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 이사부와 거칠부

道雨 2022. 1. 24. 17:38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 이사부와 거칠부

 

이사부(異斯夫)

 

이사부(異斯夫, 생몰년 미상) 또는 태종(苔宗)은 신라 지증왕 ~ 진흥왕 시대의 장군 · 정치가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다.

일본서기》에는 실제 이름 발음으로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로 소개되어 있다. 《삼국유사》이후에는 풍습에 따라 단성으로 박(朴)씨로 기록되었으며, 이름은 이종(伊宗)이라 나타난다.

박문영이 작곡·작사한 대한민국의 대중 가요인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과 〈독도는 우리 땅〉에 등장한다. 독도 인근의 해산 이사부해산에 그의 이름이 붙었으며 강원도 삼척시의 '이사부길',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의 '독도이사부길'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사부(異斯夫)
생애 : 미상
시대 : 신라 상고기(6세기)
가문 : 김씨(혹은 박씨)
다른 이름 : 이질부례지, 태종(苔宗), 이종(伊宗)
(관직) : 관등 : 이찬(伊湌), 상대등
          직책: 실직주군주, 하슬라주군주(何瑟羅州軍主), 병부령
주군 : 지증마립간  법흥왕  진흥왕

 

목차

 

이름

異斯夫, 苔宗은 실제로 '잇부/잇보'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사(斯)는 사이시옷으로 흔히 사용되던 글자다. 태(苔)는 이끼이며 잇기로 발음되므로 우리말 '잇'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종(宗)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인 '보/부' (울보, 먹보 등)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던 글자다. 질(叱) 역시 거의 항상 사이시옷을 표시하고자 사용되었다. 이종(伊宗)은 '잇보'에서 사이시옷이 약해져서 탈락된 형태이다.

 

생애

가계 배경

그의 가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사서간의 기록이 달라서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는 그가 내물왕의 4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의 성을 박(朴)씨로 기록하고 있다. 사서마다 성씨가 다르게 기록된 또 다른 인물로는 신라의 충신 제상(堤上)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박씨, 삼국유사는 김씨로 기록한다. 이것은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성씨를 중국식 단성으로 표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실제 성명은 한반도식으로 이질부례지간기이며 박씨가 아니였지만 단성 기록에 의해 박씨와 김씨같은 단성으로 바꾸어 기록되었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 신라왕의 성이 단성으로 기록된 것은 진평왕이 최초다.[1]

화랑세기에는 아버지가 아진종, 어머니가 보옥공주로 나와 있다. 보옥공주는 백제 개로왕의 딸이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숙명공주는 진흥왕과 후비가 되었으나 풍월주 이화랑과 사통하여 궁을 떠났다. 아들로는 원광법사와 보리를 낳았고 딸로는 화명과 옥명을 낳았다. 궁에 있을 때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정숙은 태자로 봉해졌다가 폐해졌다.

경주김씨 세보에 따르면 이사부는 자비 마립간의 아들이자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 하여 열전의 기록과 다르다.[2]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쓰는 시대에는 중국식 단성을 써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질부례지간기를 김씨로 후세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밀양이씨 족보는 이사부를 고시조로 삼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과 교류한 수창장군 이재도 성을 異로 쓰고 있다.

 

우산국 정벌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3],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4] 《삼국유사》에는 이사부(박이종)가 하슬라주 군주라는 지위를 우산국을 정벌한 공로로서 획득하게 된 것으로 적고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금관국 합병

《일본서기》에는 법흥왕 16년에 해당하는 계체천황(繼體天皇) 23년(529) 임나(任那) 4개 마을을 점령하는[5] 한편 탁순국(卓淳國)의 웅천(熊川)을 공격해 가락국의 부흥을 지원하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의 왜병을 패퇴시키고, 법흥왕(法興王) 18년(531)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격파하여 이듬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신라에 합병시켰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왕(脫解王) 시대의 인물로서 당시 신라와 이웃해 있던 우시산국(于尸山国)과 거칠산국(居柒山国)을 정벌한 거도(居道)라는 인물의 열전이 실려 있는데, 많은 말을 모아놓고 병사들에게 말 위에서 하는 마상재를 매년 열어서 두 소국 사람들 앞에서 늘 보였고, 두 나라 사람들이 마상재를 보며 어느 순간 방심하면서 신라군을 방비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두 나라를 급습해 멸망시켰다고 적고 있다. 이사부 열전은 지증왕(500~514) 때에 변경 관리가 된 이사부가 거도의 계략을 써서 가야를 멸망시켰다고 전한다.[6]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했다.[7]

 

고구려와의 전쟁

 

진흥왕이 즉위한 이듬해(541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신라의 국정을 총괄하였다. 545년에는 왕에게 국사 편찬을 건의하였으며, 550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국경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놓고 서로 싸워서 지친 틈을 타서 출진하여 두 성을 모두 빼앗고, 성을 증축해 갑사 1천여 명을 배치하였으며 이때 고구려의 탈환 기도를 물리쳤다. 또한 단양 신라 적성비에 따르면 이사부는 이 때를 전후하여 파진찬(波珍飡) 두미(豆彌), 아찬(阿飡) 비차부(比次夫) · 김무력(金武力)과 함께 한강 상류 일대를 신라 영토에 편입시켰다.

미진부, 비조부와 함께 신라 상대 마지막을 풍미한 3대 명장으로 손꼽을 수 있다.

 

가야 정벌

진흥왕 23년(562) 9월 반란을 일으킨 가야에 사다함(斯多含)의 활약으로 가야가 멸망하였다.[8]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논란

 

지증왕(500~514) 때 이미 멸망한 가야가 진흥왕 23년(562) 때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지증왕 때에 가야가 멸망했다면 흔히 가야라 부르는 금관국이 신라에 합병된 532년까지 존속했다는 것도 모순이다. 또한 이사부가 562년에 정벌한 가야는 532년 신라에 합병된 금관국이 아니라 대가야이다. 지증왕 당시 가야 연맹 가운데 일부만을 점령한 것이라 추정하는 의견[9]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사부가 가야를 정벌한 562년을 《일본서기》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 10국을 공격해서 멸망시킨 시기로 기록한다.[10] 멸망한 임나 10국은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인데 구체적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각주

  1.  《책부원귀(冊府元龜)》는 법흥왕의 이름을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기록한다. 《구당서》 권1 본기 제1 고조 7년(624), "봄 정월 기유(己酉)에 고려왕 고무(高武)를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백제왕 부여장(扶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봉하였다(七年春正月己酉 封高麗王高武爲遼東郡王 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 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
  2.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면 내물왕의 3세손이 된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6년(505), "봄 2월 왕이 친히 나라안의 주와 군,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六年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
  4.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로 조공하였다. 우산국은 명주(하슬라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험준한 지형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엄으로 오게 만들기는 어렵고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여럿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장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十三年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
  5.  《일본서기》 계체 23년(529), "이에 신라는 상신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이사부)로 바꾸어 보냈는데 (신라에서는 대신을 상신이라고 한다) (어떤 책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도 한다) 3천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毛野臣: 오미노 케누)이 병사 수천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웅천에서 나와 임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다다라 평야에 머물며 삼가 석 달을 기다려 칙을 듣고자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병졸들이 취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모야신의 종자 하내마사수어수(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어수는 다른 문에 들어가 숨어 걸식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멀리서 주먹을 날렸다. 걸식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을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보이려 하지 않고 칙지를 들으려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상신을 죽이고자 함이로다."라 하였다. 그리고 본 바를 낱낱이 상신에게 알렸다. 상신은 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 4개 마을을 약탈했다. 어떤 책은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 4개 마을이라 한다(由是 新羅 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 新羅以大臣爲上臣 一本云 伊叱夫禮知奈末 率衆三千 來請聽勅 毛野臣 遙見兵仗圍繞衆數千人 自熊川入任那己叱己利城 伊叱夫禮智干岐 次于多々羅原 不敬歸待三月 頻請聞勅 終不肯宣 伊叱夫禮智所將士卒等 於聚落乞食 相過毛野臣傔人河內馬飼首御狩 御狩 入隱他門 待乞者過 捲手遙擊 乞者見云 謹待三月 佇聞勅旨 尚不肯宣 惱聽勅使 乃知欺誑誅戮上臣矣 乃以所見 具述上臣 上臣抄掠四村 金官 背伐 安多 委陀 是爲四村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爲四村也)."
  6.  《삼국사기》 열전 제 4 이사부, "이사부는 태종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김씨고 내물왕 4세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시절 변경 관리가 되었는데 거도(居道)의 계략을 답습하여 마희(말馬놀이)로써 가야국을 속여 취하였다(異斯夫 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加耶國取之)."
  7.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법흥왕 19년(532),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 및 세 아들- 첫째 노종, 둘째 무덕, 막내 무력-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8.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토벌케 하고 사다함이 돕게 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인솔해 도착하니 일시에 항복하였다(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栴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
  9.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698
  10.  《일본서기》 흠명 23년(562),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요, 개별적으로는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飡國, 稔禮國으로 모두 열 나라이다(卄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合十國)."

