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당국의 적대관계 해소 노력
- 네 번의 기회
남북한 당국이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네 번이나 기회를 만들었다. 아직 확고한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기회는 또 생길 것이다.
첫 번째 기회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데탕트 정책’을 채택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과 평화 공존하는 길을 탐색했다.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해진 시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냈고, 김일성 주석은 박성철 제2부수상을 서울에 보냈다. 공동성명에는 이후락 정보부장과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대리 서명했다.
1972년 7월 4일 남북 당국이 전격 발표한 성명의 핵심은, 자주·평화적 방법으로 통일을 실현하며,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초월해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상호 비방 중단, 군사충돌 방지, 남북교류 실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서울과 평양 상설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에도 합의했다.
국민은 희망에 들떴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과 석 달 후 유신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체제를 수립했다.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채택하고, 개인숭배와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더욱 확고히 했다.
남북 권력자들이 「7·4남북공동성명」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이라는 공동성명의 3원칙은, 이후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토대가 됐다.
소비재산업만으로 북한의 소득수준을 따라잡은 대한민국은, 1970년대에 철강, 조선, 화학, 건설, 자동차, 전력산업 등 전통적인 중화학공업을 세워냈다.
상품을 수출해 획득한 달러로 원자재와 에너지를 사들이고, 국방비 지출을 대폭 늘려 첨단무기를 도입했다.
국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됐다.
반면 북한은 만성적인 경제적 침체와 퇴행을 겪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1990년대 초 남북한의 경제력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격차가 컸다. 북한만 그랬던 게 아니라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택했던 사회주의국가들이 다 마찬가지였다.
베트남과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점진적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했지만,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은 극심한 정치적 혼돈을 거쳐 급진적으로 체제를 전환했다.
이념과 이론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현실의 사회주의는 개인의 욕망을 거세하는 체제였다. 욕망 실현을 추구하는 모든 사상과 행위양식을 ‘부르주아 반동’으로 규정해 억압했고, 인간 해방과 계급 없는 이상사회 건설이라는 추상적 이념에 개인을 종속시켰다.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낸 것처럼 보였지만, 모든 사람을 장기간 그런 식으로 동원할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무너진 후에도 북한은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고, 1987년 11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이후 미국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해 대외교역을 봉쇄한 탓에, 중국 말고는 무역 파트너가 없었다.
대외교역이 단절되면 수출을 할 수 없고, 수출을 하지 못하면 에너지와 원자재를 조달하지 못해, 제조업 생산의 순환이 멈춘다. 우리가 겪은 금융위기와는 전혀 다른 실물경제의 위기였다.
한계에 봉착한 김일성 주석이 변화를 모색했고, 노태우 대통령이 화답함으로써, 남북관계 전환의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991년 남북 당국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이다.
흔히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틀을 바꿨다고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사로 보든, 역사적인 제1차 남북정상회담으로 보든, 그렇게 말할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 공로를 국제사회가 인정했기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틀을 바꾼 사람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라 생각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개선했고, 진지한 태도로 옛 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7·7선언’을 발표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와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이산가족 생사 확인·남북교역 문호개방을 제안했고, 군사물자만 아니라면 우방국이 북한과 교역하는 것을 용인하고, 남북 대결외교를 종식하며, 북한이 미국·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했다.
대북비방방송을 먼저 중단했고, 북한이 1990년 5월 「조선반도의 평화를 위한 군축방안」을 발표하자, 고위급회담을 열었다.
1991년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제안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9월 24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주한미군의 핵무기 철수 문제를 협의할 용의를 밝혔으며, 미국 정부도 한반도 핵무기 철수 결정을 발표했다.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을 발표해, 핵무기를 제조·보유·저장·배치·사용하지 않으며, 국내의 핵시설과 핵물질을 공개하고,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2월 13일 정원식 총리와 연형묵 총리가 상호존중, 교류, 경제협력과 평화에 관한 원칙적 합의를 담은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김일성 주석은 남북관계 개선을 지렛대로 삼아, 북미관계와 북일관계를 정상화해 북한체제를 안정화하려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한의 체제경쟁이 대한민국의 완승으로 끝났음을 확신하고, 북한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잘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여겼으며,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북한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자극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남북관계의 기조를 이념·군사적 대결에서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으로 전환함으로써, 한반도의 국지적 냉전체제를 해체하려고 했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과 북은 민족의 화해를 위해 상호 체제인정, 내정 불간섭, 비방과 파괴 및 전복 행위 금지, 정전협정 준수와 평화상태 전환 공동노력, 국제무대 대결 종식과 협력, 판문점 남북연락사무소 설치, 합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정치분과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무력 사용과 침략 금지, 평화적 분쟁 해결, 정전협정의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을 경계선으로 하는 상호불가침,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남북군사 공동위원회설치, 우발적인 무력충돌 방지를 위한 군사당국자 직통전화 설치, 불가침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분과위원회 구성에도 뜻을 모았다.
