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일두 정여창 · 사옹 김굉필 · 정암 조광조 · 회재 이언적

道雨 2021. 3. 5. 21:05

일두 정여창 · 사옹 김굉필 · 정암 조광조 · 회재 이언적

 

                    - 선비 정신의 사표(師表), 동방 사현(四賢)

 

 

# 동방 사현(四賢)이란?

 

성종 시대에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士林)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정미사화의 참화(慘禍)와 재앙을 겪었다. 하지만 명종 말기 훈구파와 외척 세력의 마지막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권간(權奸) 윤원형 일파를 단죄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은 선조 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집단으로 자리 잡아, ‘사림전성시대가 열린다.

 

중앙 정치를 장악한 사림은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이념과 원리로 삼았으며,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성리학의 적통(嫡統)과 도통(道通)의 계보를 세우는 일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사업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때 사림세력은 과거 다섯 차례의 사화(士禍)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절의를 지키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혹은 유배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던 사림의 지사(志士)들을 성균관 문묘에 추존(追尊)하는 일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성균관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사림 권력에 정치적 명분은 물론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하는 일이었다.

선비 정신()’()’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어진[]마음으로 백성을 대하고, 의로운[] 뜻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선조 1년인 1568년에 사림의 적극적 지원 아래 성균관의 유생들이 앞장서 임금에게 문묘 종사를 요청한 인물은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네 사람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사현의 종사를 청한 상소의 내용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이들 상소문을 통해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네 명의 지사를 칭송하기 위해 사용한 사현(四賢)’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공식화 되었다.

그 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퇴계 이황이 사망하자, 선조 9(1576)에 다시 이황의 문묘 종사를 추가 요청하면서, 이른바 동방 5(五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 당대에는 이들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1610, 이들 5현은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1568년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시작된 동방 4의 문묘 종사 운동이, 40여 년이 지난 후 동방 5의 문묘 종사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들 동방 5은 사림의 표상이자, 선비 정신의 사표로 큰 존경을 받고 있다.

 

 

# 일두(一蠹) 정여창 : “나는 한 마리의 좀벌레다!”

 

사림(士林)’이라는 용어는 성종 시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을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인 정여창·김굉필·김일손·홍유손 등이 신진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성종은 이전 세조 때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공신(功臣)과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영남의 재지사림(在地士林)을 대거 발탁했고, 당시 사림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김종직이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종주라고 일컬어지는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길재의 수제자였던 김숙자의 아들이었다.

김종직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 계보를 잇는 사림의 적장자였다.

 

김종직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사건을 인의(仁義)를 어지럽힌 행위로 본 반면, 성삼문 등 사육신은 끝까지 절의를 지킨 지사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세조의 친손자였던 성종에게 서슴없이 사육신은 충신이다라는 직언을 했다.

절의를 숭상한 김종직의 철학은 그가 함양 군수 시절 학문을 가르쳤던 정여창·김굉필 등의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정여창이 김종직을 처음 만나 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때는 성종 3(1472), 나이 23세 때였다. 그는 4세 연하이지만 지동도합(志同道合, 뜻을 함께 하고 를 합한다)’의 지기(知己)를 맺은 김굉필과 함께, 1년 전에 자신의 고향인 경남 함양 군수로 부임한 김종직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佔畢齋集)』 「연보에 기록되어 있음.

이후 김종직이 한양으로 올라가자, 정여창은 지리산에 들어가 3년 가까이 유학의 경전 공부에 전념하였고, 27세 무렵 한양으로 올라가 옥당(玉堂)의 응교(應敎)로 관직에 있던 김종직을 다시 찾아가, 정자와 주자 등의 성리학을 배웠다.

 

정여창은 중국 송나라에서 발원한 성리학의 태두인 정이천(程伊川)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天地間一蠹]’에서 일두(一蠹)’라는 말을 취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정이천은 다른 사람의 은택을 입고 살면서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낼 뿐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을 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한 마리의 좀벌레[一蠹]’에 불과하다고 했다.

 

농부는 무더위와 한겨울에 열심히 경작하여 내가 이 곡식을 먹고, 공인이 어렵게 기물을 만들어 내가 이를 사용하고, 군인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고 지켜 내가 편안히 지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은택을 주지 못하고 그럭저럭 세월만 보낸다면 하늘과 땅 사이의 한 마리 좀벌레같은 존재이다.