 

 

거칠부(居柒夫)

 

거칠부(居柒夫, ? ~ ?) 또는 황종(荒宗)[주 1], 구지포례(久遲布禮)[2], 구례이사지우내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2], 거칠부지(居七夫智)[3], 거비부지(居朼夫智)[1] 진흥왕, 진지왕 시기에 활동하였던 신라의 승려, 장군, 재상이다.

居柒夫, 荒宗은 실제로 '겇부/겇보'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柒/七(일곱 칠)은 치읓, 荒(거칠 황)은 '겇'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겇'의 받침을 풀어 발음하면 '거치/거지/구지'가 된다. 朼(숫가락/수 비)는 사이시옷을 표시하고자 사용되었다. 구지포례(久遲布禮)를 줄여서 구례(久禮)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김거칠부(金居柒夫)

지위
대아찬(? ~ 545년 7월)
 
파진찬(545년 7월 ~ 576년)
 
이찬[1]
상대등(576년 ~ ?)
 
전임 : 김구해?
후임 : 노리부
이름
황종(荒宗), 구지포례(久遲布禮),
구례이사지우내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 거칠부지(居七夫智), 거비부지(居朼夫智)
신상정보
신라
부친 : 김물력(金勿力)
배우자 : 말보(末宝)
[자녀]
장녀
 : 윤옥(允玉)
차녀 : 윤궁(允宮)
장남 : 윤황(允荒)
기타 친척 :
김잉숙(할아버지)
김구리지(손자)
문노(사위)
종교 : 불교

 

생애

거칠부는 젊은 시절 승려가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다 고구려에 가 혜량의 강론을 듣고[4] 이후 신라로 돌아와 벼슬길에 올라 대아찬이 됐다.[5] 545년 7월(진흥왕 6년) 왕명을 받아 선비들과 함께 《국사》를 편찬하고 공을 인정받아 파진찬으로 승진했다.[6] 551년(진흥왕 12년) 백제와 연합하여 8명의 장군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았고[7] 고구려 승려 혜량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최초의 승통이 되게 했다.[8] 576년(진지왕 원년) 상대등으로 승진했고 78세로 죽었다.[9]

가족

  • 할아버지 : 김잉숙(金仍宿)
  • 아버지 : 김물력(金勿力)[10]
  • 아내 : 말보(末宝)[11]
    • 장녀 : 윤옥(允玉)[11]
    • 차녀 : 윤궁(允宮)[12]
    • 장남 : 윤황(允荒)[11]

 

각주

  1.  이동: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磨雲嶺新羅眞興王巡守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561년.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2.  이동:  〈신라왕과 백제왕을 소집하였으나 사신을 보냄. 신라가 4개 촌을 공략 (529년 4월)〉. 《日本書紀》 [일본서기]. 권17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 계체천황(繼體天皇). 720년.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3.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561년.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4.  김부식 (1145년).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법사의 강설을 듣다〉.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5.  김부식 (1145년). 〈신라로 돌아와 대아찬에 오르다〉.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6.  김부식 (1145년). 〈국사를 편찬하다 (545년)〉.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7.  김부식 (1145년). 〈고구려 10군을 점령하다 (551년)〉.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8.  김부식 (1145년). 〈신라 최초의 승통이 되다〉.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9.  김부식 (1145년). 〈상대등이 되다 (576년)〉.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10.  김부식 (1145년). 〈가계〉.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4권(卷第四十四) 열전(列傳)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11.  이동:   김대문, 박창화 필사. 〈말보〉. 《花郞世紀》 [화랑세기 필사본]. 2017년 8월 13일에 확인함.
  12.  김대문, 박창화 필사. 〈윤궁〉. 《花郞世紀》 [화랑세기 필사본]. 2017년 8월 13일에 확인함.

 

주해

  1.  불교 승려 법명 황종(荒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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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특집>-(18)이사부와 거칠부

신라인의 이름 변화에서 주목할 인물로는 법흥-진흥왕 무렵 신라 황금시대를 연 두 주인공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가 꼽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내물왕 4세손이며 거칠부는 5세손이다.

한데 이들의 이름이 아주 묘하게 느껴진다. 대단히 토속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 이름을 뜯어봐도 그렇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일명 태종(苔宗)이라 했고 거칠부(居柒夫)는 다른 이름이 황종(荒宗)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사=태(苔)' '거칠=황(荒)' 및 '부(夫)=종(宗)'의 대응관계를 추출할 수 있다. '이사'는 바위에 끼는 식물인 이끼이며 '거칠'은 지금도 고스란히 쓰이는 '거칠다'에서 온 것이다.

요컨대 '이사부'는 '이끼 사나이'고, 거칠부는 '거친 사나이'가 된다. 어떤 국어학자는 거칠부 같은 영웅에게 이런 '불경스런' 이름을 붙였을 리 없다면서 '거칠'은 '신령스럽다'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다.

김춘추, 김유신 및 법흥-진흥과 같은 훌륭한(?) 이름은 한자가 도입되고 유교와 불교가 본격 확산됨에 따라 태동한 것이며 그 이전에는 '이끼'라든가 '거칠다'와 같은 '불경스럽고' '토속적인' 말에서 이름을 따다 지었다.

이사부와 거칠부라는 이름은 그런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이사부와 거칠부가 전형적인 중국식 이름인 '태종'(苔宗)과 '황종'(荒宗)이라는 이름을 아울러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사례가 두 가지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통해 이사부와 거칠부가 활약하던 법흥-진흥왕 시대에 전통적인 신라식 이름과 중국식 이름이 뒤섞여 서로 충돌하며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두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흥-진흥 무렵을 지나면서 신라에서는 적어도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층만큼은 전형적인 불교식 혹은 유교식(중국식) 이름 일색으로 변모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법흥의 경우만 해도 뜻을 알 수 없으나 신라식 이름으로 판단되는 모진(募秦)이라는 다른 이름이 확인되고 있으며 진흥왕 또한 토종임이 확실한 심맥부(深麥夫)라는 또다른 이름이 있다. 그 이전 신라인의 이름을 보면 비록 뜻은 명확히 알기 어려우나 거의 예외없이 토속적인 냄새가 완연하다.

예컨대 법흥의 아버지인 지증왕은 「삼국사기」에는 본명이 지도로(智度路),지철로(智哲老) 따위로 나오는데 실제 1989년 4월에 발견된 경북 영일 냉수리비문(503년.지증왕 4년 건립)에는 지도로(至都盧)라고 등장하고 있다.

발음은 한 가지임이 분명한데 표기가 이처럼 다르다는 사실은 이 이름이 순전한 한문식이 아니라 신라식이라는 명확한 증거다.

죽은 이에게 후손이나 신하가 올린 이름을 시호(諡號)라고 하는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 특히 유교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왕에게 시호를 올린 것은 지증왕이 처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시호 도입은 신라식 이름짓기의 변화라는 단순한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사리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사회변화가 숨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신라가 불교식 왕국으로 변모하는 한편 다른 한 켠에서 유교화를 향해 대보(大步)를 내디뎠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이런 움직임은 시호 도입 이전 사용하던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과 같은 신라 고유의 우두머리 칭호를 버리고 '왕'(王)이라는 중국식 칭호를 채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요컨대 적어도 이름으로만 볼 때 신라의 중국화는 지증왕 무렵 준비 단계를 지나 법흥-진흥왕 때에는 불교와 결합해 착근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는 정착, 발전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식 이름이 중국화, 혹은 불교화돼 가다가 완결되는 모습은 순전한 중국식 이름인 김춘추와 김유신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이름짓기의 변모는 단순히 마립간이라 부르던 왕을 중국처럼 '왕'이라고 불렀다거나 지증왕 이후 중국식 시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 이름에도 중국 경전에서 따오기도 했고(김춘추), 법흥 이래 진덕까지 불교 용어를 빌리기도 했으며, 역사상 실재한 인물의 이름(김유신)을 빌리기도 했다.

