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퇴계 이황

道雨 2021. 3. 3. 16:18

퇴계 이황

 

                                       - 평생 ‘물러날 퇴(退)’ 한 글자를 마음에 품고 살다!

 

 

# 퇴계(退溪) : ‘물러날 퇴(退)자를 호로 삼은 까닭은?

 

이황은 1570128, 나이 70세로 죽음을 맞았는데, 죽기 나흘 전에 조카 이영을 불러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내가 죽고 난 후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려고 청하면 사양해라. 또한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조그마한 빗돌에다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세계(世系지행(志行출처(出處)를 간략하게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대로 하라. ···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적어서 미리 명문(銘文)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꾸 미루어 오다가 미처 끝내지 못한 채, 어지러이 흩어놓은 난고(亂稿) 가운데 숨어 있으니, 찾아서 묘비의 명문을 새기도록 해라.

- 퇴계집(退溪集), 연보(年譜)

 

이황이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적어 두었다고 말한 명문(銘文)’이란, 자신의 70 평생을 42496()로 압축하여 정리래 놓은 자명(自銘)’을 가리킨다.

이황의 묘소를 찾아보면, 그 묘비의 중앙에는 그의 유언대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적혀 있고, 그 오른편에는 퇴계선생묘갈명(退溪先生墓碣銘)‘이라는 제목으로 앞서 언급한 자명(自銘)‘이 기록되어 있다.

 

이황은 이 자명(自銘)에서 자신이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던 뜻은 바로 물러날 퇴(退)’ 한 글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벼슬에 나아가면 가다가 넘어졌고[進行之跲(진행지겁)], 벼슬에서 물러나 숨으면 올곧았네[退藏之貞(퇴장지정)]”

벼슬에 나아감[]’은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아 몸을 상하게 만들었던 반면, 벼슬에서 물러남[退]’은 자신의 마음과 같아서 올곧은 삶을 지켜주었다는 얘기다.

 

이황은 8남매의 막내였는데, 그의 아버지 이식(李植)은 그가 걷기도 전인 2세 때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이황의 어머니는 직접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면서 남은 자식들을 양육했고, 이 때문에 집안은 가난했으며 살림은 궁색했다. 그러나 이황의 어머니는 배우지 못한 과부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가난 속에서도 자식들의 공부만은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영특하고 학문에 출중했던 이황에게 거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고, 이황의 과거 급제는 집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나 다름없었다. 학문이냐 벼슬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이황은, 어머니의 기대와 형제들의 권유를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첫 과거 시험인 경상도 향시(鄕試)27세의 늦은 나이로 치른 까닭 역시 여기에 있었다.

이황이 벼슬길에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집안 살림이 몹시 궁색해 늙은 어머니가 가난으로 고생하자, 차마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34세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황은 성균관, 호조, 홍문관, 춘추관, 사헌부 등 60여 개의 중앙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나 항상 마음은 벼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다시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나아가기를 거듭했다.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할 마음이 적었다. 그 당시 정치 사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므로, 선생은 계묘년(癸卯年, 1543) 나이 43세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결심을 가졌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임금이 불렀지만, 항상 조정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으셨다.”

- 이황의 제자 정유일이 훗날 스승의 평소 언행을 모아 엮은 언행록(言行錄)중 내용

 

이황의 나이 37세에 그가 벼슬에 나갔던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던 어머니 박씨 부인이 사망했기에, 더 관직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었다. 43세 때인 15432, 이황은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했으나,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복귀와 사직을 반복했다.

 

잦은 사직과 뒤이은 복귀로 말미암아, 이황은 동갑내기이자 학문적 라이벌이었던 산림처사(山林處士) 조식으로부터 출처(出處)’가 명확하지 않다고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식은 그 뜻과 기상이 성리학을 초월했기 때문에, 군신(君臣) 간의 의리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통 성리학자였던 이황에게는 군신 간의 의리는 아주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이었다. 그래서 이황은 평생 임금이 부르면 어쩔 수 없이 나아갔다가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거듭했던 것이다.

