용』을 통달하는 등, 천재적 자질과 행적을 숱하게 보여주었기에,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이름 높은 명사들이 앞 다퉈 이 어린 천재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급기야 세종대왕의 귀에까지 김시습의 명성이 전해졌다.
학문 잘 하는 사람을 누구보다 아끼고 귀하게 여겼던 세종대왕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시(詩)로 시험해보았다. 김시습의 시는 빠르면서도 아름다웠다.
김시습의 재주에 탄복한 세종대왕은 크게 칭찬하면서, 훗날 나라의 재목으로 크게 쓰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세상의 풍속과 이목을 놀라게 할까 염려된다. 마땅히 그 집안에 권하여 재능을 감추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렸다가 장차 크게 쓸 것이다.
- 『율곡전서』, 「김시습전」
이때 김시습의 나이 불과 다섯 살이었다. 너무 일찍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면, 자칫 학업을 소홀히 하거나 헛된 명성을 쫓다 신세를 망치지 않을까 우려했던 세종대왕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대궐을 다녀온 이후 김시습의 명성은 이미 온 나라에 퍼져 ‘오세(五歲)’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김시습이 21세 때 발생한 한 ‘사건’이 천재의 운명을 ‘광인(狂人)의 삶’으로 바꾸어버렸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른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당시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에서 글을 읽다가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크게 울부짖고 통곡한 다음, 읽고 쓰던 서책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광기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 나와 곧바로 방랑길에 올랐다.
김시습은 권력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친조카를 죽인 것도 모자라, 나라의 동량과 인재들이 집현전의 학자들까지 몰살한 수양대군(세조)과 그 수하들의 패악에 분개하고,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는 세상에 분노했다.
그는 평생 세속 밖을 떠돌아 다녔으며, 일부러 광태(狂態)를 부리고 이성을 잃은 모양을 보여서 자신의 본모습을 가렸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 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년 후에 나의 속뜻을 알아주기 바라네.”
유학은 물론 불교에도 해박했던 율곡은 김시습이 “유가(儒家)의 본뜻을 크게 잃지 않으면서도 선가(禪家, 불가)와 도가(道家)의 대의(大義)를 깨우쳐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선종의 가르침을 적은 말) 짓는 것을 좋아하여 그 현묘하고 은미한 뜻을 밝혀 드러냈는데, 막히거나 걸리는 곳이 없었다. 비록 학문에 깊은 노스님과 명망 높은 승려들도 감히 그의 말에는 항거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시습의 글은 “물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산이 감추는 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다가, 신(神)이 선창하고 귀신이 화답하는 듯해, 보는 사람이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게 하였다.”라고 했다.
김시습이 특별히 좋아했던 것이 ‘매화[梅]’와 ‘달[月]’이다.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정한 31세(1465년, 세조 11) 무렵, 이 두 가지 사물을 취해 ‘매월당(梅月堂)’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매화’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유가(儒家)의 기호(嗜好)이고, ‘달’은 깨달음 혹은 해탈을 상징하는 불가(佛家)의 기호이자,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도가(道家)의 대도(大道)를 표상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김시습은 유가와 불가와 도가에 모두 통달한 사람이었다. 율곡은 김시습이 “마음은 유교에 있고, 행적은 불교를 따라,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생각했다”고 적었다.
경주 금오산에 머물 때 적은 글을 엮은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실려 있는 ‘탐매(探梅)’라는 시는, 조선의 선비들이 ‘매화’를 소재로 지은 수많은 시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걸작이다.
‘달’은 무학대사가 간월도(看月島)에서 어느 날 문득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해탈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선가의 공안(公案)이 되기도 한다. 손가락은 속세, 달은 깨달음(해탈)을 상징하는 용어로 비유된다.
도가(道家)에서 달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진리를 찾아가는 대도(大道)를 의미하거나 이상향인 선계(仙界)를 상징하기도 한다.
김시습은 「탐매」 14수에 자신의 매화 사랑을 담았던 것처럼, ‘달(月)’을 큰 제목으로 한 11편의 연작시를 지었다.
그는 세속의 권력이나 이욕(利慾)에 몸담기를 권유하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더욱 미치광이 행세를 자청했다.
# 동봉(東峯) : 수락산을 벗 삼아 일생을 마치려고 결심하다
김시습은 관서, 관동, 한양 도성 부근, 호남, 영남 등 전국의 많은 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산을 좋아해 산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했고, 산중생활을 즐거워했던 그는 수많은 ‘산중 시’를 남겼다.
그가 돌아다녔던 수많은 산 중에서 오랜 세월 거처로 삼은 곳은 금오산(金鰲山)과 수락산(水落山)뿐이었다.
31세(1465년, 세조 11) 때 경주 금오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곳에서 7년여를 거처하는 동안,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 이 책에서 당시의 유학자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궁·천상·저승·귀신 등을 소재로 삼아, 신비롭고 기이한 세계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보였다.
김시습은 수락산 동쪽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峰)을 애호하여 ‘동봉(東峯)’이라 부르고, 자신의 호까지도 ‘동봉(東峯)’으로 하였다.