 

일두(一蠹)’라는 정여창의 호는, 자신을 좀벌레로 낮추어 겸양의 뜻을 보였다고 하기 보다는, 간혹 나태함과 용렬함과 게으름의 미혹에 빠져드는 자신을 채찍질해,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세상과 사람들에게 의롭고 이로운 일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정여창은 여러 사람이 조정에 자신을 천거했음에도 33(1482, 성종 13) 때 전주 부사(全州府使)를 지낸 이외에는, 41(1490, 성종 21) 때 별시 문과에 합격해 예문관 검열(檢閱)의 직위에 오를 때까지, 경남 하동의 악양(岳陽)에 머물며 성리학을 탐구하거나 사림의 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자신을 끊임없이 갈고닦는 일에 전념했다.

예문관의 검열을 거쳐 세자 시절의 연산군을 지도하는 시강원의 설서(設書)로 중앙 정계에서 활약할 때도 자기 수양에 매진했다.

 

1492(43, 성종 23), 스승 김종직이 사망하고, 평소 두터운 친교를 나눈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남효온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큰 시름을 겪은 데다, 2년 후에는 세자 연산군과 불화하면서 미움을 사자, 외직인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자청해 조정을 떠나고 만다. 안음현감으로서 어진 정사를 펼치는 한편, 제자 양성에도 힘썼다.

 

연산군이 새로이 임금이 된 지 4년째 되는 1498년에, 훈구파 대신이자 권간(權奸)인 유자광과 이극돈은 일찍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성종실록편찬 때 사초(史草, 실록 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빌미삼아, 이른바 선비 살해 사건인 사화(士禍)를 일으킨다.

이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이 항우(項羽)와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초()나라 회왕(懷王)의 고사를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여론몰이를 했고, 눈엣가시 같던 사림 세력을 몰아낼 기회를 보던 연산군은, 유자광과 이극돈의 고변을 계기삼아, 조정 안팎의 사림파에게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을 가했으니, 이 사건이 조선사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로 인해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삽입한 김일손은 사형을 당했고,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에 처해졌다.

당시 중앙 정계와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정여창도 사화의 피바람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김종직의 수제자로 당시 사림파의 적통을 계승한 거물이었고, 또한 김일손의 동문(同門)이자 절친한 지기였기 때문이다.

환란(患亂)이 닥치면 성인(聖人)이라도 피해 갈 수 없다.”면서, 장형(杖刑) 일백 대와 두만강 근처 함경도 종성(鍾城)으로의 유배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유배지 종성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연산군은 수모와 모욕을 줄 작정으로 정여창에게 관청의 불을 지피는 화부(火夫)의 노역을 명했다. 그러한 간난신고(艱難辛苦) 속에서도 정여창은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제자들을 가르쳐 사림의 씨를 뿌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일두(一蠹)’ 즉 한 마리 좀벌레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평생 철학을 잊지 않았다.

 

종성에서 유배 생활을 한 지 7년째 되는 1504(연산군 10) 4월 초, 정여창은 나이 55세로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종성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무려 두 달에 걸쳐 고향 함양으로 운구해, 승안동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그해 9,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라는 참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스승 김종직에 이은 부관참시였으니, 당시 연산군이 정여창을 김종직의 뒤를 잇는 사림의 적장자(嫡長子)로 여겨 얼마나 증오했는가를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연산군의 그 증오 탓에 훗날 정여창은 신념과 절의를 지키다 가장 잔인하고 혹독하게 희생당한 사림의 순교자가 되었고, 선비 정신을 구현한 사림의 사표(師表)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 사옹(蓑翁) 김굉필 : “비록 큰 비를 맞더라도 겉은 젖을망정 속까지 젖지는 않겠다.”

 

김굉필은 정여창과 지동도합(志同道合)’의 인연을 맺고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운 이후 죽을 때까지 사림의 지사로 뜻을 같이 했다. 정여창이 온건파였다고 한다면, 김굉필은 강경파에 가까웠다.

김굉필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 벼슬에 나아갔다.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살면서 30세 이전까지는 모든 학문의 시작을 소학에 두어야 한다.’라는 김종직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으면서, 오로지 소학을 배우고 실천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30세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소학외의 다른 글을 읽었고 후학(後學)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소학을 통한 수기(修己)에 전념한 김굉필을 두고, 스승인 김종직은 성인(聖人)이 될 바탕이 있다면서 극찬했다.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의 중직에 임용되었음에도 조정을 바로잡아줄 건의를 올리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은 김굉필은 스승과 사이가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한 편의 시를 지어,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김종직의 현실 타협적인 처세를 비판했다.