작명법의 중국화는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변화를 불러온다. 돌림자 사용이 바로 그것이다.

신라인들이 중국 고전이나 다른 인물에서 따다가 이름을 짓기 시작했으며 이와 더불어 돌림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용수(龍樹)-용춘(龍春)이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데 또 하나의 결정적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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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 

 

 ◈ 신라의 숨어 있는 명장   이사부 장군 - 신라군의 기반을 닦다

 

관산성전투에 대해서 살펴보다가  새롭게 눈에 들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거칠부와 이사부였다. 이사부라고 하면 일반인들도  “어! 어디서 듣던 사람인데?  아 맞다. 신라장군 이사부”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다.   유행가 가사를 통해서  귀에 익숙하게 된 이사부 장군이 바로 그사람이다.     “지증왕 13년  임자없는 섬이라고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우리땅”이라는 노랫말 가사로 통해서 이사부장군은 현재의 우리와 소통하고 있다.

 

또한 거칠부도 마찬가지다.  그냥 거칠부라고 하면 몰라도, “거칠부의 국사” 로 우리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을 뿐이고,   그 이상은 시험에 안나오기 때문에  알지도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저  신라 진흥왕때  왕명으로  처음으로 그때까지의 신라역사를 기록하는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관산성 전투에 대한 역사추적을 통해서  이사부와 거칠부가  그렇게 큰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두인물이 도대체 어느정도이길레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굳이 설명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두 주역이  김춘추와 김유신장군이라면,   그보다 앞선  신라 진흥왕때   신라전성기를 연 두 주역이 바로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이다라고 비유하면 거의 딱 맞을 듯 싶다.  


거칠부의 국사를 편찬이라고 생각해서  거칠부가  조선시대 붓잡고 글만 쓰는 선비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거칠부는  삼국사기에서도  분명하게 김유신 장군 다음으로 그 비중을 높게 다룰만큼  열전편에  거칠부의 면모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특히 군사적 관점에서 볼때는   젊은 화랑 김유신이 닮고자 했던  모델이  거칠부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왜냐하면  김유신장군과 거칠부,이사부의 군사작전 스타일이 빼다 박았다고 해도 될만큼 닮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승리하는 지휘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보전을 통한 지략으로 승리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똑같다.  기만과 우회기동을 통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순식간에 적이 무너지게 하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습은 흡사 삼국지 제갈공명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관산성전투의 배후 지휘자  이사부장군과 거칠부 장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독도는 우리땅의 주역  이사부 장군

 

 q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 장군

 

독도는 우리땅의 주인공 신라 이사부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고  필자가 왜 이사부장군을 관산성 전투의 배후 지휘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그 역사과정을 추적해 보자.

삼국사기 권44 열전 4편에 보면 이사부편과 거칠부편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사부장군은 신라 지증왕때부터 진흥왕때까지 활약하였고  진흥왕 15년 백제와 일대 격전을 벌였던 관산성 전투당시엔 신라의 병부령으로서 총 지휘를 하였다.때독도는 우리땅 이사부장군을 살아있는 역사로소 우리 가슴에 품어 보자. 그럴려면 그 열전편에 기록된 아사부장군의 기록을 그대로 적어본다.

 

 <異斯夫 이사부>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 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 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 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 士(+一千) 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요,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지증왕)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년에 그는 하슬라주(지금의 삼척)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꾀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속임수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싸움배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위협하기를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를 시켜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이것이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자체는 그리 많지 않으나 군사적으로 볼땐 그 속에 엄청나게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유행가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이사부하면 울릉도인 우산국 병합이라는 것만을 기억할 텐데 사실은  진흥왕 11년때  고구려와 백제의 도살성과 금현성을 빼앗은 사실이 역사의 대변혁의 전주곡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 부분에 보면  이사부가 거도의 말놀이를 모방하여 가야를 속여서 빼앗았다고 나오는데 그 거도 이야기를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보충설명 tip 

* 거도(居道) 이야기 *
이 이야기는  초기신라때  가야 연맹국을 신라가 공격할 때  기만전술로서 싸워 이긴 거도에 대한 것으로써, 삼국사기 열전에 올라와 있다.  삼국사기의 열전 거도편엔 다음과 같이 올라와 있다.

  거도는 탈해이사금때 사람인데 그 성씨는 전해지지 않고 어디 사람인지도 모른다.
탈해 이사금때 벼슬이 간(干)에 이르렀는데  이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신라 국경에 이웃해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에 걱적꺼리가 되었다. 거도는 변방의 관리가 되어서 몰래 그 나라들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다. 매년 한찰PTlr 장토(張吐)의 들에서 말떼를 모아 군사들로 하여금 말놀이(馬戱)를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마숙(馬叔)이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신라가 늘 하는 행사라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군사와 마필을 일으켜 불의에 쳐서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중에서 가장 후진적이었고 약했던 신라가,  진흥왕때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상대로 동시에 성을 빼앗는데는 이사부장군의 역할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말놀이를 가장하여 적을 기만한다든가,  고구려 백제 양군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양국의 성을 빼앗는다는 단편적 기록만으로도,  이사부의 기회포착능력과  군사작전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배경엔  정보력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한데,  그 정보부분에서 거칠부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 했는데,  당시 거칠부는 이사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q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이사부장군의 모습

 

 w 지증왕6년(505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 삼국사기에서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부분이다. 실직이라 하면 지금의 삼척지역을 말하는데, 당시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요충지로서, 북방 말갈족이 동해안을 타고 신라로 침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에 대한 방어사령부였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고 할수 있다.

여기서 잠깐 실직주 사건을 알고 갈 필요가 있다.

451년 눌지왕때  하슬라성(지금의 강릉)의 성주인 삼직이  실직주벌판(현재의 삼척)에서 사냥을 즐기던 고구려 장수를 공격해서 죽인 사건인데,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 장수왕이 대노하였고,  신라 눌지왕은  고구려에게 사죄 사절을 파견하면서  수모를 겪었었다.

당시 실직주는 고구려의 신라 영토내 주둔지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광개토대왕시절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가 5만병력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왜를 물리치고 금관가야까지 정벌한 후, 일부는 그대로 신라영토내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과정에서  당연히 고구려군은 신라군보다 우위를 점하였을 것이고, 광개토대왕의 신라구원전쟁 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인 눌지왕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집권층내부에서 반고구려 정서가 싹트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 연장선에서  실직주 사건을 이해하면,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해 준 400년으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후 시점에서, 고구려와 신라간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엿볼 수 있다.

 

어떻든 이사건 때 신라의 눌지왕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고 굴욕을 감내했어야 했다.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에도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상하 관계를 설명하는 기록이 있다.

