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조부가 만주에 간 그해 평강군에서 벌어진 일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의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했다는 '조선인 거류민단' 활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만주 개척 정책에 호응하는 활동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역사적 정황이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일제강점기 친일단체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김주용 원광대 교수의 조언으로, 새롭게 조사한 내용을 하나 더 공개한다. 김주용 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당시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만주이민훈련소가 있었다"고 알렸다.
공교롭게도 강원도 평강군은 최재형 후보 증조부 최승현의 고향이고, 이민훈련소 수료생이 배출돼 만주로 이동한 1938년은 최재형 후보의 할아버지 최병규가 만주로 간 해와 동일하다.
평강에 세워진 선만이민훈련소
▲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 세워진 선만이민훈련소(매일신보, 1938. 7. 30) 일제는 조선인의 만주 개척 참여를 위한 이민훈련소 설립을 추진하였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기후와 풍토가 만주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하면서 건립됐다.
일제는 1936년에 이르러 만주 개척의 기치를 내걸면서, 일본인의 만주 이민을 넘어 조선인의 만주 이민정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8년부터 일제가 주도하는 조선인 만주 이민이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만주 신징(新京)에서 <만선일보> 정치경제부장을 맡고 있던, 친일인사 홍양명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조선인의 모험 도강으로부터 개시된 과거 수십 년 전의 자유이민 시대를 지나, 통제적으로 이민을 지도하는 계획이민 단계에 처하야, 만주국 정부가 소화 11년에 칙령에 의한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야, 총독부 당국과 협력하야 만주이민의 보호통제를 하고 있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삼천리 제11권>, '대륙진출의 조선민중, 만주국에서 활약하는 그 현상', 1939. 1. 1)
일제의 만주 개척을 앞두고 선만척식주식회사가 세운 선만이민훈련소(鮮滿移民訓練所)가 조부 최병규의 고향이기도 한 평강군 고삽면(세포리)에 들어서게 됐다. 조선총독부 외사과는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만주와 기후·풍토가 똑같은 곳으로 평강을 지목했고, 훈련소 건립을 위해 약 4만 원의 보조금도 지원했다.
1938년 7월 30일 발행된 <매일신보>에는 세포이민훈련소에 관한 사진과 개소식 소식이 실렸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7월 28일 열린 개소식 행사엔 총독대리 송 사무관과 김시권 강원도지사, 만주국 모리적정사 사무관, 최형식 평강군수 등이 참석했다.
초창기 선만이민훈련소를 경영한 선만척식(주)는 조선총독부령 제45호(선만척식주식회사령)에 근거해 1936년 9월 9일에 설립된 특수회사였다. 선만이민훈련소는 '조선인의 만주이민을 지도할 중견 청년을 훈련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기관이었다.
이민훈련소 운영은 일제의 계획보다는 많이 늦어졌다. 1937년 5월 1일부터 훈련생 교육을 시작한다는 계획이, 해를 넘긴 1938년 1월에야 현실화됐다.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해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됐다.
▲ 선만이민훈련소 설립과 운영 관련 매일신보 보도기사 두편 오른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설치 계획을 처음 보도한 기사(1937. 2. 19)이고, 왼쪽 기사는 이민훈련소 1기 모집과 운영을 알리는 기사(1938. 1. 13)이다.
여기서 세포이민훈련소로 불리기도 한 선만이민훈련소의 교육 훈련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민훈련소는 단지 만주에서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와 자신은 물론 다른 조선인 농업 이민자들이 만주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을 지도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선만이민훈련소는 오히려 사상 무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제1기 입소생을 맞으면서 조선총독부가 선만척식(주)에 내린 네 개 항의 '경영요항'은 당시 <매일신보>에 <만주건국정신을 훈련 방침으로>(1938. 1. 13)에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 만주건국선언(滿洲建國宣言)의 취지의 부연강화(敷衍講話)
-. 민족협화(民族協和)의 관념 함양
-. 일만(日滿) 불가분 급 일덕일심(一德一心)의 정신 계배(啓培)
-. 선만일여(鮮滿一如)의 구현화
위 '경영요항'을 통해 일제가 이민훈련소에서 일제의 방침을 충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조선인 중견 청년을 양성하려고 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선만이민훈련소는 1940년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으로 승격되면서, 경영에 있어 일제의 통제가 더 강화됐다.
