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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리학(주자학)과 기타 학자들의 학통과 계보

道雨 2021. 3. 31. 10:30

조선시대 성리학(주자학)과 기타 학자들의 학통과 계보

 

 

* 성리학(주자학) 계보 : 안향-안향의 6군자-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길재, 권근

-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

 

* 이색의 가계 : 한산 이씨.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손자인 이맹균(1371~1440)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뒤에 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죽였다고 하며, 시체마저도 길가에 내다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하여 바로 세종대왕이 아무리 종이라고 해도 이런 짓은 심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직시키고 이씨와 이맹균을 귀양 보냈다.

그나마 황해도 우봉헌으로 귀양 간 이맹균은 몇 달도 안 돼 병으로 다 죽어갔고, 세종은 어차피 이젠 죽을 거 귀양을 풀어줬으나, 이맹균은 한양으로 오던 도중 개성에서 숨졌다. 이씨는 남편 장례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귀양을 풀어줬지만, 이후 3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로 인해 이색의 후손들은 훈구파의 한 축이 된 것에 비해 ,이색의 학풍을 이은 제자들은 사림파의 한 축이 되었다.

하지만 사육신 중 1명인 이개는 이색의 증손자로, 같은 가문에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가 이색의 7대손이다.

 

 

* 이색의 제자 :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위인을 여럿 키워냈다. 정몽주, 정도전이 유명해서 그렇지, 이숭인,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까지, 사실상 여말선초의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

 

* 길재의 학통 : 이색-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손중돈·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

이색·정몽주·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웠다.

정몽주에게서 이어받은 학통을 김숙자(金叔滋)에게 전하고, 이는 다시 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

 

* 김종직의 학통 : 길재-김숙자(김종직의 아버지)-김종직-정여창·김굉필·김일손·손중돈·남효온-조광조·이언적

아버지 김숙자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인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에게서 수학하였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 정계에 진출한 이는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정여창, 최부(崔溥),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남효온(생육신)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다,

 

* 조광조의 학통 : 김종직-김굉필-조광조-양산보(소쇄원조욱·성수침(성혼의 아버지)-성혼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 서경덕의 학통 : 서경덕-이지함·허엽·박순·남언경-

독학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갖춤.

서경덕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로써 설명하고,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데 특징이 있다.

격물을 중시했던 그의 학문방법은 독창적인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루었던 정주학의 이론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분이 많았으므로, 이황·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서경덕의 학설은 우리나라 성리학에서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를 시도한 것이었으며, 이이 등 주기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하에서 박주(朴洲박순(朴淳허엽(許曄남언경(南彦經민순(閔純이지함(李之菡이구(李球박민헌(朴民獻홍인우(洪仁祐장가순(張可順이중호(李仲虎)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 이언적의 학통 :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의 외삼촌)-이언적···이황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의 도움으로 생활하며 그에게 배웠다.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으로 평가되는 태극개념논쟁 과정 속에서 전개된 그의 이우위설(理優位說), 이후 이황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 이황의 학통 : 이황-유성룡·김성일-

좌찬성 식()7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12세 때 작은아버지 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20세경에는 주역등의 독서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이황의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가 체계화한 개념을 수용하여 이를 보다 풍부히 독자적으로 발전시켰으며, ()를 보다 중시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란 특성을 지니고 있다(이기론).

이황의 학문·사상은 이후 영남·근기 지방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학계의 한 축을 이루었다.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학통은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황준량(黃俊良) 등의 제자와 17세기의 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이현일(李玄逸정시한(丁時翰)을 이어,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곽종석·허훈(許薰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 등 한말까지 내려왔다.

근기 지방에서는 정구(鄭逑허목(許穆) 등을 매개로,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남인 실학자에게 연결되어, 이들 학문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했다.

 

* 조식의 학통 : 조식-정인홍,김우옹,최영경,정구,곽재우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김우옹, 곽재우는 조식의 제자이면서 외손주 사위임. 김우옹과 곽재우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었음.

 

* 이이의 학통 : 이이·성혼-김장생-김집-송준길·송시열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대해 사숙(私淑)했다.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성리학, 주기론). ()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 조헌의 학통 : 이이·성혼-조헌

이지함과 교유하고, 그의 권유에 따라 성혼과 이이를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았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고, 김황(金滉이지함(李之菡)에게도 배웠다.

 

* 김인후의 학통 : 김안국·송순-김인후-기대승·정철·김천일·박순

전라도 장성 대맥동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8(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제자로는 조희문·양자징(梁子徵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오건(吳健노적(盧適신각(申覺서태수(徐台壽이지남(李至男) 등이 있으며, 기대승·정철·김천일·박순 등도 문인을 자처했다.

 

* 김장생의 학통 : 이이·송익필·성혼-김장생-김집-송준길,송시열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김장생)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송익필은 본래 서자의 후손이었지만 사람을 가리지 않던 아버지 김계휘와 삼촌 김은휘는,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각별히 아끼고 친구로 사귀었다.