이 실직주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의 압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 고구려와는 전통적으로 적대관계였던 백제와는 가까워 지게 되었으니,  나제동맹 형성의 단초는 실직주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로도  고구려 장수왕은 수차례 실직주를 포함한 신라의 동해안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지만,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엔 실직주는 완전한 신라의 영토가 되었는데, 그 기록이 실직주에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다.  기록상으로는 임명이지만,  이사부가 실직의 고구려군을 패퇴시켰다고 보는 것이  보다 더 실체적 사실에 접근한다 하겠다.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임명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사부가 당시 동북아 최강인 고구려와 싸워 이겼음을 뜻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사부는 고구려군 생리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아는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두말 할 필요 없이 신라내에서 이사부의 군사적 지위는 확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w 지증왕13년(512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 이 기록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랫말의 모체이다. 지증왕 13년에 이사부가 울릉도인 우산국을 귀속시켰다는 내용인데, 이 기록을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한다면,  이사부는 지금의 울릉도까지 정벌 할 수 있는 해상력을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그 당시 울릉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용으로 볼때 이사부는 단순하게 힘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기만하는 지략으로 제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이사부가 해상력을 운용할 수 있기에 선박을 이용해서 동해안지역에 대한 군사적 기동이 용이할 수 있었고,  이런 능력은 군사작전에서  지상병력과 해상병력을 함께 이용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확대해석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런 능력이 이사부가 실직주 군주로 임명된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라 지증왕 다음왕이  법흥왕(法興王)인데, 재위기간 26년(514~540)동안 신라본기 법흥왕조엔 이사부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법흥왕 다음 왕인 진흥왕때 신라본기에 이사부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w 진흥왕 2년(541년) 봄 3월,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임명하고,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이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했다는 부분이다.  병부령은 법흥왕 4년(서기517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진흥왕 2년에 이사부는 병부령이 됨으로써 신라군의 총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사부가 실직의 군주로 임명된 것이 지증왕 6년인 서기 505년인데, 병부령으로 임명된 진흥왕 2년은 541년이다. 그렇다면 무려 3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때 이사부는 국가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갈랐던 관산성 전투는 진흥왕 15년인 서기 554년에 있었으니, 응당 병부령인 이사부가 총 지휘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된다. 

 

 

w 진흥왕 6년(545년)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들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고 나쁜 것을 만대 후손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를 책으로 편찬해놓지 않는다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왕이 깊이 동감하고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 이 기록이 고교시절 국사시간에  신라의 국사편찬 [거칠부의 국사]로 암기해야 했던  삼국사기의 바로 그 대목이다.  여기서 보듯이  이사부가 건의하고, 그 건의를 받아들여서 거칠부가 행하는 것이기에,  직위상  거칠부는 이사부 밑에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q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결정적 작전을 입안한 이사부 장군

 

w 진흥왕 11년(550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 신라와 백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는 단초가 된 기록이다. 금현성과 도살성은 현재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순 없지만  여러 정황상 보은의 삼년산성-옥천의 관산성-진천-이천-한강의 신주(이성산성,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중간의 어느지역으로 보여진다. 그만큼 금현성과 도살성은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인데, 이에 대한 작전도  병부령 이사부가 지휘했음을 알 수 있다.

 

진흥왕 14년인 서기 553년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어렵게 되찿았던 백제의 고토인 한강하류지역을 신라가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신라는 신주를 설치하고,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신주의 군주로 삼았으니, 백제는 공격의 방향을 고구려에서 급속하게 신라로 향하게 된다.  백제의 복수전인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 기록중엔 일본서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신라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일본서기 기록에 나온 내용은 삼국사기에선 신주의 군주 김무력군이 관산성전투에 합류하고 백제군을 물리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신라군의 일련의 군사작전의 총지휘자는 당연지사 병부령 이사부이다. 따라서 이사부는 휘하에 김무력과 거칠부를 거느리고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이었던 것이다.

 

q 화랑을 적극적으로 전투에 활용하기 시작한 이사부

 

w 진흥왕 23년(562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주민을 침탈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싸워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모반하였다. 왕은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고, 사다함으로 하여금 이사부를 돕게하였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흰 기를 세우자, 성 사람들 전체가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인솔하고 그 곳에 도착하니, 그들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로를 평가하는데, 사다함이 으뜸이었기에 왕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왕이 강력히 권하므로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이들을 풀어주어 양민을 만들고, 밭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 진흥왕 23년의 기록이 이사부가 나오는 마지막 기록이다. 특히 이 부분은  가야의 완전몰락을 그리고 있다. 가야는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가야국중엔 최강국인 김해의 금관가야가 몰락했고,  그 후 가야의 리더였던 대가야는 관산성 전투당시 백제편에 서서 신라에 맞서다가 패함으로써 치명타를 입게 된다.  그 관산성 전투이후 8년후인 진흥왕 23년엔,  이사부가 지휘하는 화랑 사다함의 활약으로 대가야는 완전히 신라에 무릅꿇게 된다.


실직군주로서 처음 임명받은 지증왕 6년때인  서기 505년부터 진흥왕 23년인 562년까지 무려 57년간을  일선에서 활약안 이사부는 신라를 군사적기반을 닦은 장군이었다.

 

이사부장군이 일선에서 활약하는 기간동안  굵직굵직한 군사적 사항을 요약해 보면

 

 * 강원도 강릉 삼척지방을 확실하게 신라영토로 확보
 * 병부령을 설치하여 군사지휘권의 일원화 확보
 * 한강하류 지역 확보
 * 관산성 전투에서의 신라군 총사령관으로서 신라 승리
 * 가야지역 신라 영토로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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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이름
김이사부 (金異斯夫, 《삼국사기》)
김태종 (金苔宗, 《삼국사기》)
이질부례 (伊叱夫禮, 《일본서기》) [2]
박이종 (朴伊宗, 《삼국유사》)
 (金) / 박 (朴)(?)
골품
관등
이찬 (伊飡)
생몰년
480년경 ~ 562년 이후
직위
실직주 (悉直州, 현 강원도 삼척시) 군주
아슬라주 (阿瑟羅州, 현 강원도 강릉시) 군주[3]
병부령 (兵部令, 국방장관)

 

1. 개요

신라 장군, 수군 제독, 진흥왕 재위기의 병부령(兵部令).[4]

신라 전반기 최고의 명장으로, 신라 지증왕에서 진흥왕 시기인 6세기 초중반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전성기 영토 확장을 이룩한 공신이다. 상대등 거칠부(居柒夫), 대각간 구진(仇珍) 등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공략하였으며 경상도 지역의 소국이었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한반도 중심을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동해로 진출하여 우산국을 합병함에 따라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해양 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일본  가야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특히 가야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로 이사부의 손에 가야군이 여러번 격파당했고 결국에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를 함락시키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2. 이름

 

異斯夫【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김씨이고, 내물왕의 4세손인데…

《삼국사기》 권44 열전(列傳) 중 제4 이사부(異斯夫)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중략)… 에 교(敎)하시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이사부(異斯夫)이다. 혹운(或云) 태종(苔宗)이라고 하여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한국어 신라어는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음(소리)과 훈(뜻)으로 쓰고 읽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으므로, 같은 고유어 이름을 하나는 음차, 하나는 훈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 따르면 '태(苔)'는 이끼를 뜻하므로, 고대에 이것을 음이 아니라 훈으로 읽었을 때는 대략 '잇/is/'으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宗)은 '부(夫, 남자)'에 대응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된다. 의미는 울보, 먹보와 같은 '이끼보'. 성이 김(金)씨이므로 본명은 '김잇부'라고 읽고, 쓸 때는 '김이사부' 또는 '김태종'이라고 한자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비슷한 예로 금천(소나)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伊叱夫禮), 정확히는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라는 긴 명칭으로 기록했다. 일본식 만요가나를 적용한 발음은 '이시부레치칸키(イシブレチカンキ)'다. 이를 분석해 보면 신라어와 가야어 어휘에서 지(智)는 존칭 '님'을 말하는 것이고 간기(干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이름은 '이질부례'가 되는 것이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상고한어에서 伊는 /*ʔij/ '이', 夫는 /*p(r)a/ '파/프라', 禮는 /*[r]ˤijʔ/ '리'로 발음되었으며, 고대 한반도에서의 한자 발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叱는 받침 /s/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伊叱夫禮의 발음을 굳이 복원한다면 /*ʔis.p(r)a.[r]ˤijʔ/ '잇파리'가 되겠다. 기본적으로 '이질부례(이시부레)'와 '이사부'는 음운의 유사성으로 보아 같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문제는 《삼국유사》이다. 여기서는 성을 박(朴)씨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름은 이종(伊宗)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품계, 직위, 행적이 같으므로, '박이종'이라는 사람이 '김이사부'와 동일인임은 확실하다. 이종(伊宗)의 '이(伊)'는 전형적인 /i/ 음차이고, 태종(苔宗)의 '태(苔)'는 '밸 태(台)'라고 쓸 경우 '나 이(台)'로 맞춰볼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결국 성씨를 전혀 다르게 썼기 때문에 이사부의 진짜 이름이 '김이사부'인지 '박이사부'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는 성씨를 제외하고 이름인 '이사부'만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李)씨의 존재 때문에 이사부의 성이 '이'고 이름이 '사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비슷한 사례로 이차돈이 있는데, 이차돈 역시 이름이 '이차돈'이고 성은 따로 있다. 둘 다 이씨가 아니다.