 

이황은 46세가 되는 1546(명종 1) 2, 휴가를 얻어 고향인 예안현(지금의 안동)으로 돌아가 장인 권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이후, 5월에는 병을 핑계 삼아 조정으로 복귀하지 않아 해직되었다.

그리고 7, 부인 권씨가 사망하자, 작정하고 고향인 예안현 온계리(溫溪里)로 귀향하여, 참됨을 기른다는 뜻의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향 온계리에 흐르는 토계(兎溪)’라는 시내 이름을 퇴계(退溪)’로 바꾸고, 마침내 자신의 호로 삼았다. 당시 이황은 퇴계(退溪)’라는 제목의 시문(詩文)까지 짓고, 자신의 호에 물러날 퇴(退)’자를 넣은 뜻을 설명했다.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내 분수에 맞아 편안하지만, 학문이 퇴보할까 늘그막을 우려하네. 시냇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퇴계(退溪)를 굽어보며 매일 반성함이 있네.

- 퇴계집, 퇴계

 

오늘날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으로 흐르는 조그마한 실개천이 바로 이황이 퇴계라고 고쳐서 자신의 호로 삼았던 토계이다.

 

이황이 죽기 1년 전인 1569(선조 2), 새로이 즉위한 임금이 종1품직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와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을 내렸는데, 이황은 자신이 직접 쓴 묘갈명인 自銘에서 만년에 어찌 외람되게 벼슬을 받았는가라고 후회하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황이 자신의 묘비에 일체의 관작(官爵)을 기록하지 말고, 오로지 퇴도만은(退陶晩隱)’이라고만 적으라고 한 까닭 역시 벼슬에 나아간 것을 자신의 본래 뜻과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묘비를 관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던 당시 사대부들과는 다르게, 그냥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 지내다라는 뜻의 退陶晩隱이라고만 적으라고 했던 것이다.

물러날 퇴(退)’자를 평생 가슴에 품었던 것도 모자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물러날 퇴(退)’ 한 글자로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이황이었다.

 

 

# 도수(陶叟)·도옹(陶翁)·도산노인(陶山老人) : 도산(陶山)에 숨어 사는 병든 늙은이

 

퇴계와 더불어 이황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단어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이다.

이황이 주인공인 천 원짜리 지폐 앞면에는 이황의 초상화가 있고, 뒷면에는 도산서원의 전신인 도산서당(陶山書堂)을 그린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가 새겨 있다. <계상정거도>는 겸재 정선이 1764년에 그린 것으로, 이황이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퇴계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陶山)에 세운 강학소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선비와 제자를 수용하기에 퇴계가의 집은 너무도 좁고 답답했기에, 거처를 옮길 목적으로 마땅한 장소를 찾아다니다가, 퇴계 남쪽에 있는 도산에서 좋은 터를 발견했다. 그 후 5년 가까운 시간 각고의 공을 들여, 1561년 가을 마침내 도산서당은 완성되었다.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이황은 곧바로 도산기(陶山記)’라는 글을 짓고, 이곳에 담긴 자신의 뜻을 밝혔다.

陶山이라는 이름은 옛적에 산속에 질그릇을 굽는 가마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이황이 평생 추구했던 성리학의 도(), 곧 인간의 참된 본성과 인격을 도야(陶冶)하는 산이기도 하다.

 

영지산(靈芝山)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 도산(陶山)이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산이 두 번이나 솟았으므로 도산(陶山)이라 이름하였다하고, 또 혹자는 산속에 옛날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事實)로써 이름을 붙였다라고 말한다. ··· 이곳에는 조그마한 골짜기가 있고, 앞으로는 강과 들을 굽어볼 수 있다. 그윽하고 아득하며 멀고 넓을뿐더러 바위와 산기슭이 밝고 또렷하며 돌샘은 차가워서 은둔하기에 마땅한 곳이다. 농부의 밭이 그 가운데 있었지만, 재물을 주고 밭과 바꾸었다. ··· 5년 만에 서당(書堂)과 정사(精舍) 두 채가 대략 완성되어 깃들어 쉴 만한 곳이 되었다. ···