사계는 1557(명종 12)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예학자 구봉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67(명종 22) 대학자인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정암 조광조-휴암 백인걸-율곡 이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수학하였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마침내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禮學)의 태두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김집(金集)과 김반으로, 김집은 그의 아들이자 학통을 계승하였고, 김반은 인경왕후의 할아버지이자, 김만기,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저자 김만중(金萬重)의 할아버지이며, 서인 중진 광남 김익훈의 아버지이다.

 

* 송시열의 학통 : 이이·성혼-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

송시열은 젊은 시절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수학했는데, 그의 학문은 바로 이러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김경여(金景餘윤선거(尹宣擧윤문거(尹文擧김익희(金益熙) 등과 함께,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부자에게서 배웠다.

정통 성리학자로서 그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다.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기년복(朞年服 :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3년복(2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던 남인의 윤휴(尹鑴)와 대립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제2차 예송이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 : 9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 실각당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덕원으로 유배되었고, 이어 웅천·장기·거제·청풍 등지로 옮겨다니며 귀양살이를 했다.

영조·정조 이후 노론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적 지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되었다.

제자로는 윤증이 가장 촉망되었으나, 그 아버지의 묘지문 문제로 노론·소론으로 분당되어 서로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8학사가 나왔는데, 이들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이었다.

 

* 윤휴의 학통 : 성운·이민구-윤휴

주자학이 지배하던 17세기 사상계에서 주자의 학설·사상을 비판·반성하는 독자적 학문체계를 세웠다.

서인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탄받고 끝내 처형당했다.

조식(曺植)과 학문적으로 가까웠던 성운(成運)의 서실(書室)에서 독서했다. 이후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와 이원익(李元翼)에게서 배웠다.

부친인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민순(閔純)에게서 배우고,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과 깊이 교유한 인물이었다. 외조부인 김덕민은 성운의 양자로, 그의 지()보다 행()을 중시하는 학풍을 윤휴에게 직접 가르쳤다.

이와 함께 이민구를 통해 이수광의 영향도 받았는데, 이는 이황의 적전(適傳) 제자들을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형성된 남인학파와는 그 학통을 달리하면서도 윤휴가 남인으로 활동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 박세채의 학통 : 김상헌·김집-박세채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로, 당쟁의 근절을 위해 노력했던 문신.

1651년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주로 성리학을 연구했고 송시열과도 교류했다.

1682년 김익훈·김석주가 남인을 밀고하여 옥사가 발생하자, 청의파에서는 이를 무고라 하여 탄핵했다. 이때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등을 추종하는 사람은 노론으로, 박세채·조지겸·한태동 등을 따르는 사람은 소론으로 나누어졌다.

그는 윤증 등 소론계 학자들과 함께 학문교류 및 정치활동을 했다.

박세채의 학문은 당쟁의 격화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의 동요하는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당쟁의 근절을 위한 탕평론과 사회적 규범의 확립을 위한 예학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결국 소론의 영수가 되었지만, 붕당의 화가 나라의 존립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서,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론을 제시했다.

 

 

* 윤증의 학통 : 송시열-윤증-

성혼(成渾)의 외손이다. 아버지는 선거(宣擧).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아버지(윤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송시열에게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내용 중에 야유하는 뜻을 적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사제 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 이익의 학통 : 윤휴,이언적,이황···유형원·허목·이하진·이잠···이익-안정복,이중환···채제공,정약용,이가환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남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태어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에만 주력했으며, 그의 사상은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사헌 이하진(李夏鎭)의 아들이다. 실학자 반계 유형원에게는 외6촌 동생이 되나, 생전에 한 차례도 만나본 적이 없다.

섬계 이잠(剡溪 李潛, 이익의 형)에게 수학하다, 송곡 이서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홀로 학문 연구에 진력하다, 미수 허목과 아버지 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 반계 유형원 등을 사숙하였고, 이후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어 근기남인 최대의 학파인 성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 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고, 이익은 학통상으로 윤휴의 손제자뻘이 된다.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 및 이언적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저술에 힘쓰는 한편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여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중환 등을 배출하였고, 그의 학통은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이현일 등으로 이어졌다.

 

* 정약용의 학통 : 유형원···이익···정약용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윤두서의 손녀.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다산은 매형인 이승훈(李承薰)과 가까워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었다. 다산은 이승훈과 이승훈의 외숙인 이가환(李家煥, 이익의 종손) 등과 교류하면서 실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고, 성호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 박지원의 학통 : 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김정희

조선 후기 소설, 철학, 천문학, 병학, 농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한 북학의 대표적 학자.

문학에서는 당시 이덕무·유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 4명에 정약용과 서이수를 포함하여 6대문장가로 불림)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으며, 이서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당시 그를 중심으로 한 '연암 그룹'이 형성되어, 많은 신진기예의 청년 인재들이 그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고, 새로운 문풍(文風학풍(學風)을 이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북학파실학(北學派實學)이었다.

1780년 연행에서 접촉한 청의 문물은 그의 사상체계에 큰 영향을 주어, 인륜 위주의 사고에서 이용후생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귀국 후 저술한 열하일기호질·허생전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인상과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 등도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였다.

 

* 김정희의 학통 : 박제가·완원·옹방강-김정희-이상적·허련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고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한 문인으로,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다. 그림에서는 문기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한도>

1830년 생부 노경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 헌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 만 9년 만에 풀려났으나, 다시 1851(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2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