 

 

3. 생애


국내 기록에서 나타나는 이사부의 주요 활동 지역. 여기에 남아있는 금석문 일본 기록에 있는 몇몇 전공을 추가로 알 수 있다.

 

3.1. 탄생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부는 왕족의 피를 타고난 인물로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이사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가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증왕 역시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므로 상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경주 김씨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사부를 박씨가 아닌 김씨라고 썼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나친 음모론이다. 한때 삼국사기에 대한 음모론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 사서들과의 교차 검증 결과 삼국사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뢰성이 높은 사서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름이 다른 경우로는, 신라 충신의 대명사로 알려진 박제상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박씨라고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김씨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인물의 성씨가 서로 다르게 전해지는 것은, 일연이 참고한 고서의 내용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이사부가 정말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었다면 박씨였을 가능성은 더욱 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신라 왕족들이 서로를 김씨, 석씨, 박씨 등으로 구분했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야기된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5][6]

화랑세기 필사본에 따르면, 미실의 남편 김세종은 이사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종(노리부)은 이사부는커녕 김유신의 큰할아버지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똑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화랑세기 사본이 역사서가 아니라 개인의 창작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근거로 쓰이고 있다.

이사부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사부가 지증왕 때인 505년에 실직군주에 임명된 이래로, 법흥왕 진흥왕 시기를 걸쳐서 수십 년 동안 활동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적어도 20대 정도의 나이는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사부가 금수저 출신이라지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인 실직성은 고구려로부터 다시 수복[7]한지 얼마 안 된 땅이고, 신라에게 아주 민감한 최전방인데, 그런 곳의 군권을 통솔하는 지위 낙하산 인사로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어린애를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아무나 앉혔다기보다는, 최소한 청년의 나이에 나름대로 검증된 지휘 능력 재능이 있으니까 맡겼다고 봐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을 찾아보면, 사다함 열전에서 사다함이 15~16세일 때 전쟁에 참가하려 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 해서 왕이 허락하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 신라 시대에도 전장에 나설 만한 어린 나이의 기준은 최소한 20세 정도였을 테니, 이사부는 늦어도 대략 485년경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위와 같은 이유로 이사부가 소지 마립간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 마립간의 2번째 아내인 벽화부인은 날이군(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이고, 소지 마립간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어린 나이에 최전방에 배치된 것(모계로 소백산맥 일대의 호족 가문을 잇고 있기 때문)과, 소지 마립간 사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선혜부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사흔계가 지지하지 않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다만 벽화부인이 소지 마립간의 유복자가 될 아들을 임신한 시점이 최소 500년 9월인데[8], 이사부의 추정 생년과 괴리된다는 부분이 약점이다. 게다가 이사부가 벽화부인이 임신한 시점에서 5년 후에 실직성의 군주로 부임하는 것 역시, 이사부의 소지 마립간 아들 설을 반박하는 증거.

 

3.2. 최초 가야 일대 공격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지도로왕(智度路王) 때 변경 관리가 되어, 거도(居道)의 계략을 모방하여, 말놀이로써 가야(加耶)【혹은 가라(加羅)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

 

이사부의 행적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사건. 삼국사기 본기에는 나오지 않고 열전에서만 나오는 사건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이사부가 최전방 실직성(삼척시)의 책임자라는 중요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적어도 20세는 되어야 가능했을 테니, 그 이전의 일인 이것은 적어도 10대 후반~20대 초반경의 일이었을 것이다. 서술 순서상 여기에서 실적을 냈으니 다음에 더 중요한 자리로 보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사부가 모방했다는 거도는 신라 초기의 인물이다. 경주 주변 작은 나라들[9]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함부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간 주변 나라들 정찰에 걸려 방어를 굳힐 테니, 거도는 속임수를 썼다. 신라에는 매년 한 번씩 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노는 정기적 행사 마숙(馬叔)이라는 게 있었는데, 거도는 이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위장했고, 주변 나라들은 이번에도 마숙 행사라 착각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이 틈을 타 거도는 이 기병을 이용해 두 나라를 기습 공격해 멸하였다. 사실 이는 병법 삼십육계 중 승전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에 해당한다. 즉 병법의 기본. 중국에서는 삼국지 태사자가 이 책략을 사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빼앗은 가야가 어디인지 명확하진 않다. 현대에는 가야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실제로는 여러 작은 나라가 따로 있었던 게 가야기 때문이다. 단국대 전덕재 교수는 '이사부 가계와 정치적 위상'이라는 논문에서,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에 있었던 가야계 소국 다라국이라고 추정했다.

 

3.3. 우산국(울릉도) 복속

 * 자세한 내용은 신라-우산국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
 
 
동해  바다에 외따로 떨어진 울릉도가 최초로 한반도 왕조의 영역에 포함된 사건.[10] 단순한 무력 정복이 아니라 가짜 맹수를 이용한 책략을 사용해 항복시켰다는 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505년 2월에 지증왕은 신라에 주, 군, 현의 제도를 정하고, 실직주(悉直州,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지증왕은 이사부를 실직주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이사부가 역사 기록 속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 군주라는 직위의 명칭이 이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사부는 50여 년이 지난 562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이사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그가 평균 수명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대하게 계산해도 아직 새파란 젊은이의 나이로 한 지역의 군주직을 맡은 셈이다.

7년 뒤인 지증왕 13년(512)에 실직주 근처인 하슬라주(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 군주로 임명받았고, 우산국 정벌을 개시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귀환했다. 정벌 과정은 삼국시대의 양대 역사책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모두 실려 있다.
 
우산국(于山國)이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백 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다루기는 어려우니 계책으로 복종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바로 나무로 사자를 가득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말하였다.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13년(서기 512) 여름 6월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11]이다.】 동쪽 바다에 순풍이 불면 이틀만에 이를 수 있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 한다.】가 있었는데, 섬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다. 왕은 이찬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서 그들을 위협하여 말하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겠다.”
그러자 섬 오랑캐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아슬라주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지철로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나머지 내용에 큰 차이가 없는데, 하슬라 군주가 된 것이 우산국 정복 전이나 후냐는 순서 차이만 난다. 삼국사기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된 다음에 우산국을 정벌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우산국을 정벌한 상으로 이사부를 아슬라(하슬라)에 부임시켰다고 써 있다. 이 때문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출항한 곳이 어디냐를 놓고 강릉시 삼척시가 다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삼척시 출항설을 지지하는 편인데, 삼국사기 기록대로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가 먼저 됐다고 해도, 강릉에 가자마자 대규모 선단을 꾸리기는 어려웠을 거고, 실직 군주 시절부터 원정을 준비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삼척시에서 울릉도는 동쪽으로 쭉 가면 되기 때문에 항해 방향을 잡기도 쉬운 편이기 때문이다. 손승철 교수는 나중에 고려시대 조선시대 기록을 참고해 봐도, 동해 바다와 울릉도 관리는 삼척시가 제일 수월하고 최적의 출항지라고 주장했다.

우산국 정복에 사자 목상을 사용했다는 점 덕분에, 현재 강원도 삼척에는 '이사부 사자공원'이 있고, 지역 축제 때도 나무사자를 깎는 행사를 한다.

신라 사람이던 이사부가 먼 서역에 가서나 볼 수 있는 사자를 알았던 것은, 신라에 뒤늦게 들어온[12] 불교의 경전에 사자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사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전설 속의 동물로만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한반도에 사자의 존재가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져 영향을 끼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사부가 정복한 우산국은, 신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빠르게 신라 문화에 동화되었다. 1957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친 국립박물관 연구팀이 울릉도의 고분을 조사 발굴한 결과, 우산국에 존재하는 다수 고분이 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산국의 역사는 신라의 진출 이전에 시작되기는 했지만, 신라에 복속된 뒤 동해안 지방에서 문화가 유입된 뒤, 울릉도에 거대한 돌무지무덤을 축조할만큼 문화가 융성하고, 국가 형태로 존재할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신라 때부터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독도를 최초로 점령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실제로 이사부 관련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아예 이사부가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에 나무사자를 데려가서 협박하는 듯한 일러스트까지 나온다. 아마 '독도는 우리땅' 가사에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로 등장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인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독도 도로명주소로 '독도이사부길'이 있다.