최재형 조부 최병규의 만주 이주와 선만이민훈련소
▲ 이민훈련소 제2회 수료생(1938. 7. 31) 40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출된 109명(혹은 105명)의 1기 수료자는 길림 지역으로 보내졌다. 2기는 1938년 3월 15일에 입소하여 7월 24일에 65명의 수료자를 배출했고, 3기생은 1938년 8월 5일에 150명이 입소하는 등 300명의 중견 청년 지도원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그럭저럭 실현되었다.
최재형 후보 부친 최영섭은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조부 최병규가 1938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갔다고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1938년 평강에 있던 선만이민훈련소에서 배출된 중견 청년 지도자들이 만주로 처음 출발한 년도와 동일하다.
기자는 지난 보도에서 1999년 춘천고 명예졸업 당시 언론에 보도됐던 "한국인 지원사업에 가담했다"(<강원일보>), "만주로 가 동포들의 정착 돕기 운동을 벌였다"(<중앙일보>)와 같은 최병규 인터뷰 내용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했었다. 최재형 후보 측에서 최병규가 쓴 <사려와 조화>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그의 만주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당사자 발언은 짧더라도 소중하다.
최병규가 생전에 남긴 '한국인 지원사업' 또는 '동포 정착 돕기 운동'은 독립운동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다. 반면, 일제에 호응해 선만이민훈련소에서 육성된 중견 청년 지도자들이 만주로 가서 이주 조선인들을 지도한 일을 포장했을 가능성은 더 힘을 얻게 된다.
물론 다른 가능성은 존재한다. 국방헌금 강요 등 계속되는 일제의 강요와 협박에, 더 이상 굴욕적인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결심한 최병규가 일제의 만주 이주 정책을 활용해 만주로 이주한 다음, 만주에서 비밀스럽게 독립운동을 벌였을 가능성이다. 만약 최재형 후보 측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의혹 제기에 반박하고자 한다면, 그 근거를 함께 제시하면 된다.
근거를 내놓으라는 기사는 최재형 캠프에서 항변하듯 윽박지르는 행위가 될 순 없다. 7년간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대한 독립의 희망을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실천을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면, 이를 독립운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최재형 후보 아버지 최영섭이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와 전달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기록해놨다. 이것 역시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쓴 것이 최영섭의 "착오"였다고 해명한 것과 똑같이 착오였다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자가 누차 강조했듯,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의 원문 전문을 공개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다.
[관련기사]
[단독 검증] 최재형의 할아버지 '최병규'는 진짜 독립유공자일까? http://omn.kr/1uoci
[반론] 최재형 후보 측 "조부가 독립유공자라 한 적 없다" http://omn.kr/1ur1v
[재반론] '독립유공자' 조부는 착오? 최재형 후보님, 이 기사는 뭡니까 http://omn.kr/1ur4c
[검증] 최재형 조부 생전에는 '만주독립운동' 언급 없었다 http://omn.kr/1ut22
[검증]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http://omn.kr/1u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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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최재형 일가 땅 몰수, 부친이 맞나 캠프가 맞나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 면해"... 아버지 최영섭은 "강제로 빼앗겨 알거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처한 최재형 대선 예비후보 캠프의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오마이뉴스>가 공개를 요구한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회고록 <사려와 조화>(1987년작)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공개한 건 원문 내용이 아니라 표지뿐이었다.