자원의 공동개발과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 과학·기술·교육·문화예술·보건·체육·환경분야 협력, 신문·라디오·텔레비전·출판물 등의 보도와 출판 등 다방면의 교류협력, 자유로운 왕래와 접촉 실현,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서신거래·왕래·상봉과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실현, 철도·도로 연결과 해로·항로 개설, 우편과 전기통신교류 시설 연결 및 비밀 보장, 국제무대협력, 남북 경제교류협력 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위원회 구성,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교류협력분과위원회 구성에도 이견이 없었다. 세 건의 부속합의서도 체결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불가침부속합의서」에는 NLL 관련 조항이 있었다. 요약하면 해상경계선에 관해서는 남북이 계속 협의해나가되, 새로운 합의가 나올 때까지는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을 불가침경계선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은 바로 해상 NLL을 가리킨다.
해상경계선 문제를 계속 협의하기로 한 것은, 국제법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가진 해상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이 인정했으며, 그것을 전제로 북한이 기존 NLL을 잠정적으로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했음을 의미한다.
1991년 이후 현재까지 모든 남북교류와 경제협력사업은 「남북기본합의서」의 극히 일부를 실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7·4남북공동성명」과 달리 「남북기본합의서」는 추진과정에서부터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 비정치·인도적 교류 지원, 상호협력 확대 등 여러 성과를 냈다.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1992년 12월까지,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문제를 다루는 세 개의 분과위원회가 각각 10회 안팎의 회의를 통해 합의를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을 논의했다.
만약 1994년 7월 4일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김영삼 대통령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평화시대를 연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 사망 후, 북미 간에 핵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대북강경노선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후 한반도에 다시 훈풍이 불었다. IMF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에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들이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건설 등 민간 차원의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심각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 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은, 체제안전을 보장받는 일에 집착했다. 미국과 힘겨루기를 할 목적으로 핵폭탄과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해, 남북관계 전환의 세 번째 기회를 만들었다.
남북 정상은 「6·15공동선언」에서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장기수문제 해결, 경제협력과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분야 협력과 교류 활성화,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한 대화를 하기로 합의했다.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소신이었다. 그는 남과 북이 상이한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곧바로 통일하기는 어려운 만큼,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1국 2체제 국가연합’ 통일방안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구상과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방안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합의사항으로 넣은 것이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1998년부터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거래’해 만든 사업으로, 군사충돌 방지와 다방면의 남북교류 실시를 선언한 「7·4남북공동성명」과 자원의 공동개발·물자교류·합작투자를 추진하기로 한 「남북기본합의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프로젝트였다.
남북은 장관급회담을 열어 이중과세를 방지하고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합의서를 체결했고, 우리 정부는 남북협력기금을 조성해 민간단체와 기업인의 교류를 지원했다.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6·15공동선언」을 더 구체화한 「10·4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핵심은 남북경제협력을 대폭 확대·강화하고, 서해에 공동어로구역을 포함한 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사업들을 안정적으로 추진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협력과 평화보장 장치도 포함시켰다.
2007년 11월 서울에서 남북 총리들은 세 건의 부속합의서를 체결했고, 개성공단 통행·통신·통관의 대폭적 개선과 해주경제특구 건설, 해주항 활용, 한강하구 공동이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설정을 위한 세부 사업계획과 추진 일정도 마련했다. 그러나 공동어로구역 획정방식은 합의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해 12월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10·4공동선언」 이행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개혁할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비핵개방 3000’을 기본 정책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남북은 단 한 차례도 국방장관회담을 열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당국간 비밀접촉은 있었지만, 남북관계는 살벌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10·4공동선언」 합의를 이행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박왕자 씨 피격사망사건으로 금강산관광을 중단했고,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도 막았다. 급기야는 2010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을 이유로 5·24조치를 취해,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제협력을 전면 중단했다.
남북교역과 민간 경제협력사업, 인도적 지원, 항공로와 뱃길이 모두 막혔다.