이때의 일로 김굉필은 김종직과 틈이 갈라져, 끝내 사제 간의 정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얽히고설킨 사림의 학통과 인맥은,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오히려 김굉필을 김종직의 뒤를 이을 사림의 영수로 만들었다.

 

무오사화 때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곤장 80대의 형벌을 받고 평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를 당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전라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를 옮겨 북문 밖에서 우거(寓居,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삶)했는데, 그에게 미친 재앙의 기미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급했다.

 

김굉필은 한때 자신이 호로 삼았던 사옹(蓑翁)’처럼 태연하게 대처하며 평소의 지조를 잃지 않았다. ‘()’는 짚이나 띠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옛적의 비옷인 도롱이를 뜻한다. ‘사옹(蓑翁)’도롱이를 걸쳐 두른 늙은이를 말한다. “비록 큰 비를 만나서 겉은 젖을망정 속은 젖지 않겠다는 뜻.

 

김굉필은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1년 전(1497) 봄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을 때 이미 사림에게 닥칠 화란(禍亂)을 예견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나는 그대(進士 신영희)를 만나지 않겠다. 지금 선비들의 기풍(氣風)을 살펴보면 동한(東漢) 말기와 유사하다. 조만간 사화(士禍)가 일어날 것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미 화()가 닥쳐서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대는 멀리 시골에 가서 숨어 살며 재앙을 피해야 할 것이다.’

 

혹독한 추위에 떨어야 했던 유배지 평안도 희천에서, 죄가 감등(減等)되어 따뜻한 남쪽의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겼을 때에도, 또 다른 재앙이 자신을 덮칠 것을 예견했다. 1504(나이 51, 연산군 10) 9월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이 더해진 김굉필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사옹(蓑翁)’에 담긴 뜻처럼, 김굉필은 겉(육신)은 그들에게 빼앗겼지만 속(정신)만은 온전히 보존했다. 김굉필의 죽음은 훈구파와 연산군의 의도와는 달리 치욕이 아닌 영광이 되었다. 김굉필이 사림의 지사로 인정받아 성균관 문묘에 추존된 4(四賢) 혹은 5(五賢)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굉필은 처음 호를 사옹(蓑翁)이라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명호(名號)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순수한 처세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이를 고쳤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김굉필 사후 사람들은 그의 호를 사옹(蓑翁)’이라고 칭하기보다는 한훤당(寒暄堂)’이라고 불렀다. 그의 문집 역시 한훤당집(寒暄堂集)이라고 되어 있다.

김굉필의 연보에 보면, 그가 한훤당이라는 호를 사용한 때는 1472년 나이 19세 때였다. 이 해에 김굉필은 경남 합천군 야로현 말곡 남교동에 사는 순천 박씨의 집에 장가들었다. 그는 처갓집 옆 개천 건너 지동(地東)이라 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김굉필은 한훤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한훤당에서 추울 한()’이고, ‘따뜻할 훤()’이다. 추위와 더위를 뜻하는 한훤(寒喧)’은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상징하는 성리학적 우주관을 담고 있다.

 

남명 조식이 김굉필의 행적을 적은 경현록(景賢錄)을 읽고 난 후 남긴 후기의 글.

사람으로 인한 화란(禍亂)이 선생에게 미칠 바가 아니었는데 종국에 재앙을 모면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천명(天命)이라 하겠다.”

 

 

# 정암(靜庵) 조광조 : “어진 사람[仁者]은 고요하다!”

 

김굉필이 사림의 역사에 기여한 공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적은 유배지인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靜庵) 조광조를 가르친 일이다.

조광조는 두 차례의 사화로 위기에 처한 사림파를 다시 일으켜 세웠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사림이 중종 시대에 개혁 정치를 주도할 만큼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광조가 없었다면 16세기 사림의 전성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림에 끼친 그의 공적은 위대했다.

김굉필과 그의 평생 동지였던 정여창이 훗날 사림의 추앙을 받아 성균관의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조광조를 제자로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조광조는 어천찰방(魚川察訪)이라는 벼슬을 산 아버지의 임지로 유배 온 김굉필을 만나면서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된다. 김굉필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를 옮기기 전 2년 동안, 평안도 희천 유배지에서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했다.