하지만 이사부의 군대가 실제로 독도에 도달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또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등 중세 이전 사서에서 우산국의 어떤 부속 도서를 묘사한 내용도 찾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단, 지금도 날씨 맑은 날에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맨눈으로 잘 보이듯, 당시 우산국의 주민들이 울릉도 성인봉을 비롯해 울릉도 동쪽의 아무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면 육안으로 독도를 관측할 수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독도를 '우산국의 일부(영해)'로 간주하는 관점은 존재한다. 즉, 독도는 우산국의 주민들이 물리적으로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 거리 내에 있고, 어로 등 경제 활동을 실시하는 반경 내의 바위섬이었으며,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었으니 곧 한국의 전통적 영유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독도 관련 연구소 및 재단에서 근거를 채집하는 방향은 이 쪽이다. 무주지 논쟁 및 역사적 선점 사실에 대해 논쟁할 때,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기록은 결정적인 건 아니더라도 정황적 증거로는 충분히 인용할 수 있다.

 

3.4. 금관가야 공격

법흥왕 16년(529) 신라가 가야 방면 확장을 위해 지금의 김해시에 자리잡고 있던 금관가야를 압박하자, 신라가 가야를 모두 집어삼킬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인근 국가 아라가야는 왜국에 지원 요청을 했고, 오미노 케나노 오미(近江毛野臣)가 이끄는 왜군이 도착했는데, 이에 이사부는 3천의 군대를 이끌고 왜군을 먼저 쳐부순 뒤, 복귀하는 과정에서 금관가야 백성들을 대거 포로로 끌고 갔다.
 
이미 가야 안에서 주도권을 대가야에 내주고 쇠퇴하고 있던 금관가야였지만[13],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치명타를 입은 셈이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532년, 구형왕이 순순히 먼저 신라에 항복하겠다고 전하면서 멸망한다. 신라 초기부터 수백 년 동안 영남지방의 양대 라이벌이었던 금관가야가 이사부의 활약으로 멸망하고, 신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에 대해서는, 국내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사료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장수 이름에 대한 언급은 없고, 법흥왕이 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532년에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연도 차이도 있다.
금관가야 정복에 이사부가 큰 역할을 했다는 건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학계는 대체로 이 내용에 대해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14]

 

3.5. 병부령에 임명

진흥왕 2년(541년) 국방장관 격인 병부령(兵部令)에 취임해, 명실상부한 군부의 정점에 올랐다. 7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은, 성년인 18세(551년)가 될 때까지 약 11년간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을 받았다. 따라서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한 인물도 실질적으로 지소태후였다.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법흥왕대에는 법흥왕 본인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서인지 병부령이 공석인 때가 많았다. 법흥왕 사후 진흥왕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인 지소태후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명장 이사부를 병부령에 앉혀 국방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흥왕의 섭정 시기 동안 이사부는 군권을 바탕으로 국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녕 척경비에 '과인(진흥왕)이 어릴 때 왕위에 올라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고 기록된 것에도 이같은 상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조정에서 이사부의 권력이 너무나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544년 병부령을 2명으로 늘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사부는 여전히 중용되었으며, 도살성, 금현성 전투 등 진흥왕이 친정을 행사하기 전까지 국방에서 커다란 업적을 여럿 남긴다.

진흥왕 6년, 이사부는 왕에게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일을 건의했는데, 진흥왕은 거칠부에게 편찬을 명했고[15], 거칠부가 쓴 게 신라 최초의 정사(正史) 국사(國史)다.[16]

 

3.6. 진흥왕의 한반도 정복사업 시기

이 후로도 신라의 정복 전쟁 일선에서 계속 활약했는데, 진흥왕 11년(550) 백제와 고구려가 지금의 충청북도인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서로 치고받아 싸우다 지친 틈을 타, 이사부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두 나라 군대를 어부지리로 모두 쳐부수고 두 성을 차지했다. 이후 고구려가 병력을 보내 금현성을 쳤다가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자, 신라군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그대로 북진하여 남한강 상류 유역을 차지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신라가 영남을 넘어 남한강 유역에 영토를 걸치게 됐다.
 
이 때 세워진 단양 신라 적성비에도 이사부의 이름이 나와서, 고구려 영역이었던 단양 지역을 현지 주민 야이차의 도움과 희생으로 평정하는 데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듯 하다. 단양 적성비의 참전장수 명단에서 첫머리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원정군에서 서열이 가장 높았고,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을 기획하고 총지휘한 것이 이사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반도 중부 공략전 초반에는 이사부가 참여했지만, 정작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신라가 가장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는 데 성공한 551년의 거칠부를 비롯한 아홉 장군의 북한강 상류 정벌 ~ 한강 하류 차지 ~ 554년의 관산성 전투까지의 과정에서는 딱히 이사부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게 되고, 대신 거칠부 김세종, 김무력 같이 이전에 항복한 가야계 인물들이 대신 신라군의 주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 두고 젊은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한 후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실각시킨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상술한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이사부가 나제동맹 관계인 백제군까지 공격했는데, 곧 깨지기 직전이긴 했지만 아직은 동맹이 깨진 게 아니었으므로, 이사부가 책임을 지고 잠깐 물러났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사부는 10년 뒤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미 이때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17]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더이상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활발히 수행할만한 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단양 적성비의 내용을 고려할 때, 고령이었던 이사부는 새로 점령한 단양 ~ 충주 지역에 남아 신라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병부로 돌아가 왜구 등 후방의 침입을 대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이사부는 아래 단락에도 나오듯이 562년 대가야 정복 때 다시 등장하는데, 당시 대가야의 완전 정복은 어느정도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커다란 무력 충돌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령의 이사부가 직접 출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친정을 시작하자 마자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던 진흥왕의 성격상, 친정 시작되기 얼마 전에 있었던 독성산성 전투 및 도살성-금현성 전투에서도 소년 진흥왕의 의견이 개진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당연히 병부령 이사부와도 의견 조율이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 섭정기에 지소태후가 이사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면서도 끝까지 이사부를 신뢰했던 것을 보면 섭정기부터 진흥왕과 이사부 역시 신뢰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3.7. 가야멸망전 지휘

기록에 나오는 마지막 업적은 진흥왕 23년(562)에 있었던 대가야 정복이다.[18] 가야는 이미 앞서 금관국은 진작에 망했고, 안라회의의 결렬, 독성산성 전투 등으로 안라국도 크게 약화되면서, 반파국(대가야)만이 마지막 구심점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의 후방에 걸림돌이 될 세력(백제, 가야, 일본)을 관산성 전투에서 모조리 정리한 뒤인 562년에, 진흥왕의 명에 따라 병부령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어 대가야로 진격했고, 부장으로는 유명한 화랑 사다함이 참전했으며, 반파국 도설지왕의 항복을 받고, 반파국을 도우러 왔던 왜군도 격파하고 왜장들을 포로로 잡아 모욕하는 등, 반파국 정복은 성공리에 끝나고, 가야는 마침내 완전히 멸망해 전역이 신라 땅이 되었다. 이 때 이사부의 나이는 대충 잡아도 70대였다.

 

3.8. 말년[

대가야 정벌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죽고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 또한 없다. 이를 가지고 일각에서는 진흥왕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말년 실각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위 내용과 같이 적어도 3대 왕을 섬기면서 평생에 걸쳐 업적이 상당히 많은데도, 김유신 등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도 기록이 너무 부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사례가 이례적인 경우일 뿐, 신라 전기 인물 가운데 임금과 직계 왕족이 아닌 인물의 생몰에 대해 소상히 기록된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이사부의 만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김유신의 경우 업적상 이사부와 비견될 만한 명장이지만, 그에 앞서 신라 중대 무열왕계 왕들의 외척이 되는 김해 김씨 집안의 웃어른이었던데다, 이후 김유신의 후손들이 잠시 역적으로 몰려 가문이 몰락했다가 9년만에 재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후손들은 가야계 김씨의 전성기였던 김유신에 대한 자세한 행적을 기록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김유신행록이고,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관련 기록 분량이 많은 것도 김유신행록을 참고했기 때문이다. 즉 김유신 기록이 많은 것은 많이 기록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기록 및 후대의 대우에 있어서 이사부와 김유신에 대해 같은 기준과 관점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이사부 관련 기록이 줄어드는 시점부터 슬슬 금관국 왕족 계통 김무력, 김서현 등의 활동이 대폭 잦아지기도 하는데,[19] 진흥왕이 이사부를 견제하기 위해 신흥세력인 가야계를 등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젊은 진흥왕이 자신의 수족으로 젊은 세력을 키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사부 역시 진흥왕대의 최대 군사적 사건 중 하나인 대가야 토벌에 기용되었다는 점에서, 진흥왕은 만년의 이사부 역시 노장으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세워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사부의 나이는 70대로 추정되며, 이미 진작에 은퇴하거나 2선으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나이였다.

