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말, 대통령의 말, ‘진보’의 말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외교를 해내야 하는 나라 중 하나다. 한중수교 이후 30년 동안 한국 외교의 틀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북핵 문제는 미·중과 협력해 풀어간다’는 것이었다.
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세계를 ‘분단’시키면서, 그 틀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안보와 경제가 하나로 얽히고 있는데, 경제는 중국 의존도가 과하게 높고, 북한 핵 위협도 더욱 위험해졌다. 난제를 해결할 쉬운 길은 없을 것이다.
대중국 포위망의 최전선에 앞장서지 않으면서도, 국제사회와 공조하며 국제질서의 변화에 적극 대응해나갈 지도자의 신중한 언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윤석열 당선자는 지난 14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에 대해 더욱 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중국은 북한과 동맹이고,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했다. ‘북한의 동맹인 중국도 주적’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대통령 당선자의 발언으로는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유죄, 무죄를 흑백 논리로 따지는 검사의 어법이다. 외교안보의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지 않고 있다. ‘대북 선제타격’이나 ‘사드 추가 배치’ 같은 엄중한 문제를, 전임자를 공격하기 위한 국내 정치 이슈로 소비하고 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윤 당선자가 지금까지 해온 언행대로 외교를 하면, 1년 안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장 취임 열하루 뒤 초고속으로 열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다음달 21일 정상회담에서, 윤 당선자가 한국과 미국의 국익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보수진영을 대변하는 윤 당선자의 흑백논리가 위태롭다면, 진보진영 안에는 또다른 흑백논리가 존재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진을 추진해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무시한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하다가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 정부의 외교 무능’을 조롱하는 이들이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달러 패권이 무너지면,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대안적 국제질서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반미’의 시각이 지금 중국과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퇴행적 변화를 은폐하는 장막이 되어서는 안된다.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에 미국이 ‘승자의 관용’을 보이며 러시아를 포용하는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라 하더라도,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 이후 강고해진 ‘대러시아주의’의 산물이다. 2007~2014년 러시아의 군비 지출은 2배로 증가했지만 나토의 군비 지출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나토의 동진만을 탓할 수 없다.
지금의 세계를 만들어낸 전환점은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미국이 과도한 신자유주의의 후유증과 불평등으로 휘청거리는 틈을 노려, 푸틴은 2008년 조지아를 침공했다. 뒤이어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강군몽’을 추구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다극체제” “국제질서의 민주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미국의 일극체제를 흔들어,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세력권을 나눠, 각자 주변 약소국들을 통제하는 새로운 제국적 질서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중·러는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시민사회/민간의 자율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국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국가주의를 실현해가고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벌이고 있는 살육과 파괴, 중국의 권력이 ‘제로 코로나’ 정책을 통해 수천만명을 ‘가둘 수 있는’ 통제와 감시 시스템은, 이들이 대안이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미국 편이냐, 중국·러시아 편이냐’는 논쟁은, 세계를 좌-우의 흑백논리로 보게 하면서, 위-아래의 문제로부터 시선을 빼앗는다. 우리 사회 진보 가운데 일부가 가진 것 없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덜고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 실제로 노력하기보다는, ‘민족주의와 반미’의 깃발로 ‘진보의 선명성’을 주장하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제 권력자들의 대결에 훈수를 두는 ‘책사’의 역할을 멈추고, 평범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물어야 한다.
러시아의 침공을 멈추고, 한반도와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한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해야할 역할이 적지 않다. 전쟁과 국가폭력,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서서, 더욱 포용적인 방향으로 우리 사회와 국제질서를 개선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박민희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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