당시는 사림파가 크게 화란을 입은 직후여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성리학을 재앙을 부르는 학문이라고 하며 멀리 했다. 김굉필이 갑자사화 때 죽임을 당했기에, 성리학 공부에 몰두한 조광조에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고 자기 수양에 힘을 쏟았다.

 

조광조의 행적을 기록한 정암 조선생 연보에 따르면, 그는 소학, 근사록과 사서(四書, 논어·맹자·대학·중용)를 위주로 독서했다. 그런 다음에 여러 경서와 성리학 서적, 그리고 통감강목(通鑑綱目)등을 공부했다.

 

논어옹야편 구절.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仁者靜 智者樂 仁者壽”(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같이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산과 같이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어서 물을 좋아하고, 학문과 지식에 대한 끝없는 욕구와 호기심으로 인해 여기에서 저기로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산다고 한 것이다.

어진 사람은 의리(義理)에 밝아 후덕(厚德)하고 중후하여 권세나 이로움을 쫓아다니지 않아서 움직이지 않는 산과 비슷하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또한 어진 사람은 성격이 산과 같이 고요해서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는 얘기다.

조광조가 호에 담은 ()’의 참 뜻은 논어仁者靜(어진 사람은 고요하다)’이다. 산처럼 고요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권세나 이로움을 쫓아다니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정암(靜庵)’이라는 호에 담긴 뜻이다.

 

우암(尤庵) 송시열은 심곡서원강당기(深谷書院講堂記)에서, “선생(조광조)이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은 마치 주염계(周濂溪,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송나라에 태어난 일과 같다.)라고 적었다.

주염계는 정호·정이 형제와 함께 주자(朱子, 주희) 이전에 성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운 대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정호·정이 형제가 우주 만물의 진리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여 근원적 도리에 이르는 심법(心法)의 요체를 에서 찾은 반면, 주염계는 ()’에서 찾았다.

··은 성리학자가 학문을 닦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핵심이 되는 개념들이다. 이들은 ··의 수양이 유학의 최고 가치인 인의(仁義)로 귀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조광조는 ()’을 수양의 요체로 삼아 仁義를 실천하려고 했던 것이다.

 

조광조는 중종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1510(나이 29),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많은 동료를 사귀게 된다. 이때 수많은 사람이 조광조의 인품과 학식에 감탄한 나머지 자청해 그를 따라 학문을 배웠다.

나이 34세가 되는 1515(중종 10)에는 성균관의 추천에다 이조(吏曹)의 천거로 종6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나는 본래 이익과 영달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뜻밖에 일을 맡게 되니, 어쩔 수 없이 과거 시험을 거쳐서 벼슬길에 오르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나는 헛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매우 부끄럽다.”라는 뜻을 밝히면서 벼슬을 거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과거 급제를 통해 정식으로 벼슬길에 나서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해 822일 알성시(謁聖試) 을과(乙科)에 급제한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 6)에 올랐고, 다시 사헌부 감찰(監察, 6)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조광조는 호조, 예조, 공조 등 여러 관직을 거쳤지만, 대부분의 관직 생활을 관료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을 주요 임무로 하는 사헌부(司憲府)와 임금의 잘못에 대한 간쟁(諫諍) 및 논박(論駁)을 담당하는 사간원(司諫院), 임금에게 국정 자문을 하면서 정치의 시비를 가리는 간언(諫言)을 주로 하던 홍문관(弘文館)에서 보냈다.

 

이 당시 조광조는 반정공신(反正功臣)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조정의 언론과 간쟁을 담당하는 이들 3(三司)에 신망 받던 사림의 신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해, 훈구파의 전횡에 맞서 싸우는 전초 기지로 삼았다.

 

중종의 후원 아래 조광조는 사림파를 중앙 정계로 적극 등용하면서, 자신이 내세운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하나둘씩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사회의 풍속과 풍습 역시 점차 성리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조선 팔도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보급하는 운동을 펼쳐 향촌 사회를 성리학의 이상과 질서에 맞게 개편해나갔다.

음직(蔭職)으로 관직을 얻고 훈구파의 비호를 받아 부정비리를 일삼는 관리들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천거를 통해 사림의 명망 높은 선비들을 관직에 임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했고, 공신전(功臣田)과 녹봉의 감소를 추진했다.