따라서 만년에 원로 대신으로서 평안한게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4. 평가

 

신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한 명으로, '정복전쟁의 영웅'이라는 점에서, 왕과 신하라는 차이만 빼면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라 할만하다. 신라의 전성기를 활짝 열어 젖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는데 앞장선 장군으로, 백제 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신라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김유신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장군도 이사부 위에 놓일 수 없다.

활동 기간이 굉장히 긴데, 서기 500년 초에서 560년대까지 활약하고 있으니, 최소 50~6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620년대에서 660년대 후반까지 40여년 간 활약했던 김유신보다도 훨씬 더 긴 활동연도를 자랑한다.

신라 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이사부만큼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전공을 올린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각주

 

[1] 상상도이지만 우수한 복식 고증을 자랑하는 공식 영정 중 하나로, 삼국시대에 널리 쓰이던 목가리개가 달린 찰갑의 형태와 환두대도의 모습을 잘 구현하였다. 당장 광개토대왕 항목에 실린 영정을 봐도 고증이 영 아니다.[2] 삼국시대 당시에는 ㅅ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질(叱)을 썼기 때문에 실제 음가는 '잇부리' 정도가 되겠다. 신라어를 음차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당대에 가까운 발음일 수도 있다.[3] 여담으로 몇몇 환빠들은 아슬라주를 알래스카와 동일시해 신라가 알래스카까지 뻗어있었다(...)고도 한다.[4] 병부의 재상. 현대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5]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는 신라에서 국초부터 박씨, 석씨, 김씨 등의 3가지 성씨와 그외의 여섯 가지 성씨가 사용되었다고 전하지만 정작 신라의 금석문이나 중국, 일본 등의 기록을 교차 검증해 보면 신라인들이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한 시기는 빨라도 진평왕 이후이다. 이전의 법흥왕 같은 경우에 아예 중국 쪽에서는 "모즉"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을 뿐이었는데 진평왕 대에 이르러서야 신라의 왕들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김씨를 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6] 김부식이 삼국 중 가장 늦은 신라의 역사를 고무줄처럼 늘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애당초 김부식이 참고한 자료는 고려 건국 이전에 신라인들의 손에 의해 한 번 필터링을 거친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 김부식은 다만 전해지는 문헌을 충실히 옮겼을 수도 있고 이는 일연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김부식은 엄연히 따져서 삼국사기 편찬의 총책임자였지, 혼자서 모든 부분을 일일히 집필하거나 편찬하지는 않았다는 점 또한 명심할 필요가 있다.[7] 삼척 지역은 내물 마립간 때 점령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다가 재수복한 지역이다.[8] 애초에 처녀 벽화 설화가 기록된 부분이 삼국사기 소지 마립간 22년조, 즉 500년의 기록이다.[9] 우시산국 거칠산국. 지금의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10] 울릉도에 대한 언급 자체는 더 이전의 중국 기록에서도 간략하게 등장한다.[11] 강릉시 일대.[12] 지증왕 당시니까 아직 국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지 마립간의 '사금갑'을 비롯해 불교 자체는 법흥왕 이전에도 알려지고 신라 사회에 스며들고는 있었다.[13] 금관가야는 삼국시대 초반에 낙동강 물길을 이용한 교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는데, 5세기엔 신라가 커지면서 낙동강 동쪽이 전부 신라 땅이 되었으므로 마음대로 지리적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14]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정설로 따르는 현행 한국사 교과서나 시험 등에서는 장수인 이사부가 아니라 왕인 법흥왕으로 되어있다. 후술되는 대가야 정벌에 대해서는 장수인 이사부와 화랑 사다함이 쓰여있는 것과 대조된다.[15] 거칠부는 한문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승려 경력이 있고 소싯적에 신라와 고구려 등 이곳저곳을 유람하며 많은 문사들과 인맥을 쌓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서 편찬에는 이사부 본인이나 다른 자들보다 적임자였다.[16] 다만 이 책의 제목이 정말로 "국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논란은 백제에서 근초고왕 때에 박사 고흥이 지었다는 "서기"에도 적용된다. 원문에는 단순히 "국사를 짓도록 하였다", 즉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는 식으로 풀이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연이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인용했다고 전하는 "국사(國史)"라는 문헌 또한 실상은 "구삼국사"나 "삼국사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므로,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지었다는 "국사"와는 별개의 책일 가능성이 높다.[17] 활동년도를 감안했을 때 실직 군주에 임명될 때 20세였다고 쳐도 금현성, 도살성 전투 때는 이미 환갑도 넘은 65세다.[18] 대가야 정복 1년 전인 561년에 새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하필 최고위 직책을 보유한 인물 리스트가 써 있던 부분이 마멸이 심해 읽을 수 없는데, 여기에 이사부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9] 그리고 금관가야뿐 아니라, 단양 적성비 창녕 척경비 내용을 참고하면 대가야 계통 인물인 도설지도 진흥왕이 측근으로 가까이 했던 정황도 나타난다.[20] 때문에 초창기에 유독 노리부와 화백회의가 계속해서 미실을 황후로 올리려고 했던 까닭이 설명된다. 하지만 결국 문노가 납치되었다가 강 속에 던져진 마야부인을 살린 뒤 무사 귀환하면서 다 어그러져 버렸고 황후의 꿈이 날아간 미실은 결국 그 꿈을 포기하고 대소 귀족들을 규합해 자신의 파벌을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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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

 

신라 제3대 상대등
居七夫 | 거칠부
출생
(음력)
사망
(음력)
579년 (향년 78세)
재임기간
(음력)
제3대 상대등
576년 ~ 미상

 

1. 개요

 
 

2. 생애

거칠부지(居七夫智), 김황종(金荒宗)이라고도 하는데, 동시대 인물인 이사부의 예처럼, 다른 이름 황종의 황(荒)은 당시에나 현대 한국어에서나 거칠다는 의미고, 종(宗)은 부(남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거칠부의 '거칠'은 고대 한국어를 한자의 의미에 관계없이 음이 같은 한자들로 쓴 것이다.[1]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칠부라는 이름의 의미는 울보, 먹보를 잇는 거칠보.[2] 
일본 기록에서는 구지포례(久遲布禮) 혹은 구례이사지우내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3]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물 마립간의 5세손으로, 조부는 각간 잉숙(仍宿),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4] 이를 통해 거칠부의 가계는 당시 신라 왕실의 핵심적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물력은 524년(법흥왕 11)에 세워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탁물력지일길간지(啄勿力智一吉干支)'로 나오는 물력지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물력은 울진봉평신라비 외에 다른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조부인 잉숙의 이름은 다른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데, 486년(소지왕 8) 2월 이벌찬에 오른 내숙(乃宿)이 잉숙일 것이라고 흔히 추정하며, 잉(仍)과 내(乃)가 비슷한 모양의 한자이기 때문이다. 내숙과 잉숙이 동일 인물이라면 <삼국사기>에서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이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거칠부의 가계에 대해서도 더 추적해 볼 여지가 생겨난다. 조부가 내숙이라면 증조부는 미사흔이 된다. 그리고 미사흔계는 지증왕 즉위 이전까지 왕비를 대대로 배출한 왕비족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왕가에서도 꽤나 중요한 집안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증왕 즉위로 미사흔계의 왕비 배출은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이후에는 왕실의 인척으로 내려 앉으며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뭐가 되든 눌지 마립간의 직계가 소지 마립간으로 끝난 상황에서, 왕위를 계승 중인 복호계를 제외한 내물계의 나머지 직계인 미사흔계의 직계 자손인 거칠부도 왕실의 주요 일원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해보인다.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설을 따를 경우, 선혜(善兮)라는 이름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초기 고유 신라식이 아니라 불교적인 이름이다. 거칠부는 본인뿐 아니라 집안 전체가 불교에 호의적이고, 신라에 수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고[5] 젊을 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정확히 언제 출가하고 떠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45년 국사 편찬 책임자가 됐을 때 이미 관등이 대아찬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 때 기준으로도 상당히 오래 전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천하를 유람하다, 신라 국내뿐만 아니라 문득 고구려의 강약을 엿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고구려에서 지냈던 적도 있다. 고구려에서 지내던 시절 승려 혜량의 강연을 들었는데, 얼마 안되 혜량법사는 거칠부가 신라 귀족인 것을 눈치채고, 고구려에서 붙잡히기 전에 돌아가라고 조용히 전해 거칠부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환속하고 신라에서 일했다.