김종혁 본부장은 "유교집안에서 자란 자신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는지 사상적 편력을 말하면서, 동시에 일제시대 자신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록이 있다"면서 "왜 나(최병규)는 일본에 대해 적개심 갖게 됐는가. 최승현(최재형 증조부)이 장독대에 숨겨놓은 대한신문, 독립신문을 어떻게 읽게 됐는가. 왜 내가 동맹휴학을 하게 됐는가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라고 책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최재형 캠프는 <사려와 조화>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문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표지만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최재형 후보 일가를 향한 의구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마이뉴스>가 조부 회고록의 공개를 요구한 핵심 이유는, 최재형 증조부와 조부의 친일 행적을 밝혀보자는 게 아니다. 1938년 이후의 만주 행적을 조부 최병규가 어떻게 기록해놨는지 직접 확인해 이를 독립운동 이력으로, 독립운동가로 부를 수 있는지 검증해보자는 취지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는 최병규가 만주로 이주한 뒤의 행적에 대해선 이번에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후보 캠프는 현재 '최재형 후보가 직접 조부를 독립유공자라거나 독립운동가라고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가 운영하는 유튜브에 '최병규는 독립운동가'로 설명하는 영상이 링크돼 있었다는 점(17일 현재 해당 영상은 최재형TV 채널에 보이지 않는다),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이 최병규를 독립운동가라고 부르면서 지지 입장을 밝혔다는 점 등은 여전히 유권자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증은 여전히 필요하다.
[검증대상 ①]
최재형 캠프 "독립운동 인정받아 토지 몰수당하지 않았다"
최재형 아버지 "전답·임야를 공산당에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
김종혁 본부장은 13일 최재형 후보의 증조부 최승현과 조부 최병규의 독립운동 이력과 월남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부와 증조부는 해방된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지주계급이었음에도 (북한 공산당에게) 그동안의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토지를 몰수당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소련군이 체포를 하려고 하니까,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하게 됐다.
그러나 이는 만주에서 강원도 평강으로 돌아온 과정과, 해방 이후 월남 과정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해명이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180도 다른 설명이 담겼다.
필자(최영섭)의 집안에는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임야가 있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땀 흘려 모은 부동산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임야를 포함해서 약 200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낙엽송 약 40만 주를 심어 놓은 임야를 가지고 있었다. 대대손손 땀 흘려 일군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재형 캠프는 '북한 공산당에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토지몰수를 당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정작 최재형 후보의 부친은 "전답과 임야를 공산당에게 강제로 빼앗겨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됐다"고 기록했다.
최재형 캠프가 만주로 함께 이주했다가 돌아온 것으로 설명한 증조부 최승현은, 만주 여행 사실은 있을지언정 만주로 함께 이주한 사실은 없다. 만주로 이주한 이는 1938년에 만주로 먼저 간 조부 최병규와, 1940년 뒤따라 만주로 간 최병규의 부인, 그리고 최영섭·최응섭·최호섭 삼형제 등이다. 이들이 평강으로 돌아온 시점은 1944년 12월이었다. 최재형 캠프의 해명과 최영섭의 <바다를 품은 백두산>의 설명이 다르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는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되기 8개월 전에 왜 먼저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최영섭의 회고록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는 그 이유가 전혀 언급돼 있지 않다.
또한 '최병규가 반탁운동을 벌이다 소련군의 체포를 피해 일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는 최재형 캠프의 해명 역시, 부친 최영섭의 기록으로 반박 가능하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의 월남은 1947년 2월 일이다. 북한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졌던 때는 1945년 말과 1946년 초였다. 조부 최병규와 부친 최영섭이 북한에서 은밀하게 반탁활동을 지속하다가 발각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 중 하나인 최영섭의 회고록엔 그와 같은 언급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 이유도 전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의 행패와 압력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북한에 계속 있자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병규 독립유공자 표창' 등 <바다를 품은 백두산> 속 최영섭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게 쓰여진 점을 고려했을 때, 최영섭의 증언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병규 회고록엔 왜 '최병규와 그 가족이 해방 전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반탁운동으로 인한 체포 위협 때문에 월남했는지' 기술돼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한 해명을 후보자 캠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증대상 ②] 딱 최병규만 꼬집어 주거제한형?... 강경애-서정주 사례는 달랐다
▲ 왼쪽부터 소설가 강경애, 시인 서정주.
