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1992년 대선, 그리고 남북회담 ‘훈령 조작’ 사건

道雨 2022. 1. 18. 11:52

1992년 대선, 그리고 남북회담 ‘훈령 조작’ 사건

 

이동복은 정원식 총리를 포함해 회담 대표단의 그 누구한테도 서울에서 새 훈령이 왔다는 사실을 회담이 사실상 끝났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고 뒷날 사건 조사에 관여한 김영삼 정부 초대 통일부총리 한완상은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적었다. 이동복은 회담을 깨려고 ‘가짜 훈령’ 조작도 모자라 ‘진짜 훈령’까지 묵살한 것이다.

 

* 1992년 9월15~18일 평양에서 열린 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전대미문의 ‘훈령 조작·묵살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은 서로 바라던 ‘이산가족 상봉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리인모 송환’의 맞교환 합의에 실패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사흘째인 1992년 9월17일 아침 7시15분, 평양의 회담 대표단에 서울발 ‘훈령’이 도착했다.

“리인모씨 건에 관하여 3개 조항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을 경우 협의하지 말 것”.

북쪽과 이틀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사실상 합의에 이르렀다고 느긋해하던 대표단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경한 훈령에 당혹스러워했다. 갑자기 태도를 바꿔 ‘무조건 3개항 관철’을 되뇔 궁색한 처지로 몰려서다. ‘훈령’은 회담 대표단의 언행과 협상 목표·전략을 구속하는 절대지침이다(대다수 남북 당국회담에선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전달된다). 화창하던 평양의 회담장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 강경한 서울발 훈령은 ‘가짜’였다. 남북 회담사에 전무후무한 ‘훈령 조작·묵살’ 사건의 시작이다.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8차 고위급회담 직전에 수석대표인 정원식 국무총리를 불러 “연말연시에 맞춰서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질 수 있게 하라”고 직접 지시한 터다. ‘이산가족 상봉 성사’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협상하라는 ‘대통령 훈령’이다.

대표단은 회담 전날인 9월14일 고위전략회의를 열어 회담전략을 다듬었다. 이 회의에서 이동복 회담 대표가 북쪽이 바라는 ‘리인모 송환’을 대가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 사업 실시 정례화,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운영, 1987년 1월 어로 중 납북된 동진27호 선원 12명 송환’ 등 3개항을 “협상기법상 조건”으로 내걸자고 제안했다.

정 총리가 주재한 이 회의에선 ‘리인모 송환 대 3개항’의 협상을 벌이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 성사를 전제로, ‘면회소’ 또는 ‘동진호’ 가운데 하나만 더 북쪽이 받아들이면 ‘리인모 송환’과 맞바꾸는 합의를 하기로 한 셈이다. “이산가족 상봉이 꼭 이뤄질 수 있게 하라”던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에 따른 전략이다.

 

그러던 대통령이 돌변해 ‘3개항 절대 고수’ 훈령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그런데 ‘리인모’는 누구인가?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지리산에서 붙잡혀, 두 차례에 걸쳐 34년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로, 김영삼 정부 첫해인 1993년 3월19일 가족 방문 목적의 ‘장기방북’ 형식으로 북쪽으로 돌아가, 89살이던 2007년 6월16일 숨졌다.

북쪽은 7차 고위급회담(1992년 5월5~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의 첫 선물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방문단을 상호 교환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는, “리인모 선생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자”고, 연형묵 총리 기조연설로 공개 거론했다. 사실상 ‘이산가족 상봉’과 ‘리인모 송환’을 맞바꾸자는 제안이다.

이에 노태우 대통령은 7차 회담 직후인 1992년 5월22일 “이인모의 송환을 전향적으로 조처할 것과 비전향 좌익수 175명 중 귀향 희망자를 모두 송환하는 문제도 전향적으로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그러므로 8차 고위급회담 이전에 남북 사이에 이미 ‘이산가족 상봉-리인모 송환’ 거래는 사실상 성사된 셈이고, 남쪽으로선 ‘리인모 송환’을 고리로 ‘면회소’ 또는 ‘동진호’ 문제에서 북쪽의 추가 양보를 타진해보기로 한 정도다.

사정이 이러하니 ‘3개항 절대 고수’는 너무도 생뚱맞은 훈령이 아닐 수 없다.

 

‘가짜 훈령’의 기획·실행자는 회담 대표인 ‘이동복’.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보인 이동복이 안기부 통신망으로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한테 “청훈(훈령 요청)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내용의 회신을 보내달라. 전문을 보고 난 후 파기하라”고 부탁했고, 엄삼탁은 이동복의 부탁대로 회신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정부 내부 논의나 대통령 보고·재가는 없었다.

