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葛文王)
* 허루(許婁)갈문왕 : 파사이사금의 장인.
* 마제(摩帝)갈문왕 : 지마이사금의 장인
* 일지(日知)갈문왕 : 일성 이사금의 외조부.
* 아도갈문왕 : 파사 이사금의 손자
* 내음(奈音)갈문왕 : 조분이사금의 장인(유례이사금의 외조부)
* 골정(骨正)갈문왕(=홀쟁갈문왕)=세신(世神)갈문왕 : 조분이사금과 첨해이사금의 아버지.
* 구도갈문왕 : 미추이사금의 아버지
* 파호갈문왕 : 내물 마립간의 차남(복호). 자비 마립간의 장인 중 한 명.
* 지도로(至都盧)갈문왕 : 지증왕. 왕(王)이라는 호칭 이전에 사탁부의 수장 자격으로 사용된 듯.
* 습보(習寶)갈문왕 : 지증왕의 아버지, 소지마립간의 장인
* 사부지(徙夫智/ 徙夫知)갈문왕 =입종(立宗)갈문왕 : 법흥왕의 동생(진흥왕의 아버지)
* 복승(福勝)갈문왕 : 진평왕의 장인(마야부인의 아버지)
* 백반(伯飯)갈문왕= 진정 갈문왕 : 진평왕의 동생(선덕여왕의 삼촌)
* 음(飮)갈문왕 : 선덕여왕의 남편
* 국반(國飯)갈문왕= 진안 갈문왕=국기안 갈문왕 : 진평왕의 동생(진덕여왕의 아버지)
* 만천갈문왕 : 국반 갈문왕의 장인(월명부인의 아버지).
* 충공(忠恭)갈문왕 : 희강왕의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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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 ]
갈문왕(葛文王)은 신라 때 왕실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왕족 및 왕의 근친 귀족에게 추봉하던 왕명이다.
갈문왕의 추봉 범위는 대개 진골 중에서도 왕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으로, 이들에게는 특별한 사회적 의의를 인정해 주었다(→신라의 관직).
이사금 시대에는 “갈문”이라고 표현하다가, 중국식의 “왕”이라는 호칭이 수용되면서 마립간 시대에는 “갈문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는 갈문왕이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갈문왕은 왕궁에 살았다. 왕궁에 살던 왕의 형제들이 갈문왕이 되었다. 마립간 시대에는 왕의 형제만이 아니라 먼 혈족도 갈문왕이 되었다.
갈문왕은 죽은 후에 추증되는 게 아니라, 살아있을 때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즉 왕의 아버지로서 왕이 되지 못했던 사람, 혹은 왕비의 아버지, 혹은 왕을 견제할 만한 권력을 지녔던 세력가, 왕의 동생이나 삼촌들에게 갈문왕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점차적으로 왕의 형제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왕의 형제들 이런 특정한 인물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조분 이사금의 아버지 골정(骨正), 첨해 이사금의 아버지 세신(世神), 지증 마립간의 아버지 습보(習寶), 진덕여왕의 아버지 국반(國飯) 등이 왕의 생부로서 갈문왕에 봉해졌으며, 일지(日知), 허루(許婁), 마제(摩帝), 지소례(支所禮), 내음(奈音), 이칠(伊柒), 복승(福勝) 등은 왕의 장인으로서 갈문왕에 봉해졌다. 또한 알천의 경우 김춘추에게 제위를 양보한 것으로 김춘추가 알천의 조부를 갈문왕에 봉한 기록이 있다.
또한 왕의 숙부로서 갈문왕에 봉해진 사례도 있다. 진평왕의 동생이자 선덕여왕의 삼촌인 백반(伯飯) 갈문왕과 국반(國飯) 갈문왕이 그들이다.
왕의 남편으로 갈문왕이 된 사례로는 선덕여왕의 남편 음갈문왕(飮葛文王)이 있다.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금석문 '영일냉수리신라비'[5] 에도 등장한다.
갈문왕이 초기에는 제2인자로서 실권을 가지고 왕의 위상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왕의 권력이 점차적으로 강화되어 나가면서 갈문왕의 위상은 약화되어서 나중에 가면 의식, 의례적인 칭호로 바뀌어 가게 된다. 통일 이후 무열왕 이후 왕권 전제화에 따라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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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위키 ]
1. 개요
15년(서기 148),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했다.【신라에서는 죽은 뒤에 봉하는 왕을 모두 갈문왕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상세하지 않다.】
十五年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皆稱葛文王, 其義未詳.】
2. 상세
《삼국사기》에 보이는 갈문왕은 왕의 생부의 경우, 골정(骨正:助賁王의 부) ·세신(世神:沾解王의 부) ·습보(習寶:智證王의 부) ·입종(立宗:眞興王의 부) ·국반(國飯:진덕여왕의 부) 등이 추봉되었고, 왕의 장인의 경우, 일지(日知) ·허루(許婁) ·마제(摩帝) ·지소례(支所禮) ·내음(奈音) ·이칠(伊柒) ·복승(福勝) 등이 추봉되었다.