<일본서기> 기록상 529년에 구지포례(久遲布禮)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일반적으로 거칠부의 이름을 다른 한자로 음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특유의 윤색이 있어 해석이 조금 어렵지만, 대략 가야  기능말다간기[6] 백제와 신라를 두려워해 국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를 가야 땅에 불러왔고, 거칠부가 그에게 사신으로 갔다. 그러나 오미노 케누는 급이 낮은 자가 사신으로 왔다고 돌려보냈다. 이후 거칠부 대신 이사부가 3천 신라 군을 끌고 와서 오미노 케누를 쫓아냈다.

진흥왕 때 이사부의 제안으로 역사서인 <국사(國史)>[7]를 편찬했다. <삼국사기>에는 545년에 편찬된 것으로 나오나, <해동삼국사>에는 547년에 편찬[8]된 것으로 나온다.
거칠부는 어릴 때부터 승려였으므로, 외국에서 들여온 불경을 읽으려면 중국식 한문 해독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9], 당시 신라에서 손꼽히는 한문 능력을 익혔던 사람인데다, 신라와 고구려 이곳저곳을 유람하면서 각 지방의 명사들과 교류해, 학식, 경험, 인맥을 쌓은 인물이므로 이런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국사>는 거의 천 년이 지난 고려시대까지는 존재했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으며, 고려시대에 기존 사서를 집대성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550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단양 신라 적성비에, 거칠부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변태섭 교수는 비문의 3번째 줄 맨 위 부분의 이름 부분이 손상된 ▨▨夫智大阿干支(대아찬 ▨▨부)가 거칠부일 것으로 추측했다. 다만 주보돈 교수는 추정할 근거가 없다고 부정했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남부의 한강 유역 10군을 탈취하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때 참전한 아홉 장수[10] 중 한 명이었다.[11] 
진흥왕의 북진 정책에 따라 고구려를 칠 때, 과거 은혜를 입었던 고구려 승려 혜량을 만나자마자 거칠부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군례(軍禮)로 인사를 올리고, 신라로 데려와 진흥왕에게 직접 천거해 신라 불교의 승통으로 삼았다.
 
이후 창녕 척경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에서 진흥왕의 행차를 보좌한 인물 목록에서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가야와 함경도 지역 정복에도 참여하며 맹활약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가야 정복 완료 1년 전에 만들어진 창녕 척경비에서는, 갈문왕, 대일벌간 등 진흥왕을 호위하는 최고위 귀족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기재되어 있어, 실제 정복 전쟁에서 전투를 실제로 치르는 자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직책을 보유하였음이 드러난다.
 
주보돈 교수는 진흥왕 재위 후반부에 창설한 화랑 제도를 거칠부가 주도해 추진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거칠부 본인이 어릴 적 승려로 출가해 지식을 쌓거나 유명한 승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적국 고구려 땅까지 포함해 천하를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뒤, 조국으로 돌아와 인재로서 활약하는 생애 전반부 자체가, 훗날 화랑의 교육 과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마침 화랑 제도를 창설한 진흥왕 말년 시기에, 거칠부는 이사부의 뒤를 이어 최고위직에 앉아있었으므로, 충분히 임금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하고 추진할 수 있는 위치였기도 하다.

이렇게 신라 상고기 전성기의 영토 확장이 마무리되고, 진지왕의 치세가 시작된 말년에는 상대등에 올라 권세를 누렸고, 579년 78세에 사망했는데, 시대를 감안하면 상당히 장수했다.
진지왕이 불과 4년만에 정치를 돌보지 않아 폐위되었는데, 이 때 상대등이었던 거칠부가 폐위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12], 그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3. 평가

동시대에 활약한 이사부가 50년 이상 전장을 누빈 백전 노장이었다면, 거칠부는 상당히 다양한 경력을 보여준다. 주로 정치에서 활약한 재상급 인사였지만, 소시적에는 승려 경력도 있고, 역사서를 편찬한 문인이었으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영토 확장에도 한 몫했다. 또한 고구려를 엿보려고 고구려에서 눌러 살았었다는걸 보면, 일종의 스파이 경력도 있었던 셈. 그야말로 당시 신라의 만능인였던 인물이다.

 

각주

 

[1] ‘居柒夫或云荒宗’(삼국사기 권44), ‘東萊郡本居柒山郡’(삼국사기 권34)에서는 ‘荒, 萊’를 의미하는 단어가 ‘居柒(중세국어 : 거츨-)’이라 발음되었음을 볼 수 있다.

[2] 다만 <일본서기>의 표기를 최대한 살리면 구디부레로 관형격 어미인 ㄹ이 관찰되지 않는지라 거칠-보다는 겉(고어형: 겇)-이 당대 표기일 수도 있다. 사실 거칠다라는 것도 결국에는 겉(면이 두드러기처럼) 일다에서 파생된 표현이고. 이에 따르면 정확한 이름은 겉보.

[3] 이사지(爾師知)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이질(爾叱)과 같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가 아닐까 싶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보검에 새겨진 이사지왕(尒斯智王)의 이사지(尒斯智)도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尒는 爾의 이체자다. 현대어로 비슷하게 발음하면 굴-잇지-우-낫말.

[4] 일반적으로 잉숙은 내숙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므로 거칠부는 소지 마립간의 왕비 선혜부인의 조카가 된다. <삼국사기>에 소지 마립간의 왕비인 선혜부인을 내숙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기보갈문왕은 지증왕의 아버지이기도 했는데 만약 둘이 동일인이라면 지증왕은 거칠부의 백부가 되는 셈이나 그럴 가능성은 적다. 두 기록에 하자가 없다면 소지 마립간은 내숙의 딸 선혜부인과 기보갈문왕의 딸을 왕비로 맞은 것인데 당시만 해도 신라에서는 왕이 2명의 왕비를 두지 않았으므로 둘은 선후해서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5]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의 첫머리에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신라는 거칠부가 20대이던 527년 이차돈 순교로 불교를 공인하므로 거칠부는 불교 공인 이전에 승려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승려의 존재 자체는 이전 기록부터 나오므로 모순은 아니다. 불교는 이차돈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신라 정부의 공인이 527년에 된 것이다. 젊을 적부터 불교에 우호적인 인사였던 거칠부가 불교 수용에 적극적인 법흥왕과 처음부터 입장을 같이 했고 이후 진흥왕 시대까지 정치적 핵심으로 부상하는 배경으로 보는 설도 있다.

[6] 가야 전체의 왕이 아니라 가야의 여러 나라 중 한 나라의 왕으로 보고 있다.

[7] 보통 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8] 진흥왕 8년,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 ≪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9] 그래서 역사 시대 내내 특히 고대에는 승려는 지식인 계층으로 대우받았다.

[10] 대각간 구진,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ㆍ서력부(西力夫)ㆍ노부(奴夫),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11] 아직 나제동맹이 끊어지기 이전이었다.

[12] 진지왕 폐위를 주도한 국인(國人) 입장이었거나 진지왕 폐위에 따른 책임을 지고 상대등에서 물러났을 수도 있다.[13] 미실은 문노와 자신의 고종 사촌인 윤궁의 아버지이므로 미실에게 거칠부는 고모부이다.

[14] 미실의 표독스러움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의 폐위 이후 자식인 비담도 버리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고모부도 없애버린 것이다.

[15] 당연히 여기서도 무적의 소엽도가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