김시습은 수락산 폭천(瀑泉) 부근에 ‘폭천정사’라 이름붙인 거처를 짓고 직접 농사를 일구며 살았고, ‘동봉’ 즉 수락산의 만장봉에 자신의 다른 호인 ‘매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처소를 짓고 거처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이 세상을 떠나고 200년이 흐른 뒤에, 서계(西溪) 박세당은 수락산에 들어와 그의 유지를 찾아 복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수락산에 거처한 지 10여년이 흐른 1483년(49세), 홀연히 두타(頭陀, 머리를 깎은 승려)의 행색을 하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떠났으며, 양양 부근의 바닷가 마을인 낙진촌(樂眞村)에 머무를 때, 자전적인 시라고 할 수 있는 ‘동봉6가(東峯六歌)’를 지어, 반평생(51세 무렵)을 지난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성찰했다.
천재로 태어났지만 시대를 잘못 만나 광인 행세를 하며 평생 방랑의 삶을 살아야 했던 김시습의 번뇌가 구구절절 담겨 있다.
# 서계(西溪) : ‘수락산의 나무꾼’을 자처한 또 한 명의 기사(奇士)
김시습이 세상을 떠난 지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7세기 중반, 또 한 명의 기사(奇士)가 수락산을 찾아온다.
그는 조선을 지배한 유일한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유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낙인이 찍혀 죽음을 맞은 ‘조선 철학의 이단자(異端子)’ 박세당이다.
수락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개울이 박세당이 호로 삼은 ‘서계(西溪)’이다.
박세당은 1668년(현종 9) 40세 무렵 수락산에 들어가 은거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서계의 나무꾼’이라는 뜻으로 ‘서계초수(西溪樵叟)’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때 옥당(玉堂, 홍문관)의 교리로 재직하던 박세당은 일부러 문신월과(文臣月課, 문신들에게 매월 詩賦를 지어 바치게 한 제도)에 세 번이나 제술(製述)하지 않아 파직을 자처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락산 석천동으로 들어왔다.
박세당은 선비의 몸이지만 직접 농사짓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농사철에는 농부나 야인(野人)들과 함께 어울려 하루 종일 밭에서 지내곤 했다.
더욱이 박세당은 자신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색경(穡經)』이라는 서책까지 저술했다. 『색경』은 유학자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농업에 종사하고, 또한 농업 기술 등 실용적인 지식을 익히는 데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사례로, 18세기에 만개했던 ‘실학 운동’의 선지자적 역할을 한 서책이다.
평소 김시습을 누구보다 염모했던 박세당은, 수락산에 들어온 이후 김시습의 옛 자취를 직접 탐사하고, 그가 남긴 뜻을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박세당은 김시습이 거처하던 옛터가 남아 있는 수락산 동봉 서쪽 석림사(石林寺) 곁에 사우(祠宇, 사당)를 세워 김시습의 삶과 남긴 뜻을 기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우를 세울 재물이 없어서 ‘매월당 영당(影堂) 권연문(勸緣文)’ 한 통을 지어 석림사의 승려들에게 보내, 재물과 양식을 구해 공역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박세당의 노력은 1686년(58세) ‘동봉사우(東峯祠宇)’를 세우고, 이어서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無量寺)에 있는 김시습의 자화상(自畵像)을 모사하여 봉안하는 것으로 결실을 맺었다. 4년 후에는 조정으로부터 ‘청절사(淸節祠)’라는 사액까지 받았다.
이렇게 김시습과 박세당은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한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졌다.
15세기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광사(狂士) 김시습과 17세기 조선의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기사(奇士) 박세당이 있었기에, 수락산은 드높은 선비의 기상이 서려 있는 산이 될 수 있었다.
박세당은 수락산 아래 석천동에 거처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유학의 경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와 주석을 단 『사변록(思辨錄)』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는 20년 후에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맞는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당시 주자학자들이 금서(禁書)이자 요서(妖書)로 배척한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장자의 『장자(莊子)』에 주해(註解)를 다는 연구 작업도 했다.
죽음을 맞기 1년 전(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으면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송시열을 ‘올빼미’에 비유해 비판한 일로 파란을 일으켰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다음 해(1703년) 조정 안의 노론 세력과 이들에게 아첨하는 사대부, 부화뇌동한 성균관의 유생들이 한패거리가 되어, 박세당이 주자의 장구(章句)와 주해(註解)를 불경하게도 함부로 고치는 이른바 ‘사문난적’의 중죄를 지었다면서, 형벌에 처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결국 박세당은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전라도 옥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연로하다는 이유로 다행히 유배될 위기를 모면하고 수락산 석천동 집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석 달 후인 1703년(숙종 29) 7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박세당은 70세 무렵 ‘서계’라는 호를 빌어서 직접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이라 할 수 있는 ‘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를 지었다.
“차라리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쓸쓸하게 살아갈망정, 끝내 ‘이 세상에 나왔으니 이 세상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이 세상이 좋아하는 대로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마음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 어떤 권력과 사상도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과 사상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칼날이 된다. 17세기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그랬다.
그런 점에서 박세당은 17세기 조선에 불어 닥친 ‘주자학’의 광풍(狂風)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위해 싸운 지사(志士)이자 투사(鬪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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