울주 천전리 각석에 따르면, 갈문왕의 부인은 왕비라고 불렀는데, 같은 명문 안에서도 일반 귀족의 부인은 처(妻), 또는 부(婦)로 호칭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금석문에서 우리가 아는 신라국왕은 "대왕", "태왕", "매금왕" 등으로 미칭을 추가해 불렀기에 구분이 되었다.
신라 역사는 조선 역사만큼 대중적으로 읽히는 역사가 아닌데다가, 관련 기록이 조선보다 적어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지라, 조선의 대원군과는 달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단어였지만, 대왕의 꿈에서 진덕여왕의 아버지인 국반 갈문왕이 등장해 지상파를 타면서 널리 알려진 적이 있다. 갈문왕이 작위가 아니라 시호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
사실 대원군과 비슷한 직위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뿐, 구체적으로 뭘 위한 직위였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이에 대해선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 학자에 따라 갈문왕은 대왕(代王)·군장(君長)을 뜻할 것이라는 등 이설(異說)도 있다. '대왕' 즉 '대신하는 왕'이라고 해석하는 쪽에서는, '서로 번갈아들며 교차되다.'는 뜻의 갈마들다라는 순우리말이 있음을 근거로 삼는 듯하나, 해당 단어는 19세기부터 문헌상 확인되는 어형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해당 설이 사실이라면 '갊은 왕 → 갈문왕'의 음차라는 해석인 셈이다[1]. 혹은 중세 한국어 어형 ᄀᆞᇕ다(나란히 놓다)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2][3], 만약 갈문왕이 위 동사의 활용형을 쓴 'ᄀᆞᆯᄫᆞᆫ王'의 고형이었다고 가정한다면, 해당 어휘는 '공동국왕' 내지는 '왕에 버금가는 왕' 정도의 뜻이었을 수도 있으나,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 추측에 머무를 뿐이다.
503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비"에서는 "지도로 갈문왕"이란 명칭이 나오는데, 이 명칭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자는 지증왕이다. 하지만 503~4년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지증왕이 즉위한 지 4년이나 지난 다음이기 때문에, '대신하는 왕'의 뜻으로 갈문왕이라는 단어를 풀이한다면, 어째서 "국왕"이 "갈문왕" 작위를 쓰고 있는지 알 수 없어진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갈문왕 출신으로 즉위하면 왕위에 오르고도 몇 년 동안 그냥 갈문왕을 사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배경이 깔끔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문제.
갈문왕이 부왕(副王)으로서 존재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신라 6부 중 김씨 왕족의 근거 부족은 탁(喙)부와 사탁(沙喙)부였다. 그 중 실제 왕은 탁부에서 대대로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탁부는 김씨 왕족의 제2부족으로서 탁부 출신의 왕을 지지하는 부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갈문왕은 바로 이 사탁부의 수장으로서 왕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자 버금가는 위치였다는 추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에서도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에서 이미 즉위하였던 지증왕(500년에 즉위)이 사탁부의 지도로 갈문왕으로 등장한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학설로는, 탁부 매금왕이었던 소지 마립간의 후계로, 사촌이며 사탁부의 수장인 지증왕이 신라의 전체 통치권을 계승하고, 지증의 장남인 법흥왕이 탁부의 수장직을, 차남인 입종이 사탁부의 수장직을 이어받았으며, 지증왕은 탁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사탁부 갈문왕을 칭하다가, 탁부 쪽의 불만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이 공고화된 후에야 6부를 초월한 '신라 왕'을 칭했다는 학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지증왕이 최초로 마립간 대신 왕(王)을 칭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여기 연관시키기도 한다.
갈문왕 제도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중대 이후로는 오랫동안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국왕이 전제왕권을 가지게 되면서 사용이 중단된 듯하다. 허나 신라 하기로 갈수록 왕권이 약화 되면서 충공 갈문왕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상 마지막 갈문왕이다.
3. 역대 갈문왕
4. 대중매체에서 보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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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도 갈문왕이 여러 명이 더 보이지만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제외. 사용목적은 현재의 신라왕이 자신 시조의 사당이나 묫자리에서 이전에 죽은 사람을 더 높은 직위로 추존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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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가계(家系)의 장에게 준 칭호.
* 왕과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지배세력 내에서는 왕에 준하는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갈문왕이라는 칭호에는 ‘왕’자가 들어가고, 부인은 ‘비(妃)’라 칭해졌으며, 561년(진흥왕 22)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보이는 수가신명(隋駕臣名) 중에 갈문왕이 첫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 명문(銘文)에도 갈문왕이 자신의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고 있다.