최재형 후보 조부 최병규의 '1926년 춘천고보 순종 서거 상장달기 운동'과 '자격미달 교무주임 배척 맹휴 조직으로 인한 퇴학'에 대한 최재형 캠프의 해명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여태까지 (이와 같은 활동이) 항일운동으로 인정된 사례가 없다"라고 밝혀, <오마이뉴스>의 보도와 궤를 함께했다. 이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역언론에서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라는 주장(12일)에 이어, 13일에도 이런 해명을 내놨다.
최병규는 퇴학당한 후 고향에서 3년 동안 일본경찰로부터 감시를 받았다. 총을 들고 만주에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독립운동이다 아니다를 평가하나. 일개 시민단체에 불과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고 하면 독립운동이 아닌 건가.
3년 주거제한형이나 금족령은 일본 당국이나 일본경찰이 취한 판결이나 조치일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 최재형 캠프는 지난 6일 "고문하라는 법이 없으니 고문이 자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면서, 요주의 인물에 대한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맞다. 고문하라는 법이 없어도 고문을 했던 게 사실이고, 사찰과 감시, 행동제약도 있었다.
결국 일본 당국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과 함께 강제로 고향으로 귀향시켜, 평강에서의 3년 거주제한, 일명 금족령을 내렸다. (최영섭 <바다를 품은 백두산> 중)
최영섭 대령이 쓴 '3년 거주제한'이나 '금족령'이란 표현은 매우 그럴듯 하지만, 실제 일제의 사찰·감시 양태와는 다르기 때문에 의혹이 제기되는 것이다. 독립유공으로 표창받은 일이 없음에도 표창 날짜까지 박아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기술한 것을 고려하면 더욱 미심쩍은 대목이다.
일제는 1920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마리아와 1927년 병보석으로 석방된 박헌영 같은 요주의 인물을 사찰하거나 감시하긴 했지만, 구속 경력이 없는 인사에 대해 3년이라는 기간을 미리 정해 행동반경을 고향으로 제한하는 것과 같은 감시나 사찰은 없었다.
훗날 <인간문제> <소금> 등의 소설을 통해 식민지 여성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물로 평가되는 강경애는, 1923년 학교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맞서 무려 한 달 간 맹휴를 조직하다, 학교 당국에 의해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했다. 그럼에도 이후 서울 동덕여학교로 편입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시인 서정주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서울 중앙고보에서 맹휴를 주도하다 퇴학당한 것은 물론, 구속까지 됐음에도, 1931년 전북 고창고보에 편입해 등교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유독 최병규에게만 일본당국이 3년간의 주거제한형이나 연금령 조치를 내렸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기자는 최영섭 회고록에 등장하는 조치는 일본당국이 내린 조치라기보다, 증조부 최승현이 조부 최병규에 내린 '근신조치'로 해석하는 게 더 설득력 있다는 지적을 했다.
최재형 캠프는 독립운동 인정 여부와 전혀 관계 없는 지역언론 보도를 독립운동 이력의 근거로 제시한 것도 모자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무슨 자격으로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최재형 캠프도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판단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역사연구기관·역사학자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관·집단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증대상 ③] 만주에서의 활동은?... "윽박이냐" 반문 말고는 정확한 설명이 없다
▲ 해림에서 애국기2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헌납했다는 매일신보 기사(1945. 3. 29) 해림가 부가장과 조선거류민단장이 당시 하는 일은 국방헌금이나 애국기 헌납금을 잘 걷는 일, 방공훈련에 주민들 잘 동원하는 일, 일제의 중국침략을 비롯한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창구역할을 잘하는 일 등이었다.