 

조광조의 개혁 구상과 정치 행동이 점차 훈구파들의 숨통을 죄어오자, 반정공신과 훈구파 세력은 역모사건을 조작해 조광조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1519년 대사헌에 오른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반정공신들의 훈작(勳爵)을 삭제하는 문제를 제기하자, 훈구파들은 대반격에 나선다. 그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곧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와 모함을 뒤집어씌워 조광조와 사림파를 몰아세운다.

 

당시 중종은 반정공신과 훈구파의 권력 전횡도 못마땅했지만, 지난 몇 년간 조광조가 보인 도학 정치에 대해서 더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임금까지 가르치려는 조광조의 독선과 사림파의 독주에 대해 염증까지 느끼고 있었다.

 

조광조는 잘못된 훈작을 삭제할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중종이 이를 거부하자,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대간(臺諫)을 이끌고 사직을 청했다. 이에 중종은 이를 허락하면서,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도록 했다. 그때가 1111일이었다.

그런데 나흘 후인 1115일 밤중에, 중종은 조광조가 당파를 조직해 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홍경주·남곤 등 훈구파 대신들의 밀고를 받아들여,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핵심 인물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다음 날 밤에 조광조와 김정, 김식, 김구 등 사림파의 핵심 인사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이 재상의 지위에 있던 사람을 이렇듯 허술하게 죽일 수는 없다고 간언하자, 조광조와 김정은 사사(賜死)하고 김식과 김구는 곤장 100대에 절도 안치하라고 명령을 바꾸었다. 그러나 정광필이 굴복하지 않고 또다시 간언하자, 어쩔 수 없이 사형의 명을 거두고,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위리 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조광조는 전라도 화순군 능주로 유배되었다.

당시 성균관의 생도를 포함한 수많은 유생들은 힘을 모아 조광조와 사림파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석방을 탄원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시위는 오히려 중종과 훈구파의 사림파에 대한 위기의식을 부추겼고, 끝내 중종은 훈구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 능주에 유배온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216일 끝내 조광조는 사사당하고 만다.

 

죽음을 앞둔 조광조는 한 편의 절명시(絶命詩)를 짓고 사약을 마셨다. 사약을 마시고도 바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자, 군졸이 나서서 조광조의 목을 조르려고 하였다. 조광조는 자신의 죽음을 더럽히려는 군졸의 행동을 심하게 꾸짖어 제지하고, 사약을 더 가져오라고 한 다음, 태연하게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이은 사림에 대한 세 번째 탄압이자 학살이었다.

 

훗날 사림의 전성시대를 연 대학자 율곡 이이는 조광조가 도학, 즉 조선의 성리학에 끼친 공적을 평가하면서, “조광조가 없었다면 조선에 성리학은 없었다.”라며 극찬했다.

 

우리나라에는 도학의 전통이 없었다. 고려 시대에 포은 정몽주가 처음으로 그 발단을 열었지만 그 짜임새가 정밀하지 못했다. 또한 본조(本朝, 조선)에 이르러 한훤당 김굉필이 그 단서를 이었지만 미처 크게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암 조광조가 도학을 창도(唱導)하자, 모든 학자들이 그를 추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 것은 정암 조광조이다.

- 율곡전서, 경연일기(經筵日記),명종 22년조

 

퇴계 이황은 조광조가 후대의 사림에게 끼친 영향력을 두 가지로 요약했다. ‘치군택민(致君澤民)’흥기사문(興起斯文)’이 그것이다. 임금을 훌륭하게 이끌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 했다는 것성리학의 도리를 크게 일으킨 것이야말로 조광조의 공적이라는 것이다.

 

율곡은 앞서 인용한 경연일기에서, 우리나라에는 덕()을 닦고 인()을 좇은 선비들은 많았지만, ‘일찍이 도학적 실천과 의리를 임금에게 권한 사람은 조광조가 최초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율곡은 조광조가 자신과 같은 선비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길8가지로 밝혀놓았다고 했다.

첫째 성리학을 숭상하고, 둘째 인심을 바로잡고, 셋째 성현을 본받고, 넷째 지극한 정치를 행하고, 다섯째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여섯째 왕도 정치를 펼치고, 일곱째 의로운 길을 열고, 여덟째 사사로운 이익과 욕심의 뿌리를 막는 것이다.