갈문왕 자격요건은
첫째, 왕비의 아버지, 왕의 외할아버지, 왕의 아버지, 왕의 동생, 여왕의 남편 등, 왕과 일정한 혈연관계를 가진 인물들이다.
둘째는 박(朴)·석(昔)·김(金)과 같은 신라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혹은 그들 성씨집단의 분화가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단위로 부각되던 가계의 장의 지위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박씨왕 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석씨왕 시대에는 왕의 외할아버지나 왕의 아버지가, 김씨 왕위의 세습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왕의 동생이 주로 갈문왕이라 불렸다.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임의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책봉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주어졌다. 책봉은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한 것과 죽은 사람에 대한 추봉이 있었다. 대체로 신왕 즉위 초년에 행해졌으며, 그 때에 책봉 대상자에게는 갈문왕이라는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갈문왕의 소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 왕의 행차 때나 귀족 회합 때, 혹은 외국사신의 응대 및 접견 때에 왕을 배종 내지 배석해 상당한 발언권을 가졌을 것이다.
신라에서 갈문왕이 가지는 존재 의의는,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지배세력 내의 중요인물들이 갈문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왕권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신라 지배세력간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누가 갈문왕이 되었는가는 왕에게 대단히 중요해, 왕위 계승 방법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갈문왕의 의미도 달랐다.
첫째, 박씨왕 시대의 갈문왕은 주로 왕비의 아버지였는데, 이는 왕권의 지지기반이었던 왕비족에 대한 배려가 구체화된 것이다.
둘째, 석씨왕 시대에는 가계나 씨족이 달라지는 형제상속에 의해 왕위 계승이 이루어짐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가 갈문왕으로 추봉되거나,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이 되기도 했다.
이는 왕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집단 자체는 물론, 왕의 어머니족에 이르기까지 왕권의 지지기반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이후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방법이 확립되면서, 왕위 계승권자의 지위에서 밀려난 왕의 동생들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다.
이는 당시 왕의 동생이 성씨집단 내부의 분지화가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단위로서 주목되던 가계의 시조 내지는 장이 됨을 볼 때, 왕권의 지지기반으로서 일차적으로 김씨 내부의 가계들이 중요시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넷째, 중대에 오면서 왕권이 전제화되어 갈문왕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섯째, 하대가 되면서 비록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 단 한 명에 불과하지만, 다시 갈문왕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당시 진골귀족의 여러 가계간에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거듭되고, 왕권이 약화됨에 따라, 왕권의 지지기반을 재확인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하대의 갈문왕이 단 한 명에 불과했고, 중대 이후에는 왕의 아버지를 대왕으로 추봉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음을 보아, 갈문왕의 존재의의가 상고(上古)나 중고(中古)시대에 비해 그만큼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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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백과 ]
* 요약
왕은 아니지만 왕위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갈문왕이라는 호칭은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6부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정해졌는데, 국왕이 즉위한 뒤 책봉의 형식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 갈문왕의 존재 의의는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6부의 주요 지배세력들이 그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 있었다. 따라서 갈문왕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며, 시대적 상황과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그 뜻이 달랐다. 중대부터 왕권이 점차 전제화되면서 갈문왕의 존재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대에는 갈문왕의 존재가 단 1명만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만큼 존재 의의가 전시대보다 약해졌음을 뜻한다.
* 내용
왕은 아니지만 왕위에 버금가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갈문왕이라는 칭호에 '왕'자가 들어가고 부인을 비(妃)라고 부른 것과, 진흥왕 때 세워진 순수비 중 창녕비의 수가신명(왕을 따르는 신하의 명단) 순서에 갈문왕이 처음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나, 울산 천전리명문에 자신의 가신단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 1988년에 발견된 봉평비에서도 국왕인 매금왕 바로 다음에 기재된 점에서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갈문왕은 왕의 부친인 경우로서 구도(미추왕의 아버지), 세신(世神 : 첨해왕의 아버지), 습보(習寶 : 지증왕의 아버지), 입종(立宗 : 진흥왕의 아버지), 국반(진덕여왕의 아버지) 등이 있고, 왕의 장인인 경우에는 허루(파사비의 아버지), 내음(조분비의 아버지), 마제(摩帝 : 지마비의 아버지), 충공(희강비의 아버지) 등이 있다.
갈문왕이라는 호칭은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6부 내부의 정치적 역관계에 따라 정해졌는데, 국왕이 즉위한 뒤 책봉의 형식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 갈문왕의 존재 의의는,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6부의 주요 지배세력들이 그 정치적·사회적 위치를 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데 있었다. 따라서 갈문왕의 존재는 대단히 중요하며, 시대적 상황과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그 뜻이 달랐다.