최재형 캠프는 13일 기자회견에서 조부 최병규의 1938년 이후 만주에서의 행적에 대해선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 <만선일보> 기사를 찾아낸 민족문제연구소의 최병규 만주 행적 추가공개를 '의미 없는 내용'이라고 반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최재형 후보의 조부가 해림가에서 조선인 거류민 대표자격으로 부촌장 맡은 건 친일파라서가 아니고, 평균적으로 볼 때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어서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면 만주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 부촌장 등은 모두 친일파인가. 그렇게 몰아가도 되나.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밝혀야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오마이뉴스>의 지적에 대해선 "일제에 저항해 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을 자랑스러워 한 누군가에게 독립운동 한 증거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1926년의 맹휴에 대해 백번 양보해 항일독립운동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병규가 '독립운동가'로 불리기 위한 독립운동의 전문성·지속성이 확인돼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1938년 이후 만주 독립운동 사실이 인정된다면, 심지어 1930년대의 국방헌금이나 면협의원 재임, 도회의원 출마 등의 친일 의혹마저 독립운동의 현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최병규에겐 숨기거나 회피할 일이 아니게 된다. '국방헌금 강요 등 일제의 압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아름다운 스토리(미담)를 더욱 맛깔나게 하는 양념을 버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재형 캠프는 조부 최병규가 만주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해선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최재형 후보의 부친 최영섭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대상황과 다른 기록을 남겼다는 점도 새삼 주목된다. 최영섭은 "만주 목단강에 위치한 해림에는 조선 땅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은 이미 일제가 군대를 동원해 장악한 지 오래여서, 어린 최영섭의 눈에도 쉽게 보일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로 붐비는 곳'은 아니었다. 당시 이곳은 독립운동가들로서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거나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비밀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엄혹한 지역이었다.
조부 최병규가 회고록 <사려와 조화>에서 1938년 이후 만주 해림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지, 그곳에서 어떤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해놨을지에 대한 확인 없이 검증을 멈출 순 없는 노릇이다.
김학규(hkkim21)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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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 '독립유공자' 조부는 착오? 최재형 후보님, 이 기사는 뭡니까 http://omn.kr/1ur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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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 최재형 조부가 만주에 간 그해 평강군에서 벌어진 일 http://omn.kr/1uu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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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조부 일제 국방헌금이 '생존형'?... <조선> 보도를 보면
[取중眞담] 증조부 최승현, 지역 중요인물로 소개... 집안 이익 위한 타협물 가능성
최재형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전 감사원장) 측이 최 예비후보의 조부 고 최병규씨가 일제 강점기 '국방헌금'을 납부한 이유를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반박하고 있다. 앞서 <오마이뉴스>가 당시 신문기사(<매일신보> 1938.6.30)를 근거로 "최병규가 아버지 회갑 축연비를 절약하여 일금 20원을 국방헌금에 헌납했다"고 검증한 데 대한 해명이자 반박이다.
최 예비후보의 '열린 캠프' 김종혁 언론미디어본부장은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당시 일제에 살았던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내면서라도 그렇게 포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협조하지 않으면 무자비한 보복이 들어왔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18일 최 예비후보 본인도 직접 기자회견에 나서 "민족문제연구소도 일제가 어떻게 조선민중들에게 국방헌납을 강요했는지에 대해서 그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면서 "그러면(국방헌금을 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어쩔 수 없이 국방헌금을 한 그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다 친일파라는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정말 최재형의 조부는 생존을 위해 '억지로' 국방헌금을 냈을까?
강제적 헌납? 자발적 헌납?
최 예비후보 측의 언급처럼 일제강점기 국방헌금은 자발성보다는 강제성이 컸다. 일제는 쌀이나 놋그릇, 생활 도구까지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했다. '국방헌납(헌금)'도 강요됐다. 헌납의 사전적 의미는 자발적 봉사나 희사이지만, 실제로는 떡판 돈 헌납한 행상인, 소나 돼지를 헌납한 농부, 산채나 물고기 판 돈 헌납, 폐품 판돈 헌납 등처럼 헌납을 가장한 수탈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에 아부하기 위해 국방헌금을 내기도 했다. 동의대 김인호의 학술논문 '침략전쟁 시기(1937~1945) 조선에서의 국방헌납 실태'는 "헌납은 자발이 아니라 총독부의 작품이었다"면서도 "대자본가의 경우 막대한 헌납은 막대한 수주를 의미했고, 조선인 지식인층에게는 당시 추진되던 조선의 자치와 제국의회 조선의원 파견, 징병제, 의무교육제 등의 현안과 연계해, 헌납을 통한 정치적 모색의 기회였다"고 평가했다.
