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의 어두운 역사, 군부독재시절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
박정희·전두환, 정권 위기 때마다 국민투표 발의... 윤석열 측 제안에 의구심 드는 이유
더불어민주당이 검찰청법 및 형사소송법 개정안 본회의 처리를 예고한 가운데 27일 윤석열 당선인 측이 '국민투표'란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은 27일 서울 통의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나 "민주당의 다수의 폭거에 대해 당연히 현 대통령께서는 거부권을 행사하리라 믿지만 그럼에도 민주당과 야합을 한다면 국민들께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나"라며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당선인 비서실은 대통령 당선인께 국민투표를 부치는 안을 보고하려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민투표 시점'에 대해 "비용적 측면에서 지방선거 때 함께 치른다면 큰 비용도 안 들 수 있고 국민 뜻을 물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윤 당선인 측 입장이 알려지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당일 언론에 "재외국민의 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현행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해당 조항의 효력이 상실됐으며, 현행 규정으로는 투표인명부 작성이 불가능해 국민투표 실시가 불가능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사단법인 세계한인유권자총연합회 등이 '국민투표법 14조 1항이 선거권 및 국민투표권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 심판청구 사건에서 재판관 6(헌법불합치) 대 3(합헌)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국민투표법 14조 1항은 국민투표 공고일 현재 관할 구역 안에 주민등록이 돼 있거나 재외국민으로서 국내 거소 신고가 돼 있는 투표권자를 조사해 투표인 명부를 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내 거소를 신고하지 않은 재외국민에게는 국민투표권 행사가 제한돼 온 것이다.
이후 해당 조항에 대한 개정 입법이 이뤄지지 않아 국민투표 자체가 불가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인 측은 검찰청법 및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꺼내 들었다.
박정희 군부독재, 명분 쌓기 목적으로 국민투표 선택
헌법 제72조에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장 실장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소 소추권은 아주 중요한 정책"이라면서 "선거 사범이라든지 공직자 비리에 대한 수사를 검찰이 못하게 하는 게 국민들이 원하는 건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헌재가 이미 '국민투표가 불가하다' 결정한 상황임에도 소위 '검수완박'을 국가 안위에 관한 것이란 정치적 판단을 한 뒤 국민투표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돌아보면 국민투표는 1948년 제헌헌법이 만들어진 이래 단 여섯 차례만 이뤄졌다. 여섯 번의 국민투표 중 다섯 번은 헌법 개정과 관련된 내용이고, 1975년 2월에 실시된 4회 국민투표만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기간 치러진 6번의 국민투표 모두 정부가 내놓은 안이 100% 가결됐다.
1960년 5월 16일 박정희 군부의 쿠데타 후인 1962년 12월에 진행된 제1회 국민투표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발의한 헌법개정안의 찬반을 묻는 것이었다. 헌법개정안의 핵심은 4.19혁명으로 완성된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하고,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개표결과 총 투표인수 1241만 2798명 가운데 85.3%인 1058만 5998명이 참여하여 그중 78.8%인 833만 9333명이 찬성해 헌법개정안은 확정됐다. 이후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다. 군복을 벗은 박정희 정권의 독주가 시작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969년 10월 재차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대통령의 3선 출마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의 찬반을 묻겠다는 것이 주된 의도였다. 장기독재로 가기 위해 박정희 군부가 헌법을 개정한 것으로 개표결과 총 투표인수 1504만 8925명 가운데 77.1%인 1160만 4038명이 투표에 참여해 그중 65.1%인 755만 3655명이 찬성, 박정희 정권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은 다시 확정됐다. 다만 제2차 국민투표는 1차와 달리 국외부재자투표가 허용됐다. 당시 국외부재자는 4만5482명이었으며 대부분 베트남파병 군인이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직원 2명을 베트남 현지에 보내 부재자 신고를 진행했다.
3차 투표 역시 박정희 정권 하인 1972년 11월에 이뤄졌다. 이미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개정을 통해 3선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 구축을 위해 다시 한번 개헌작업을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으로 국회를 해산시킨 뒤 해산된 국회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에서 수행하도록 했다.
거수기 역할을 하던 비상국무회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하는 것이 골자인 3차 국민투표를 발의했다. 당시 투표에 나선 국민이 이에 압도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헌법 개정안은 통과됐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은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모두 쥔 1인 대통령제를 완성했다.
국민과 야당의 저항... 군부독재 정권, '국민투표'로 돌파
유신체제가 국민투표를 통한 압도적 지지 속에 출발한 듯 보였지만 실제는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국민과 야당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 자리에 박정희가 다시 오르자 유신체제 자체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1975년 다시 국민투표를 꺼내 들며 "이번 국민 투표는 비단 현행 헌법에 대한 찬반 투표뿐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로 간주하겠다"라고 말했다. 기존 헌법개정과 달리 처음으로 자신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정당의 참관이 허용되지 않은 투·개표를 통해 총 투표인수 1678만 8839명 가운데 79.8%인 1340만 4245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그중 73.1%인 980만 201명의 찬성으로 국민투표안은 가결되었다. 역대 국민투표 중 가장 낮은 찬성률을 보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9일 김재규가 쏜 총탄에 사망한다. 그러나 전두환이 신군부를 이끌고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 군부독재의 문을 다시 열었다.
모든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9월 1일 장충체육관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리고 다음 달인 1980년 10월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 및 7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제5차 국민투표를 강행한다. 문제는 이 국민투표가 1980년 5월 17일 계엄포고에 의하여 모든 정치활동이 중지된 가운데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치러진 국민투표는 91.6%의 찬성률을 보이며 가결됐다. 이듬해인 1981년 3월 전두환은 선거인단 간접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전두환 임기 내내 청년, 학생, 시민, 노동자, 재야인사들의 항거가 계속됐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대통령간선제를 폐기하고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는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한다. 이에 맞춰 1987년 10월 27일 제9차 헌법 개정을 위한 제6차 국민투표가 진행된다. 이로써 대통령 선거방식이 직접선거로 변경되고 대통령의 임기 또한 7년 단임제에서 5년 단임제로 변경됐다. 6번째로 실시된 1987년 국민투표는 큰 혼란 없이 역대 국민투표 중 가장 높은 93.1%의 찬성률을 기록하며 가결됐다. 이때 만들어진 헌법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편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8일 정책조정회의에서 "검찰은 권한쟁의 심판, 효력 정지 신청을 검토하고 있고 윤석열 당선인과 인수위는 느닷없이 헌법상 요건도 충족되지 않는 국민투표를 하자고 한다"면서 "수사권을 사수하고자 대통령, 인수위, 검찰이 한몸으로 똘똘 뭉쳤다"라고 지적했다.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도 이날 YTN라디오에 출연해 "국민투표는 외교·국방 등 국가 안보의 중요 사항에 대한 것으로 돼 있는데 검찰의 수사·기소 분리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윤 당선인이 검찰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국민투표)이든 하겠다는 선언적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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