첫째, 박씨 왕 때에는 왕권의 지지 기반인 왕비족에 대한 배려로, 갈문왕이 왕비의 아버지인 경우가 많았고, 둘째, 석씨 왕 때에는 가계나 씨족이 달라지는 형제상속에 의해 왕위가 계승됨에 따라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나 왕의 외할아버지가 갈문왕이 되었다. 이는 왕의 친가·외가에 이르기까지 왕권의 지지기반이 확대되었음을 말한다. 셋째, 눌지마립간부터는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 방법이 확립되면서 왕이 되지 못한 왕의 동생들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 김씨 내부의 가계를 중요시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대부터 왕권이 점차 전제화되면서 갈문왕의 존재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대에는 갈문왕의 존재가 단 1명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서 그만큼 존재 의의가 전시대보다 약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1989년 영일 냉수리신라비의 발견으로 지증왕이 국왕이 되기 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음이 확인되어 이전의 이해에 큰 의문이 제기된 상태이다.
* 개인의견 : 입종갈문왕(사부지갈문왕)은 아들인 진흥왕이 왕이 되기 이전에 이미 갈문왕으로 호칭이 되고 있는것으로 보아, (진흥)왕의 아버지가 아닌, (법흥)왕의 동생으로서 갈문왕이 된것으로 보인다.
천전리 각석의 명문(원명, 추명)은 법흥왕 때 새겨진 것인데, 이 명문에서 이미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과 동일 인물로 추정됨)으로 호칭이 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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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에 보이는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의 삶과 죽음
1. 기록에 보이는 사부지갈문왕의 행적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삼국유사》 왕력에 따르면, 갈문왕입종(葛文王立宗)은 법흥왕의 아우였으며, 또한 법흥왕의 딸인 김씨(金氏), 즉 지소부인(只召夫人)과 결혼하여 아들인 진흥왕을 낳았다. (굳이 말하자면 법흥왕에게는 아우이자 사위가 되는 셈이다.) 기존의 문헌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입종갈문왕의 행적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현대에 발굴된 신라 중고기의 금석문 자료들은 입종갈문왕의 보다 상세한 행적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입종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 徙夫知葛文王)"이라 칭해지고 있다.
새롭게 발굴된 기록에 등장하는 사부지 갈문왕은, 형인 법흥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영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과, 친족들과 다소 기괴한 로맨스를 즐겼다는 점으로 재조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기존 문헌과 신라 중고기의 금석문에 묘사된 사부지갈문왕의 행적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참고로 〈울주천전리각석〉의 해석은 주보돈 교수의 주장을 주로 참조하였다.
① 사부지갈문왕은 법흥왕(法興王)의 아우였으며,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只召夫人)과 결혼하여 진흥왕(眞興王)을 낳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 《삼국유사》 왕력
② 524년 1월 15일, 탁부(啄部)의 모즉지매금왕(牟即智寐錦王)(=법흥왕)과 사탁부(沙啄部)의 사부지갈문왕 등을 필두로 하는 조정 내 주요인사들이 거벌모라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에 대한 판결을 교시함. ―〈울진봉평리비〉
③ 525년 6월 18일, 사부지갈문왕이 사탁부의 가신들 및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과 함께 서석곡(書石谷)으로 놀러왔다가 글을 새김. ―〈울주천전리각석 원명〉
④ 537년, 사부지갈문왕이 사망함. ―〈울주천전리각석 추명〉
⑤ 539년 7월 3일,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지소부인) ·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夫乞支妃)(=보도부인) · 사부지왕자랑 심▨부지(深▨夫知)(=진흥왕) 등이 서석곡을 찾아와 사부지갈문왕을 추모하며 글을 새김. ―〈울주천전리각석 추명〉
〈울진봉평리비〉의 일부
2. 〈울진봉평리비〉 속의 사부지갈문왕
〈울진봉평리비〉(524)는 사부지갈문왕의 정치적 행보와 영향력을 묘사하고 있는 몇 되지 않는 기록 중 하나이다. 〈울진봉평리비〉는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조정의 주요인사들이 북변의 요충지인 거벌모라 일대에서 벌어진 실화(失火)로 인해 빚어진 소요에 대하여 현지 책임자들을 문책한 후, 그 판결문을 새겨놓은 비문이다.
