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미국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道雨 2021. 6. 4. 09:31

미국 민주주의가 위태롭다

 

 

* ‘광란의 수요일’로 불렸던 지난 1월6일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사건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 국회의사당 안으로 난입하고 있다. 이날 미 의회는 상·하원 합동회의를 열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를 인증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가 의사당에 난입해 6시간 동안 중단됐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가 떠나고 나면 잦아들 거로 보였던 미국 민주주의 위기론이 끊이질 않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메모리얼데이(현충일) 기념식 연설에서 “미국과 전세계에서 민주주의 자체가 위험에 처했다”고 개탄했다.

1일에는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연구원 등 100여명의 학자가 집단성명을 내어 “우리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태롭다”고 경고했다.

 

이런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온 직접적인 계기는, 공화당이 지방 정부·의회를 장악한 주에서 잇따르고 있는 투표권 제한 입법이다. 가장 최근에는 공화당 텃밭인 텍사스주에서 드라이브스루 투표와 24시간 투표를 금지하는 등의 투표법안이 주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지난달 주 하원에서 민주당이 집단퇴장해 표결이 무산됐지만, 공화당은 조만간 특별회기를 소집해 처리할 계획이다.

앞서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아이다호, 인디애나, 캔자스, 켄터키 등에서 지난해 11월 대선 이후, 투표 문턱을 높이는 법률을 제정했다. 뉴욕대 브레넌정의센터 집계로 현재까지 14개 주에서 22개의 투표 제한법이 통과됐고, 18개 주에서 61개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

우편투표를 위한 신원 확인 요건을 강화하고, 부재자투표 신청 기간이나 투표 시간을 단축하며, 투표함 설치를 제한하는 등의 내용이다. 투표하려 줄 선 사람들에게 음료를 건네는 것을 금지하는 곳도 있다.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확산시켜왔다고 자부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기둥인 투표를 억누르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공화당은 투표의 온전함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흑인·히스패닉 등 유색인종과 저소득층의 투표 참여를 어렵게 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내년 중간선거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두 정당에 첨예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는 트럼프가 짙게 드리운 그늘이다. 트럼프는 대선이 조작됐다는 ‘새빨간 거짓말’(Big Lie)을 계속하고, 그 지지자들의 1월6일 의사당 난입 사태에 관한 조사위원회를 신설하려는 민주당의 시도는 공화당의 반대로 좌절됐다.

지난달 극우 음모론 집단인 큐어논(QAnon) 관련 행사에서, 한 청중이 마이클 플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미얀마에서 일어난 일(쿠데타)이 왜 미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할 때,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시비에스>(CBS)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의 67%는 바이든을 지난 대선의 합법적 승자로 보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거짓과 음모론, 트럼프 맹신, 바이든 불신이라는 토양 위에서 민주주의 위기가 자라고 있다.

 

바이든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실행은 험난하다. 평등한 투표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국가 차원의 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 또한 공화당의 반대에 가로막혀 있다.

후쿠야마 등 학자들은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제도인 필리버스터를 유예해서라도 공화당의 반대를 뛰어넘어 투표권 확대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한다. 민주주의 위기(투표 제한 등) 논란이 또다른 민주주의 침해(필리버스터 폐지) 논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바이든은 지난 1월 폭도에게 짓밟혔던 의사당에서 한 취임 연설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는 내부에서 금이 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경쟁’은 바이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바이든이 공언한 대로 올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열 무렵, 미국 민주주의는 세계 앞에 얼마나 당당한 모습이 돼 있을까.

 

 

황준범 | 워싱턴 특파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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