 

인자(仁者)는 불이성쇠개절(不以盛衰改節)이요, 의자(義者)는 불이존망역심(不以存亡易心)이라

어진 사람은 흥망과 성쇠로 절개를 고치지 않고, 의로운 사람은 보존과 멸망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 소학

 

 

# 회재(晦齋) 이언적 : 회암(晦庵, 주자)을 우러러 본받다

 

이언적은 1491(성종 22) 경주부 양좌촌(지금의 경주 양동마을)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양동마을은 오랜 세월 이언적의 외가인 경주(慶州) 손씨와 친가인 여강(麗江) 이씨가 더불어 세거지로 삼은 집성촌락이다.

이 마을은 뒷산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이른바 ()’자형의 지세를 이룬 명당이다.

이곳이 선비 문화와 정신을 대변하는 살아 있는 현장이 될수 있었던 까닭은, 사림의 사표(師表)동방 4에 올라 있는 이언적이라는 명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이언적은 외가에 의탁해 성장했다. 학문 역시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을 통해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유학을 익히고 성리학의 글을 배운 사림의 문사였다. 이언적은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으로부터 발원하는 사림의 학통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삼촌 손중돈 외에 이언적에게 학문적·정치적 영향을 끼친 이는, 기묘사화 때 화란을 입은 기묘명현(己卯名賢)’ 가운데 한 사람인 모재(慕齋) 김안국이다. 김안국은 이언적이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을 때, 장차 임금을 돕고 사림을 크게 일으킬 재목임을 알아보고, 이언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이언적은 나라와 왕실의 재앙이 간신배들의 입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구복방가부(利口覆邦家賦)를 지었다.

 

··· 간사한 입을 가진 사람은 칼날과 같은 혀를 갖고 있어서, ()를 훼손하고 이치를 해쳐서, 임금을 어둡게 하고 재앙을 만드니, 환란(患亂)이 처음 일어나는 것이 어찌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겠는가. 경계하라! 임금이여! 이로움을 말하는 입을 제거하는 것에 의심을 두지 말라. 그 입이 한번 열리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 회재집(晦齋集), 이로움을 말하는 입이 나라를 망친다(利口覆邦家賦)

 

27~28세 때 셋째 외삼촌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오고 간 조선 유학사상 최초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참여해 독자적인 철학적 견해를 내보이는 것으로, 성리학에 대한 사림의 지적 수준을 크게 일으켰다.

이 논쟁의 와중에 할아버지 이수회의 상()을 당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 해 사림을 발칵 뒤집어놓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15218,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에 올라 조정에 다시 나간 이언적은 이때 중종의 명에 따라 이름에 ()’자를 더했다. 이전까지 그의 이름은 이언적이 아닌 이적(李迪)이었다. 중종이 단성(丹城) 출신의 어떤 사람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선비라는 뜻을 가진 ()’자를 사용하게 해 비로소 이언적(李彦迪)’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종은 비록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사림의 인사들을 내쳤지만, 유학의 나라인 조선의 왕이 사림과 유생을 배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당시 사림의 신망을 받던 이언적을 중용했다. 이언적은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의 설서(設書)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530(나이 40)까지 이언적은 六曹三司의 요직을 거치면서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했다.

 

15311, 자신의 아들이 중종의 사위가 되는 권간(權奸) 김안로가 세자를 가르치고 돌보는 실질적인 후견인에 다름없는 세자 보양관(輔養官)을 맡게 되자, 이언적은 외척(外戚)과 간신배의 발호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이 일로 이언적은 사간원 사간(司諫)에서 성균관 사예(司藝)로 좌천당했고, 얼마 뒤 김안로를 따르는 간신배들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자, 아예 벼슬에 대한 미련을 내동댕이치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이언적은 자신으로 인해 고향 마을에 화가 미칠까 염려해, 따로 자옥산(紫玉山) 기슭에 거처를 짓고 은거했다.

무이산에 은둔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해 유학사를 빛낸 주자(朱子)를 본받겠다는 일념으로,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유래한 회재(晦齋)’를 호로 삼았던 이언적은, 실제로 주자처럼 은둔한 채 홀로 학문에만 전념했다.