당시 이 사건을 판결한 이들은 탁부의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 등을 필두로 하는 14명의 인사들로, 그중 대부분은 아마도 당시 신라 조정의 최고위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서 모즉지매금왕과 사부지갈문왕을 포함한 12명이 각기 탁부 · 사탁부 소속이었으며, 그 인원수의 비율도 각각 6명으로서 1:1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에 쓴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링크) 이를 통해 볼때에 당시에는 매금왕이 주관하는 탁부와 갈문왕이 주관하는 사탁부가 신라 6부 내에서도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울진봉평리비〉를 볼 때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문에 등장한 탁부와 사탁부의 인원들의 관등을 비교해 볼 때에, 사탁부 소속의 인원들이 태아간지(=대아찬)부터 일길간지(=일길찬)에 이르기까지 탁부 소속의 인물들보다 관등이 더 높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울진봉평리비〉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세워진 〈영일냉수리비〉(501)에서도 모종의 사건 해결을 지시한 인원 가운데 대부분이 탁부 · 사탁부 소속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사탁부 소속의 인원이 관등이 조금 더 높은 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일냉수리비〉가 세워질 당시에,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이 사탁부 소속의 갈문왕으로서 집권한 흔적으로 여겨진다. 본래 신라는 탁부의 매금왕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사탁부의 지도로갈문왕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신라를 통치하게 된 듯 하다. 그러나 이미 사탁부의 갈문왕이었던 지도로갈문왕은 탁부의 매금왕이 될 수 없었다. 지도로갈문왕은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이는대로, 탁부와 사탁부를 초월한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지도로갈문왕이 죽은 후에 그의 초월적인 신라국왕의 지위는 더 이어지지 못하였고, 그 대신에 그의 두 아들인 모즉지매금왕과 사부지갈문왕이 각기 탁부와 사탁부를 관장하게 된 듯 싶다. 이 시기의 금석문에서 사탁부 소속의 인원들이 탁부의 인원들보다 높은 관등으로 등장하는 것은, 지도로갈문왕이 사탁부 소속으로서 집권한 흔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사탁부가 탁부의 우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지도로갈문왕이 신라 6부를 초월한 국왕을 한번 칭했던 이상, 기존에 유지되었던 신라 6부의 질서, 즉 부체제는 해체 수순을 겪게 되었으며, 탁부와 사탁부도 매금왕을 보필하는 양대의 축으로서 통합과정을 겪게 된 것 같다.
(※이상의 논지는 윤진석 박사의 논문 〈신라 부체제의 특징〉을 주로 참조하였다. 전덕재 교수 등과 같이 탁부와 사탁부의 통합시기를 5세기 경까지 올려다 보는 견해도 있으나, 윤진석 박사는 6세기 경 지증왕의 집권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윤진석 박사의 견해에 좀 더 공감이 된다.)
이후 모즉지매금왕(=법흥왕)은 불교공인과 율령반포 등의 정책을 통해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고, 이후의 금석문인 〈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535)과 〈울주천전리각석 추명〉(539) 등에서는, 더이상 탁부의 매금왕이 아니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 등 신라 6부를 초월한 신라국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부지갈문왕은 이와 같은 격변기에 등장하여, 국왕과 버금가는 독특한 지위를 누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울주천전리각석의 풍경
〈울주천전리각석 원명〉의 모습
〈울주천전리각석 추명〉의 모습
3. 〈울주천전리각석〉 속의 사부지갈문왕
〈울진봉평리비〉(524)에서 사부지갈문왕이 누렸던 독특한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면, 〈울주천진리각석 원명〉(525)과 〈울주천전리각석 추명〉(539)에서는 그의 사생활에 대한 흥미로운 부분을 살펴볼 수 있다. (※〈울주천전리각석〉의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판독과 해석은 주보돈 교수의 저서 《금석문과 신라사》를 주로 참조하였다. 개인적으로 정리한 글이 있는데 링크로 소개한다.) (링크1) (링크2)
〈울주천전리각석 원명〉은 525년 6월 18일,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이 "사랑하는 누이(友妹)"였던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과 함께 야외로 놀라갔다가 새긴 것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오늘날 울주군 상봉면 천전리에 위치한 계곡에 놀러갔다가, 마침 글을 새기기에 알맞은 바위를 하나 발견하여 글을 새겼으며, 이후로 그 계곡의 이름을 서석곡(書石谷)이라 붙였다고 한다.
사부지갈문왕과 함께 서석곡에 놀라 갔다는 "어사추여랑"은 과연 누구였을까?
비문에서 그를 사부지갈문왕의 누이라 하였던 점을 보건데, 사부지갈문왕과는 친족관계였던 왕족 혈통의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의 호칭 뒤에 붙은 "王"이란 글자는 아마도 그 신분이 왕족임을 뜻하는 말이거나 혹은 존칭어의 일종인듯 하다.
또한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 자체로 인명(人名)이 아니라 "어사추의 따님" 정도의 표현일 것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한국 고대의 다른 금석문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데 〈광개토왕비문〉에서도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의 어머니를 "하백여랑(河伯女郎)", 즉 "하백의 따님"이라 하였으며, 〈울주천전리각석 추명〉에서도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심맥부지(=진흥왕)를 "사부지왕자랑(徙夫知王予郞)", 즉 "사부지왕의 아드님"이라 하였다. (※이 부분은 윤진석 박사의 주장을 주로 참조하였다.)