정리하면, 국방헌금에도 있는 자들의 현실적 이익을 위한 자발적 헌납과 조선인 일반의 강제적 헌납이 있다.
그렇다면 최재형의 조부 최병규는 자발적 헌납에 가까울까, 강제적 헌납에 가까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산계급의 자발적 헌납 가능성이 커보인다.
먼저 최 후보 일가의 당시 지위다. 증조부 최승현은 1904년부터 1906년까지 평강 공립소학교 부교원, 1918년 3월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평강분국장, 1918년 3월부터는 최소 17년 이상 평강군 유진면장과 고삽면장 등을 지냈다. 강원도에서 관변단체인 유도천명회(儒道闡明會) 평강지회 지회장도 맡았다.
조부 최병규도 1935년(27세)에 유진면 면협의원을 맡았다. 최병규의 형 최병렬도 고삽면 면협의원에 당선됐다. 아버지 최승현은 유진면 면장, 형 최병렬은 고삽면 면협의원, 최병규는 유진면 면협의원을 맡은 유력 집안이었다.
당시 면장과 면협의원은 어떤 지위였을까? 일제는 조선의 전통적인 자치제도도 파괴했다. 1906년에는 종래 면민의 선거 또는 장로의 추천에 의한 면장 임용제도와 자치적인 면회(面會)를 폐지하고, 군수가 면장을 임명했다. 1930년에는 지방단체의 의결기관으로 도회, 부회, 교육부회, 읍회, 면협의회를 설치했다. 때문에 대다수 면장과 면협의원은 주로 면내 유력 동족 마을 대표자, 토지 재산과 사회 활동 능력을 갖춘 자, 당국의 신뢰를 받거나 사회적 인망이 있는 면내 유지급들이었다.
조선일보 '평강지역 각계 중요 인물'로 소개된 '최승현'
▲ 최재형의 증조부 최승현이 평강지역 중요 인물로 소개된 1934년 11월 2일 자 조선일보. 최승현을 "유학 군자로 칭하고 있고, 항상 자선사업으로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으며, 현재 유진 면장으로 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최씨 일가의 사회적 지위를 엿볼 수 있는 신문기사가 있다.
최병규가 국방헌금을 내기 4년 전인 1934년 11월 2일 자 <조선일보>에는, 그의 부친 최승현이 평강지역 '각계 중요 인물'로 소개된다. 이 기사에 실린 인물은 최승현을 포함 모두 15명인데, 평강사회 중진이자 민간제일의 유력자(평강진흥회장), 수십만 원의 재산이 있는 평강의 일류부호(진흥회서무부장), 곡물 무역상으로 평강제일, 평강 포목상 중 최대규모 등 인물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최승현은 "유학군자로 칭하고 있고, 항상 자선사업으로 이 지역에서 명망이 높으며, 현재 유진면장으로 있다"고 소개했다(원문: "유학군자의 칭이 있는 최씨는 항상 자선사업으로 명망이 일경에 놉흐니 현재 유진면장으로 있다"). 평소 자선사업으로 평강 지역 중요 인물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세를 얻은 것이다. 그런 유명 인물의 아들인 최병규의 국방헌금을 '생계형' 또는 '생존형'으로 부르기 어려운 이유다.
국방헌금 '미담 기사'까지
다음은 최병규의 국방헌금 방식이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각 신문에는 지역별로 국방헌금 액수와 명단이 실렸다. 시기별, 지역별 할당을 엿보게 하는 자료도 많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려 '국방헌납운동'을 전개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 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연일 '미담' 사례를 홍보했다. 자발적 헌납이 아니라 강제 공출이고, 총독부의 조직적인 정책적 강요에 의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를 참작하더라도, 지역 유지로 알려진 집안에서 '회갑 축연비를 알뜰히 쓰고 돈을 남겨 국방헌금에 헌납했다'는 '미담 중의 미담' 기사를 남긴 것은, 일제의 정책적 강요와 최병규 집안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 등의 현실적 타협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최 후보 측의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해서든 협력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선 민중의 애환"에, 최 후보의 조부와 증조부까지 포함시키는 게 과해 보이는 이유다.
심규상(dj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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