 

()’자의 뜻이 감추다 혹은 숨기다이고, 이언적이 당시 거처하던 곳의 이름까지 독락당(獨樂堂)’이라 붙이고, 어지러운 세상과 부패한 권력에 등을 진 채 홀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낙향한 다음 해(1532, 나이 42)에 양좌촌(양동마을)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자옥산 기슭 계곡가에 세운 10여 칸의 처소였다. ‘홀로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하는 생활을 즐긴다는 뜻을 담아 독락당(獨樂堂)’이라 했다. 이것이 오늘날 이른바 ‘45(四山五臺)’라고 불리는 이언적의 유적이다.

자옥산을 포함한 주변의 네 산이 4산이고, 5대는 계곡의 바위들 중 5군데를 골라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고 이름 지었다.

 

이언적은 회재라는 호 외에 자계옹(紫溪翁)’이라는 自號도 사용했는데, 자옥산 계곡을 사랑하였기에 자옥산 계곡의 늙은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1532(중종 27) 42세 때 시작한 자계옹의 삶은 나이 47세인 1537(중종 32)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끝이 나고 만다. 정승의 자리까지 오른 김안로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종친은 물론 왕족까지 축출하고 살해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그런데 이 해에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이었던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오히려 중종의 미움을 사, 전라도 진도로 유배형에 처해진 뒤 끝내 사사당했다.

 

이언적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다시 등용되는 것을 막고 있던 김안로가 죽자, 중종은 즉시 이언적을 불렀다. 장악원 첨정(僉正)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른 이언적은,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과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거쳐 한성부 판윤,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좌참찬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53세가 되는 중종 38(1543)에 잠시 외직인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다음 해 11월 중종이 죽고, 한때 자신의 제자였던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의정부 좌찬성으로 임명되어 조정에 복귀했다.

 

인종이 재위한 지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언적에게 다시 고난이 찾아왔다. 인종은 후사가 없었기에 그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 왕위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원대군(명종)은 당시 나이가 12세에 불과했기에, 그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철의 여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권력욕이 강했고 정적을 다루는 데 무자비했다. 그녀는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을 제거하고,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사림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사림은 또 다시 대재앙을 맞게 되니,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그 당시 이언적은 역모 사건을 다루는 의금부의 수장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고 있었다.사림의 영수가 사림에게 죄를 물어 역적으로 만드는 사화(士禍)’의 가해자가 되는 참으로 가혹한 순간이었다. 이언적은 사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끝까지 추국(推鞫)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림의 인사들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독단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을사사화 이후 문정왕후는 역모를 막아 사직을 보존했다면서 이언적에게 위사공신(衛社功臣)에다가 여성군(驪城君)이라는 군호(君號)까지 부여했다. 사림을 죽이거나 조정에서 내쫓는 한편으로 일부사림을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세력으로 조정에 남겨 권력의 정당성과 정치적 명분으로 삼고자 한 문정왕후의 계략이었다.

 

을사사화를 막지 못한 이언적의 소극적 처신은 훗날 율곡 이이의 비판을 샀지만, 또 한편으로 서애(西厓) 류성룡과 같은 이는 이언적의 처신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어쨌든 을사사화 때 보인 이언적의 처신은 그의 선비 정신에 큰 흠을 남겼다.

 

문정왕후와 그 친족(親族) 동생인 윤원형 일파는 자신들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사화의 칼날을 정면으로 이언적에게 겨냥했다. 윤원형과 이기가 앞장 서 1546(명종 1) 9월 이언적을 모함해 탄핵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관직을 삭탈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해 윤9월 문정왕후를 비난한 글을 붙였다는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를 물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형에 처했다. 이 사건이 조선사 최후의 사화로 기록된 정미사화(丁未士禍)’.

 

정미사화는 당시 사림의 영수이자 스승으로 존경받던 이언적을 제거하고 사림파를 몰살하려는 정치적 음모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언적은 조선의 북쪽 끝 강계 유배지를 성리학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장소로 바꾸어버렸다.

그곳에서 그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등의 역작을 저술했다. 이들 저술은 조선의 성리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였다. 특히 유학의 여러 경전에 흩어져있는 ()’에 관한 성현의 언행과 해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구인록, 사림이 추구한 선비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노작(勞作)이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6년의 삶은 이언적의 정신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사림의 큰 별이자 정신적 지주로 만들어주었다. 생애 마지막 6년간의 유배 생활은 이언적이 훗날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와 함께 동방4(東方四賢)’ 중의 한 사람으로 유학의 성지인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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