정황상으로 보건데,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아마도 친족이자 동시에 연인관계였던 것 같다. 사부지갈문왕이 행차를 시종하는 인물들을 제외하면 함께 놀러온 사람이 어사추여랑 뿐이었다는 점, 〈울주천전리각석 원명〉에서 굳이 어사추여랑에게만 "여덕광묘(麗德光妙)", 즉 "덕이 미려하고 광묘하다"라는 찬미의 표현이 붙어 있다는 점, 〈울주천전리각석 추명〉에서 어사추여랑이 죽은 후에도 사부지갈문왕이 그를 생각했다는 뉘앙스의 묘사가 있는 점 등의 정황이 이를 추측케한다.
〈울주천전리각석 추명〉은 539년 7월 3일, 어사추여랑과 사부지갈문왕 등이 모두 죽은 후에, 사부지갈문왕의 부인이었던 지몰시혜비(=지소부인) · 지몰시혜비의 어머니인 모즉지태왕비 부걸지비(=보도부인) · 사부지갈문왕의 아들 심맥부지(=진흥왕) 등이 사부지갈문왕이 거닐던 서석곡을 찾아와 그를 추모하며 새긴 글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어사추여랑은 서석곡에 들린지 8년이 지난 533년 경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사부지갈문왕 또한 537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보면 지몰시혜비는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인과 놀러다니던 곳에 찾아와 그를 추모한 격이 된다.
한편 울주천전리각석은 사부지갈문왕이 다녀와서 "서석곡"이라 이름붙인 이래로, 한동안 신라에서는 귀족들의 핫플레이스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 같다. 사부지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의 인증샷을 시작으로 해서, 이후 수백여년간 신라인들이 서석곡으로 놀러와서 자신의 이름 등을 적어두고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바위에 새긴 글씨의 흔적은 오늘날 까지도 남아 신라사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출처] 금석문에 보이는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의 삶과 죽음|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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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각석 을묘명
* 울주천전리각석 : 을묘명
* 연대 : 신라 법흥왕 22년(535)
乙卯年八月四日聖法興大王節」
道人比丘僧安及以沙彌」
僧首乃至居智伐村衆士」
▨人等見記」
을묘년(乙卯年)1 8월 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2 때[節]에, 도인(道人) 비구승(比丘僧)3 안급이(安及以)와 사미승(沙彌僧)4 수내지(首乃至)와 거지벌촌(居智伐村)의 중사▨인(衆士▨人)5 등이 (서석곡의 바위를) 보고 새기다.
- 신라 법흥왕 22년(535)으로 보인다.
- 신라 법흥왕을 말한다.
-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승려를 말한다.
- 출가하여 십계를 받았으나 아직 수행을 더 쌓아야 하는 소년 승려를 말한다.
- 중사(衆士)와 ▨인(▨人)는 거지벌촌의 거주민이지만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출처] 울주천전리각석 : 을묘명 (535)|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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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천전리각석 : 계해명 (543)
* 울주천전리각석 : 계해명
* 연대 : 신라 진흥왕 4년(543) 혹은 진평왕 25년(603)
亥年二月八日」
沙喙▨凌智小舍」
婦非德刀遊」
行時書」
계해년(癸亥年) 2월 8일, 사훼(沙喙)의 ▨능지(▨凌智) 소사(小舍)1의 아내 비덕도(非德刀)가 놀러왔을 때에 쓰다.[遊行時書]2
- 울주천전리각석 계해명의 문체는 6세기 대의 금석문과 흡사하며, 또한 과거와는 달리 관등명을 표기하면서 제지(帝智)·제(第) 등의 존칭을 뺀 것을 보았을 때에, 진흥왕 혹은 진평왕대의 계해년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 이두식 문법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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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천전리각석 : 을축명
* 울주천전리각석 : 을축명
* 연대 : 신라 진흥왕 6년(545)?
乙丑年九月中沙喙部于西▨
夫智佊珎干支妻夫人阿刀郞女
谷見來時前立人闲▨氣
乙▨居(下缺) (上缺)悉工栽
(上缺)次▨(下缺)
(上缺)心麦夫智在
(上缺)杪有夫智世▨
(上缺)春夫之世▨▨軰三(下缺)
(上缺)▨丈夫(下缺) (上缺)三人共耒
(上缺)▨▨(上缺)
을축년(乙丑年)1 9월 중에 사훼부(沙喙部)의 간서▨부지(于西▨夫智) 피진간지(佊珎干支)의 아내인 부인(夫人) 아도랑의 딸[阿刀郞女]이 계곡을 보러 왔을 때에, 앞에 선 사람이……(이하 해석 불명)
-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존칭인 지(智)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6세기 경의 비문으로 보기도 한다. 때문에 이를 진흥왕 6년(545)에 비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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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각석 : 상원2년명
* 울주 천전리각석 : 상원2년명
* 연대 : 신라 문무왕 12년(675)
上元二年乙亥三月▨日加具見之也大阿干▨八戌待
상원(上元)1 2년(675) 을해(乙亥) 3월 ▨일, 가구견지야(加具見之也) 대아간(大阿干)2 ▨팔무대(▨八戌待)3
- 중국 당에서 사용하던 연호이다.