이동복-엄삼탁이 조작한 ‘3개항 고수’ 가짜 훈령이 평양 회담 대표단에 도착한 시점까지, 정식 청훈의 수신인으로 지정된 이상연 안기부장, 최영철 통일원 장관,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누구도 평양에서 보고·청훈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애초 평양의 회담 대표단이 1992년 9월17일 0시30분에 서울로 발송한 ‘협상 중간 보고 겸 청훈’ 전문은, 이동복-엄삼탁의 ‘가짜 훈령’이 평양 회담 대표단에 도착하고도 한참 더 지난 9월17일 오후 2시께에야 안기부장→외교안보수석’ 라인으로 전화 통보됐고, 한시간 뒤인 오후 3시께 노태우 대통령한테 보고됐다.

엄삼탁 등 안기부 일부 세력이 안기부장도 따돌리고, 평양 대표단의 청훈 전문을 13시간30분 동안 깔아뭉갠 것이다.

 

대통령한테 청훈이 보고되고 한시간여 만인 그날 오후 4시15분, 평양 회담 대표단에 대통령 재가를 받은 ‘진짜 훈령’이 전달됐다.

“3가지 조건의 동시 관철이 바람직하나, 불가할 때는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또는 첫째와 셋째만 관철돼도 리인모씨 북송을 허용할 수 있음”.

요컨대 “이산가족 가족 방문단 사업 정례화”는 필수이고, 여기에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 설치와 상설 운영” 또는 “동진호 선원 12명 귀환” 가운데 하나만 더 북한테서 얻어내면 합의하라는 지침이다. 북이 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면회소 설치에 동의한 만큼, 추가 협상 없이 최종 타결해도 좋다는 훈령이다.

 

그런데 이 훈령을 전달받은 이동복은, 정원식 총리를 포함해 회담 대표단의 그 누구한테도 서울에서 새 훈령이 왔다는 사실을 회담이 사실상 끝났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고, 뒷날 사건 조사에 관여한 김영삼 정부 초대 통일부총리 한완상은 회고록 <한반도는 아프다>에 적었다.

이동복은 회담을 깨려고, ‘가짜 훈령’ 조작도 모자라 ‘진짜 훈령’까지 묵살한 것이다.

결국 남과 북은 서로 바라던 ‘이산가족 상봉과 판문점 면회소 설치’와 ‘리인모 송환’의 맞교환 합의에 실패했고, 탈냉전 초기 남북 공존의 로드맵을 짜던 남북고위급회담도 8차를 끝으로 더는 열리지 못했다.

 

노태우 정부는 8차 고위급회담 직후인 1992년 9월23일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안전가옥)에서 정원식 총리 주재로 고위급전략회의를 열고, 이후 정부 내부 조사를 거쳐 이동복의 ‘훈령 조작·묵살 사건’의 실체를 파악했다.

회담 대표인 임동원 통일원 차관의 ‘이산가족 문제 협상 경위와 내용’(1992년 9월23일), 최영철 통일원 장관의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청훈 관련 통일부총리 입장’(1992년 9월23일),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이 자체 조사를 거쳐, 노태우 대통령한테 보고한 비밀문건인 ‘훈령 조작·묵살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1992년 9월25일)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아무런 징계·처벌·발표 없이 묻혔다.

 

이듬해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생매장된 ‘훈령 조작 사건’을 폭로(1993년 11월12일 국회 외무통일위원회)했고, 이를 계기로 감사원이 감사를 벌였다. 이회창 감사원장은 그해 12월21일 ‘청훈 차단-훈령 조작-처리 지연-훈령 묵살’이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감사원의 공식 발표 뒤에도 형사 처벌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동복이 ‘안기부 특보’직을 잃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진실을 영원히 숨길 순 없다.

 

이동복 등의 ‘훈령 조작·묵살’이 명백히 사실임을,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두 차례나 확인하고, 사실상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은 건, 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12월18일)와 관련이 있다.

1992년 5월19일 민주자유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공동대표가 대선 후보로 공식 선출된 일을 계기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다수의 “충성선언이 이어졌고, 이때부터 노태우 정부에서 권력누수 현상(레임덕)이 일어났”으며 “국내정치가 남북대화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고, 임동원은 <피스메이커>와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뷰(<고위 관료들, ‘북핵위기’를 말하다>)를 통해 증언했다.

 

이동복 등이 전대미문의 ‘훈령 조작·묵살’을 감행한 배경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남북 화해협력 주창자인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김영삼 후보가 경쟁·승리하려면, 남과 북 사이에 ‘화해협력’이 아닌 ‘긴장·갈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대선 셈법’이 깔려 있었다.

어떤 이들한테는 한반도 8천만 시민·인민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보다 당장의 권력·이권이 중요하다. 분단의 지속, 남과 북의 갈등·대립을 기회로 여기는 ‘분단 정치 세력’의 어두운 민낯이다.

‘그들’의 숨소리는 아직도 멎지 않았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