중년에 망령되게 세상에 나가, 세속의 바람과 먼지에 엎어지고, 나그네처럼 헤매다가 미처 스스로 돌아와서 죽지 못할 뻔했다. 그 후 더욱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은 깊어지고 하는 일마다 곤란을 겪으니, 비록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으나 내가 스스로 세상에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 퇴계전서, 도산기

 

이황이 도수(陶叟도옹(陶翁도산노인(陶山老人도산진일(陶山眞逸도산병일수(陶山病逸叟) , 도산과 관련된 수많은 자호들을 사용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황은 도산을 배경으로 하거나 소재로 삼은 한시(漢詩)와 우리말 시가를 아주 많이 남겼다.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지은 도산잡영(陶山雜詠), 65세 때 지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옛사람도 날 못 보고 나도 옛사람 못 봐

옛사람을 못 봐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꼬

···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흘러가는 물은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萬古)에 늘 푸르리라

···

어리석은 이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모르는구나

- 퇴계전서, 도산십이곡

 

 

도산십이곡은 이황이 스스로 쓴 발문에서 도산노인이 지었다고 밝힌 국문 시가로, 앞의 여섯 곡은 을 말하고, 뒤의 여섯 곡은 학문을 말하였다고 밝혔다.

이황이 말한 이란 벼슬이나 출세와 같은 세속의 이욕(利慾)을 쫓아다니지 말고 자연 속에서 참된 본성을 기르라는 것이고, ‘학문이란 만권의 책을 쌓아 두고 성현의 도()를 힘써 궁구하라는 것이다.

 

도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하며 강학하던 10여 년의 생활이 쌓이고 쌓여서, 이황은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라는 장소가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고 싶었던 이황의 뜻이 깃든 곳이었다면, ‘도산은 이러한 이황의 뜻을 현실로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자신의 비석에 退陶晩隱이라고만 새기라고 거듭 유언을 남길 만큼, 이황의 삶과 철학에서 (退)’자와 함께 ()’자가 지닌 의미는 거대했다.

 

 

# 청량산인(淸凉山人) : 오가산(吾家山), “진실로 우리 집안의 산이다!”

 

지리산을 좋아했던 조식이 스스로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는 호를 썼던 것처럼, 이황은 청량산(淸凉山)을 무척 좋아해 자신을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청량산은 열두 봉우리의 기암괴석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예로부터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린 산이다.

16세기 이래 청량산은 선비들이 숭상하는 성산(聖山), 성스러운 산으로 대접받았다. 그 까닭은 이 산 구석구석에 이황의 얼과 혼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청량산은 이황에게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의미가 있는 산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형(父兄)을 따라 책보자기를 짊어지고 이 산을 오고 가며 글을 읽은 것이 몇 번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꿈에서는 이따금 다시 맑은 산을 넘지만, 형체는 지금도 오히려 먼지 구덩이에 떨어져 있네.”

 

풍기 군수로 있던 1549년 봄에, 주세붕이 지은 청량산 유람록(遊淸凉山錄)을 고을 사람들에게 얻어, 세 번이나 되풀이해 읽으면서 청량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15524월 임금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올라갔다가, 청량산유람록을 지은 주세붕과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세붕의 특별한 요청에 따라 청량산유람록에 발문(跋文)까지 써주게 되었다. 이 글에서 이황은 청량산을 가리켜 오가산(吾家山)’, 우리 집안의 산이라고 불렀다.

1553년 나이 53세 무렵부터 스스로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불렀다.

 

1555년 벼슬에서 물러나 한 달 여 동안 청량산에서 머물다가 퇴계가의 집으로 돌아온 이후, 이황은 서당을 지을 터를 구하러 다니다가 57세에 도산 남쪽에서 마땅한 장소를 구했고, 5년여의 공사를 거쳐 1561년 도산서당을 완성했다.

이황이 청량산이 아닌 도산을 선택한 이유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째는 청량산의 높은 절벽과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가 늙고 병든 자신에게 편안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청량산에는 물이 없어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명승지(名勝地)와 명산(名山)은 사람에 의해 이름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이황이 있었기 때문에 청량산은 도산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朱子) 이후 최고의 성리학자로 일컬어지는 퇴계의 정신이 깃든 성산(聖山)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