- "가구견지야(加具見之也)"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뒤에 대아간(=대아찬)이라는 관등이 붙은 것을 보면 인명일 가능성을 고려해볼 만 하다.
-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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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 천전리각석 : 상원4년명
* 울주 천전리각석 : 상원4년명
* 연대 : 신라 문무왕 17년(677)
上元四年十月四日夫米坪宅猪烏
상원(上元)1 4년(677) 10월 4일, 부미평택(夫米坪宅)2 저오(猪烏)3
- 중국 당나라에서 사용하던 연호이다.
-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 기이 진한조에서 말하는, 신라 서울에 있었다는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유하고 큰 저택) 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하는 추정이 있다.
-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
울주 천전리각석 : 개성3년명
* 울주 천전리각석 : 개성3년명
* 연대 : 신라 민애왕 1년(838)
開成三年戊午
三月一日文巖見▨
▨化▨耒之
개성(開成)1 3년(838) 무오(戊午) 3월 1일, 문장을 새긴 바위[文巖]2를 보았으니, ▨▨화▨뢰지(▨▨化▨耒之)3
- 중국 당나라의 연호이다.
- 이를 인명으로 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글자를 새긴 서석곡 바위를 이르는 말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 이 부분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출처] 울주천전리각석 : 개성3년명 (838)|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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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천전리각석 : 기타 명문
* 울주천전리각석에는 앞서 소개한 명문 외에도 그 자세한 내력을 알기 어려운 단편적인 문장들이 많이 새겨져있다. 이를 모두 기타 명문으로 분류하고, 이를 3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소개하도록 한다. 임의로 해석해본 문장이 많으니 주의하기를 바란다.
① 간지(干支)가 기록된 유형
1) 丁酉銘
丁酉年二月
十一日明奈
何
: 정유년(丁酉年) 2월 11일, 명내하(明奈何)1
2) 丙申銘
丙申載五月十一日
慕郞行賜
道谷兄造作
: 병신재(丙申載)2 5월 11일, 랑(郞)을 사모하여[慕郞]3 행사(行賜)4한다. 도곡형(道谷兄)5이 쓰다.[造作]
3) 辛亥銘
辛亥年九月
主陪朗者成三人
: 신해년(辛亥年) 9월, 주배랑자(主陪朗者)6가 세 사람이 되었네[成三人].7
4) 乙卯銘
乙卯年甲子四月十一日喙烏毛(下缺)
: 을묘년(乙卯年) 갑자(甲子) 4월 11일, 훼(喙)8의 오모(烏毛)……
5) 癸亥銘
癸亥年二月二日
亥年四月四日
: 계해년(癸亥年) 2월 2일
해년(亥年) 4월 4일
6) 壬午銘
壬午年六月十日▨自(下缺)
: 임오년(壬午年) 6월 10일……
7) 乙未銘
乙未年九月五日道安兮
春談道權伊就等隨
: 을미년(乙未年) 9월 5일 도안혜(道安兮) 춘담도권이취등수(春談道權伊就等隨)
8) 丙戌銘
丙戌載六月十十六日官郞
: 병술재(丙戌載)9 6월 26일?[十十六日] 관랑(官郞)
9) 辛亥銘
辛亥年九月中芮雄妻幷行
: 신해년(辛亥年) 9월 중에 예웅(芮雄)과 아내[妻]가 함께 오다.[幷行]
10) 戌年銘
戌年六月二日
永郞成業
: 술년(戌年) 6월 2일, 영랑(永郞)10이 일을 이루다.[成業]11
11) 乙巳銘
乙巳年
阿郞徒夫知行
: 을사년(乙巳年), 아랑도(阿郞徒) 부지(夫知)가 다녀간다.[行]
② 인명(人名)이 나열된 유형
1) 金仔郞夫帥郞
: 김자랑(金仔郞) 부사랑(夫帥郞)
2) 渚峯郞
渚 郞
: 저봉랑(渚峯郞)
저랑(渚郞)
3) 山郞
: 산랑(山郞)
4) 沖陽郞
: 충양랑(沖陽郞)
5) 法民郞
: 법민랑(法民郞)
6) 水品罡世
好世
僧柱
: 수품(水品)12 강세(罡世)
호세(好世)13
승주(僧柱)
7) 聖林郞
: 성림랑(聖林郞)
8) 法惠郞
惠訓
: 법혜랑(法惠郞)
혜훈(惠訓)14
9) 行水
阿號花郞
: 행수(行水)
아호화랑(阿號花郞)
10) 大郞
: 대랑(大郞)
11) 惠訓
文僉郞
: 혜훈(惠訓)
문첨랑(文僉郞)
12) 貞兮奉行
: 정혜(貞兮)가 봉행한다[奉行]
13) 豆世夫知 夫人
: 두세부지(豆世夫知) 부인(夫人)
14) 宮順王▨▨光峯部典
: 궁순왕(宮順王)…광봉부전(光峯部典)
15) 柒陵郞隨良來
: 칠릉랑(柒陵郞) 수랑(隨良)이 다녀간다.[來]
16) 春夫知世廿士
: 춘부지세입사(春夫知世廿士)
17) 欽純
: 흠순(欽純)15
18) 貞光郞
: 정광랑(貞光郞)
19) 建通法師
峯兄林元郞
一曰夫智書
: 건통법사(建通法師)
▨봉형(▨峯兄) 임원랑(林元郞)
일일부지(一曰夫智)가 쓰다.16(?)