이 조치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큰 경제적 손실을 입었으며, 한국 기업의 빈자리는 중국 기업이 차지했다.
2010년 11월에는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포격하는 사태가 터져 남북관계는 거의 완전히 끊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실체가 모호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북정책으로 내세웠다. 취임 직후였던 2013년 봄 북한이 정치군사적인 이유를 들어 개성공단 통행을 제한하는 등, 기존의 정경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 폐쇄를 불사하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1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개성공단이 다시 문을 열었고, 2014년 2월에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개최했지만, 금강산관광과 개성관광은 재개하지 않았고, 5·24조치도 철회하지 않았다.
2016년 2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비판하면서 개성공단 운영을 전격 중단하자, 북한은 폐쇄 조치로 맞받았다. 124개의 한국 기업이 철수했고, 남북협력의 마지막 통로였던 개성공단은 문을 닫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만들었던 남북관계 전환의 세 번째 기회는 그렇게 무산됐다.
2018년 네 번째 기회가 왔다.
2017년 가을까지 맹렬한 기세로 핵폭발 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신년사에서 대화 의지를 밝혔다. 여자 아이스하키 등 일부 종목에서 남북단일팀을 만드는 등,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당국이 손을 잡았다.
김여정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들고 서울에 왔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특사로 평양에 가서 김정은을 만났다.
4월 2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남측 지역으로 걸어 내려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판문점선언」을 채택했다.
북미정상회담을 수락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취소를 선언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5월 26일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비공개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이견을 조정하고 트럼프 대통령을 다시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상 최초로 만난 북미정상은, 북한의 체제안전보장과 한반도의 비핵화, 새로운 양국관계 수립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했다.
북한은 회담 직전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고, 끝난 후에는 한국전쟁 미군 유해와 억류 미국인을 송환하는 등 분위기를 개선했다.
북한이 인근 미사일 관련 시설을 해체하자, 한미 양국은 연합 군사훈련을 취소함으로써 화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18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을 방문해 다시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했고, 5·1경기장에 모인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합을 약속하는 연설을 했다.
급류를 탔던 북미협상은 2019년 2월 27일부터 이틀 동안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급정지했다.
북미정상은 확대정상회담에서 공동합의문을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플루토늄을 재처리하고 우라늄을 농축하는 영변 핵시설을 완전 폐기하는 대신, 2016~2017년 유엔 안보리가 채택한 대북제재결의 11건 중 철광 수출과 석유 수입 등 비군사적 경제활동을 막은 5건을 해제하라고 제안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핵시설과 핵무기 전체에 대한 목록 제출을 요구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네 번째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연 G20 정상회의를 마친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6월 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군사분계선 회동을 성사시켰다. 북미 정상은 북측 판문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남측 자유의 집에서 차기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실무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 북미협상과 남북대화는 정지 상태에 들어갔다. ‘노딜’로 끝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가 정전협정체제와 북미 적대관계의 산물이어서, 북미 양국의 합의 없이는 해결할 수 없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남북관계도 진도를 크게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증명했다.
남북관계 전환의 네 번째 기회는 앞선 세 번과 질적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7·4남북공동성명」,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민족끼리’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네 번째 기회는 한국전쟁의 당사자였던 미국 대통령이 함께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지만, 북한 최고 권력자와 미국 대통령이 세 번이나 얼굴을 맞대고 협상했다는 사실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부동산 거래하듯 북한을 상대했던 트럼프 대통령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반도 비핵화문제에 접근하겠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그랬듯 한국 정부의 전략과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전략적 인내’를 내세워 북한 핵문제를 방치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았던 것은,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대통령이 거부하는 일을 미국 대통령이 앞장서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미 양국에 민주당 정부가 공존했던 시기는 단 한 번, 1998년 2월부터 2001년 1월까지 3년뿐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수적이고 소심했던 탓에,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했던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기간에 진도를 확 나가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임기 후반에,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내내 공화당 조지 부시 대통령을 상대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3년 반 넘게 트럼프 대통령과 발을 맞춰야 했다.
이제 문재인 정부는 임기 후반 1년 반 동안 바이든 행정부와 공조 협력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핵미사일 폐기와 북한에 대한 제재완화,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남북의 군사적 대결 종식과 경제협력 재개, 인도적 지원과 민간교류 등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
트럼프는 낙선했지만, 그가 남북 정상과 함께 만든 네 번째 기회는 아직 살아 있다.
*** 이 글은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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