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독일 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합의통일’이었다

道雨 2021. 3. 31. 11:37

독일 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합의통일’이었다

 

 

 

동독의 사회주의체제는 대책 없이 붕괴하지 않았다. 동독 정부와 국민이 서독체제로 통합하기를 원했고, 서독이 그것을 받아들여 질서정연하게 통일했다.

 

독일 통일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정부였다. 두 나라는 198952일 국경의 철조망을 제거했고, 헝가리는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동독 시민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1989년 여름 동유럽으로 휴가를 떠난 200만 명의 동독 국민 가운데 상당수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주로 엔지니어, 건축가, 의사, 간호사, 교수 등 동독의 산업시설과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데 필수 일을 하는 20~40대였다.

 

여름휴가 시즌이 끝난 뒤 동독 정부당국은 정상적으로 생산시설을 관리하고 국가조직을 운영하기 어려워졌음을 알게 됐다.

 

동서독은 남북한과 달랐다.

 

1969년 서독 정부 수립 이후 첫 정권교체를 이룬 사민당 소속 빌리 브란트 연방총리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도모하는 새로운 동방정책을 수립함으로써, 독일 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진 사건 때문에 브란트 총리는 사임했지만, 통일독일의 첫 총리직을 포함해 무려 16년 동안 집권했던 헬무트 콜과 서독 보수진영 정치 지도자들은 브란트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동서독 정부는 서신 교환과 친지 방문, 방송 시청을 서로 허용했다.

 

1989년 가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던 동독 시민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서독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시위가 벌어진 곳은 동독 산업 중심지 라이프치히였는데, 광장에 운집한 시민은 열쇠뭉치를 높이 들어 흔들면서 민주주의와 통일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완전한 비폭력시위를 했고, 동독 정부도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동독 정부 핵심 인사들은, 여기에 어떤 거스를 수 없는 역사법칙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그들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권력을 내려놓았다. 동독 공산당 정치국이 1989119일 밤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허용한다고 발표하자, 동베를린 시민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브란덴부르크 검문소로 달려갔다. 검문소 장교는 상부 지시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판단으로 경비 병력의 무력 사용을 막았다.

1961년 동베를린 시민의 탈출을 막으려고 쌓았던 장벽은 그렇게 무너졌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두 국가는 화폐를 통합하는 등 적절한 준비를 하고, 주변 국가의 동의를 받아 통합을 결정했다.

 

이것이 합의통일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평화적 합의통일이라 할 것인가.

 

서독은 동독을 흡수통일하려고 한 적이 없다. 동독 국민이 원하고 동독 정부가 결단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교류·협력하고 지원했을 뿐이다.

 

동독이라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신뢰를 얻었고, 동독 정부의 무장을 해제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브란트 총리가 펼쳤던 동방정책의 한국 버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같은 관점에서 평화공존과 높은 수준의 교류·협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문재인 정부도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바라보며 그 길을 걸었다.

 

혼자서는 종착점에 갈 수 없기에,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결해왔던 북한과 미국의 최고 지도자와 동행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 이 글은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