20) 道信
: 도신(道信)
21) 官郞
: 관랑(官郞)
22) 金郞屛行碧▨
: 금랑(金郞)이 몰래 와서(?)[屛行] 벽▨(碧▨)하다.(?)
③ 마멸이 심하여 해석하기 어려운 유형
1) 大德公隨下也
▨思夫智善作▨
: 대덕(大德)이 공히 수하(隨下)하다.(?)
▨사부지(▨思夫智)가 (글을) 잘 지었다. (?)
2) ▨大爲王▨二癸仙未
: ▨대(▨大)를 왕으로 삼으니, ▨이계선미(▨二癸仙未).
3) ▨▨王七年僧徒▨▨
: ▨▨왕(▨▨王) 7년, 승도(僧徒)가……
4) 慕谷僧徒于另▨▨
: 모곡(慕谷) 승도(僧徒)가 ▨▨에서 헤어지다.(?)
5) 壬午年六月十日▨自▨
: 임오년(壬午年) 6월 10일, ……
6) 竹歡曺
有百文人
: 죽환조(竹歡曺)에는 100명의 문인(文人)이 있다.(?)
7) ▨▨年
六月四日
成義郞妻氏曰▨▨
: ▨▨년 6월 4일, 성의랑(成義郞)과 아내[妻氏]가 말하기를,……
8) 六?夫智
作文之
: 육벌부지 (六伐夫智)가 이를 작문(作文)한다. (?)
-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奈何"가 한문에서 "어찌 할까"라는 뜻으로 풀이되기는 한다.
- 중국 당나라에서는 현종 천보 3년(744)에 "年"을 "載"라 고쳐쓰도록 하였다가, 숙종 건원(乾元) 원년(758)에 다시 "年"을 쓰도록 하였다. 만일 신라도 이 표기를 따랐다면 해당 명문은 신라 경덕왕 15년(756) 병신년에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 "慕郞", 즉 "랑을 사모하여"라는 표현은 모죽지랑가에서도 보인다.
- "나아가 준다", 즉 "선물한다"라는 뜻은 아닐지 추측해본다.
- 인명(人名)을 가르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主陪"란, 중국의 술자리 예절에서 상석에 앉는 술자리의 주최자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주배가 곧 이 주배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한편 뒤에 붙은 "朗者"의 의미도 알기 어렵다.
- 당나라의 시인인 이백이 지은 「월하독작」의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구절을 참고하여 멋을 내며 쓴 문장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여기서 "성삼인"이란, 자신과 달빛과 그림자를 이르는 말이다. - 신라의 훼부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 중국 당나라에서는 현종 천보 3년(744)에 "年"을 "載"라 고쳐쓰도록 하였다가, 숙종 건원(乾元) 원년(758)에 다시 "年"을 쓰도록 하였다. 만일 신라도 이 표기를 따랐다면 해당 명문은 신라 경덕왕 5년(746) 병신년에 쓴 것일 가능성이 높다.
- 『삼국유사』 탑상 백율사조에 보이는 효소왕 대의 화랑인 "영랑(永郞)"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 특이하게도 이 명문은 사각형 모양의 큰 테두리 안에 둘러쌓여 있다.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선덕여왕 대의 상대등인 수품(水品)과 동일인물인지는 알기 어렵다.
- 『삼국유사』 의해 이혜동진조에서 진평왕 대의 인물로 등장하는 호세랑(好世郞)과 동일인물일지는 잘 모르겠다.
-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장육조의 기록에서 황룡사의 주지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한 국통 혜훈(惠訓)과 동일인물일지는 잘 모르겠다.
- 김유신의 아우인 김흠순(金欽純)과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 혹은 "(같은) 한 날에 부지가 쓰다"
[출처] 울주천전리각석 : 기타 명문 |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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